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단장님, 저는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제가 아일렌 경과 같은 조가 된 게 제가 지도를 잘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제라드는 단장의 설명에 납득하지 못했다.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저 잘난 천재와 같은 조로 묶었다는 뜻 아닌가. 제라드는 단장마저 자신을 재능이 없다고 무시한다고 여겼다. 실은 그게 아닌데도. 아일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제라드를, 꼭 이전의 자신 같다고 여겼다. 차이점이라면 적어도 당시의 아일렌은 노력이란 걸 하긴 했다는 점일까.

 

“그래. 부정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자네에게 기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세. 나는 자네가 신입을 가르치면서 변화하기를 바랐네. 만약 능력이 뛰어난 신입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길 바랐지.”

 

“결국 제가 부족하다는 소리 아닙니까!”

 

“제라드 그레이 경. 경이 뭔가 착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군. 기사는 재능만이 전부가 아닐세. 재능이 있으면 기사 시험에 쉽게 합격할 수 있고,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기사라고 부를 수는 없네. 재능만 가진 기사는 오히려 기사가 아니라, 말 잘 듣는 칼잡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지.”

 

칼잡이. 뼈있는 말이었다. 아일렌은 단장의 말이 어쩐지 자신을 향한 것 같다고 느꼈다. 지금은 기사다운 기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은 그녀 역시 말 잘 듣는 칼잡이였던 적이 있기에. 아니, 어쩌면 아직도 칼잡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바뀌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또 이렇게 사고를 쳐버리지 않았나. 아일렌은 괜히 긴장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단장의 말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긴장하지마. 넌 잘못 없어.”

 

제이나는 그녀가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낀다고 생각하고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제라드였다. 그녀가 아니라. 제이나는 그녀가 바뀌었다는 것을 믿었다. 처음에는 제이나 또한 그녀가 바뀌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일렌의 성격이 어디 보통인가.

 

하지만 아일렌은 행동으로 자신이 바뀌었다고, 바꾸겠다고 몸소 보이고 있었다. 먼저 인사를 해오고, 훈련을 도와주고, 3기사단을 선택하고. 그녀는 재능만 가진 칼잡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기사였다. 적어도 제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제이나의 다정함에 아일렌은 슬며시 웃었다. 어째서 예전에는 이런 다정함을 그저 오지랖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그녀는 제이나와 친구가 되지 못한 과거를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아일렌은 고개를 들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첫날부터 사고를 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정당방위였다. 일단은.

 

“기사에게 기사도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기사는 실력이 부족할지언정 남을 위해 검을 드는 것이 기사일세. 명예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기사는 검을 드는 걸세. 우리 3기사단같이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경우라면 더욱 그래야 하고. 그러나 자네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검을 들었네.”

 

단장인 미하일은 이미 이 시점에서 제라드가 기삿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기사는 더는 기사가 아니다. 기사는 사람을, 명예와 정의 같은 가치를 지키는 자들이었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자들은 그저 제멋대로 검을 휘두르는 것에 불과했다.

 

아일렌은 단장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기사다운 기사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단장의 말은 그녀에게 실마리가 되었다. 남을 위해 검을 드는 기사라.

 

그녀는 황녀를 주군으로 삼았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남을 위해 검을 든다고는 하지 못했다. 황녀를 위해 살겠다고 진심으로 맹세했다기보다는, 그 선택은 일종의 속죄에 가까웠기에. 이번 일도 제라드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는 하지만 자존심에 못 이겨 검을 든 것이고.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 아일렌. 그녀는 단장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아직 기사로서는 햇병아리인 자신에 비하면 그는 제대로 된 기사인 것 같아서.

 

“물론 이번 일로 자네가 기사직을 그만둘 일은 없을 걸세. 일단은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피해가 크지 않으니까. 하지만 기사의 정의에 대해서, 검을 드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라네. 제라드 그레이 경. 자네가 기사로 계속 남고 싶다면 말이지.”

 

말을 마친 단장은 아일렌 쪽을 돌아보았다. 일단은 제라드 쪽의 상황 설명만 들었으나 그녀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다만 이대로 아무런 처벌 없이 상황을 넘어간다면 특혜니 뭐니, 쓸데없는 논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제라드는 후작가의 자제였으니.

 

제라드가 이번 일을 통해 좀 바뀌게 된다면 좋으련만. 단장 미하일은 3기사단 인원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이번 일이 그가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뒤떨어진 기사라고 해도 결국 3기사단 소속이면 자신의 책임 아래 있으니까.

 

“제라드 경은 이만 가봐도 좋네.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는 내일 알려주지.”

 

제라드는 말없이 아일렌 쪽을 한번 쏘아보다가 단장에게만 인사를 한 뒤 단장실을 나갔다. 그의 태도에 미하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할 건 끝까지 해야겠지. 단장은 아일렌에게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다시 한번 물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

 

“제라드 경이 대련을 청해서 받아주었습니다. 뒤탈이 없도록 적당히 힘을 빼서 지려고 했는데…. 황녀 전하와 저를 모욕하는 발언에 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진검을 꺼내 오러를 두르길래 저 역시 오러로 상대를 했고요. 자존심을 세워 쓸데없는 사고를 만든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죄송할 거 없네. 황녀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이상 주군을 모욕하는 발언을 그냥 참고 넘기는 것도 기사의 도의가 아니지. 아일렌 경이 실력을 속이려던 것도 제라드 경을 농락하려던 것이 아닌 것 같고.”

 

제라드는 아일렌이 그를 농락하기 위해 실력을 속인 것 같다고 증언했으나, 지금 아일렌의 차분한 설명을 들어보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제라드의 성격을 짐작하고 큰일로 만들지 않으려 한 것뿐이겠지. 그녀의 행동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라드가 먼저 황녀 전하를 모욕했다면 황녀를 주군으로 모시는 아일렌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이유가 생기는 셈이고.

 

“다른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려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긴 하군. 하지만 형식적인 절차니까 물어보겠네. 증언할만한 내용이 있나?”

 

“정확히는 황녀 전하도 어지간히 보는 눈이 없으시다고, 아일렌 경을 근성 없는 기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일렌 경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냐고 했고, 제라드 경은 황녀 전하가 보는 눈이 없는 건 사실이라면서 그녀와 그녀의 주군이신 황녀 전하를 다시 한번 모욕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일렌 경.”

 

자세한 내용을 증언한 것은 에단이었다.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청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조금 놀란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였고, 제라드와 아일렌 사이에서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게 된 제이나와 세뮤엘도 덩달아 놀랐다.

 

명백하게 황녀에게 무례가 되는 발언일뿐더러 그런 말을 아일렌 본인에게 직접 하다니. 진짜 보는 눈이 없는 놈은 따로 있었네요. 세뮤엘은 옆에 서 있는 제이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제이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에 대한 것은 정말 재능밖에 몰랐던 건가. 요새는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수습기사 시절에 시비가 걸리면 걸리는 족족 그냥 다 발라버렸다는 것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정말 재능에 대한 소문만 들었다면 귀에 필터가 달린 수준이었다.

 

“에단 경의 말대로라면…. 아일렌 경이 참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군. 증언 고맙네, 에단경.”

 

“예, 단장님.”

 

“누가 잘못인지 명백한 상황이지만…. 아일렌 경도 징계를 피해갈 수는 없을 걸세. 특혜니 뭐니 하는 뒷말이 나올 수 있거든. 특히 아일렌 경이 평민인 데 비해 제라드 경은 후작가의 자제이니 가벼운 징계라도 내리는 편이 덜 시끄러울걸세. 경의 징계는 감봉으로 끝나겠지만. 그래도 괜찮겠나, 아일렌 경?”

 

“괜찮습니다, 단장님.”

 

그녀 역시 징계를 피해갈 수 없을 거라는 말에도 아일렌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 정도는 예상했다. 상대가 무려 후작가의 자제인데, 아무 징계도 받지 않고 넘어가기는 힘들겠지. 뒷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단장의 처사가 옳았다. 아일렌이 처분을 받아들이자 미하일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한번 웃었다.

 

“감봉과는 별개로, 치료비가 조금 나올걸세. 어찌 되었건 다른 기사에 의해 입은 상처니까. 감봉이 있긴 해도 치료비를 받으면 월급에 별 차이는 없을 거야.”

 

“... 배려 감사합니다.”

 

아일렌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꿰맨 것도 아니고 반창고로도 끝날 상처였다. 그런데도 치료비가 나오는 것은 단장의 배려였다. 그녀의 잘못이 있는 일이 아니니, 피해를 최소화해주려는 배려. 그의 배려에 감사하다는 말을 한 아일렌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 인사는 됐네. 당연한 일인데. 아, 당연하겠지만 조장은 바뀔 걸세. 이번에는 제대로 된 기사를 붙여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게.”

 

대화를 마무리한 단장은 네 명을 내보냈다. 단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제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친구가 평범하질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좋게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지만. 제이나는 아일렌을 바라보았다.

 

“... 첫날부터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일렌은 잠시 바닥을 바라보더니 살짝 작아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얼떨결에 같은 조인 그들도 말려들게 해버렸다. 딱히 물리적인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지만, 첫날부터 단장실에 들락날락하게 만든 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사과에 세뮤엘이 손을 내저었고 에단 역시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라드 경 예전부터 재수 없었는데 잘된 거죠, 뭐. 아일렌 경이야말로 괜찮아요? 월급에 차이는 없다고 해도 징계인데.”

 

“맞습니다. 저희야 피해가 없지만, 아일렌 경은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가벼운 징계 한 번 받았다고 출셋길이 막힐 것 같지는 않아서.”

 

“자신감 넘치네. 뭐, 의기소침해지는 것보다는 낫다.”

 

세 명의 걱정이 이어지자 아일렌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인복은 없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람들을 보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짓는 아일렌을 보던 제이나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치더니 얘기했다.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겼는데, 액운도 털어낼 겸 술이나 마시러 갈래요?”

 

“술이라, 좋습니다.”

 

“저도 좋아요.”

 

의외로 에단이 가장 먼저 수락하고, 뒤이어 세뮤엘도 좋다며 제이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남은 것은 아일렌 뿐이었다. 술이라. 주량은 자신 없는데. 그녀는 이전에도 동료와 술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된 이후 주량이 약하다는 것을 안 뒤로는 회식 자리에서도 줄곧 물만 먹었으니까. 하지만 셋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아일렌은 기꺼이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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