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거기 떨어져 서 있어.”


“옙.”



여주는 재깍 제노의 말을 듣고 사정거리 밖에 섰다. 방사 가이딩도 거둬들여졌다. 그러자 반대편에 서 있던 동혁이 인상을 팍 썼다.



“가까이 와서 가이딩해.“


“넵.”



그래서 가까이 가서 동혁의 손을 잡았다. 제노가 불편해할까 봐 방사는 없애고 접촉 가이딩만 실시했다. 동혁은 좁혔던 미간을 풀었고 제노는 넓었던 미간을 좁혔다.



“떨어져.”



제노가 또 인상을 쓴다. 원하는 대로 가이딩도 없애줬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신지. 여주는 제 인상도 구겨지려는 걸 간신히 펴고 뒤로 물러났다. 어쨌든 저게 갑이고 자신이 을이다.



“넵.”


“장난해? 이리 와.“


”넵.“


”떨어지라고.”


“넵.”


“야, 일로 안 와?“



제노와 동혁이 번갈아 명령을 내린다. 가까이 와 떨어져, 이리 와 저리 가, 이 씨발, 청기 올렸다 백기 내려 백기 올렸다 청기 내려냐고…. 여주가 그 어드메에 어정쩡하게 서 있자 둘이 같이 여주를 노려본다.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다.



“제가… 제가 멍청해서 잘 못 알아먹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결국 죽었다 깨어나도 을인 김여주는 대가리를 숙이고 싹싹 빌었다. 개 같은 거, 나는 이거 좋아서 하는 줄 아냐? 고개 푹 숙이고 손 비비면서 입 모양으론 온갖 욕을 입에 담았다. 나쁜 놈들, 개자식들….

내가 니들 세상만 구원하고 여기 뜬다.




#1


숨, 숨 막혀. 여주는 온 힘을 다 해 주위를 더듬었다. 어딘가 좁고 네모난 곳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여주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것을 내리쳤다. 그게 깨질 때까지 계속.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내리친 끝에 마침내 유리 벽이 깨졌다.



“허억…!”



유리벽 안을 채우고 있던 물이 깨진 틈새로 줄줄 빠져나갔다. 여주는 남은 유리를 마저 밀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 산소를 보충한 끝에 바깥으로 팔을 내밀어 바닥을 짚었다. 손에 생채기가 남는데 아프지도 않았다. 공기를 폐 속에 있는 대로 집어 넣는 게 더 급했다.



“후아….”



한동안 숨만 쉰 것 같다. 이제 슬슬 제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여주는 물에 푹 젖은 몸을 이끌고 엉금엉금 기어 그 안에서 빠져나왔다. 기어 온 곳에 엉망으로 널린 유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마찬가지로 엉망인 어떤… 기계 같은 것. 여주는 다시 그쪽으로 슬금슬금 기어갔다.


기계는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앞면은 투명한 유리, 뒷면은 흰색으로 칠해진 금속으로 되어 있었는데, 뒷부분이 제일 두꺼웠다. 아마 저 부분 안에 어떤 기계 장치가 더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 갇혀 있었다고? 그것도 가득 채워진 물이랑? 어떻게 안 죽었지.


무심코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핸드폰은 없었다. 환장하겠네. 핸드폰도 없이 여기서 집까지 어떻게 가? 아니지, 일단 경찰한테 신고를 하든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치웠다. 먼저 근처 파출소로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여주는 젖은 옷을 대충 갈무리하고 골목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최대한 대로를 찾으려고 했는데….



“뭐야…?“



뜻밖에도 강남대로 뺨칠 만큼 큼직한 건물들과 도로가 펼쳐진다. 여주는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여기가 한국 맞나? 그러나 귓가에 들려오는 언어는 애석하게도 너무나 익숙한 그 언어라서. 넋 놓고 걷다 누군가와 퍽 부딪혔다. 행색이 딱 출근 중이다. 상대방은 욕을 읊조리며 여주의 사과도 안 받고 떠나버렸다. 와, 진짜로 우리나라 맞는데.


그럼에도 여주는 굴하지 않고 물어물어 경찰서를 찾아갔다. 여기가 정말로 한국 땅이라면 전산화 된 개인정보를 토대로 날 집에 보내주겠지, 하는 근거 있는 믿음에 기댄 결과였다.



“안 뜨는데요?”


“예? 저 한국 사람인데요?“



이름 김여주, 성별 여, 서울시 거주. 경찰은 그런 사람은 못 찾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졸지에 유령인간이 된 여주만 황당하게 물었다. 그럼 저 집은 어떻게 가요?



“알아서 가셔야죠?”



그 길로 경찰서에서 쫓겨났다. 여주는 머쓱하게 젖은 옷의 물이나 짜냈다. 이상하다. 이런 건 내가 아는 대한민국이 아닌데. 자국인을 이렇게 쫓아내도 되는 거야? 가뜩이나 인구 없다며…. 의문을 품자마자 덤프트럭을 가르고 웬 문어가 뛰쳐나왔다.



“우와, 문어다.”



일반적인 문어치곤 좀 컸다. 한… 63빌딩 정도? 너 키 크고 싶다는 꿈을 꿨구나. 현실감 없는 광경에 피할 생각도 안 하고 섰다. 거대한 촉수가 자유분방하게 날아다니다 여주 쪽을 향했다. 여주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웬 빛덩이가 문어의 촉수를 자르기 전까진.


이쪽으로 뛰어온 여자가 손을 펼치자 아까같이 생긴 빛덩이가 문어에게 달려들었다. 문어도 나름 저항을 하는 듯했으나 저 여자에겐 역부족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거대한 문어가 도로에 널브러졌다. 마찬가지로 그 앞에 주저앉은 여자에게 어떤 남자가 급히 달려간다. 남자는 여자의 옆에 꿇어앉아 손을 잡았다. 그러기를 잠깐, 여자가 남자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아…!”



초능력 쓰는 인간이랑 그 인간이랑 스킨십 하는 다른 인간. 답은 하나밖에 없다. 나 센가물에 빙의한 거구나!

여주는 길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눈부시게 흰 머리카락,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 보라색 눈동자에 도도한 이목구비… 는 아니고, 그냥 원래 아침마다 보던 한국인 김여주가 비친다.

정정하겠다. 빙의 아니고 차원 이동에.




#2


그럼 차원 이동을 왜 했을까. 여주는 삶이 좆 같아서 현실도피를 원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괜히 나대다 어디 맨홀에 빠진 적도 없고, 무슨 소설을 읽다 분노에 찬 댓글을 날려본 적도 없다. 빙의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차원 이동까지 했다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게 뭐야… 각성자 관리 센터(시청)역…?”



원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랬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세계가 적까지는 아니지만, 알아두긴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강남역까지 내려가 노선을 보니 저 꼴이 나 있었다. 시청이… 서울 시청이 뒤로 밀리다니. 어떻게 되먹은 세계관이야.

어쨌든 차원 이동자는 거리낄 게 없다. 돈이 없어서 개표구도 사람들 눈치보다 막 뛰어넘었다. 노선은 원래 세상과 얼추 비슷해서 덜 헤맸다. 여주는 5번 출구로 나가 당당하게 형질 검사를 의뢰했다. 이번엔 안 헤맸다. 건물이 시청보다 컸거든.



“B급 가이드시네요.“



여주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으로 굳었다. 좋아하기도 좀 그렇고, 실망하기도 그런 애매한 등급…. 직원의 얼굴도 무료하기 짝이 없다.



“성함이랑 생년월일 적어두고 가세요.”


“음… 음… 그게요.”



여주는 제 자초지종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제가 제 이름이랑 나이랑 거주지는 아는데요, 제가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네? 아니, 파출소 가서 집 찾아달라는데도 안 먹혔다니까요. 제가 전산 상에 안 뜬대요. 원래 집 주소 얘기해봤자 그런 건물은 없다면서 사람을 쫓아내고요. 진짜 너무한 거 있죠.


응대 직원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김여주 같은 사람들을 많이는 아니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은 보았다. 보통 중국이나 태국, 일본 등지에서 몰래 한국에 입국한 교포들이 그랬다. 이들의 부모나 조부모는 한국인이었을지언정, 본인들은 한국 국적 없는 외국인이라 예외 없이 추방이었다.

다만 가이드나 센티넬로 발현했을 때는 달랐다. 온 나라가 등급에 관계없이 각성자를 긁어모으려고 혈안이 됐다. 한국도 그렇고.


여주는 제 앞의 담당자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열변을 토해냈다. 깨어나서 보니 무슨 기계 장치 안이었다는 말까지 포함했다. 어쨌든 그는 여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여기 가이드 등록증이랑 임시 신분증명서요. 근처 행정센터 가서 신원 등록하고 신분증 발급받으세요.”



그리고 직원은 단 하나의 질문도 하지 않고 서류를 넘겨주었다. 여주는 제 손안에 들어온 종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뭐가 이렇게 쉽지?



”가보세요.“


”예? 그, 저는 어디서 자죠?”


“김여주 씨 주무시는 걸 제가 어떻게 해드리죠?”



직원이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여주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내 잠자리랑 그쪽이랑 상관이 없긴 하지만. 센가물은 다 센터에서 숙소 제공해주는 거 아니야? 심지어 부모랑 생이별 시키고 센터에서 먹고 자게 시키는 것도 많잖아? 그래도 나 나름 가이드인데?



“저는 집도 돈도 없는데요….”


“저희 센터도 아무 각성자 분들이나 재워드릴 예산이 없습니다. 행정센터로 가서 문의하세요.“



그리고 뻥 쫓겨났다. 진짜로 엉덩이가 차인 건 아니지만 마음은 그 정도로 아팠다.

여주는 씩씩거리며 각성자 관리센터에 있던 책자를 다섯개 챙겨왔다. 하나는 읽으려고, 나머지 네 개는 예산 축내려고. 대리석이 번쩍번쩍하던 걸 보면 예산에 스크래치도 안 날 것 같지만.


책자는 전혀 예상 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이드가 존나게 흔하다고…???”



센티넬보다 가이드가 훨씬 많아서 봉급이 낮은 편이라고…?? 이게 말이 돼? 망연자실하게 벤치에 드러누웠다. 어떻게 이래. 센티넬보다 가이드가 적은 게 클리셰 아니야?


그래도 여기서 좌절하긴 이르다. 여주는 책자는 던져버리고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어린이를 위한 각성자 역사. 좋아, 딱 내 수준이야. 지구 반이 괴물에게 점령… 오로지 센티넬만 대적 가능해… 이게 뭔 소리지.


어린이용 역사서가 간략히 소개해준 역사는 이러했다. 어느 날 지구의 절반이 갑자기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괴물에게 점령당했다. 이는 지구에 떨어진 운석에서 나온 물질, 통칭 ‘기프트’에서 기인했다. 이것은 기이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접촉한 대상의 상태를 가장 최고였던 시절로 복원해줄 수도, 또는 그것의 잠재력을 끌어내 줄 수도 있었다. 과거 인류는 그 물질을 이용해 많은 풍요를 누렸다.


그러던 중 누군가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린 거다. 그 ‘기프트’를 인간에게 써보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세기의 천재를 기대하며 아이큐 200 이상의 인간에게 기프트를 주입했다. 결과는 뇌만 거대하게 남아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 이렇게 기프트와 접촉한 인간들은 이지를 잃은 괴물이 되어 사람들을 헤쳤다. 그대로였으면 인류는 망테크를 탔을 텐데, 아쉽게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인간이 기프트와 접촉해서 괴물이 되지 않은 첫 케이스가 나왔다. 그들은 ‘센티넬’이라 불리는 각성자로 발현하여 이성을 잃지 않고 초능력을 다룰 줄 알았다. 괴물은 인류의 무기로도 쉽사리 척살할 수 없었으니, 결국은 센티넬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 같은 게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센티넬도 한계치를 넘어 능력을 사용하면 폭주를 하게 되는 부작용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 대략 센티넬 출현 30년 후 나타난 게 가이드다. 그들은 센티넬을 자신과의 신체 접촉으로 안정시킬 수 있었다.

가이드는 기프트와 접촉하는 방식으로 발현하는 게 아니고,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했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어떤 원리로 발현하는 건지는 못 찾았다. 아무튼 가이드의 수가 센티넬의 수보다 월등히 많아서, 이걸 센티넬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두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추구하려는 인간종의 본능쯤으로 해석한다고….

그래서 인류는 센티넬은 괴물을 잡는 ‘헌터’로 명명해 괴물 토벌을 진행하고 있다.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괴물을 처리하고 옛 인류의 영토를 되찾는 게 전 인류의 목적이다.



“뭐...?”



그쯤 읽고 책을 던졌다. 센티넬이 더 적다고… 야 이놈들아, 센티넬 여럿이 가이드 하나 물고 빠는 게 얼마나 맛있는데….


험악한 현실에 끙끙대다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이건 무슨 소설일까.

여주는 아까 도서관에 오며 ‘ㅇㅇㅇ 헌터가 보증한 피로회복제!’ 라는 옥외 광고를 보았다. ‘ㅁㅁㅁ 헌터의 피부 장벽 보습제!’라는 플랜카드도 봤고. 초능력자들이 부와 명예를 얻고, 괴물도 나온다는 점에선 현판 소설 같다. 그런데 게이트 얘기는 없고 웬 외계 물질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내가 이딴 걸 읽은 적이 있나…?“



은근히 클리셰 같으면서 기억은 안 나는 설정이란 말이지. 가이드가 더 많은 것도 이상한데…. 센티넬물이란 센티넬물은 다 읽었으니 언젠가 스쳐 지나가듯 읽어봤을 수도 있다.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불쑥 햄버거집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입맛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그 이상한 기계에서 깨어난 뒤로 한 끼도 못 먹었다.



“에이, 먹고 생각하자.“



행정센터 가서 징징거리면 뭐라도 주겠지.




#3


신분증은 잘 나왔다. 그런데 밥은 안 나왔다. 잘 곳도 안 나왔다. 물어보니까 각성자 관리센터에 문의하라고 그러더라. 각성자 관리센터가 여기로 오라고 했다는 말을 하니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란다. 민원 돌리기는 찐한국이나 짭한국이나 똑같다. 그런데 애원도 돌릴 줄은 몰랐지.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버림도 받은 김여주는 공원 벤치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이불도 외투도 없어서 그냥 웅크리고 잤다. 그러고 날 밝자마자 각성자 관리센터로 달려갔다.



“저 진짜 이러다 죽을 거 같으니까 돈 벌게 해주세요….”



밥 주고 재워달라는 거 말고 일 달라고. 각성자 관리센터나 행정센터나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인지 이제 깨달았다. 어제 본 담당자는 여주를 잠깐 혐오와 동정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수 분 만에 그가 주소 두 개를 쥐여주었다.



“B급은 일이 잘 없는데 사정해서 잡아드린 거예요. 이거 센티넬들 집 주소니까 여기 가서 가이딩하시면 수당 지급해드립니다.“


”예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담당자에게 대고 여러 번 굽신거렸다. 그는 그런 여주를 보고 파리 보듯 손을 휘저었다. 저 일 많으니까 이제 가세요.

여주는 부푼 가슴으로 메모지에 적힌 주소 두 개를 안고 센터를 나섰다. 대로변까지 가서 꼬깃꼬깃하게 접은 메모지를 펼쳤다. 주소가….



“서울시 안전구 행복동 복지로 7 606호?“



주소가 지랄이 나 있다.




#4


가이드가 많아서 하찮은 취급을 당한단다. 뭐 어쩌라고. 애초부터 여주는 이런 취급에 이골이 났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아주 특출난 소수만 빼면 노동자 자존감을 박박 깎아 먹지 못해 안달 난 나라 아니야.


당연히 여주는 특출난 소수가 아닌 평범한 대다수에 속했다. 패스트푸드점 알바든, 카페 알바든, 간신히 합격한 회사에서든 여주는 항상 대체 가능한 직급이었다. 거기에 가이드라는 새로운 이름 하나만 추가됐을 뿐이다. 니들이 주휴 없고 야근수당 없는 최저시급 노동자의 설움을 알겠냐.


그렇게 자기 세뇌 빡세게 하며 센티넬의 집으로 갔다. 어쩐지 난쏘공이 떠오르는 듯한 주소지는 알 바 아니다. 밥 먹을 돈부터 벌어야 한다. 행복동은 조금 멀었지만 지금도 빈털터리니까 버스 따위 타지 않았다. 1시간 동안 쌩으로 걸었다. 그 끝은 으리으리한 부자 동네였다. 여주는 거기서 4차 산업혁명 일어날 것 같이 생긴 아파트로 들어갔다.



“… 계세요?”



초인종을 눌러도 안쪽에서 대답이 없다. 아까 눌렀던 초인종을 또 눌러보았다. 뭐지? 센터 말로는 오늘은 임무가 없다고 했는데. 잠깐 어딜 나갔나? 문에 귀를 가까이 들이댔다.



“… ㅈ….”


“예?”


“꺼져!”



이윽고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귀에 정확히 꽂혔다. 여주는 문에서 두어걸음 물러났다. 내가 뭘 들은 거야…? 얼 타고 있는 새에 문이 덜컹거렸다.


저 사람은 센티넬이지, 등급은 모르겠지만 가이드인 나보다는 셀 거야. 난 가이드니까 근력이고 나발이고 일반인이잖아. 굼뜬 뇌가 지금만큼은 번개같이 결론을 내렸다. 튀자!


여주는 엘리베이터도 놔두고 계단으로 뛰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갈 때까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5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죄 없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다. 그래, B급한테 가이딩 받는 게 싫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신사답게 거절해주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문 안 열어줘도 된다. 그냥 인터폰으로 가라고 그랬으면 갔다고.

여기서 포기하기엔 여주는 아직 배가 고팠다. 첫 번째니 액땜으로 치기로 하고 두 번째 주소를 펼쳤다.



“서울시 안전구 행복동 복지로 25 423호….”



같은 동네네. 안 멀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에도 튼튼한 두 다리의 힘을 빌려 집 앞까지 도착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예의 바르게 노크하고 계시냐고 묻기도 했다. 또 대답이 안 돌아온다. 여기도 첫 번째 집처럼 꺼지라고 하는 거 아니야? 안 되는데… 나 배고프고 돈도 없는데…. 조바심에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어차피 안 열릴 거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다.



“어?”



왜 열려. 이 사람 문도 안 잠그고 사나? 어쨌든 문이 열렸으니 조심스레 한 발을 들여보았다. 안쪽에선 아무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단속하는 걸 깜빡하고 나가신 것 같았다. 현관문을 고이 닫아두고 나가려는 찰나, 여주의 얼굴 옆에 뭐가 날아와 문에 박혔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50kg짜리 덤벨이 철제 문을 뚫고 움푹.



“죄송, 죄송합니다….”



염소 소리로 거듭 사과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 김여주 인생 가장 빠른 속도였다.




#6


여전히 집 없고 돈 없고 일도 없는 김여주는 또 공원 벤치에 잠자리를 깔았다. 오늘은 운 좋게 굴러다니던 비닐을 발견해서 그걸 요 삼았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밤바람이 옷자락을 들추고 뼛속까지 들이쳤다.


그러니 유리 깰 때도 안 나오던 눈물이 울컥 나오는 거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엄마랑 아빠 보고 싶다. 내가 뭔 짓을 하든 한숨 한번 쉬고 다 받아주던 김도영도. 훌쩍이며 다리를 더 끌어당겨 안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딴 세계에 떨어뜨려 생고생을 시키는데. 내가 여기서 B급 가이드 형질 갖고 뭘 할 수 있는데…. 흔한 소설처럼 원대한 능력을 타고 나서 세상을 구하는 것도, 타인에게 사랑받을 운명을 타고난 것도, 누군가를 무찔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는 센가물 주제에 너무 현실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러게. 이거 센가물에 괴물까지 판치는 요상한 판타지 소설인데. 이렇게 현실적이어도 되나.



“이거 소설 아니고 진짜 세상이면 어떡하지….“



사실 여기가 내 현실이었다면? 어쩌다 지독한 정신질환을 얻어 여기를 소설 속이라고 믿고 현실 도피 중인 거면? 그럼 난 정말 좆된 건데.




#7


퉁퉁 부은 눈으로 잠에서 깼다. 안 그래도 기분이 거지 같은데 눈도 안 떠진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비비려는데 두 손 사이에 뭐가 만져졌다. 눈을 겨우겨우 뜨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게 접힌 종이쪽지다.

얼른 일어나 앉았다. 쪽지는 빛의 속도로 후루룩 펼쳤다.



여긴 소설 속이 맞아. 

네가 이 세계에 꼭 필요해서 내가 여기로 부른 거야. 

걱정하지 마.



여주는 만세를 외쳤다. 할렐루야랑 관세음보살도 두루두루 외쳤다. 아무튼 이 세계의 신? 관리자님? 감사합니다. 절도 세 번 했다. 손엔 쪽지를 꼭 쥔 채였다. 다행이다, 이게 내 진짜 인생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야. 여주는 춤추듯 뛰어다니다 불현듯 멈추어 섰다.

근데 여기가 소설 속이면… 난 어떻게 돌아가냐?



“결말을 봐야 하나…?”



거의 모든 소설이 이런 흐름이 아닌가.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가 만족할 만한 결말을 보여주고, 그 주인공은 자신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이런저런 역경을 뚫어야 하지만… 괜찮다. 난 어차피 주인공 아니잖아.


주인공이었으면 진작 고등급 센티넬이나 가이드로 발현시켜줘서 세상을 구하라고 했겠지. 아니면 다른 엄청난 능력을 주던가, 적어도 높은 지능을 갖고 있던가…. 그러나 여주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원래 세상에서의 능력치 그대로 남의 차원에 툭 떨어진 것이다. 가이드 B급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여주가 보기에 이건 면피용 정도밖에 안 되는 능력 같았다. 잘 쳐줘봤자 주인공 서포트에 그치지 않을까?


어쨌든 고난과 역경은 주인공이 앞장서서 헤쳐 나가고, 난 옆에서 응원이나 해주면 되겠지. 여주는 심오한 고민을 손쉽게 떨쳐버렸다.



“배고파….”



존재에 대한 의문은 풀었으니 이제 1차원적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다. 밥이랑 집. 기가 막히게도 센티넬들이 여주한테 문전박대를 때렸으니 돈을 벌 수가 없다. 알바라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도 알바지옥 앱이 있을까? 여주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다 한숨을 쉬었다. 나 폰도 없지.


무료급식소라도 갈까…? 신체 건강한 성인이 가도 되는 건가? 아니 그래도 나는 돈도 없고 밥도 없는데 한 번쯤은 가도 되지 않나?



“에이, 가보자.”



아무래도 죄책감보다는 굶주림이 먼저였다. 사람이 밥부터 먹고 봐야지. 일 구하는 건 조금 이따 생각해보고. 정 안 되면 각성자 관리센터에 가서 다시 바짓가랑이 붙잡고 빌어볼 요량이었다. 안 되면 뭐… 행정센터를 가던가… 복지센터를 가던가… 설마 사람이 죽으라는 법이 있겠어.




#8


“키에에에엑-.”



죽으라는 법이 있군. 초록색 괴물이 입을 벌렸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각성자관리센터를 다 찾아가다 잠깐 길을 잃어 골목을 헤맸다. 점심시간 전에 가고 싶어 걸음을 빨리했는데, 갑자기 집채만 한 괴물이 불쑥 튀어나왔다. 겉에 초록색 진액이 찐득하게 묻어 있고, 눈은 세 개나 달린 징그러운 게….


여주는 거기서 주저앉아버렸다. 괴물이 입을 쩍 벌리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망갈 수가 없었다. 차원 이동까지 한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했다. 뒤질 거면 빨리 죽여달란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기다리던 아픔이 없다. 여주는 얼굴에 뭐가 촥 튀는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헉, 허억, 괜찮으세요?”


“예? 아….”



앞에 선 건 앳된 얼굴의 남자애였다. 여주보다 몇살쯤 더 어릴까, 그 남자애가 괴물 앞에 검은 피에 젖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여주는 뒤늦게 제 얼굴에 묻은 것을 문질러 닦았다. 끈적거리고 새까맣다.


일어나려다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여주는 손으로 제 팔을 감싸 안았다. 피가 옷에 덕지덕지 묻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애가 여주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저, 저기요…. 많이 놀라신 거죠….”


“….”


“집이 어디세요? 데려다 드릴게요.”



여주는 집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저었다. 저 애가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없는 집에 어떻게 가나. 덜덜 떨리는 다리를 몇 번 주물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여주는 옆의 벽을 잡으며 슬슬 일어났다.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렸지만 일단 서긴 섰다.



“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는 여주를 그가 유심히 뜯어보았다. 군데군데 괴물의 피가 묻은 데다 무릎엔 멍까지 들었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아까부터 온몸을 떨고 있다. 괴물을 보고 충격을 극심하게 받은 듯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갈 데 없으시면 잠깐 우리 집 가실래요?“


“… 집이요?“


“네네, 곤란해 보이시는데 화장실 빌려드릴게요. 가서 씻으세요. 저는 진짜 괜찮아요!”



그는 누굴 안심시키려는 듯 작게 웃었다. 여주는 그의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얘 천사인가?




#9


씻는 게 이리 감격스러운 행위일 줄 몰랐다. 장장 3일쯤 못 씻다 씻으니 그렇다. 일단 몸에 묻은 피랑 먼지가 사라진 것만으로 살 것 같았다.


여주는 기다란 옷을 접어 올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 남자, 지성이 잠깐 입으라고 준 건데, 키가 한참은 차이 나서 여주한텐 턱없이 길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는 여주를 보고 지성이 벌떡 일어났다.



“여기 수건 있어요.”


“어우… 고맙습니다.“



여주는 곧장 그걸 머리에 묶었다. 얘 진짜 착하다. 처음 보는 사람도 덥석 집에 데려와서 씻겨주고. 슬쩍 집을 훑어보았다. 방이 하나 딸리긴 했는데, 집 구조를 보면 혼자 사는 것 같다.



“옷도 빌려줘서 진짜 고마워요.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괜찮아요. 작아져서 안 입는 옷이었어요.”



다시 생각했다. 얘는 천사인가. 천사가 아닌 이상 목숨도 구해주고 씻게도 해주고 옷도 줄 수가 있나.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인성이다.



“그런데 그게… 혹시 갈 데는 있으세요?”



이것 봐라. 모르는 사람 집 걱정도 해주니 말이다.

여주는 어디까지 말할지 고민하다, 차원 이동한 사실만 빼놓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기억 상실이라는 핑계는 적당히 댔다. 돈 없고, 일도 못 구해서 길거리에서 잤다는 얘기는 그대로 했다. 여주의 얘기를 다 들은 지성이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짜 나쁜 사람들이네.”



각성자관리센터 사람들을 향한 말이다. 고작해야 3일 헤맨 건데 지성이 자기 일처럼 화를 내주었다. 여주는 왠지 찡해지는 눈가에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노숙했던 지난 3일이 많이 힘들긴 했나보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결론은, 김여주는 거지고 갈 곳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다, 였다. 정말 대단한 상거지가 따로 없다.



“저 이제 가볼게요…. 아, 옷은 진짜 고마워요. 나중에 새 옷 생기면 꼭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지금은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구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주는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꿰어 신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입고 있었던 옷은 밖에서 자느라 더러워진 데다가 괴물 피가 묻어서 입을 수가 없었다. 여주가 나가려고 들자 지성이 펄쩍 뛰며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려고요? 집 없다면서요?”


“각성자 관리 센터에 다시 가보려고요. 어떻게 해보면 일을 다시 주시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은 안 줄 것 같았다. 그 센티넬 두 명 연결해준 것도 눈치를 팍팍 주며 해주던데. 그것마저 말아먹었으니 또 일을 줄 리 만무하다. 가이드는 흔하기도 하고…. 일단 거기 가서 말은 해 본 다음에 안 된다고 하면 다른 일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씁쓸하게 한숨을 쉬는 여주 앞에서 지성이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괜찮으시면 우리 집에서 지낼래요?”


“네…? 그건 너무….”


“저는 진짜 괜찮아요. 제가 D급 센티넬은 돼서 제 앞가림할 돈은 벌 거든요. 여기서 당분간만 지내요.”



지성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조건이 너무 좋다. 처음 만난 사람이 목숨도 구해주고, 옷도 빌려주고, 이젠 집까지 빌려준다고. 여기가 여주가 잘 아는 서울이었다면, 그리고 길거리에서 3일째 굶은 정신머리가 아니었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주는 어제 신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자신이 차원 이동자고, 이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해서 차원 이동을 하게 되었다는 말. 그 말 이후에 마침 지성이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착하고, 남을 의심하지 않고, 공교롭게도 지금 바로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사람.



“좋아요! 안 그래도 잘 곳이 없었어요!”



여주의 눈에 비친 건 영락없이 신의 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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