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한 정운이 치킨을 포장해 들고 와 현관에 섰다. 수해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수해를 방해하지 않으려, 치킨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외투를 벗어 정리했다.

   “뭐 하고 있었어요?”

   가까이 다가와 앉는 정운에게, 수해가 살짝 웃어 보이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문서 작업이요. 업무 보고를 올려야 하니까…”

   “통증은 좀 나아졌어요?”

   아까 병원에서와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이다. 수해가 하던 작업에서 고개를 돌려 정운을 보았다.

   “나 아픈 거 잘 참아요.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면… 괜히 더 아픈 거 같더라.”

   수해가 장난으로 울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약 바른 뺨이 아직도 조금 반들거렸다.

   고요한 거실 안에 자판을 타닥이며 치는 소리가 울렸다. 정운은 소파에 목을 젖히고 기대 천장을 보았다. 천천히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떠도는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했다. 바닥에 내려놓은 손이 수해의 허벅지 아주 근처에 있었다. 수해가 조금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수해의 팔꿈치가 정운의 무릎 끝을 스쳤다. 정운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수해의 몸이 조금씩 닿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주 미약한,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을 이 닿음이 좋았다. 그가 나와 부딪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계속 닿는 것이 좋았고, 수해의 침범을 불쾌해하지 않고 조용히 숨죽여 기다리는 일이 좋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수해가 일을 마쳤는지, 노트북 뚜껑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수해가 소파에 등을 기대자, 두 사람의 어깨와 팔이 맞닿았다. 살며시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니 나른한 표정을 한 수해의 얼굴이 보였다.

   “나 오늘요. 반쯤 장난으로 놀래켜주려고 간 건데. 재밌을 것 같아서.”

   “놀랐어요. 엄청.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랬어요? 하나도 안 놀란 것 같던데. 감정이 아예 없어 보였어요.”

   정운은 몸을 일으켜 똑바로 기대 앉았다. 눈을 감은 수해를 가만히 보다가 조심히 말을 골랐다.

   “내가 긴장하면… 좀 그래요. 감정을 다 죽이고 숨기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 긴장했어요?”

   고개를 살짝 숙인 정운의 시선이 바닥 어딘가를 향했다. 떨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겨우 대답했다.

   “많이 다쳤을까 봐.”

   수해도 몸을 일으키고 바로 앉아 고개를 숙인 정운의 옆얼굴을 들여다 본다. 정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위험한 일 하는 거 알아요. 내가 말린다고 그만두지 않을 것도 알고. 다치면 내가 봐줄 테니까, 꼭 와요. 치료해주고 싶으니까.”

   두 시선이 맞닿았다. 이제야 얽혔던 것이 조금 풀리나. 정운이 웃으며 수해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진짜 심각한 상황이면 바로 응급실 가고. 그 상황에서 나 찾는다고 시간 지체되면 안되니까. 수해 씨가 응급실 가더라도, 내가 꼭 가서 봐줄게요. 알겠죠.”

   정운의 긴 손가락에 수해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감겼다. 따뜻한 손이 머리를 덮는 감각에, 수해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정운의 손길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비상 연락망에 내 연락처 써야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비상 연락망 있어요?”

   “… 그런 거 만들 생각도 안 해봤는데.”

   “빨리 만들어요. 내 이름 등록해놔요. 주치의 이정운. 이렇게.”

   “주치의?”

   호칭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정운을 그렇게밖에 못 부르나. 수해가 정운의 어깨에 가만히 뺨을 기댔다. 한숨처럼 나른하게 수해의 말이 쏟아졌다.

   “오늘 진료 받을 때… 정운 씨가 나 아픈데 없냐고 봐주니까,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나 분명히 별로 안 아팠는데. 참을 만 했는데. 항상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근데… 나 사실 아팠다고. 아프다고. 크게 다칠까 봐 무서웠다고. 정운 씨 멀쩡한 모습으로 못 보게 될까 봐. 사실 무서웠다고…”

   수해가 자조적인 투로 하하 웃었다.

   “다 큰 새끼가 약한 소릴 하죠. 경력이 벌써 십 년이 넘었는데.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정운 씨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요. 기대고 싶게…”

   정운의 크고 따뜻한 손이 수해의 귓가와 옆얼굴을 덮었다. 수해가 어깨에 더 가깝게 기댈 수 있도록 수해의 고개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따뜻한 숨결이 어깨에 와닿는 걸 느끼며, 정운이 속삭였다. 

   "괜찮아요. 나한테 기대도."

   마치 수해를 안심시키려는 듯, 정운도 자기 뺨을 수해의 머리에 가볍게 맞대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가끔은 위로가 필요하니까. 삶은 너무 잔혹하고, 살아내기가 이렇게 힘든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혼자 견디는 데 너무 익숙해졌잖아요. 가끔 이렇게 같이 견뎌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면, 조금 위안이 되지 않나요.”

   맞닿은 몸을 통해 어느덧 호흡이 같은 속도로 맞아들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어깨와 가슴이 살짝 올라왔다 내려간다. 문득, 이 사람과 닿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힘든 하루를 끝내고 돌아와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잠시 후 기분이 풀린 수해가 나른하게 웃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오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네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수해가 정운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 겹치고, 고개를 돌려 코와 입술을 묻었다.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고, 말랑한 입술이 손바닥을 가볍게 눌렀다. 너무 떨려서 숨 쉬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수해가 아주 미세하게 입술을 움직이는 하나하나의 감각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덴 것처럼 예민해져, 자신도 모르게 신음할 것 같았다.

   “정운 씨는…”

   입술을 붙이고 속삭이자 아찔한 감각에 곧바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손이 참 따뜻해요.”

   한참을 입술로 정운의 손을 느끼던 수해가 겨우 말을 마치며, 정운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었다. 곧이어 정운의 손바닥 안쪽 깊숙이, 수해가 키스했다. 자신도 모르게 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해가 정운의 손바닥에 뺨을 댄 채 비스듬히 정운을 보며 웃었다.

   마음이 울렁였다. 거세게 치던 파도가 속수무책으로 넘쳐흘렀다. 금방이라도 선을 넘을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끓어올라 호흡이 거칠어진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자 숨결이 아찔하게 섞여들었다. 수해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고 잠시 멈추어 섰다. 시선을 마주한 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이 이상 다가가면 어떻게 될까.

   타인과 타인을 구분 짓는 이 경계선. 정운은 이 경계선 가장 바깥쪽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이 선을 넘을 용기. 수해는 이 선을 넘어보라고 자꾸만 정운을 끌어당긴다. 수해가 마치 허락하듯 눈을 내리깔자, 저항할 수 없는 거센 끌림에 둘 사이의 경계선이 무너졌다. 아주 천천히, 정운의 입술이 수해의 입술에 가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조심스럽게 감촉을 전했다. 가만히 수해를 느끼며 어루만지던 입술이 지긋이 눌렀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살짝 감았던 눈을 뜨자 곧 시선이 얽혀들었다. 여전히 뜨거운 온도를 담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조심스럽게 참았던 숨이 잔뜩 떨리며 부서졌다. 수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예쁜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와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