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어느 새 멎었으나 질척한 땅은 마음 바쁜 명을 애타게 하였다. 다행히 중간에 무리들 중 일부를 따라잡아 그들을 해치웠으나, 일월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물어보려 했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살초를 쓰지 않았음에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한 그들은 외려 명의 검날에 자신들의 목을 대었다. 간신히 한명 정도를 살려내어 일월의 행방을 물었으나, 그 역시 바로 혀를 깨물어 자결하고 말았다.

  '젠장, 낭패군. 왜 다들 죽지 못해 안달인건데!'

  허탈함이 밀려왔지만 넋놓고만 있을 순 없었다. 다시 땅에 새겨진 족적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젖은 어깨에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달리다 겨우 작은 흔적을 발견하였다. 작지만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기에 얼굴에 미소가 자신도 모르게 피어 올랐다.



  일월은 자신을 이 좁은 오두막에 두고 간 그 복면사내가 중얼거린 말을 곱씹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의뢰받지 않는건데.'

  그가 한 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연히 집에 들어온 불한당들은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꾸몄으리라. 일월은 좁은 오두막의 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예상했듯이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느 새 잠에서 깼는지 연희는 작고 앙증맞은 손발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모른 채 사랑스러운 얼굴로 방긋 웃고 있었다. 일월은 연희의 얼굴을 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방긋거리는 연희를 보다 보니 명이 생각났다. 비록 석의 핏줄이지만, 같은 아비의 피를 타고난 지라 연희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석보다 오히려 명이를 닮았다.

  '나 못돌아가면 서방님이 많이 슬퍼할텐데...'

  명과 닮은 연희를 보며 자신을 찾고 있을 명을 떠올렸다. 비록 명의 곁에 원의가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늘 자신이 불편한 것은 없는지 말없이 배려해주고 있었으니까. 혼인한 이후에는 조금 뜸하긴 했지만, 오늘밤 자신에게 찾아왔지 않은가. 

  '그렇게 좋아했던 원의아씨랑 맺어졌으니 그정도는 봐줬다 뭐.'

  아까 미안한 듯한 표정의 명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감금된 신세지만, 험한 상황에서 잠시간 명의 얼굴을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쫓으려 애썼다. 꼬물락거리는 연희의 볼을 매만지던 일월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렇다치더라도 연희 너만은 안전하게 보내야할텐데...'

  허름하였지만, 나름 굵은 쇠사슬로 잠긴 나무문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뒷쪽으로 자리잡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작은 구멍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이다보니 낡은 부분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일월은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맨손으로 구멍을 넓히기 위해 나무를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낡아보이는 나무판자는 생각보다 잘 뜯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월은 이를 악물고 조금씩 조금씩 뜯어내었다.

  '연희만이라도...'

  뜯어진 나무조각들로 인해 가시가 잔뜩 박히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 박힌 가시로 피가 흥건히 흘러내렸지만 일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아픔을 느끼지 않는 듯 미친듯이 나무판자를 뜯어내기를 반복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월의 손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일 즈음에 겨우 연희가 나갈 정도의 구멍을 낼 수 있었다. 일월은 그 구멍 밖으로 연희를 내보낼 생각을 했지만, 막상 내보내려하니 오두막 안에 있는 것에서 바로 밖에 있는 것의 차이만 있을 뿐, 갓난아기가 걸어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한 수고였나...'

  다시 절망감에 빠져있을 때 오두막 문이 덜컹거렸다. 일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들이 다시 돌아온 것일 것이다. 이렇게 구멍을 낸 것을 보면 어떡하나 싶어 얼른 그 구멍을 가리며 앉았다. 이상하게도 몇번 문이 더 덜컹거렸지만 열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일월은 긴장감에 연희를 안고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연희를 밖에다 내놓으리라. 밖은 어두우니 운이 좋으면 놈들에게 걸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니, 그것은 연희가 울지 않는다는 전제하이긴 하지만...

  "일월아..."

  그때 문 밖에서 아주 작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다시한번 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월아, 이 안에 있는가?"

  많이 들어 본 목소리였다. 

  "작은...마님?"

  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원의가 이 한밤중에 산 속 오두막을 어찌 알고 왔을까? 귀신의 짓인가? 아니면 자신이 지금 긴장으로 인해 듣고 싶은 환청이 들리는 것은 아닌가?

  "아, 일월이 맞구나!"

  다시 한번 더 들려온 원의의 소리에 일월은 떠올리던 생각을 지우고 마음 속에 희망을 피어올렸다. 

  '살 수... 있겠구나.'

  "네! 작은 마님. 접니다. 일월이예요."

  "굵은 쇠사슬로 잠겨있어서 내 힘으로는 이 문을 열지는 못하겠네.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 내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불러 올터이니."

  일월은 다급한 마음에 원의를 불렀다.

  "작은 마님! 그럼 먼저 연희라도 데려가 주세요!"

  혹시나 원의가 사람들을 부르러 간 틈에 놈들이 온다면 차라리 지금 연희라도 보내야 했다. 어떻게 원의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녀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일월에겐 천우신조나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연희가 우선이었다.

  "문이 잠겨있는데 어찌 데려갈 수 있는가."

  원의의 한숨이 오두막 나무벽 너머로 들려왔다.

  "옆쪽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제가 작은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나갈 수 없지만, 연희는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 이쪽으로 오셔서 연희를 받아가 주시면 됩니다."

  잠시 뒤 구멍 밖으로 원의의 얼굴이 보였다. 일월은 마음이 놓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행이야. 참으로 다행이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작은 마님."

  일월은 저고리 앞섶을 올리고는 연희에게 젖을 물렸다. 조금전까지 눈을 동글동글 뜨고 있던 연희는 제 어미의 젖이 입에 물려오자 행복한 듯 힘차게 빨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가 먹고 싶은 만큼 배불리 먹은 연희는 포만감에 다시 사르르 잠이 들었다. 일월은 그런 연희의 얼굴을 피가 붇은 손바닥 대신 손등으로 연신 쓰다듬었다. 아이의 통통한 볼에 입맞춤을 한 후 일월은 원의에게 건네었다. 

  "작은 마님... 잘 부탁드립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밖에 있는 원의를 걱정시키기 싫어 마치 울지 않는 척 목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알겠네. 자네도 마음 단단히 먹고 있게. 내 금방 사람들 불러올터이니 조금만 기다리게."

  연희를 받아든 원의가 마을로 돌아가려하는 그때였다. 작게 난 숲길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온 길쪽이었다. 원의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큰 나무 옆 수풀 속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 연희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원의는 자신이 숨어있는 수풀 앞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아는 사람이었다.

  

  일월은 연희를 건네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긴장하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연희마저 보내지 못할 뻔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뒤 쇠사슬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풀리지 않는지 짜증내는 소리가 오두막 안까지 들려왔다. 일월은 긴장하며 오두막 제일 안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에이썅! 더럽게도 칭칭 감아놨네."

  그 목소리에 일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는 분명...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 오두막 문 밖에는 일월이 생각한 그자가 서 있었다.

  "도...도련님이 어떻게...?"

  석이었다. 지금 집에서 괴한들의 공격을 받고, 자신은 납치당했는데, 왜 여기에서 석이 나오는 것일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답은 뻔했다.

  '석이 꾸민 짓이구나.'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 오두막을 알고 석이 정확하게 찾아왔을까. 그리고 아까 그 괴한이 말한 '의뢰'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것이 석의 의뢰였다는 결론이 일월의 머릿 속에 빠르게 정리되어 나왔다.

  그러자 일월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바뀌었다.

  "도련님 짓이군요!"

  석은 그녀의 말에 비열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네 년놈들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이것은 '짓'이라고 할 수도 없지."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어떻게 하긴! 네 서방이라는 그 천것과 그 자식새끼들은 죽여 없애고, 네년은 내 첩으로 들이려했지. 그것도 이젠 안되지만."

  끝을 흐리면서 입맛을 다시는 석이었다. 일월은 석의 말에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 갓난아기들까지 해치려하십니까!"

  발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우리 집안에 더러운 피는 필요없으니까. 그 천것의 피를 받은 그것들도 당연히 더러우니 없애야지. 네년이야 어차피 계집종이었으니 내가 취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겠냐마는..."

  석은 보면 볼 수록 아까웠다. 어렸을 때는 별 생각없이 지나쳤는데, 나이가 차면 찰 수록 요염하게 사내의 마음을 끄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특히, 잠자리에서는 더더욱.

  "네년을 데리고 살려고 했다면, 어머니께서 워낙 반대를 하셔서 말이지. 죽이라 하시니 어쩌나. 죽여야지. 하지만, 죽이기 전에 맛은 보고 죽여야 내가 이 짓을 벌인 보람이 있지 않겠어?"

  비열한 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년 목숨 하나는 아깝지 않으나, 어찌 갓난 아기까지 그러느냐! 그 아기들은 바로 네놈의 씨인 것을!"

  음침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던 석이 잠시 움찔하였다.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을 씨부리는 것이냐? 게다가 감히 양반에게!"

  일월이 반말을 하면서 제게 반항하듯 소리치자 의외였는지 잠시 주춤하는 석이었다.

  "그리고, 그 천것의 새끼들을 내 씨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석은 일월의 뺨을 갈겼다. 뺨을 맞은 일월은 오두막 바닥에 내팽겨쳐졌다. 넘어져 누운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 네 놈의 씨앗이다! 네 놈이 내 몸을 유린하던 그때 품은 아이들이었으니까!"

  악에 받힌 일월이 석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의외의 강한 반응에 석은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또 그녀의 뺨을 때렸다.

  "미친 년! 그 말을 누가 믿겠느냐? 네년이 그놈과 붙어먹은 것을 내 모를 줄 알고? 어디 나한테 뒤집어 씌우려고! 아하! 그래, 그 천것이 씨들을 내 씨라고 속이면 그것들을 살려줄까봐 그러는 것이구나! 에잇, 퉤!"

  석은 정말로 믿지 않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녀의 말을 그냥 뭉개버렸다.

  "진짜 네놈의 씨라니까! 내가 입덧할 때까지도 서방님은 나랑 혼인하지도, 그리고 몸에 손도 대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년이 거짓을 지어내? 하, 그래, 뭐 그렇다 치자.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데?"

  일월은 그런 석의 말에 몸이 굳었다. 석의 표정은 정말 정상적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탁하게 풀린 동공은 제정신인 사람이 아닌 듯했다. 

  자신의 자식들이라고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라니... 원래부터 글러먹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인륜(人倫)을 저버리는 정도의 막되먹은 인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제 자식들인데... 제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이려고 하는 아비라니...

  일월은 맥이 탁 풀렸다. 

  '그래... 그래도 연희랑 재희가 여기에 없으니 다행이야.'

  누운 채 오두막 천정을 바라보던 일월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것도 이내 잠시 제 앞에서 바지춤을 끄르는 석의 모습을 보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징그러운 뱀이 제 몸을 더듬는 듯한 축축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치맛 속으로 그 뱀같은 손이 들어오자 일월은 입술을 꽉 물었다. 

  "흐흐... 그래, 계집의 몸이 이렇게 탱글해야지. 나한테 시집온 년은 푸석푸석하니 계집 안는 맛이 전혀 없어서... 흐흐흐, 오랜만에 명기를 맛보겠구나."

  징그러운 웃음과 침을 흘리듯 제 가슴과 치마 안쪽을 더듬는 석의 손길에 일월은 소름이 끼쳐왔다. 

  싫었다. 다시 이 놈에게 몸을 허락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리라. 명의 손길이 닿은 몸 구석구석에 이 더러운 놈의 손길이 덮히는 것이 싫었다.

  일월은 제 위로 엎어져 양물을 밀어넣으려 하는 석의 귀를 콱 깨물었다.

  "으아아아!"

  석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작은 오두막 안을 채웠다. 하지만, 일월은 깨문 그의 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있는 힘껏, 마치 물어 뜯듯이 꽉 깨물어 비틀었다.

  "으아악! 이... 미친년이! 놓아! 놓으란 말이다. 으아아아악!"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던 석이 제 주먹으로 그녀의 복부를 강하게 강타하였다. 그제서야 석의 귀에서 그녀의 입이 떨어졌다. 그녀의 입에서도 석의 귀에서도 피가 철철 흘렀다. 아픈 귀를 만지던 석은 귀가 반쯤 떨어져 너덜너덜해져있는 것을 알고는 분노에 찼다. 

  "이 미친 년이! 죽으려면 곱게 죽어야지! 죽기 전에 사내 맛을 보여주고 죽여주겠다는데!"

  석은 일월을 미친듯이 밟아대었다. 바닥에 누운 일월은 몸을 웅크린 채 그의 발길질을 견뎌내었다. 

  '아파...'

  그래도 몸뚱아리가 아픈 것이 나았다. 차라리 이렇게 맞아죽는 것이 낫지, 그놈에게 또다시 몸을 유린당하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계속되는 석의 발길질에 일월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계속될 것 같던 발길질이 '퍽'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잠시 뒤 '쿵'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월아... 괜찮아?"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떨고 있는 목소리는 원의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꽤 커보이는 돌덩이를 들고 있는 원의의 걱정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아... 작은마님!"

  일월은 왜 아직 원의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조금 전에 분명 마을로 간다고 했는데. 연희는? 연희가 보이지 않았다.

  "일월아,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멍하니 아무런 생각을 떠올리던 일월에게 원의가 재촉하였다. 원의의 부축으로 일어선 일월은 그녀와 함께 오두막을 나섰다. 원의는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풀 속에서 연희를 안아 올렸다. 효녀인 듯 제 어미를 위해 아직까지 곤히 잠들어있어 주었다.

  "아아..."

  일월은 연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다시 살아서 아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자신이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으나, 아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서웠다.

  "일월아, 얼른 마을로 가자. 저 놈이 언제 깨어날 지 모르니. 걸을 수 있지?"

  원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일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같아서는 빨리 뛰어가고 싶었지만, 일월의 상태가 좋지 않아 조금 빠른 걸음으로만 걸었다. 

  조금 걸어내려가던 발걸음이 주춤하였다. 이제는 어둠에 익숙해져있어 사물을 흐릿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비탈길 저 아랫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엔 민가의 사람인가 싶어 반가움 마음에 달려내려가려하였으나, 옷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색 옷이었다.

  한밤중에 검은 색 옷을 입는 양민이 있을까. 잠시 주저하는 원의에게 일월이 속삭였다.

  "그놈들이예요."

  일월은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 중엔 저를 들쳐메고 온 사내와 비슷한 풍채의 모습을 가진 이도 있는 듯 보였다.

  마을로 가려면 내려가야 했지만, 그쪽에서는 괴한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원의는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은 자신이 잘 아는 곳이었다. 아까 이상한 대화를 들을 후 집을 나서는 석의 모습을 보고서는 잠을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인근에 오두막이라면, 자신이 북악산에 살고 있을 적에 본 적이 있었다. 마을로 내려와 세답일과 삯바늘질일감을 받으러 다닐때 무던히 다니던 산길에 있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그 오두막은 버려진지 오래일텐데, 그 오두막을 왜 언급하였을까 의아했다. 무언가 머릿 속 한켠에 불안감이 자리잡았다. 원의는 안오는 잠을 내팽개치고 일어나 밖을 나섰다. 

  '오두막에 가보자. 잠깐만 보고 오는거야. 아무 일도 아니면 되는거지. 확인만 해보고 오자.'

  일월이라는 이름이 나온 뒤부터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원의는 질척거리는 산길을 빠르게 걸었다.

  일반 양갓집 규수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산을 탔기 때문에 이 정도의 빗물의 진창은 문제없었다. 치맛자락을 추켜올려 끈으로 묶고는 뛰듯이 오른 그 오두막에는 역시 일월이 있었다. 그녀의 부탁대로 연희를 받아 돌아가려할 때 석의 모습이 오두막에 나타나자 차마 혼자 내려갈 수 없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일월에게 몹쓸짓을 하려는 석이었다. 연희를 가만히 내려놓고 원의는 주변을 뒤져 제법 큰 돌을 찾아 두 손에 받쳐 들었다. 열린 오두막 안에선 그 몹쓸 놈이 일월이를 겁간하려 하고 있었다. 원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없이 석의 뒷통수를 향해 돌을 내리쳤다.

  '아까 연희를 데리고 마을쪽으로 내려갔으면, 이들에게 잡힐 뻔했군.'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마을쪽으로 내려가지 못한다면 산 윗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 산은 험준해서 산중턱까지는 괜찮지만, 이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암벽과 가파른 길이 나오기에 다친 일월을 데리고 가기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에게 선택할 길이란 없었다. 

  원의는 한손에는 연희를 안고 한손은 일월의 손을 잡고 빠르게 뒤로 돌아 윗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하였다. 석이 쓰러져 있는 오두막을 금세 지나 가파른 오름길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산길을 재촉하던 원의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잠시 멈춰서서 자신의 운혜(雲鞋)를 벗었다. 그리고, 오두막을 향해 두 짝의 운혜(雲鞋)를 집어 던졌다.

  명이 혼례 때 특별히 그녀를 위해 맞춰준 운혜였다. 오두막 인근에 던져 놓으면, 괴한들도 이상하게 생각치 않을 것이다. 어차피 여인을 납치해온 자들이니까 일월의 신이 벗겨져 있는 것으로 알 것이다. 원의가 운혜를 벗어 던져 놓은 것은 만약을 위해서였다. 자신들을 찾으러 오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명이라면 자신의 운혜(雲鞋)를 알아볼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쉬울테니까. 적어도 오두막 윗쪽이라는 방향은 잡을 수 있으니까.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초보 작가입니다. 사극 동양풍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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