밤이 깊었다. 화려한 용포를 벗고 얇은 야장의만 걸친 예는,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어 대륙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넓은 어전御前을 밝히는 불은 서안(*책상) 위의 등잔이 유일했다. 등잔의 불씨가 일렁일 때마다 곧게 뻗은 빗장뼈와 우아하고 탄탄한 복근 위로 불그림자가 춤추듯 너울졌다.

지도는 태자이던 시절 부황父皇에게 하사받은 것이다. 아들에게 이런 선물을 한 것을 보면 존재감 없던 나라를 제국으로 키운 것이 퍽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이가 비명횡사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할까.

나른한 낯에 비웃음이 맺혔다.



“ 폐하. 이부시랑 한 설이 독대를 청하나이다.”



국경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비스듬한 시선이 닫힌 문을 향했다.

아무래도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




“ 폐하. 이부시랑 한 설이 독대를 청하나이다.”



지밀에선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환관이 난처한 표정으로 설의 눈치를 살폈다. 자시子時(*오후 11시-새벽 1시)를 넘겼으니 독대를 청하기에 늦은 시각이긴 하였다. 그러나 이를 청한 이가 다름 아닌 이부시랑이다. 예가 때를 문제 삼아 그를 거절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정한 자세의 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재차 고해 달라 청하진 않았으나 이대로 돌아갈 것 같지도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낯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른 복도에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설에겐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당장 내일이 조회였다. 즉위 후 첫 국정 회의인 만큼 초칙을 공표하는 것은 물론, 국상國喪동안 약식으로 논의했던 사안 전반을 처리해야 한다. 이 정도의 대사大事를 앞두고 있으면서 제겐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으니, 신하된 입장의 그가 먼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머뭇거리던 환관이 설의 방문을 한 번 더 고하려는데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상처 없이 매끈한 발등이었다. 얇은 옷자락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문 안쪽에 기대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선 예가 보였다. 곧 침수寢睡들 모양이었는지 하의에 야장만 걸쳐 균형 있게 짜인 상체가 훤히 내다보였다. 뼈대가 크고 근육이 탄탄한 몸인데도 거칠지 않고 우아한 것이, 용포를 입고 있을 때보다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 보고 싶어 헛것을 들은 줄 알았더니,”

“ 정녕 무심한 희헌이로군.”

“ 폐하를 뵙습니다.”



설은 제게로 뻗힌 예의 손을 끌어와 그 끝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이는 존귀한 자에 대한 천라의 전통적 예법이다. 설의 인사가 끝날 때까지 온도 없는 시선은 줄곧 그를 향해 있었다.

이토록 늦은 시간에 입궐하면서도 번거로운 관복을 전부 갖춰 입었다. 사생활이 난잡하고 웃음이 헤퍼 바깥에선 화화花花라 불린다던데, 제 앞에만 서면 이렇게나 방정하여 빈틈이 없었다.

그것이 도리어 제 욕심을 부채질하는 줄도 모르고. 불쌍한 희헌.

예의 눈초리가 매끄럽게 휘었다.



“ ... 어떻게 여길 찾아올 생각을 다 했을까.”

“ 겁도 없이.”



뜨거운 온도의 손가락이 설의 손가락 사이를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닿아있던 손이 단단히 얽힌 다음 순간, 설의 몸이 내전 안쪽으로 강하게 끌려들어갔다.



“ ...!”



우악스러운 힘으로 당겨지자 순식간에 균형이 흐트러졌다. 쓰러진 발이 문지방 안쪽을 내딛기도 전에 거센 소리와 함께 등 뒤의 문이 닫혔다.

쾅!

궁인들이 놀라 돌아보았으나 두 사람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 짐이 윤허하기 전까진 누구도 들이지 말라.”

“ 들어온 자는 예외 없이 벨 것이다.”



서늘한 경고가 귓전을 맴돌았다. 어지럽던 시야가 잔잔해지자 비로소 어둑한 내전의 풍경이 들어왔다. 불빛이라곤 멀리 떨어진 서안 위의 등잔이 전부인 듯했다. 사위가 어두워 달리 보이는 것은 없으나 익숙한 체향만은 지척에서 느껴졌다. 설은 회명에 익숙해진 이후에야 욱신거리는 손목을 매만지며 물었다.



“ 화는 풀리셨습니까.”

“ 그럴 리가 있나.”



설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예가 숨 닿을 거리에서 눈을 맞춰왔다. 나른한 얼굴로 피식, 웃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이 와중에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 이번에야말로 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찾아온 줄 알았는데.”

“ 그리 여기셨다면 송구할 따름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조금도 짓눌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예의 앞에서 이토록 여유롭게 굴 수 있는 자도, 이를 용인容認 받는 자도 설이 유일했다.



“ 그대도 취향이 참 나빠.”

“ 어떻게 보아도 하 염보단 내 겉가죽이 더 낫지 않나?”



하 염. 이제는 죽고 없는 2 황자의 이름이다. 예가 그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데도 설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낯이었다. 딱히 필요를 느끼지 못해 얘기하지 않았을 뿐, 비밀로 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설이 설핏 미소 지었다.



“ 폐하께서 천라 제일의 미인인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 ... ...”

“ 그와는 원하는 것을 주고받은 것뿐이니 까다로운 신의 취향과는 무관합니다. 제 심미안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 시답잖은 말장난이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

“ ... ... ”

“ 그것도 이런 시각에 말이야.”



예의 눈초리가 찬찬히 휘어졌다. 사람을 홀리는 달콤한 미소와 달리, 설의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새벽의 설에게선 묘한 관능이 묻어났다. 뒤틀린 데 없이 곧게 뻗은 콧대도, 살결이 얇아 끝이 붉은 귀도, 모양 예쁜 입꼬리도. 예로선 무엇 하나 유혹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얇게 속쌍꺼풀 진 눈매와 색소 옅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긴 순간엔 이유 모를 초조감마저 들었다.

한데 이런 얼굴로 타인을 안았다고.



“ 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을 비싸게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다할 이유가 있습니까.”

“ ... 네가 무정한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입 다물어, 희헌.”



설은 열띤 손가락 끝이 제 입술을 아무렇게나 짓이기도록 내버려두었다. 이것이 예가 발휘할 수 있는 너그러움의 한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의 두 사람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웬만해선 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설이 나서서 그를 도발하고, 설의 앞에선 부러 연약한 척 굴던 예가 제 노여움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져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예가 설을 등진 채 본래 앉아있던 서안으로 향했다. 그제야 닫힌 문 위에 등을 맞대고 서 있던 설도 침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팽팽하던 공기가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다.



“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용건만 말해.”

“ 기우제를 청하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십시오.”



기우제라. 사내 귀비를 들인 것으로 한바탕 시끄러울 테니 황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거로군.

과연. 지극히 설다운 대처였다. 그것이 조금도 기껍지 않았다.



“ 그대가 의견을 낼 수는 없었을 텐데? 아무리 영명하다 한들 그대는 당하관(*정3품 이하의 관리)이니 권한이 없지.”

“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고관高官들께 의견을 내어주시길 청하였습니다.”



의견을 내어주길 청하였다? 이번에도 속이 뒤집히는 소리였다.



“ 그 치들은 좋겠어. 희헌이 이 얼굴로 또 얼마나 예쁘게 웃어주었겠나.”

" ... ... "

“ 기우제는 윤허하지. 이만 돌아가.”

“ 초칙에 대한 말씀을 마저 드리려 합니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예의 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짜증스런 기색을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이 와중에도 설은 묵묵히 자릴 지키고 있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처럼.

또다시 숨 막히는 대치가 이어졌다. 마침내 앉아있던 자리를 느리게 벗어난 예가 좌정한 설의 앞에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수려하게 쌍꺼풀진 눈이 서늘히 내리 뜨였다.



“ 가만 보면 그대는 참 욕심이 많은 것 같아.”



예의 손이 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짐이 네 뜻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나?”

“ ... ... ”

“ 이번엔 희헌, 그대가 포기해.”



아무래도 유례없던 장기전이 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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