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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DA~

지난 이슈들을 보니 너무 많은 문장을 틀리게 써서 반성했습니다. 그래도 너른 마음으로 봐주세요.

[주간탐구](4) 행간을 만나기

한국어를 보고 고맥락의 언어라고 종종 말하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동시에 ‘고맥락’이 아닌 언어가 있을까라는 의문도 듭니다. 가령 제가 봤던 글은 그런 예시를 들고 있었어요. 새벽 늦게까지 음악을 크게 틀고 떠들던 옆방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너 지금 몇 시 인줄 아니?”

그 글에서는 이 말(한국어)을 영어로 ‘직역’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Do you know time it is now?”가 되어 버린다는 거죠. 그러면 대답은 지금 몇 시요. 이렇게 대답을 하게 된다고요. 하지만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늦은 밤까지 시끄럽게 구는 룸메이트에게 이렇게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Do you know what time it is now, huh?’

모든 언어는 그 나름의 어조와 함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름의 문법, 그 나름의 어법, 화법, 세대 격차, 문화 등등 암튼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죠. 저는 언어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더불어 언어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아요. 전(前)언어, 혹은 선(先)언어적 기제도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구요. 하지만 언어가 개입되면 자연히 어느 정도 축소된 세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도 너무 자명해요. 제가 지금 한국어로 글을 쓰고 있지만, 생각하는 것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생각은 합니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말’이 어떤 다른 언어를 쓰는 동네에서는 통용되는 감정이 아닐 수도 있다고요. 외국어를 배우는 건 단순히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공부해서 말을 조합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결국은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일반적인 대화들은 통할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조금만 더 복잡해진다면,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가끔 18세기에 쓰인 글들을 읽습니다. 소설은 아니고, 어떤 생각을 적어놓은 것들이요. 어떤 것들은 요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해설서를 부단히 읽어야 그게 어떤 말인지 알 수 있기도 해요. 그런 것을 읽어보면 사람의 생각에 진화(진보)가 있다는 확신이 들지요. 그 당시에 써놓은 글들은 최초의 약속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상태를 보고, 우리가 그 상태를 무엇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약속이요.

저는 한 커뮤니티에서 생기는 오래된 ‘약속’의 부재가 처음에 말했던 그 언어를 ‘직역’하지 못 한다로 귀결되는 현상이 아닐까 해요. 암호(를 지각/인식하는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암호가 너무 재밌지 않냐는 거예요. 인간 역사에 등장하는 매체의 시발점이 되었던 장치들은 인간의 ‘시각’이 자연스럽기에 그렇게 봐왔던 것이 아니라, 인간한테 주어진 시각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도를 했던 장치들이라는 거예요. 매체의 발전을 통해 인간들은 보는 ‘양식’자체를 바꾸었다고요. 이와 비슷하게 암호도 기존의 관점을 꼬아서 대체된 텍스트(볼거리)를 만들고, 그것을 해석(복호화)하는 관점에서 또 다른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요. 어떤 매체들이든지 그 매체에 대한 이해가 들어가야 하고, 그 매체가 어떻게 볼거리를 규정/규범화하는가를 고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마치 암호처럼요.

모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 ‘사용자 친화성’이란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컴퓨터가 사용자를 유아화시키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수만이 기술을 독점하고, 일반 사용자는 컴퓨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알 수 없고 본질에 접근할 수도 없다. 마치 중세에 교회가 라틴어 성서를 번역하지 못하도록 해놓고 성화로만 교리를 설명하는 식의 ‘친절함’일 뿐이다”(출처)

이해와 전달이 반복되는 것을 우리는 ‘대화’라고 부르지요. 처음에 외국어 번역을 예로 들었지만, 이것이 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단순히 공동체의 약속을 열심히 나누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할 틈도 없이 변화는 매체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매체’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오는 방법은 무엇일까?

요즘엔 문해력(literacy)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능력이 아니지요. 그 글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전반적인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정보를 읽어내고, 그것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게 다시 정리하는거요. 저는 모든 텍스트는 ‘매체’를 반드시 경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통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표현된 결과물 사이에 이 매체가 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시간이 흘러, 어제 썼던 매체가 내일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아주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라는 사람은 기술(記述)하는 체계(방식)가 바뀌면 그 방법에 따라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되는 ‘문해력’이라는 말과 ‘매체 문해력(media literacy)’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만 하는 순간이 도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늦출 수도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태까지 오지 않았나라는 걱정도 해요.

여러 동네에서 ‘매체(미디어)’에 대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합니다. 오늘은 저도 고민해봤지요. 저의 1)모국어로 쓰인 이번 글은 여러분들이 2)트위터, 3)레뷰, 4)(구독하신 분들은) 이메일함에서 보셨을 거예요. (그리고 포스타입!)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변수라고 한다면, 오늘,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의사소통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dug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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