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예상보다 더웠다. 긴 비행이었다. 멜버른의 툴라마린 공항은 작았다. 캐리어는 컸다. 설렘도 기대감도 없는 출발이었다.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었다. 온통 외국인이었다. 집중해 듣지 않으면 이해 못 할 말들이 사방에서 넘실거렸다. 중심가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전 보인 것은 나름 유명한 통신사였다. 줄은 짧지 않았지만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가진 것이 시간뿐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친절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한 직원의 가슴팍엔 호주 국기 외 중국 국기 배지가 달려 있었다. 동양인이었다. 중국말을 할 줄 안다는 표시이리라. 그가 나를 보며 중국어를 내뱉기 전 Hello. 어색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모국어보다 앞서 영어로 말하게 될 것이다. 상대의 말을 더 집중하게 될 것이고 말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할 것이다. 완전한 이방인의 위치에서. 새로운 유심칩이 들어가 있는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익숙한 듯 웃어 보였다. Thank you. 언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조금 더 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 조금 더 여유롭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전혀 

  나와는 다른 사람. 






이 계절을 지나



W. 썸머







  “Hello.”

  샤워가 간절했다. 조금 더 작은 캐리어를 가지고 올 걸 하는 후회는 이미 늦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열 블록은 걸어온 것 같다. 가방 속 여권을 뒤져 반갑게 인사해주는 직원에게 내미니 그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반은 해석되고 반은 그대로 공중으로 흩어졌다. 내미는 카드키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들어가 카드키를 대고 숫자 3을 눌렀다. 호스텔은 제법 신식이었다. 방은 마찬가지로 카드를 갖다 대야만 문이 열렸다. 침대는 총 12개였고 모두 이층 침대였다. 묵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24명. 편한 건 일 층이 편하지만 무겁게 막혀있는 시야는 무너질 것만 같은 공포감을 안겨준다. 나는 구태여 이 층을 고집했다. 침대 사이 캐리어를 밀어 넣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누웠다. 온몸이 찝찝했지만 일단은 눕는 게 우선이었다. 핸드폰을 켜 일본의 시간을 확인했다. 시차는 별 차이가 없었다. 찰칵-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형에게 보낼 셀카를 찍었다. 잘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보낸 사진에 형은 온통 우는 이모티콘을 띄웠다. 적당히 대꾸한 뒤 눈을 감았다. 열려있는 창문 너머로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더웠다. 

  “Can I get a Latte, Please?”

  3월, 마치 여름처럼 더웠다. 검색 끝에 찾아간 커피숍은 구석에 위치한 아주 작은 가게였다. 사람들이 북적였고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들렸다. 의자 하나 없는 몇 평 되지도 않을 가게, 창가 맡 널찍하게 놓여있는 선반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관광객이었다. 웃으며 주문을 받아가는 여자는 동양인이었다. 주고받는 짧은 마디 속 무언의 시선이 오갔다. 

  “Are you a Japanese?”

  “…”

  돈을 건네받은 여자는 살갑고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을 해왔다. 잠시 멈칫했다. Yes. 나오는 대답은 간결했고 나는 웃었다.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유하게, 나와 같지 않게. 


  “츠키시마 오래 기다렸어?”

  “아뇨. 그다지.”

  도쿄로 대학을 갔다. 한 번쯤 다른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괜찮겠냐는 형의 걱정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아는 사람 있으니까 걱정 마. 아는 사람 누구? 

  어쩌다 알게 되어

  “뭐 하나 더 마실래?”

  어쩌다 감정을 품게 된

  “아, 괜찮아요. 곧 저녁 먹을 거고.”

  “그래. 미안 잠깐만 기다려.”

  “네. 아카아시씨.”

  그런 사람이.

  연이라는 게 웃겨서, 그 사람을 떠올리자면 ‘어쩌다 알게 된’ 수식어가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고등학교 때 배구를 했고, 도쿄의 강호 고교와 합숙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영리한 세터였다. 나른한 시선이나 반 박자 늦는 대답, 한껏 기세 오른 주전 에이스를 대하는 차분한 모양새가 단번에 눈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느꼈다. 나중에서야 아니란 걸 알았어도.

  “저녁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이것저것 사 오시면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너 입 심심할까 봐.”

  웃으며 내려놓는 조각 케이크는 딸기 생크림이었다. 감추고 있는 마음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먹어. 케이크 싫어하는 건 아니지?”

  알면서 모르는 척, 입가의 웃음이 차분했다. 여유로웠다. 포크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겉으로 절대 들추지 않는 사실은 서로 빤히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안에서만 엉켰다.

  드르르륵-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멈출 줄 모르는 진동에 미안, 전화를 받아 든 목소리는

  “응, 어 아니.”

  적당히 친절했고

  “아니, 나 오늘 아는 후배 만난다고 했잖아.”

  적당히 선을 그었다.

  “저녁에? 흐응, 오늘은 곤란할지도? 뭐 봐서. 하하. 어어 그래. 끊어.”

  “아 미안.”

  “괜찮아요. 애인입니까?”

  “애인? 애인은 아닌데.”

  “그럼요?”

  “글쎄, 굳이 말하자면... 흠, 섹스 파트너?”

  “그…렇습니까.”

  절대 내보일 생각 없는 마음 조각은 흐르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길어지는 침묵 속 스며들어 나오지 않도록. 깍지 낀 손에 들어간 힘을 풀어내고 다시금 포크를 쥐었다. 조심스럽게 잘라 포크 위 올려놓은 케이크 조각에 하고 싶은 말도, 행동도 모두 찔러 넣고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하여 뱉어질 진심은 모두 내가 다시 삼켜내겠다. 

  ‘…아카아시씨?’

  ‘……츠키시마?’

  질척하게 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곤란한 얼굴로 나를 보는 건 아카아시씨였다. 떨어진 상대는 남자였다. 당황에 그를 불렀다는 것도 잊고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딱히 편견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그가 남자와 키스 하는 걸 보니 그저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완전히 돌린 몸에 앞으로 빨라지는 걸음은 붙잡혔다.

  ‘츠키시마.’

  ‘아니 저, 아카아시씨 죄송해요. 제가 그…’

  ‘츠키시마 진정해.’

  ‘저 이것 좀…’

  정신없는 와중에 붙잡힌 팔을 가리키니 그가 멋쩍은 듯 웃으며 손을 뗐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얼굴이 들키기 싫어 푹 숙인 고개에 하,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미안. 잘못 없는 이에게 듣는 사죄의 말은 묵직했다. 뜻하는 바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 단어 안에 모두 함축되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아카아시씨는…’

  ‘게이인가요…’

  무엇을 확인받고자 물었는지 모를 내 물음에 그는 작게 웃었다.

  ‘응.’

  그의 대답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내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거울이 있다면 분명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쩔쩔매고 있을 터였다. 커밍아웃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띄게 당황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츠키시마,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츠키시마”

  “…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 죄송해요. 그, 애인 분이 기다리시지 않을까 하고”

  “애인 아니래도.”


  패트리샤 커피 브루어스Patricia Coffee Brewers. 주문한 라떼가 담긴 잔은 작았다. 작은 잔 속 하얀 하트는 완벽했다. 곁다리로 함께 나온 것은 탄산수였다. 탄산수를 한 모금, 창밖 거리에 앉아 커피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따듯한 잔을 들어 커피를 한 입, 나온 라떼는 진했다. 

  몸은 정직했다. 진한 카페인이 들어오면 상념은 걷어지고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내려놓은 커피잔과 창가 풍경이 마음에 들어 핸드폰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출국하기 전 야마구치의 성화에 못 이겨 만든 SNS 계정에 접속했다. 

  ‘츳키, 너 호주 가면 더 연락 안 될 게 분명하니까 이거라도 만들어. 살아있는지 근황 보고 겸.’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멀뚱히 있자 그는 내 핸드폰을 빼앗아 가더니 멋대로 계정을 만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사진 보는 거 싫지? 비공개로 해줄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흠... 첫 번째 사진은 뭐가 좋을까? 사진첩을 뒤적여 예전 길고양이가 귀여워 찍었던 사진까지 올렸다. 

  ‘봐봐 어떻게 하는 거냐면…’

  「츠키이이!!!! 흑흑 니가 진짜로 사진을 올리다니!! 어때 커피 맛있어?

  사진을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야마구치의 댓글이 달렸다. 

  「시끄러워 야마구치. 커피는 괜찮아.」  

  답변까지 착실하게 하고 오늘 할 일을 적어놓은 메모장을 켰다.

  「Keizi_Akaashi liked your post.

   

  그 사람이 말하는 섹스 파트너는 자주 바뀌었다. 아마도 그가 남자친구였을 이와 키스하던 걸 내게 들킨 이후로. 그는 그들을 섹스 파트너라 지칭했고 나는 가벼운 관계라 정정했다. 어쩌다 알게 되어, 운 좋게 연을 지속하는 친구라는 커다란 틀 안에 그를 집어넣고 나는 종종 금요일 밤이나, 주말에 만나자는 연락을 넣었다.

  “나야말로 네 귀중한 시간 뺏고 있는 거 아냐?”

  “네?”

  “이런 금요일 저녁에 보통 다들 바쁘잖아. 데이트라든가.”

  “…딱히요.”

  “그래?”

  나른하게 내리깐 눈에 고개가 들렸다. 잔잔한 웃음이 희미하게 깔렸다. 그가 웃더니 케이크 조각을 떠 내게 내밀었다. 먹-어. 소리 없이 움직인 근육은 천천했다. 무언가 가득 담긴 조각이었다. 어쩌면 당신과 나 모두 알고 있는 것. 그리하여 내가 다시 삼켜낼 것. 

  “츠키시마. 제대로 걸어야지.”

  술이 과했다. 천천히 마신다고 들었던 잔은 입술이 닿음과 동시에 끝까지 기울어졌다. 그는 제법 빠른 속도로 술을 들이켜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나름 비슷한 속도로 잔을 기울였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비어있다고 생각해 쏟아부었던 것이 천천히 부풀어 올라 머리가 어질했다. 

  “제대로, 걷고, 아니… 아카아시씨 잠깐, 저어…”

  “풉 츠키시마. 너 괜찮아?”

  “아니이… 안 괜찮아,요.”

   기댈 곳이 필요했다. 속은 울렁거렸고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무작정 건물 옆 골목으로 들어가 쭈그려 앉았다. 서 있을 힘이 없어. 얼굴이 전부 뜨거웠다. 하하하, 웃음과 함께 그가 내 옆에 함께 쭈그려 앉았다. 너 얼굴 엄청 빨갛다. 츠키시마 취한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으려 하길래 머리가 울리는 와중에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찍지 마세요. 왼손으로 대충 블로킹을 하고 있으려니 턱, 그의 오른 팔이 잡혔다. 

  내게 잡힌 팔을 아랑곳 하지않고 손을 앞으로 쭉 뻗은 그는 팔에 얼굴을 기대고 나를 쳐다봤다. 까맣고 곱슬한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을 듯 말 듯 했다. 거 봐, 비슷하잖아.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츠키시마.”

  당신의 이런 목소리가 싫다. 잔잔한 음악처럼 깔리는 차분함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어떤 표정으로 당신을 봐야 할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키스할까?”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입술이 엉켰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고 그는 내 얼굴을 붙잡았다. 떨어지는 뒤통수를 잡아끌어 다시 맞붙였다. 숨결을 삼키고 향하는 마음을 삼켰다. 오래도록 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나는 도망쳤다. 

  ‘저 아카아시씨는…’

  ‘게이인가요…’

  ‘응.’

  도망치는 내내 단단한 그의 대답이 쫓아왔다.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거처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통의 문자를 보내면 1통의 답을 받을까 말까였다. 넉넉하게 일주일을 예약했던 호스텔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 지낸 지 3주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매일같이 바뀌는 사람들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도 익숙해졌다. 낯선 눈동자 색으로 건네받는 인사치레도 대꾸할 만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식당 선반에서 시리얼 박스를 꺼내는 것도 익숙해질 무렵, 근 2주 동안 비어있던 1층 침대 위에 소지품이 놓여 있었다.

  “Hey,”

  아침을 먹고 올라온 방 안, 나처럼 장기 투숙을 하는 이탈리아 남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He’s an  Asian.”

  “Is he a Japanese?”

  “I don’t know.”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그는 방을 나갔다. 좁은 침대 사이 안쪽에 넣어 두었던 내 캐리어를 가로막은 새로운 캐리어가 보였다. 호스텔에서 지낸 지 3주 차, 24인실의 커다란 도미토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동양인은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형과의 라인 연락을 제외하면 3주째 일본어를 내뱉은 적이 없었다. 일본인이었으면 좋겠다. 누군지도 모를 낯선 이와의 국적이 같길 소망하며 문을 나섰다. 할 일이 많았다. 

  간신히 건진 문자 속 주소는 처음 보는 거리였다. 트램을 타고 몇십분을 나가야 했다. 멜버른 3주 차, 트램에 올라타는 것이 익숙해졌다. 호스텔에서 가까운 정거장은 59번 트램의 종착지이다. 건너편엔 흔하게 볼 수 있는 마트인 콜스Coles가 있고 그 오른쪽엔 나름 먹을만한 도넛 가게, 왼쪽으론 케미스트Chemist. 보이는 전광판 속 가리키는 숫자가 컸다. 20분. 햇빛은 셌고 바람은 찼다. 3월 말,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하루 속 사계절이 다 있다는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짜증 나는 가을이었다. 적응이 완전히 끝나면 겨울일 것이다. 겨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온은 온화하고 눈조차 내리지 않을 테지만. 

  마주 선 커다란 교차로는 버크 스트릿Bourke St. 안쪽엔 쇼핑몰이 있다. 그 건너도 죄다 옷 가게였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조형물 앞에선 때마다 버스킹이 열렸다. 무대는 길거리였으나 관객석은 훌륭했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일, 이 층은 H&M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계단에는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앉아있었다. 들리는 노래는 어디선가 들어봤던 제목을 알 수 없는 팝송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도 마음에 들어 제목을 찾아봐야지 하다가 그대로 잊어버린 노래. 발걸음이 묶였다. 할 일을 되뇌었다. 

  과거를 지우기 위해선 새로운 미래를 계속해서 끌어당겨야 한다. 더 많은 현재가 생겨 과거를 몰아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도망친 과거가 눈앞에 보일 수 없도록.

  둘러본 집은 나쁘지 않았다. 시티와 가까웠고 트램 정거장이 집 바로 앞에 있었다. 방 두 개에 거실이 넓었다. 청소상태도 깔끔했다. 방 안의 커다란 이층 침대를 보며 방을 세 놓은 마스터에게 1인실로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가능하다고 대답하면서 방값이 두 배가 될 텐데 괜찮겠냐는 질문을 했다. It’s okay. 나는 상관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계약은 자리에서 치러졌다. 보증금을 넣을 계좌 번호를 받아들고 살가운 인사와 함께 집을 나섰다.


  출국 만료일을 한 달 남긴 출국은 갑작스러웠다. 갑자기? 호주?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호주행을 택한 나를 보며 형은 넌지시 걱정스러움을 표했다. 갑자기는 아니고 비자 받은 지 좀 됐어. 야금야금 세웠던 계획을 지금에서야 실행하는 것뿐이다. 

  “케이, 너 무슨 일 있어?”

  “형…”

  이것저것 집어던진 캐리어는 마음속처럼 엉망이었다. 난잡했고 한데 뭉쳐있었다. 손에 잡히는 짐을 채워 넣고 대충 잠가 세우자 와르르 물건들이 쏠리는 소리가 났다.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아 캐리어를 발로 뻥 차버렸다. 형은 나를 침대에 끌어다 앉혔다. 케이. 무슨 일인데. 두 손이 절로 모였다. 오랜 습관이었다.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입술을 잡아 벌릴 것처럼 힘주어 하얗게 변한 손끝.

  “남자랑 키스했어.”

  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호흡을 잠시 멈췄다. 꾸역꾸역 삼켜내기만 했던 것이 터져 올라왔다. 자꾸만 기어 나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사람인데…”

  말이 계속해서 꼬였다. 하고 싶은 말은, 삼켜내 쌓아 올린 감정의 밑바닥에 있었다. 한참을 휘젓고 파내야만 보였다. 무서워. 중얼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오른팔로 눈을 가렸다. 형광등 불빛이 너무 셌다. 옷자락으로 다 가려지지 않아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케이. 형의 목소리가 뜨문뜨문 들렸다. 나는 진짜 무서워 형. 뜨문뜨문 들리는 말소리 사이로 진심이 발라졌다. 그러니 도망가는 거야. 손바닥 아래가 축축했다. 

  “그런데 보고 싶으면 어쩌지”

  “여긴 이제 따듯해지지만, 거긴 다시 겨울이잖아…”

  형은 말없이 내 허벅다리를 토닥였다. 그거 지금 위로야? 물기 어린 양손을 머리카락에 마구 문질렀다. 안경을 위로 들어 올려 형광등을 바라봤다. 미안, 형이 연애 상담은 원래 잘 못 해. 하하 뭐래 진짜. 얼룩진 안경을 대충 문질렀다. 흐린 시야에 빛이 계속 번졌다. 역시 형광등 불빛이 너무 세다. 형이 일어서 방구석으로 밀려난 캐리어를 끌고 왔다. 지퍼를 내리고 차곡차곡 물건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느리게 일어나 형 옆에 쭈그려 앉았다. 옷가지를 개고 아무렇게나 놓인 물건을 다시 가지런히 쌓았다.

  “케이”

  “응”

  “괜찮아.”

  “…응 고마워.”


  겨울을 날아 겨울에 도착할 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먼 지구 반대편, 당신과 마주치는 상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 결국은 제자리임을 깨닫게 될 때 그 속에 변하지 않은 당신의

  “…츠키시마?”

  이런 목소리가 울리는 상상.

  엘리자베스 스트릿Elizabeth St.과 버크 스트릿Bourke St.의 교차로 그 어딘가. 쓸모가 무색한 횡단보도의 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길을 건넜다. 각양각색의 옷차림으로. 더러는 반소매를 입었고 몇몇은 제법 두툼해 보이는 재킷이나 점퍼를 걸쳤다. 누구는 슬리퍼를 누구는 운동화를, 사계절을 모두 겪을 수 있는 변덕스러운 날씨는 다양한 차림새를 볼 수 있게 한다. 모두 현실이었다. 여름과 가을 혹은 겨울이 전부 섞인 공간 너머에 당신이 서 있다. 나를 불렀다. 초록불은 깜빡이다 곧 빨간불로 바뀌었다. 넓지 않은 도로에 막무가내로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띵-띵- 트램이 다가오는 신호음과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열 걸음 내외면 도착할 그에게 뛰어가는 것은 다가오는 트램 때문이다. 

  ‘케이'

  ‘괜찮아.’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아카아시씨”

  나는 웃었다.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느냔 질문은 삼키겠다. 그날의 키스를 기억하느냔 물음도 삼키겠다. 도망쳐 미안하다는 사과 또한 깊이 삼키겠다. 비겁하게 계절을 지나 또다시 겨울을 맞이할 준비 된 마음으로 내뱉는 것은 오로지

  “좋아합니다.”

  그대를 향한 감정임을.

  눈앞의 당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상관없이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커지는 그의 눈에 나는 또 한 번 웃었다.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유하게, 

  나와 같지 않게.



  /



  “어때?”

  “별로예요. 전 아보카도랑 안 맞나 봐요.”

  아카아시씨의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호스텔 직원이 추천해준 브런치 가게에 왔다. 베이글 샌드위치가 유명한 카페였다. 메뉴판 속 샌드위치의 종류가 다양했다. 나는 고심하다가 직원에게 추천해줄 것을 권했고 그녀는 아보카도와 스모키 햄이 들어간다는 샌드위치를 추천해줬다. 먼저 나온 커피는 고소했다. 여긴 웬만하면 기본은 하는 거 같아요. 맛있어. 커피와 달리 내 몫으로 나온 아보카도는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아카아시씨는 나를 보더니 자기 그릇을 내 쪽에 밀어주고 아보카도가 올라간(내 입맛엔 지극히 느끼한) 베이글을 집었다. 

  “나쁘진 않은데?”

  “그럼 그거 마저 다 드세요.”

  그의 시선이 내 입가에 머물렀다. 뭐가 묻었나. 티슈를 들어 훔친 입가는 깔끔했다. 뭐예요. 아니 너 되게 귀엽게 먹길래. 켁켁. 기침이 쏟아졌다. 물잔을 내미는 손길이 진득하게 쓸어갔다. 그러니까 부끄러움 같은 것을 살살 건드렸다. 정말로.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었어요?’

  ‘…막상 지구 반대편까지 쫓아오긴 했는데 그렇게 떡하니 바로 만날 줄은 몰라서.’

  ‘사실 만날 기대를 아예 안 했어.’

  ‘그래요? 전 했는데.’

  내 말에 그는 처음 날 만났던 때와 같이 드물게 놀란 눈을 해보였다. 어디 숙소를 잡았냐는 이어지는 질문에 그가 나와 같은 호스텔 이름을 댔을 때는 내 차례였다. 몇 호에요? 3A. 설마하니 그가 내 밑 침대를 사용할 줄이야. 하하하, 그는 놀란 내 모습을 보고 낮게 웃었다. 

  “이제 들어가요.”

  “…응” 

  여권만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어색했다. 적어도 공항 안에서만큼은. 어디 옆동네 마실이라도 나가는 모양새였다. 일본 도착하자마자 비자 신청할 거야. 가지고 온 짐을 모두 내 방에 두며 그는 꽤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말이에요? 널 여기 1년씩이나 혼자 둘 순 없잖아. 더블침대에 드러누우며 그가 옆자리를 팡팡 쳤다. 호주에 오겠다고요? 아카아시씨가? 진심이에요? 약간의 당황이 묻은 말소리에 여기까지 쫓아온 거 보면 모르겠어? 그는 작게 웃었다. 나른하고 차분하게, 완전 진-심. 또박또박 말했다. 

  뒤돌아 들어가려던 걸음이 멈추고 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꽉 안겼다. 가득 채워졌다. 나보다 조금 작은 그의 얼굴이 어깨에 닿았다.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츠키시마”

  당신의 목소리가 울리면

  “연애할까.”

  나는 감정을 내뱉겠다.

  “…네.” 

  두 손 가득 당신을 꽉 안았다. 


 

썸머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