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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대비를 끝내고 맞는 귀한 주말이었지만,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자는 윤의 제안을 거절하고 서희는 보지도 않는 TV만 틀어놓았다. 가슴은 답답했고 목은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서희는 옷장에 넣어두기만 하고 아까워 입지 못했던 아이보리색 코트를 꺼내 문에 걸고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평소 잘 바르지 않던 밝은색 립스틱을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잠깐 흔들릴 수 있다고, 십 년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더 한 일들도 견뎌왔는데 이런 일로 헤어질 수는 없다고... 서희는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입술을 칠했다.


12월 초였지만 잠실 L 백화점은 이미 크리스마스였다. 보이는 것마다 번쩍거리고 곳곳이 분주했다. 서희는 앞에 팔짱 끼고 걸어가는 연인들을 공허한 눈으로 쳐다봤다. 소란함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 같기도 했다.


서희는 몇 곳을 둘러보다가 P 브랜드 매장 앞에 섰다. 블랙 셔츠 위에 입혀진 버건디 캐시미어 니트가 서희의 시선을 잡았다. 니트는 한정판임을 과시하듯 헉 소리 나는 가격표를 달고 있었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내 남자에게 입히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특별한 디자인이었다.


“이걸로 주세요.”

“선물 포장해 드릴까요?”

“네.”

“남자친구분이 좋아하시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점원에게 쇼핑백을 건네받은 서희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진혁이 퇴근할 시간이고, 오늘은 금요일 밤이고, 내일모레는 그의 생일이고, 그리고 그리고... 우린 아직 연인이기에 저녁 식사 정도는 약속 잡지 않고도 할 수 있다 생각했다. 서희는 자동차 시동을 켜고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 ST 증권사 ]를 눌렀다.




진혁은 노트북 전원을 끄고 가방을 챙겼다. 입사 동기가 지나가며 주말 잘 지내라고 퇴근 인사를 건넸다.


“아, 이 대리!”


동기는 뒤로 걸으며 진혁 등 뒤의 창문을 가리켰다.


“밖에 비 와. 추신, 엄청 엄청 엄청 추워!”


뒤돌아 창을 보던 진혁은 주차장까지 뛰어가야겠다 생각하다가, 오늘 아침에 지하 주차장까지 가는 것이 귀찮아 지상 주차장에 차 세운 일을 후회했다. 진혁은 전등 off 버튼을 누른 후 목에 걸린 사원증을 빼면서 사무실을 나섰다. 스르륵- 자동문 센서가 그의 온기를 인식하고 문을 열었다.


아... 진혁은 열린 문 앞에서 잠시 주춤하며 걸음을 멈췄다. 자동문이 한번 닫혔다가 다시 열리고 나서야 진혁은 그것을 통과했다.


“이제 가시나 봐요.”


승강기를 기다리던 세영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진혁에게 말을 건넸다.


“어.”


진혁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말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19층입니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진혁과 세영은 차례로 올라탔다. 진혁은 승강기 앞쪽 모서리에, 세영은 승강기 뒤쪽 모서리에 몸을 붙였다.


-13층입니다.


퇴근시간에 맞춰 나온 사람들이 승강기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승강기 바닥과 구두 굽 부딪히는 소리, 음음-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렸다. 더는 뒤로 갈 곳이 없는데도 승강기 안으로 들어오려는 움직임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세영은 승강기 내 설치된 철제 손잡이가 등에 닿자 난색 띤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순간 세영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건 바로 진혁의 어깨였다. 세영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늘 가까이서 맡고 싶던 진혁의 향취를 이 기회를 틈타 만끽하고 싶었다. 한 번에 강하게 맡아지지 않아서 더 애태우는 향조차 진혁다웠다. 이내 심술이 돋았다. 이 남자의 향을 익숙하게 맡는 얼굴 모르는 누군가가 괜히 미웠다.


“같이 좀 갑시다!”


문이 닫히려던 순간 한 중년 남성이 승강기 버튼을 눌러 세웠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앵한 탄식을 들으면서도 기어이 비좁은 이곳에 몸을 구겨 넣었다. 진혁은 사람들 움직임에 밀려 또다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순간 진혁의 등에 온기가 닿았다. 움찔한 진혁이 몸을 앞쪽으로 옮기려 하는 순간 뒤에서 그의 재킷 허리 부분을 당겼다. 세영이었다. 은밀한 밀착이라 표현하기엔 세영의 손끝이 너무나 애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더는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 이 순간만 허락해 달라는 간절함 같았다. 진혁의 어깨가 한차례 오르내리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톡... 세영은 움직임을 멈춘 진혁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정문으로, 주차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후문으로 동선이 나뉘었다.


“대리님.”


후문 쪽으로 몸을 돌리던 진혁의 뒤에 대고 세영이 말을 걸었다.


“밖에 비 와요. 우산... 챙겨 오셨어요?”

“차로 움직일 거라 상관없어.”

“전 우산 없어요.”

“... 차는.”

“오늘 안 가지고 왔어요. 차도 우산도 없다고 하면 혹시나 대리님이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할까 봐요. 하필 비까지 오는 더 추운 겨울이잖아요.”


진혁은 숨을 들이 마신 후 그것을 힘겹게 뱉었다.


“임세영... 여기까지만 해.”


화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하소연이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이 함께 저며 왔다. 세영은 입술을 붙이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가세요. 비 오니까... 운전 조심하시고요."


이번엔 세영이 먼저 몸을 돌렸다. 곧이어 진혁도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혁의 귀로 빗소리보다 세영의 하이힐 굽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진혁은 자동차 창틀에 팔을 올리고 손바닥에 옆머리를 기댔다. 머리카락을 적신 빗물이 손까지 축축하게 만들었지만 제 몸보다 다른 게 더 신경 쓰였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자, 진혁은 핸들에서 손을 떼고 창문을 열었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는 잡아당겨 헐겁게 만들었다. 휴대폰에는 서희에게 전화 온 기록이 남겨져 있었지만, 진혁은 서희에게 전화 걸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통화할 자신이 없었다.


뒤차의 경적에 정신 차린 진혁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앞 차와 간격을 줄였다. 좌회전 차선으로 차를 옮기고 신호에 따라 정지선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빗방울이 더 거세게 떨어졌다. 여전히 정지 신호였지만, 옆 차들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을 보니 조금 있으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뀔 듯했다. 파란 신호까지 몇 초나 남았을까. 와이퍼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진혁의 속이 타들어 갔다. 손목시계 초침 소리는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들려왔다. 딸깍. 딸깍. 딸깍. 신호가 바뀌자 진혁은 핸들을 끝까지 돌려 방향을 바꿨다.




세영은 회사 정문 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왜 하필 비야. 속상해, 정말 속상해... 속상해 미치겠어.”


우산이 없다고 하면 데리러 와 줄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부르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건 모두 손에 쥐었던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 조차 가질 수 없었다. 마음이 시렸다. 누구에게든 그를 갖게 해달라고 마구잡이로 떼쓰고 싶었다. 그를 가질 수 있다면, 그의 곁에 그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있을 수 있다면, 기꺼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임세영.”


진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세영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대리님...!”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진혁이 지금 눈앞에서 쉴 새 없이 하얀 입김을 뱉으며 서 있었다. 세영은 진혁의 얼굴과 진혁의 젖은 어깨를 차례로 보았다.


“아... 어떡해요. 대리님 옷 다 젖었어요.”


세영은 옷소매 끝을 잡아 진혁의 젖은 어깨를 닦아주었다.


“대리님, 왜...”

“... 뭐가.”

“왜... 오셨어요.”


당차기만 했던 세영의 목소리가 그의 앞에서 파르르 떨렸다. 진혁은 자신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세영을 가만히 내려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도 몰라. 하필... 비까지 오는 추운 겨울이라.”


세영은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그뿐이에요......?”

“흔들려.”

“......”

“너 때문에 흔들려.”


세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진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빗방울이 달린 진혁의 뒷머리에서 귀로, 다시 귀에서 얼굴로 옮겨졌다. 세영은 두 손으로 진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제 자신의 영혼 같은 건 누가 가져가도 상관없었다.




서희는 운전석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애처롭게 바라보는 두 남녀의 모습이 마구잡이로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빗소리로 가득한 차 안에서 서희는 옆자리에 둔 쇼핑백을 보았다. 아직 주지 못한 선물과 아직 듣지 못한 변명을 두고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나눈 시간을 이대로 놓을 순 없었다.


서희는 한 손에 쇼핑백을 쥐고 진혁의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1005#. 진혁의 집 도어록에 십 년 동안 저장되어 있던 자신의 생일이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머리 위로 센서 등이 켜졌다. 이어 진혁의 신발이 보였다. 그의 신발 옆에 나란히 놓인 하이힐도 보였다. 입구 우측의 욕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왔다. 탁... 서희는 손에 든 쇼핑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세영아, 젖은 옷은 세탁소에 맡기...”


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진혁은 갈아입은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서희야...”


서희는 사색이 된 채 사시나무처럼 손을 떨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견딜 수 없는 비참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서희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목이 조여 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희는 세차게 몸을 돌렸다.


“서희야, 일단 내 이야기 먼저 들어.”


서희가 차 키를 손에 쥔 채 운전석 문을 열자, 따라 내려온 진혁이 서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김서희, 너 지금 운전 못해.”


진혁이 서희의 팔을 붙잡자, 서희는 경멸하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놔.”

“서희야.”

“놓으라고!”

“너 지금 운전하면 안 돼... 차 키 줘. 내가 운전할게.”


진혁이 손 내밀자 서희는 울분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냐고! 이 나쁜 자식아! 이 나쁜 새끼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회사 앞에서 한 것도 모자라서 어떻게! 집에까지 데려와! 나랑 지내던 곳에 어떻게 딴 여잘 데려와!”


움켜쥔 서희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오해라고 믿고 싶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더는 오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애써 눌러둔 원망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진혁은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변명조차도 하지 않는 진혁의 모습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서희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서희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혁이 서희를 일으켜 세워봤지만 서희는 눈을 뜨지 못하고 허영거렸다. 고이 챙겨 입고 온 그녀의 아이보리색 코트에 거뭇한 빗물이 스며들어 갔다.


평범한 습작생. 더디고 어설픕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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