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리만큼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희미해져 가는 봄 내음새, 그 뒤로 고개를 내미는 파릇한 잎사귀들. 암울했던 인생이 이제야 빛을 보는 걸까. 파란 하늘이 제법 어여쁜 색을 갖추었다. 여름이 다가온다. 언제까지나 파란 하늘만 있지 않을 것이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어여쁜 하늘은 자취를 감추겠지.

장마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파릇한 잎사귀도 꺾이는 계절, 우리는 무얼해야 할까.



올해 장마는 예년에 비해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다가올 기나긴 우기를 대비하여야겠지.










불행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슬슬 하복을 꺼내야 할 시기가 다가오는 듯했다. 날씨도 제법 따뜻해져 한낮에는 땀도 삐질나기 시작했다. 여름은 이래서 싫다니까. 겨울은 어찌 추워도 껴입으면 되지만, 여름에는 벗는 게 한계가 있으니까. 한숨이 푹 나왔다. 이번 여름은 어찌 버텨야 하나.


가끔 보면 아저씨는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 같았다. 어째 계속 내 주위만 맴돌고 있는 건지. 나야 계속 같이 있는 게 좋다만, 한편으론 좀 불편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감시하듯 자리를 차지하질 않나, 커피는 하루에 몇 잔이나 마시는 건지. 설거지를 끝내고 뒤돌아보면 얼음만 남겨진 잔이 보이기 일쑤였다. 또 한편으론, 턱을 괴고 눈으로 계속 내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아저씨네 회사는 괜찮아요..?”

“왜.”

“그냥.. 회사에 안 가도 되나 싶어서요.”

“어차피 나 없어도 잘 돌아가.”

“…무늬만 대표.”

“야.”



나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사람 너밖에 없어. 발끈하듯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슬쩍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바라보니 여전히 턱을 괸 채로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휘어지는 눈은 내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 눈웃음은 진짜 유죄라니까….

마감을 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시원한 밤공기를 느끼며 손을 잡고 걷는 건 좀 로맨틱 하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매일이 이런 하루였으면 좋겠어…. 집에 가는 내내 손깍지를 끼고 가는데, 깍지를 끼다 보면 나보다 한참 큰 아저씨의 손 때문에 버거울 때가 많다. 손이 저려서 꼼지락거리면 그걸 눈치채고 깍지를 풀고 어깨에 팔을 둘러서 품에 안고 가는데, 그게 또 설레서 죽을 맛이었다. 여자가 설레는 포인트만 딱 골라서 하는 게 좋으면서도 조금 짜증이 났다. 경험이 많은 거랑 비슷한 맥락이니까.



“진짜 여자 많이 다뤄본 거 같아….”

“당연하지.”

“…이럴 땐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아닌데. 완전 믿을 거였는데.”

“그래도 숙맥보다는 낫지 않나.”



못산다 못살아. 말 한마디를 져주지 않네. 짜증이 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좋으니 참아야 하는 수밖에.

걷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가까워졌다. 느릿하게 걷는다고 걸었는데, 워낙 가까운 거리인지라 금방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집 앞에 다다르고 아저씨가 내 몸을 돌려 세운다. 목 부근을 손으로 감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양 볼을 꾹꾹 눌러댄다. 앗, 아파요. 손으로 누르는 족족 뭉그러지는 내 얼굴이 웃긴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던 아저씨가 이제는 볼을 쓰다듬는다. 병 주고 약주고인가.



“내일은 데리러 못가.”

“알겠어요.”

“왜인지 안 물어봐?”

“뭐..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래?”



여자 만나러 가는데, 괜찮으려나. 두 눈을 번갈아 보면서 얘기하는 모양새가 거짓말은 아닌 듯싶었다. 데리러 못 오는 거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 일 때문일 수도 있고, 아들 때문일 수도 있고. 아저씨도 아저씨만의 생활이 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까니 허리를 숙이고 눈을 맞춰온다. 코앞으로 보이는 얼굴이 밉게만 느껴졌다. 괜찮냐니까. 마치 시험을 하듯 묻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싫다고 해서 안 갈 것도 아니면서….



“…괜찮아요.”

“진짜?”

“응. 나도 내일 약속있거든요. 남자인 친구랑.”



거짓말이다. 그냥 여자 만난다는 아저씨한테 심통이 나서, 그래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해버렸다. 어차피 아저씨도 나한테 남자인 친구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테니 믿지 않겠지. 애초에 주위에 남자가 많을 것 같지 않아 보이니까. 그래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라고. 아저씨의 눈을 피해 아저씨 뒤로 보이는 전봇대를 보다가 슬쩍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그 얼굴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어떤 새끼야.”

“네..?”

“친구 맞아?”

“아, 그게….”



망했다. 정말 믿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어쩐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꽤나 험악스럽게 찌그러진 미간이 대놓고 화를 표출하고 있다. 근데 이걸 정말 믿을 줄이야….



“저….”

“만나지 마.”

“제 얘기 좀….”

“데리러 갈 테니까 딴 데 새기만 해.”



열 받네. 내게서 손을 뗀 아저씨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쉰다. 마지막엔 욕지거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야단났네. 오해를 어떻게 풀면 좋지.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데, 어쩌면 좋지…. 근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좀 웃기지 않나. 본인은 여자 만난다고 대놓고 얘기 했으면서. 이거 그냥 쌤쌤 퉁 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아저씨도 만나지 마요.”

“그거 뻥이야.”

“…네?”

“반응 좀 보려고 장난친 건데. 아, 몰라.”



들어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꼽고 야무지게 나를 노려본다. 그니까 정리를 해보자면 여자를 만난다는 건 거짓말이고, 나는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거짓말을 한 거네. 아, 존나 무의미하고 부질없는 짓거리였잖아. 이 아저씨를 어쩌면 좋을까. 일단 화를 먼저 풀어주는 게 급선무인 것 같다. 아저씨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몸을 밀착 시켰다. 그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자 한 쪽 눈썹이 찌그러진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화내지마요. 응?”

“안 만나겠다고 해.”

“안 만날게요. 약속.”



듣고 싶은 대답을 들어서인지 그제야 조금은 누그러진 얼굴을 하고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나를 품에 안는다. 사실대로 얘기를 할까 싶었지만, 거짓말을 한 게 괘씸하기도 하고. 또 아저씨가 질투를 하는 것 같아서 사실을 고하지 못했다. 조금 더 즐기다가 나중에 얘기해야지.

기분이 좋아진 탓에 발뒤꿈치를 들어서 아저씨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금방 떨어진 입술에 입맛을 다시던 아저씨가 고개를 숙여 다가온다. 입술이 닿기 직전, 검지손가락을 사이에 끼워 넣고 아저씨를 살짝 밀어냈다. 입 맞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



“치워야지.”

“궁금한 게 있어요.”

“나중에.”

“안 돼요.”



입술만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아저씨가 거리를 유지하며 뭐냐고 묻는다. 내일 어디 가는데요? 입술에 머물러 있던 눈을 살짝 치켜뜨고 내 눈을 바라보던 아저씨가 눈을 휘어 접는다. 궁금해? 살살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이 입술을 막고 있는 손가락을 튕겨낸다.



“일단 이거부터 치워봐.”










아저씨가 데리러 온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학교가 끝나고 교문을 나서니 아저씨의 차가 보였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차 안에서 창문을 내리고 있는게 아닌, 차에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뚫어져라 한곳을 응시하는 게 마치 사람 하나 잡아 죽일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있지 않아도 충분히 무서워 보인다고요. 지나가던 학생들이 아저씨를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간다.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 아저씨에게 다가가 가슴팍을 퉁퉁쳤다.



“야쿠자에요? 왜 이러고 있어요….”

“어따 두고 왔어.”

“…뭘요.”

“그 새끼.”



아.. 거짓말이라고 안 했지.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해명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설명하기 귀찮은 마음에 그냥 얼버무렸다.

아저씨는 카페에 데려다주는 내내 존재하지도 않는 ‘그 새끼’를 입에 올리며 욕을 짓씹었다. 나중에 거짓말인걸 안다면 어떻게 되려나. 죽이려고 달려들진 않겠지. 차에서 내리고 인사를 할 때 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는 계속되었다.



“얼른 가요….”

“왜 빨리 보내.”

“시간 촉박하잖아요.”

“늦어도 돼.”

“…저 못믿죠.”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못 믿는 거 맞네….



“끝나는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 거야.”

“…네.”



대답 크게 해야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니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네, 얼른 다녀오세요.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짓던 아저씨가 차에 올라탄다. 그래도 가는 것 까지는 봐야겠지. 차에 올라타고도 바로 출발을 하지 않던 아저씨가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잊은 거 없어?”

“잘 다녀오세요..?”

“그거 말고.”



혀로 입술을 슥 핥아내린 아저씨가 예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정확히는 입술을. 빨리해줘. 눈을 가늘게 뜨며 조르는 아저씨의 얼굴을 야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다 큰 어른이 저래…. 진짜 미쳤나봐.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아 주위가 밝았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었다. 아무도 없는 것까지 확인을 하고선 허리를 숙여서 아저씨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떨어졌어야 했는데, 대뜸 뒤통수를 감싸오는 손 때문에 벗어날 수 없었다. 혀를 섞지 않고 입술만 맞댄 채로 있다가 저 멀리서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려 아저씨의 가슴팍을 쳤다. 그제야 입술을 뗀 아저씨가 웃으며 창문을 올린다. 서서히 올라가는 창문으로 내 모습이 비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짙게 선탠이 된 창문이었지만 왜인지 그너머로 아저씨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예쁘게 웃고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저씨가 가는 곳은 각종 부유층이 모이는 사교모임 같은 곳이라고 했다. 원래는 참석하지 않지만, 투자건도 있고, 또 만나야 할 사람도 있다고 했다. 혹 만나는 사람이 여자일까 싶었지만, 친구라고 일러주었기에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카페가 휑했다. 손님도 없고, 아저씨도 없고. 손님이 없는 건 좋았지만 아저씨가 항상 있던 자리에 없으니 허전함이 컸다. 설거지를 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있었는데. 이래서 난자리가 무섭다니까. 고작 오늘 하루 없는 건데.

한 시간에 한두 명 정도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것 말고는 카페는 정말 한산했다.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연락이라도 해볼까. 사실 아저씨와 전화 이외의 연락을 해본 적이 없다. 전화조차도 많이 한 건 아니었다. 그마저도 어디냐 묻는 게 전부였다. 메시지라도 보내볼까. 근데 뭐라고 보내야 하지. 딱히 보낼 말도 없는데. 고민을 하다가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머신 쪽으로 갔다. 샷을 내리고 우유를 스팀을 냈다. 예쁜 머그잔에 에스프레소 샷을 담고 스팀을 낸 우유를 담아냈다. 마지막에는 라떼아트를 하트로 마무리 하였다. 라떼를 가지고 카운터에서 돌아 나와 아저씨가 앉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하트가 잘 보이게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아저씨에게 보냈다.

무어라 코멘트 같은 것도 덧붙여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사진만 달랑 보내는 건 예의가 없어 보이려나. 생각나는 말을 꾹꾹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언제 와요?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거 같고…. 거기 재밌어요? 아냐. 아저씨 없으니까 심심해요. 이건 진짜 아니다….

이미 사진을 보낸 지 한참 되었지만, 아직 메시지를 무어라 보내야 할지 정하지 못하였다. 아직 아저씨는 보낸 걸 읽지도 않았다. 정신 없으려나…. 하기야 어찌 됐건 일 때문에 간 것도 있으니까 바쁠 만도 하겠지. 여태 확인도 답장도 없는 아저씨의 라인대화창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 자 한 자 꾹꾹 하고 싶은 말을 눌러 담았다.



보고 싶어요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확인을 했다. 그걸 실시간으로, 두 눈으로 확인했다. 바짝 떨리는 마음에 다급히 대화창을 닫고 핸드폰을 뒤집어 두었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이 무색해지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보낸 지 삼십 분은 훨씬 지났는데. 혹시 내가 잘못본 게 아닐까 하고 다시 아저씨의 대화창을 들어가 보았지만, 읽음이라 되어있었다. 바쁜가….

돌아오지 않는 답장을 목 빠지게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9시를 향해있었다. 더이상 손님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마감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마감이라 할 것도 없었다. 설거지도 이미 끝낸 상태였고 간단히 뒷정히만 하면 그만이었다. 정리를 하며 돌아다니면서도 혹여 아저씨한테 연락이 올까 온 신경이 핸드폰으로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핸드폰은 묵묵부답이었다.

봤으면 답장이라도 좀 해주지…. 그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업무 보고를 받을 때도 전화로 하는 게 귀찮다고 거의 메시지로 주고받는 걸 보았는데. 서운함이 몰려왔다. 보고 싶다고 한 건 조금 오바였을까…. 그렇잖아, 투정 같기도 하고. 시간 맞춰 데리러 온다고 까지 했는데 그걸 못참고…. 바보야, 진짜 애냐….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쉬니 테이블 위에 미처 치우지 못한 머그잔이 보였다. 아까 아저씨에게 보여준다고 만들었던 라떼. 다 식어버렸네. 모양은 유지하고 있지만, 식어버린 커피를 물끄러미 보다가 싱크대 쪽으로 향하였다. 어차피 먹을 사람도 없는데 버리는게 낫겠지….


 짤랑-.


그때였다. 갑작스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놓칠 뻔했다. 손에서 놓칠 뻔했던지라 예쁘게 모양을 잡고 있던 하트가 찌그러져 버렸다. 어차피 버릴 거였으니까…. 싱크대에 머그잔을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마감 시간대에 손님이 오는 경우는 대개 드물었지만 가끔 있기도 했다. 아저씨는 아직 오시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어..?”

“뭘 놀라고 그래.”

“왜 벌써 왔어요..?”

“보고 싶다며.”



뒤를 돌아보았을 땐,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가쁜 숨을 몰아내쉬는 아저씨가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아저씨의 등장에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바라보고 있으니 자켓을 벗으며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던 아저씨가 핸드폰을 내게 들이민다. 화면으로 내가 보낸 사진과 메시지가 보였다. 아…. 내가 보낸 걸 봤을 때는 별 생각이 안 들었는데, 막상 아저씨가 보여주는 화면의 내 메시지를 보니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아저씨의 손을 밀어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실실 웃는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카페 안을 메웠다.



“보고 싶었어?”

“…저리 가세요.”



저리 가라는 말에도 굴하지 않던 아저씨가 이제는 아예 안쪽으로 들어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섰다. 머리 위로 턱을 얹어놓던 아저씨가 숨을 길게 내쉰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 고개를 살짝 드니 아저씨의 하얀 셔츠 위로 땀이 맺혀 있는게 보였다. 손으로 땀을 닦아내고 식혀주고 싶어 부채질을 해주니 푸흡 바람 빠지듯 웃던 아저씨가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



“그거 어딨어.”

“어떤 거요?”

“아까 사진 보낸 거.”

“아 그거….”



머리를 긁적이다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싱크대 쪽을 가리키니 내 허리에 팔을 둘러 나를 데리고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싱크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머그잔과 그 안에 담긴 라떼, 그리고 찌그러진 하트가 보였다. 살짝 옆으로 흘깃 아저씨를 바라보니 라떼를 뚫어버릴 기세로 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머그잔 손잡이를 쥐고 들어올린다. 코에 가까이 갖다대고 냄새를 맡던 아저씨가 라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만든 지 꽤 되어서 차게 식었을 텐데.



“다시 해줄까요?”

“됐어.”

“식어서 맛 없을 텐데….”

“맛있어.”



달아, 너처럼. 이미 차게 식어버린 라떼를 술처럼 원샷하던 아저씨가 머그잔을 내려놓고 예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럽도 안 들어간건데…. 아저씨의 한마디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말을 해대는 아저씨 때문에 진짜 정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혼이 다 빠질 지경이라니까…. 저, 저 슬슬 마무리 해야해서…. 정신없이 팔딱거리며 아저씨를 밀어내니 양팔을 붙잡던 아저씨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춰왔다. 깜짝 놀라서 아저씨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등바등하는 내 팔을 등 뒤쪽으로 결박하듯 한 손으로 잡고 남는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고정하듯 잡아 왔다. 아직 마감 전인데…. 맞닿은 입술새로 혀가 문을 두드리듯 핥아왔지만, 입을 벌리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눈으로 카페 입구 쪽을 흘기듯 바라보니 입술을 살짝 뗀 아저씨가 고개를 고정하여 눈을 바라보게 하였다.



“집중해야지.”

“하아.. 누구오면 어떡해요.”



내 말에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던 아저씨가 내게서 떨어졌다. 순순히 떨어져 나가는 아저씨가 이상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9시 59분, 딱 맞춰 마무리를 하고 스위치를 모조리 껐다. 이제 나가서 문단속만 하면 되는데 아저씨는 항상 앉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저 다 했는데….”

“이리와.”



아저씨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으니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한다. 조명 하나 켜진 곳 없이 어두운 채로 가려고 하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내부에 아저씨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가니 자리에서 일어난 아저씨가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잡아 당기던 아저씨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왔다. 갑작스럽게 맞춘 입술로 인해 입을 벌리지 않으니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던 아저씨의 혀가 작게 벌어진 입술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아까 순순히 떨어져 나간 이유가 이러려고….

짐승같이 밀어붙여오는 아저씨 때문에 뒤로 서서히 밀리던 내 엉덩이가 테이블에 부딪혔다. 아….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며 앓는 소리를 내니 아저씨가 나를 들어올리고 테이블 위에 앉혔다. 눈치도 더럽게 빠르다니까. 아저씨의 셔츠를 꼭 잡고 있다가 계속 내게로 기대어 오는 아저씨에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지지대 삼아 몸을 지탱하였다. 윗입술, 아랫입술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빨며 입안을 헤집어 놓는 아저씨로 인해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숨 쉴 틈없이 진득하게 이어오는 키스로 숨이 가빠진 나머지 아저씨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니 입술을 살짝 떼던 아저씨가 이마를 맞댄다. 어두운 와중에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선명히 보였다. 온전히 나를 담고 있는 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느릿하게 감긴 눈이 다시 가까워진다. 커피를 마시지 않았음에도 입안에서 커피 향이 가득했다. 아저씨가 마신 라떼 때문인지 쌉싸름하고 텁텁한 맛이 느껴졌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어째 주구장창 혀를 섞다 보니 달큰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달아, 너처럼.’



아까는 이해되지 않던 게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카페 문단속을 마치고 돌아보니 아저씨가 손을 내밀었다. 손. 강아지한테 말하는 것 같은 어투가 조금 웃겼다. 이렇게 보면 애아빠인 게 티가 난다니까. 물끄러미 손을 바라보다가 깍지를 껴 잡았다. 손에 착 감기는 아저씨의 손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단연 아저씨와 손을 잡고 걷는 것이다. 이 사소한게 왜 좋은가 하면 연인 같은 느낌이 들어서랄까. 그냥 여느 연인들과 다름 없어 보여서, 마치 연애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손을 잡으며 걷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별이 잘 보이지 않네. 안개가 자욱한 탓에 별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낮추어 옆에 있는 아저씨를 보니 살짝 피곤한 듯보였다. 그러고 보니 잘 다녀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네.



“잘 다녀왔어요?”

“응.”

“친구분도 만났어요?”

“응. 얼굴만 잠깐 봤어.”

“왜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했으면서. 왜냐고 묻는 내 얼굴을 보고 아저씨가 실소를 터뜨렸다. 모르는 척이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아저씨의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아저씨가 내 앞으로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아….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나 때문이었구나. 괜히 방해를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껏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숙여 걸으니 아저씨가 반대 손으로 내 볼을 튕겼다. 귀여워서는.



“아, 거기서 엄청 예쁜 여자 봤다?”

“…그래요?”

“응. 사람도 많았는데 그 여자가 주인공 같아 보였어.”



전혀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을 고한 아저씨가 참 미웠다. 여자 만나러 간다는 거 거짓말 아니었네. 괘씸한 마음에 아저씨를 흘깃 째려보니 푸스스 웃는다. 평소 같았으면 웃는 얼굴의 아저씨를 보고 얼굴을 붉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 뚫리겠다. 뚫려버리시던가….



“왜 또 삐졌어.”

“…삐진 거 아니거든요.”

“삐졌네.”

“아니라니까요.”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다 보니 금세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괜시리 짜증이나 잡고 있던 손깍지를 꾸물대며 빼내려하니 강한 힘으로 손을 잡아 왔다. 그렇게 잡으면 나중에 손 아픈데.



“여자 만난 거 맞네. 거짓말이라 했으면서….”



그렇게 예쁘면 그 여자한테 가던가요. 진짜 짜증나….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운동화 끝으로 애꿎은 땅바닥만 툭툭쳤다. 그러다 짜증이 도를 넘어서 눈앞에 보이는 아저씨 구두에 화풀이를 했다. 운동화 코로 아저씨의 구두 앞 코를 툭툭치니 밀려나기는 커녕 제자리에 우뚝 자리하고 있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신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저씨에 살짝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버릇 없다고 생각하려나…. 하, 씨. 짧은 숨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욕짓껄이가 나올 것 같은 아저씨의 목소리에 긴장되었다.



“야.”

“…네.”

“너 진짜,”



존나 귀엽네. 예쁘게 눈을 휘어 접으며 웃던 아저씨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 마. 내 타입 아니라 관심 없어.”

“그럼 왜 얘기한 건데요….”

“궁금할까 봐.”

“전혀 아니거든요?!”



질투했지. 아닌데요. 맞잖아.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는 아저씨 때문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든 저보다 어린 고딩 이겨 먹으려고 하질 않나. 가끔 이렇게 속을 긁어 놓을 때도 많아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어떡해. 좋아 죽겠는데….


사람을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괜찮을까. 아직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하지만 구태여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아무렴 상관 없어. 그러니 이 행복이 깨지지 않게 해주세요. 다른 건 상관 없으니 이 행복만큼은 앗아가지 말아주세요.

안개가 자욱한 하늘, 달빛 하나 비추지 않는 아래서 소원을 말한다한들 그것이 닿을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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