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 시발 진짜 씨씨라니요. 김정우의 폭탄 발언에 술이 확 깨는 것만 같았다. 물론 사귀면서 좋은 점이 더 많았던 씨씨였던 터라 여태 안 좋은 감정이 없었는데. 이렇게 나의 연애사가 까발려질 줄은 몰랐기에 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 그건 정재현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정재현이랑은 비밀 연애를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달까.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원래 박혀있던 돌 쪽이 김정우였긴 했는데. 

복잡해지는 머리를 흔들자마자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두 궁금해 하는 눈을 하고는.




"김주임, 정말이야?"

"하하... 씨..."



발 진짜.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래요 김정우랑 사귀었습니다. 그게 어째서요? 라고 따져 묻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죄송해요 주임님. 멋대로 밝혀서."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웃고 있는 김정우가 미워 살짝 그를 째려보았다. 예의상으로라도 차마 괜찮다는 말이 입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홍 사원이 대답없는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은 아니시라는 거네요?"



아, 지금은. 그렇지. 내 손을 꽉 쥔 정재현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홍 사원의 팩트 폭행과도 같은 말에 김정우 역시 대답을 망설이며 시선을 깔았다. 애매해지는 분위기에 대리님은 웃으며 이 상황을 넘기려 하셨다.



"어쩐지 정우씨가 적응을 잘 하시더니만."

"그러게요. 김 주임이 잘 챙겨준다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뭐 있을 줄 알았어."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드는 순간이었다. 가득 찬 술잔을 원샷을 한 정재현이 잔을 내려 놓으며 중얼거렸다.



"뭐 있긴 하죠."



그의 주정 같은 말에 모두가 큰 집중을 안 하고 있을 때였다. 정재현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자 그는 나를 흘끗 보았다. 그만해. 내 신호를 무시한 25톤 덤프트럭은 그대로.



"김주임 저랑 뭐 있어요."

"네?"

"저랑 뭐."



김정우와 나를 들이받았다.













내가

왜 

다시


(兩者擇一)

Phrase














"아니, 김 주임 결혼 할 사람이 그럼..."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와 제발 꿈이어라. 두 사람과 뭐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내 회사 생활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 사람은 또 왜 이러는 것인가 싶어 절망감이 들었다. 이제 슬슬 정리를 하려는 분위기였는데 또 다시 술자리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내 손이 떨려오는 걸 눈치챈 정재현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을 힘 주어 놓고는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수습을 해야했고, 정재현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다들 많이 취하신 것 같아 넘어가려고 했는데."



힘을 주어 말했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고. 정재현이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취한 거 같아도 다들 내일 기억할 거잖아. 그런데 얼굴이 붉어진 정재현이 몸을 흔들며 테이블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저랑 뭐. 그러니까 조랑말이 있다구요."

"네?"

"김주임은 키우는 조랑말 있잖아요. 히잉."



조랑말, 조랑말을 중얼거리는 정재현을 보고는 다들 취했나보다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 팀장 또 저러네 말장난 개그. 어후, 오늘 좀 달리시더라구요. 겨우 이런 말장난으로 넘어갈 것 같나.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을때였다. 정 팀장 진짜 취했네. 웃는 거 봐. 어쭈. 헤실헤실 웃는 정재현을 보고 모두들 그가 취해서 한 말인 냥 넘기는 분위기였다. 평소에도 취하면 아재 개그를 하는 정재현이긴 한데 이걸 믿는다고? 그런데 모두 헛소리로 받아들이고 다들 정재현을 무시했다. 술에 정말 많이 취했던 건지 정재현의 머리가 쾅하고 테이블을 박자 술자리가 흐지부지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내일 봬요! 고생하셨슴다. 취기가 올라 묘하게 명랑해진 목소리 들이 밤하늘을 떠다녔다. 나 역시 술에 취한 정재현을 조수석에 태우고 의자를 뒤로 약간 젖혀주었다. 잠에 취해 웅얼거리는 정재현의 고개를 편하게 돌려준 뒤 살짝 문을 닫았다. 잠이 든 그 대신 대리운전을 부르는 사이 하나둘씩 택시에 몸을 싣고 떠났다. 마지막으로 홍 사원까지 택시에 타고 택시 번호를 사진으로 찍었다.



"안 죽었네 김여주."



뒤를 돌자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김정우가 다가와 내 가슴께에 제 팔을 두르며 귀에 속삭였다. 갑작스러웠지만 김정우의 스킨십이 나쁘지 않았다. 김정우가 내 어깨에 이마를 부비적댔다. 이러는 걸 보니, 얘도 정상은 아닌 듯 했다.



"옛날에는 취하면 안아달라고 찡찡 댔었는데 사람들 다 보내고 정리할 때까지 남아있네."

"너 진짜, 옛날얘기 좀 그만해."

"과거가 있어야 미래가 있는 거지."

"진짜 닥쳐."

"넌 나의 빛나는 과거야."



아까의 일이 생각 나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다정하게 두른 그의 팔을 팍하고 밀쳐내고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너 근데 진짜 돌았어?"

"갑자기요? 나 원래 돌아이잖아."

"그게 아니라. 우리 사귄 거 동네방네 소문낼 셈이야? 헤어진 연인이라는 거 사람들이 알면 뭐가 좋은데 대체?"

"...그건."



김정우는 말을 하다 말고는 한쪽 눈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제 눈썹을 만지작댔다. 곤란할 때 나오는 제스쳐네. 그의 모든 행동을 알고 있는 전여친으로, 그의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갔다.



"그리고 나랑 정재현이랑 결혼이라도 한다면..."

"야 내가 그거 막으려고 온 건데. 말 섭섭하게 한다?"

"뭐?"

"그럼 그런 말도 못해? 사귀었었다고."

"어 못해."



신입사원 김정우랑 사귀었던 김주임. 그리고 그 김주임과 팀장 정재현이 결혼 날짜를 잡아 청첩장이라도 돌린다면. 그 후로도 우리 셋은 한 사무실에서 일 할 수 있을까? 내가 주먹으로 김정우의 가슴을 팡팡 치며 말했다.



"너 진짜 생각 없어? 그럼 내가 뭐가 되는데? 두 사람 갖고 논 샹년 되는 건 나라는 거 생각 안 했어?"

"너, 정재현이랑 진짜 결혼이라도 하려고?"



김정우가 빈정대며 물었다. 진짜 할 거냐고, 그게 지금 중요한가. 기분이 나빠져 발을 바닥으로 쾅쾅 굴렀다.



"어 할 거야 왜. 잘생기고 나만 알고 집안 좋고, 돈도 많고 나한테 돈도 잘 쓰는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게 내 꿈이었어."

"잘나셨네."

"너도 알다시피."



김정우의 가슴에 칼을 꽂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건 네가 아니었고."



심장에 칼이 꽂힌 김정우가 이를 악물었다. 김정우는 지금 직격타를 맞았을 것이다. 그의 가정사를 다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해서는 안될 말이었지만, 막상 칼을 찌른 내가 더 당황했다.



"그래서 진짜 하시겠다고?"

"왜 안돼? 그렇다면 셋 중에 적어도 한 사람은 여길 떠나야 할 수도 있는데."

"그게 나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나 봐?"

"그게 왜 너야. 가면 나지. 너 이 회사에 얼마나 힘들게 들어왔는지 아는데.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 미래를 봐야지 김정우."



태연한 그의 태도에 화를 내며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꽤나 큰 타격에도 김정우는 가만히 맞고 있을 뿐이었다. 여러 번 반복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태연한 척하는 김정우가 미워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내려치려는 때였다.



"두려워?"

"..."

"가더라도 내가 갈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그게 무슨."

"그 길이 지옥이더라도."

"..."

"내가 가더라도 갈 테니까."



중얼거리는 김정우의 말에 내려치려던 내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뭐라고?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김정우는 허공에 떠 있는 내 손목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내려 내 양손을 잡았다. 



"손 또 얼었네."



그러더니 입에 대고 후 하고 불었다. 따뜻한 온기에 얼었던 손이 살짝 녹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내내 참아왔던 기침이 터졌다. 콜록 콜록. 고개를 돌려 기침을 하는 나를 바라본 김정우가 낮게 말했다.



"팀장이 너랑 결혼하면, 그래서 나 때문에 껄끄러워지면 내가 나갈 생각이었어. 거기까지 생각 안 한 거 아냐."

"뭐?"

"걱정 마 그러니까. 내가 병신 되는 게 낫지, 너 나쁜 년 안 만들어."



그러니까 왜. 그렇게 최악까지 가야 하는 건데? 김정우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김정우는 내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덕분에 우리 사이가 가까워졌고 김정우의 숨이 내 이마에 닿았다. 기침을 해서인지, 날이 추워서인지, 눈물이 살짝 났다. 내 눈가에 맺힌 눈물에 김정우의 눈빛이 변해 다정하게 물었다.



"약은?"



갑자기 무슨 약. 하다가 그가 말하는 것이 감기약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김정우가 간 이후로는 안 먹었지.



"약 꼭 다 먹어... 오늘은 술 마셨으니까 먹지 말고."



김정우는 다정하게 말했다. 알약 못 먹는 거 알면서.  감기는 이제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이마가 뜨거운 것만 같았다. 약 안 먹어. 가져와. 먹여줄 테니까. 김정우가 씽긋 웃자 마음 깊은 곳이 저릿해졌다. 알약을 못 먹는 날 위해 입으로 먹여주었던 김정우.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았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떨려도 되는 걸까. 나는 자신을 계속 자책하며 고개를 돌려 정재현이 타고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



"정재현이랑 같이 가는 거야?"



김정우의 말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위아래로 끄덕이기만 했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길 바라면서. 한 번만 더 잡는 다면 정말 잡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 가면 안 돼?"

"응?"

"안 가면 안되냐고."



김정우의 애원 같은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강아지 같은 눈빛의 그를 보았다. 안 가면 안되냐고? 그 말에 흔들리는 내 자신이 미웠다. 여기서 정재현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정말 되돌릴 수 없었다.

정리해야겠다. 정리를 해야만 했다. 김정우의 얼굴을 보다 점차 그의 뒤에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의 가로등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은 할 수 없었기에 김정우의 손에서 내 손을 힘을 주어 빼냈다. 그의 손에서 내가 놓쳐지자 어쩐지 김정우의 눈빛이 멍해졌다.



"정우야 우리 그만하자."

"뭘 그만해."

"우리 씨씨였고 사귀었고, 내 실수로 헤어졌지만. 그때는, 우리 진짜로 헤어진 게 아니었었나 봐."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지금 헤어지자고."

"나보고 지금, 너랑... 이별을 두 번 하라고?"



김정우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이, 그 말이 가시가 되어 마음에 박혔다. 두번의 이별, 그리고 그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건 김정우였다. 그렇지만, 이 이기적임 또한 나중에 내게 거대한 죄의 값으로 다가오겠지. 그래도 김정우를 잘라내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끝까지 이기적이고, 남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조차 없는 나쁜년이 되는 것.



"우리 진짜로 깨끗하게 헤어지자."

"여주야 너 진짜."

"너도 나 놓겠다는 말 지키고. 나도 네 마음 가지고 노는 거 그만할게."



그 말을 끝으로 뒤를 돌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려는데 김정우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잔인하네 김여주.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사실 김정우의 한숨 속에 섞인 진심이 아닌 내 마음속에 울리는 소리였지만. 몇 발자국 떼지 못했지만 김정우가 내 손을 턱하고 붙잡았다. 각오한 일이기에 몸에 힘을 주자 뒤를 돌아 김정우의 눈물젖은 얼굴을 볼 일은 없었다. 




"여주야, 나는 네 옆에서 부족해 보이는 내가 싫고 너한테 못 해주는 내가 존나 한심했거든."




김정우는 내 등에 대고 말을 이었다. 김정우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그 말이 목구멍에서 올라오다 다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비겁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애정을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에게 주는 애정이 좋았고 즐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 시야가 뿌예졌다.



"그래서 진짜 노력했는데... 여기까지 오면 너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여전히 너한테 부족하지."



김정우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김정우는 울고 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차올랐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정우도 나와 같은 얼굴일 테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감정 속에 미안한 감정 하나만큼은 동일하겠지.



"너를 만나는 게 내 욕심인 것 같다는, 그런 개 소리 하면서 너 놓지 말걸 백번은 후회했어."

"..."

"잘난 놈한테 흔들려도 계속 붙잡고 있을걸. 나 병신인 거 알잖아."

"...정우야."

"여자친구한테 용돈 받아 가며 취준하는 그지새끼라고 친구들한테 욕 먹어도 그냥 네 옆에서 행복할 걸."

"..."

"자존심 부리지 말 걸. 욕심 낼 걸. 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너 잡고 안아줄 걸."



솔직한 말들을 하던 김정우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손을 잡은 김정우의 손이 촉촉해졌다.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땀 때문이었다. 그 액체로 인해서인지 생긴 틈이 커졌던 탓인지 김정우가 손에 힘을 뺀 건지. 



"그런데도, 나 아직도 널 사랑해. 사랑할 거고. 그런데 네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손의 온기가 미끄러지듯 놓쳐져 빠져나갔다.



"잘 가 여주야. 행복해."



반년전과는 묘하게 바뀐 말이었지만 의미는 동일했다. 내가 비수를 꽂고 상처를 받은 김정우가 나를 놓아주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먼저 떠나가는 건 김정우였다. 그가 100m 아니, 500m 반경을 벗어날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수도꼭지를 열어 둔 채로, 눈물이 흐르길 가만히 두었다. 그렇지만 내 가방 속에 있던 손수건 두 개는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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