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평일은 두 가지 여가 활동을 중심으로 굴러간다. 피아노 연습실에 가거나, 클라이밍 센터에 가거나, 클라이밍을 한 뒤 피아노를 치러 간다. 주로 카페와 영화관을 오가던 나의 놀이 역사에서 꽤 파격적인 행보이다. 머리에서 출발한 생각은 언어로 나오는 것이 보통인데, 생각이 팔을 타고 전완근으로 출력되는 공통점 때문인지 나는 종종 볼더링(클라이밍의 일종)을 하며 피아노를, 피아노를 치며 볼더링을 떠올린다.


볼더링은 스포츠 클라이밍 종목 중 하나로 인스타그램에서 #클라이밍을 찾으면 흔히 나오는 그것이다. 3~5m의 암벽에서 같은 색의 홀드(돌)를 이용해 정상에 오른다. 어떤 코스는 사다리처럼 쉽게 경로가 그려지지만 어떤 코스는 홀드들이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붙어있어 “저기서 저기로 이동해요? 갑자기?” 하고 묻게 된다. (강습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볼더링에서는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등반 경로를 찾는 ‘루트 파인딩'이 핵심이다. 본인의 신체 조건과 특기를 활용해 각자의 답을 찾아야 하므로, 모범 답안을 아는 것보다 스스로를 잘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운동, 하면 힘을 먼저 떠올리지만 몇몇 운동은 생각보다 계산을 많이 해야 하는 머리싸움이다. 가령 나의 최애 예능 <골 때리는 여자들>을 보면 그 짧은 찰나에 패스의 각도나 상대방의 움직임을 계산해서 공을 차는 선수들의 똑똑함에 매번 감탄하는데, 풋살이 평소 훈련을 토대로 경기에서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방식이라면, 볼더링에서의 계산은 오 분이든 삼십 분이든 원하는 시간만큼 고민하고 계산이 틀렸다면 벽에서 내려와 다른 방법을 찾고 결국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볼더링도 경기에서는 제한 시간이 있지만 여가로 즐기는 운동으로서 시간을 다르게 운용하고 실수를 정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내내 모든 체육 실기에서 거의 꼴등을 기록하고 뚝딱이기로 웬만해선 어디서 밀리지 않을 몸치인 나는... 무작정 볼더링을 시작했다. 우선 지구력을 쌓고, 기본적인 동작을 연습하고, 그런 단계 없이 갑자기 벽을 기어올랐다. 이 방법에 약간 의문은 있지만 첫 입부터 자극적으로 입맛을 사로잡지 않으면 금방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나를 알기 때문에 일단 논외로 하며... 루트 파인딩을 열심히 해도 내 몸이 원하는 경로대로 움직여 줄리 만무해서 막상 벽에 붙으면 선생님이 밟으라는 홀드를 밟고 잡으라는 홀드를 잡다가 고장 난 아바타처럼 추락하곤 한다. 2주 차까지는 팔만 조금 욱신거릴 뿐 온몸이 말짱했다. 손아귀 힘만으로 몸통을 대롱대롱 매달았다는 소리다. 직장인의 뭉친 어깨 정도는 시원하게 으깨줄 수 있는 손 힘이지만 몇십 키로의 사람 몸을 지탱하기엔 택도 없다. 머리를 더 써야 한다. 무게중심을 궁댕이에 놓고, 사지와 몸통을 어떻게 움직여야 그것이 균형을 유지하는지, 콩 한쪽만 한 힘을 어떻게 나눠먹어야 최대한 배부르게 먹을지, 그런 걸 계산해야 한다.



갑자기 피아노 얘기로 넘어가 본다. 너무 갑자기인가? 전혀 관계없는 사이 같지만 나에겐 연결된 경로가 있으니 일단 들어보세요. 십몇 년만에 피아노 연습을 시작하며, <캐리비언의 해적> 주제곡을 편곡한 연주 영상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냅다 건반을 두들겨 팼더니 일주일도 못 가서 손목이 덜그럭 댔다. 피아노도 알고 보면 다른 부위를 써야 한다. 특히 이렇게 화음이 많고 건반을 세게 때리는 곡은 상체의 힘을 삼두를 타고 끌어와 내리쳐야 한다. 팔뚝이 불끈대는 감각을 알게 되자 앙상했던 소리가 한결 맑아졌다. 그렇게 손가락에 여유를 주면 화음을 더 정확히 짚을 수 있다.


피아노 운지법도 정답은 없다. 입시 세계에는 있을지 몰라도 찍먹예술가(예술 대가가 될 생각은 없고 정서 안정과 재미와 약간의 성취감만 찍어먹고 싶은 나와 같은 사람)의 세계엔 없다. 선생님이 붙여준 손가락 번호를 따르면 움직임이 수월해지는데, 본인이 편한 대로 순서를 수정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나는 손이 큰 게 장점이고 복잡한 순서는 헷갈려서, 번호를 계속 바꾸는 운지법 대신 손가락을 넓고 크게 움직이는 편이다. 볼더링에서 다음 움직임을 고려해서 홀드를 잡아야 하듯이, 피아노도 오른손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왼손은 다음 화음으로 미리 이동해 준비하고 있어야 버벅거리지 않을 수 있다. 쉼표가 있다고 허공에서 놀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4번 손가락으로 바꿔줘야 아르페지오가 끊기지 않을 수 있다든지, 그런 것도 생각해야 한다. 이것도 머리싸움이다. 


볼더링에서 10단계 중 2.5단계 정도 수준이라면 피아노는 6.5단계 정도를 치고 있다. (물론 10단계가 세계 서열 1위가 아닌 우리 반 1등인 기준으로 얘기다.) 가끔 볼더링을 너무 실패하고 와서 배가 덜 부른 날엔 피아노로 허기를 채운다. 다음 홀드로 팔을 뻗고 발을 딛기엔 부족한 힘이었지만 건반을 내리치고 페달을 밟기엔 차고 넘치는 힘이다. 반대로 피아노 치는 영상을 찍다가 같은 부분을 계속 틀려서 스트레스받을 땐, 영상 찍을 건덕지도 없는 나의 하찮은 볼더링을 떠올린다. (뒤늦게 알았는데 이 씬에서는 일정 수준이 되어야 인스타에 영상을 올리는 것 같더라.) 한계를 넘어서 레벨을 올리려고 할 때 다치는 경우가 많다. 인대가 파열되든, 고난도 곡을 완성하지 못해서 스트레스 받든, 내겐 둘 다 부상이다. 안 그래도 한계를 넘어 하얗게 불태워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이것들은 정체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설픈 나, 능숙하지 못한 나와 좀 친해지려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클라이밍 1개월 강습이 막 끝났고 하찮지만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힙합이고 웃기겠지만... Started from the bottom인 나로서는 성장밖에 할 게 없다 이거예요. 한 달이 지나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코스가 몇 있는데 첫 시도에 비해서 한 홀드 씩 더 잡아가고 있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게 미미해도 나는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 거기 있을 내 전완근이 조금씩 늘어나는 출력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인지 기분 탓인지, 엄두도 안 났던 <캐리비언의 해적>은 이제 수월하게 완곡하게 됐다. 마음 가는 대로 곡을 고르다 보니 쇼팽을 세 곡 연속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홀드를 잡다가 이쯤에서 그만 내려가야겠다는 순간을 알게 됐다. 손 끝, 발 끝을 타고 올라온 감각으로 나를 더 알아가는 과정이다.

피아노와 볼더링. 안 다치고 잘 섞어서 냠냠 맛나게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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