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본 소설은 체벌 요소, 폭력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W. 편백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뒷골목이었다. 웅성웅성, 먼 거리에서 들리는 도시 소음이 물기 어린 공기에 필터링 되어 에코처럼 은은하게 퍼졌다. 열 걸음 걸어 오른쪽으로 꺾으면 상가가 줄지어 늘어져 있는 이곳은 대학가, 청춘의 성지였다. 비틀 거리는 사람을 부축하는 비틀 거리는 사람이 서너명씩 간간히 지나가는 걸 구경하고 있었던 찬은 옆에 붙어 있는 겸에 일말의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마치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 놓인 것처럼, 도시 소음에서 멀어진 채 고요함을 유지했다.



"좋아해."



나지막한 음성이 촉촉한 공기 타고 귓가에 스며 들었다.


찬의 눈매가 돌연 날카로워졌다. 아래가 도톰한 입술 사이에 끼인 연초에서 뭉게뭉게 연기만 피어 올랐다. 때 아닌 고백을 들어놓고도 여전히 겸을 바라보지 않았다. 찬 보다도 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겸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뱉은 사람 치고는 상당히 어긋난 표정이었다.


겸은 자신이 왜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찬이 그 사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었을까.



["겨마아... 보고 싶었어. 나 오늘 밥도 잘 먹었어!"]



나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얼굴을 부비적 거렸던 애였는데. 그 순수하고 순진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엔 피폐함이 들어 찼다. 담배 연기나 뿜어내는 그 텅빈 눈동자는 마치 말세기의 인간 같았다.


짜증나는 건 마냥 해맑았던 그때도, 석유에 풍덩 담갔다 뺀 듯 퇴폐한 지금도. 그 분위기가 퍽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길거리를 거닐다보면 하나 쯤 보이는 전형적인 우울한 인간류였다. 겸은 세상 아픔 혼자 다 짊어진 듯한 그들이 구역질 나올 만큼 싫었다. 무심한 척 굴지만 나 좀 봐달라 애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찬이 지금 그 꼴을 하고 있는데, 역겹지 않았다. 안 어울리는 옷을 입고 연극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찌든 것이다. 때가 묻어도, 찬은 여전했다. 그러니까, 어떤 놈과 영혼이 바뀐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겸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눈가에 웃음기만 빼도 창백해져선 아랫 입술이나 씹었던 찬이 지금은 내가 오만상을 쓰고 있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되물었다. 겸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보내버리면, 영영 떠나버릴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도졌다. 겸이 찬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내밀었다. 나 좀 봐달라는, 애원이었다.


찬의 눈동자가 겸을 향해 아래로 깔렸다. 동그란 눈알에 묻혀 있던 속쌍꺼풀이 드러났다.


찬이 날 보는데도, 그토록 바라왔던 눈맞춤에도 장기를 짓누르는 듯한 이 무거운 감정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찬아, 나랑 살자."



고심을 거쳐도 모자랄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그렇다 한들 빈 말은 아니었다. 찬은 저의 애달픈 표정을 가만히 직시하다 픽,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돈 많아?"



같이 살자는 말을 그렇게 쉽게 뱉을 만큼? 다시 마주한 찬의 눈빛엔 겸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놈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묻어 있었다. 겸의 눈썹이 또 한 번 꿈쩍였다.


겸의 해석이 맞았다. 찬은 겸을 딱,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봤다.


집값이 미쳐 날뛰는 시대에, 수도권 한 가운데 중에서도 가장 핫플레이스인 공간에서 한 말이니까. 끽해봐야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주제에. 내가 더럽게 까탈스러운 놈이란 걸 아는 사람이. 감히 건방지게. 찬은 이 동네에서 집 구하고 살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면 반대였지. 그 말은 즉슨 같이 산다면 겸이 과반을 넘게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전 얹혀 사는 것이고.



"너랑 같이 살 만큼은 돼."

"하하, 좋겠네. 그거 다 부모 덕?"



겸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비꼰다기엔 적나라한 발언이었다. 게다가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집 얻고 살고 있는 게 부모의 지원 덕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나와 다른 처지에 사는 찬이 안타까운 것은 아니었다. 동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만에 차서, 복에 겨워서 지껄이는 말도 아니었다. 찬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 내게 열등감이 들어서 한 말은 아닐 거다. 분명 그럴 거야.



"찬아."



여전히 겸은 절절했고



"응, 겸아."



찬은 냉혹하리 만큼 차분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동갑인줄 알겠지만, 사실 찬은 겸 보다 두 살 어리다. 겸이 아메리칸 마인드인 건 아니지만 찬이 제게 '형'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해서 문제 삼지 않았다. 되려 좋았다. 몇 년 전의 너와 나의 사이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 


그때도 찬은 겸에게 야, 너 하며 까불었지만 겸은 그런 이유로 찬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내 이름 더 불러 달라며 눈에다 입술이나 얹었지. 먼저 태어난 것이 벼슬도 아니거니와 정신연령 만큼은 찬이 더 앞서 있는 판국에 굳이 그런 것을 따져가며 암묵적인 위계를 설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허물없이 사랑하려면 호칭부터 가까워야 한다 생각했으니까.


지금 나를 겸이라고 불러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내게 선을 긋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니까.


부모 덕이냐는 그 말도. 내 신경을 거스르기엔 충분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화'라는 감정보다는 속상한 마음이 더 컸다. 감동의 재회까진 아니더라도, 이렇게까지 피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 오랜만에 만났잖아. 좋게 대화하면 안 돼?"



겸의 아련한 시선을 텅 빈 눈동자로 받아친 찬이 연초를 깊게 빨았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다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거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만큼은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보고 싶었어."

"......"



미간을 조이던 힘줄이 툭, 끊긴 것처럼 팽팽하게 늘어졌다.



무심하게 뱉은 찬의 진심에 겸은 가슴에 커다란 파도가 휩쓸고 간 기분이 들었다. 겸이 천천히 손을 뻗어 후드를 뒤집어 쓴 찬의 얼굴 께로 손을 집어 넣었다. 차디찬 손에 차디찬 얼굴이 맞닿았다. 그때보다 젖살이 빠지고 푸석 푸석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랑였다. 초롱 초롱 빛나던 눈은 심해어처럼 흐렸다. 얼마나 피곤한 일생을 살아온 것인지 다크 써클도 꽤 짙어졌다. 안쓰럽다.


살도 쪽 빠진 바람에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팔뚝이 아니라 빈 깡통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맨 처음 봤던 그때도, 그늘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잠식되어 있진 않았다. 내가 그 얼굴에 광 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또 이렇게 망가져서 오면 나더러 뭘 어쩌라고.



"밥은 먹고 다녀?"

"아니."

"......"



...당당하다? 내가 굶고 다니는 거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제가 화낼까 무서워, 식탁 위에 멀쩡히 차려진 밥을 등지고 먹었다며 거짓말을 했던 애가. 지금은 '먹는다.' 한 마디만 하면 그렇구나, 생각할 상황인데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화난 날 붙잡고 애교를 떨며 어영부영 넘어가려 들었던 것도 다 과거 일이 됐다. 사람이 바뀌기엔 충분한 시간이다만, 이리도 갭차이가 크니 적응이 안 됐다.



"시위하는 거야?"

"아닌데."

"나 싫어?"

"아니."



어미의 사랑을 확인하려 드는 어린 아이 마냥, 찬을 붙잡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 아니라는데, 아니라면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데. 차라리 시위가 맞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내가 미워서 이러는 거면 좋겠다.


아닌데 이러는 거면. 그럼 넌 정말 달라진 거니까. 그렇게 바뀔 만큼 괴로웠다는 거니까.



"그럼 왜 이러는 건데!"



내가 알던 너를 보여달라는 이기적인 요구였다. 아주 애달픈, 몹시 간절한 외침이었다. 찬은 잔뜩 흥분한 겸을 무기력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담뱃불이 꺼져갈 쯤 주머니를 뒤져 다시 불을 붙였다.


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찬이 속 깊이 매캐한 연기를 집어넣고 얇고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바람도 겸의 편인 걸까. 그에게 닿기도 전에 옆으로 길게 날아갔다. 겸을 외면하고 연기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찬이 하늘을 바라봤다. 우산을 안 가져오길 잘 했지. 비가 금방 그쳤으니까.


서울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내가 살던 곳 만큼 많진 않았으나, 어쨌든 서울에도 별이 있긴 했다.



"내가 널 찾으려고 별 지랄을 다 했어."



찬이 나긋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혹시 네가 죽은 건가 싶어서 저승까지 가보려다가,"



잠자코 듣던 겸이 또 입술을 씹었다. 저승까지 가보려고 했다는 건, 죽으려고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거기에도 네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어."



만약에 그게 맞았으면. 내가 저승에 있었으면 정말 죽을 셈이었나? 찬의 팔뚝을 쥔 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옷깃이 겸의 미간만큼이나 세게 구겨졌다. 그 압박감에 아플만도 한데 찬은 미동도 없었다.



"살아야지. 네가 없어도 잘 살아야지. 너 까짓 거 하나 때문에 날 버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 까짓 거...


기특한 생각을 했다 했더니 원망으로 그리움을 승화한 것이었다. 내 면전에다 대놓고 못된 말을 퍼붓는다. 그래, 맞다. 넌 예전에도 그랬다. 내게 네가 갑이냐, 그냥 헤어지자. 팽하게 돌아선 적도 있었다. 그치만 그땐 이만큼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널 포기하고 내 삶에 뛰어 들자 마자, 네가 또 나타났어."



초점잃은 눈으로 뭘 보고 있는 것인가.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마땅한 표적도 없는데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건데. 나한테 얘기하는 게 맞기나 한 거야?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침묵이 감돌았다. 그 대사 만큼은 겸에게 꼭 닿길 바랐던 것인지 상가의 소음마저도 갑작스레 잠들었다. 시간이 멈춘듯, 고요했고.


찬은 그 상황을 깨듯 혼자 연초나 빨았다. 또 바람이 불었다. 연기는 겸을 피해갔고, 겸은 찬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손을 붙잡았다. 후드에 반쯤 가려진 그 작은 손을 꽉 붙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신 안 떠날게.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축 늘어진 찬의 손이 시체처럼 서늘해서, 맥이 없어서 가슴이 콕콕 쑤셨다.



"떠난 건 나지. 넌 죽어도 내 앞에 안 나타났을 뿐이고."



찬은 줄곧 진실을 말해 왔다. 겸이 사과하는 이 순간 마저도 '네가 잘못한 건 없어.' 라며 이야기 한다. 찬의 말마따나 겸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찬이었다. 그러고도 이렇게 뻔뻔하게 겸의 속을 뒤집어 놓냐?



"아니야, 떠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따진다면 찬은 정말 억울할 터였다.


이별을 맞이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란 것은 존재한다. 손 쓸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은, 존중하는 게 마땅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짓이다.


찬을 지치게 했던 겸도, 버티지 못하고 겸을 떠난 찬도.


그럴 만 했다.


'사랑하면 꼭 붙들어야지.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게 말이 돼?'


식당에서 밥 먹다 들은 드라마 대사였다. 다른 건 다 안 들렸는데 저 말 만큼은 귀에 콕 박혀서 며칠 몇 달을 맴돌았다. 전자는 동의하지만 후자는...


말이 안 될 건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현실에 그런 일은 빈번하잖아.


우리도 그랬잖아.


그래, 그래서 후회한 거지.


겸은 저를 앞에 두고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찬을 품 안에 집어 넣었다. 허리를 감싸고 뒤통수를 받치며 꽈악, 바스라트릴 기세로 세게도 끌어 안았다.


이제 와서 이렇게 꼭 붙들으면,


뭐가 달라지는 건데. 


내가 널 떠나겠다 선언했을 때 가지 말란 말 한 마디만 했어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그 말 한 마디만 했어도. 내가 7년을 아파하진 않았을 텐데. 널 찾겠답시고 오만 곳을 다 뒤지고 몇 날 며칠 밤 새워가며 가슴 치지도 않았을 텐데.



"나도 보고 싶었어. 죽을 만큼 보고 싶었어."

"...지랄."



내가 그렇게 널 찾을 때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놓고. 내게 너의 흔적 하나 남겨놓지 않았으면서. 너란 존재만 내 기억에 남겨두고 널 찾아갈 단서 하나 두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으면서.



"찬아."

"그럼 죽어봐."



찬의 극단적인 발언에 그를 옥죄이고 있던 겸의 팔에 힘이 풀렸다. 서서히 떨어진 겸이 흔들리는 눈으로 찬을 바라봤다. 찬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표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목이 매여 온다. 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독한 담배 냄새보다 그 짧은 한 마디가 더 숨 막혔다. 내게 죽어보라는 그 말을, 저렇게 쉽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찬이 야속했다. 한 편으로는 미웠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증명해봐. 내가 죽을 만큼 보고 싶었단 그 말을."

"죽어서 증명해라,"

"응."



항상 이런 식이지.


나랑 싸울 때면 '그럼 헤어지든가.' 마음에도 없는 못된 말을 하더니 이젠 나더러 죽으란다. 마음을 행동으로 증명하라니. 의심을 걷지 않는 한 내가 차도에 몸을 날려도 한강 다리 한 가운데서 다이빙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그딴 걸로 사실확인이 될 리가 없다.



"내가 진짜 죽으면, 그 다음엔 어쩔 건데."

"나도 따라 죽을 거야."



타앗-!


찬의 손이 반원을 그리며 휘날렸다. 손가락에 끼여있던 연초와 함께 라이터와 담배갑까지 차례로 바닥을 뒹굴었다. 겸이 빼앗아 집어 던진 탓이었다.


머리채를 낚아채듯 후드를 홱 벗기곤 턱끝을 잡아 올렸다.


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내 무표정으로 대응하던 찬이 처음으로 동요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흑백 반전을 한듯 달라진 찬과는 달리 겸은 한결 같았다. 7년 만에 마주하는 저 화난 눈빛 마저도 달라지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이젠 웬만한 인간에게 쫄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생각했는데, 겸 앞에서는 또 쫄고 있다.



"가만히 들어 주니까 못 하는 말이 없지?"

"......"



찬의 눈에 가로등 빛이 스며들었다. 입술을 꾹 깨물어도, 울렁거리는 불쾌한 느낌이 단전에서부터 가슴까지 밀고 올라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고였다. 반가움보다 원망이 더 커서, 널 그리워 했던 그 세월이 너무나도 길었어서.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네가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가 인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미치도록 괴로웠는데.


내 눈에 비친 너의 그 화난 얼굴을 보니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실감난다.


그 안도감에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찬아."



바보 멍청이. 속상하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났으면서. 내가 고작 눈물 몇 방울 떨구는 것에 또 저렇게 놀란 얼굴을 한다.



"울지마, 미안해."



잘못한 건 난데...






-






막 독립한 사회 초년생치고는 꽤 좋은 집이었다. 그것도 수도권 한 가운데, 투룸 오피스텔이라니. 찬은 헤진 슬리퍼를 벗으며 안을 둘러봤다. 저를 앞장 세우고 뒤 따라 들어온 겸이 문을 닫자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중문을 여니 짧은 복도가 있었다. 하얀 문의 화장실을 지나 다섯 걸음 걸으니 거실이 나왔다. 주방과 함께 딸린 그 곳엔 낮은 사각 테이블과 노트북,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전형적인 자취방 구조였다. 복도에 서서 오른쪽에도 하얀색 문이 달려 있었다. 안 열어봐도 안방일 게 뻔했다.


겸이 찬의 손목을 탁 붙잡더니 안방 문을 열었다. 불을 키지도 않고 냅다 어느 곳을 향해 찬을 내팽겨쳤다. 푹신한 어떤 것에 허벅지가 걸려 상체부터 떨어졌다. 찬은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사락 사락 이불의 촉감이 느껴진다. 침대다.


불이 탁 켜지고, 겸의 실루엣이 단박에 선명해졌다. 터벅 터벅 걸어온 겸은 찬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찬의 손끝을 잡고 후드 소매를 슥 걷어 올렸다. 아까 손목을 좀 세게 때린 것 같아서.



"...부었네."



맞은 지 좀 지났을 텐데 아직도 빨갛다. 겸이 찬의 손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때렸잖아."

"맞을 짓 했잖아."



나도 너무 감정에 북받쳐서 그만.


찬은 저를 밉지 않게 째려보는 겸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서울엔 어떻게 왔어?"

"버스타고 왔지."

"아니..., 그럼 날아오겠어?"

"공항이 있긴 해."



그 말이 아니잖아. 겸은 오랜만에 듣는 찬식 화법에 헛웃음을 쳤다. 분위기는 바뀌었어도 저 엉뚱한 말투는 여전했다.



"아 참, 찬아 너 혼나자."

"...응?"



그걸 무슨 빨래 걷는 걸 깜빡한 주부마냥 박수를 치면서 말하지? 그런게 사소한 일거리 정도가 아닐텐데.



"집에 딱히 쓸 만 한 게 없긴 한데, 저기 신발장 열면 구둣주걱 있어."

"아니,"



갑작스런 전개에 말을 잇지 못했다.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겸을 바라보니 '안 가져 오고 뭐 해?' 라는 표정을 짓는다.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왜?"

"몰라서 물어?"

"우리 아무 사이 아니잖아."

"사귀자, 그럼."

"싫어."

"너무하네. 맞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어. 안 때리면 사귈게."

"그럼 사귀진 말자. 얼른 가져와."



고백과 거절의 과정까지 거쳤으나 달라진 거 없이 다시 원점이었다. 그러면 다시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닐 거란 말을 해야 했고, 겸은 또 사귀자는 말을 할 것이었으며 저는 또 안 때리면 사귄다는 말을 할테지. 그럼 겸은 또 사귀는 건 보류하고 매는 가져오라 할 게 뻔했다.


저리도 순박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딱히 매 맞을 이유는 없는 것 같다만 그런 논리는 통할 것 같지 않은 아주 하얗고 순수한 아우라였다. 쟨 그때나 지금이나 그랬다. 내 나름대로 변호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웬만한 인간들은 내게 말려 드는데 겸한텐 내가 늘 말려든다.



"내가 가져와?"



나도 클 만큼 컸어. 더 이상은 안 말릴 거야.



"나 왜 맞냐고."



남들 대하듯 일관성 있게 겸에게 개겼다.



"몰라서 묻냐고."



허나 큰 수확은 없었다. 어쩐지 줏대 있어진 찬에도 겸은 당황하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다정한 투를 싹 걷고 정색하며 묻는 겸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몰라서 묻냐, 그 말은 너 스스로도 뭘 잘못한지 알고 있지 않냐는 반문이었다. 난 '따지고 보면 세상에 잘못이란 없다.'는 주의고 겸은 '따져 볼 것 없이 잘못은 잘못이다.' 는 주의였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관의 공통점은 '안 따지면 잘못'인 것이고.


그러니 안 따지면 나만 불리한 것이다.



"...모르겠,"

"그럼 알 때까지 맞자."



나만 지는 거라고.


자리를 뜨려는 겸을 붙잡으려 황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놓치고 말았다. 신발장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가지 않아 겸이 손에 무기를 장착하고 돌아왔다. 구둣주걱이라더니 생긴 게 일반적인 모양새가 아니었다. 플라스틱 재질이 아니라 원목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찬은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감에 '설마, 날 때리겠어?' 라는 눈빛으로 겸을 올려다 봤다.



"어, 야...!!!"



제 팔을 탁 붙잡은 겸이 침대에 저를 낫모양으로 엎어 놓고 바지부터 훌러덩 벗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한 걸 입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겸이 어떤 놈인지 잠깐 망각했나 보다. 남들 모두 민망하게 여길 탈의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걸 까먹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뒤늦게나마 바지를 부여잡으니 냅다 속옷까지 벗기고 옷을 침대 위에다 대충 집어 던졌다.


눈 앞에 폭 떨어진 제 허물을 보니 수치심이 배로 밀려왔다.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야...!"


짜악-!

"아읍...!"



시트를 짚으며 일어나려 하기도 잠시, 제 옆에 앉은 겸이 곧장 매를 내리쳤다. 엉덩이 위로 느껴지는 따가운 고통에 찬이 허리를 둥글게 말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부모님의 체벌에서도 졸업했었다. 집안에서는 범죄 행위가 아니라면 사생활엔 잔소리나 종종 늘어놓을 뿐, 매까지 동원해가며 터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겸은 학창시절에 만난 첫사랑이었다. 어쩌다 사랑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룸메이트로 우연히 만났다가 정신 차려보니 선을 넘은 사이가 됐다.


밥 잘 챙겨 먹으라면서 밥을 차려주진 않는, 위험하니 일찍 들어오라면서 데리러 오지는 않는 부모님 아래서 컸다. 무관심과 관심, 그 애매모호한 간극에서 자란 찬에겐 독립심과 결핍이 공존했고,


겸은 그런 찬을 길들였다.



짜악-!

"아흐, 겸아, 아파."



찬이 슬그머니 손을 들이 밀며 달아오른 엉덩이를 문질렀다. 겸이 '씁,' 공기 빠는 소릴 내며 손목을 낚아채 허리에다 고정했다.



짜악-!

"나 없는 사이에 담배나 피우고,"


짜악-!!

"밥도 잘 안 먹고."



널찍한 원목과 살이 타음을 낼 때마다 겸이 허리를 퉁퉁 튕겼다. 다정한 질책에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악착같이 울음을 삼켜냈다. 그걸 발견한 겸은 손목을 결박하던 걸 풀고 내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하필 첫사랑이 너라서. 관심을 받은 수단이 하필 이런 '체벌'의 형태여서.


누굴 만나도 너처럼 나한테 간섭하지 않으면 성에 차질 않았다. 진심 같이 느껴지지도, 날 사랑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게 길들인 거지. 너 아니면 못 살도록, 길들인 거지.



"아!"



찬이 겸의 엄지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황급히 손을 뺀 겸이 잇자국이 난 손가락을 문지르며 벙찐 눈으로 찬을 바라봤다.



"지금 나 깨문 거야...?"

"너도 나 때리고 있잖아!"



허. 저를 잔뜩 노려보는 찬에 헛웃음을 친 겸이 잠깐 풀어줬던 손목을 다시 단단히 붙잡았다.



짜악-!

"아!"


짜악-!, 짝-!

"아으, 야, 아...!"



어째 아까보다 강도가 더 세진 느낌이다. 한 대 한 대 공 들여 때리더니 지금은 규칙성도 없이 연속으로 쌔리고 있다. 아무래도 성질이 난 양 싶다. 찬이 허리를 들썩이니 손목을 꾸욱 누르며 허리까지 침대에 같이 고정시켰다.



"아, 야, 아파!!"



짜악-!, 짜악-!

"흐윽, 아, 겸아, 제발."



짜악-!!

"아흐읍!"


"어떻게 나한테 죽으라는 소리를 해?"



결박을 풀려 힘을 잔뜩 주고 있던 찬의 손목이 늘어졌다. 따갑다 못해 쓰라린 고통이 아직도 찌릿찌릿하게 엉덩이를 조지고 있지만 그보다도 겸의 목소리가 더 아팠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그 한 마디가 독이 퍼지듯이 뼈 마디 마디를 저리게 만들었다.



짜악-!!

"으읍,"


"어떻게 나한테 죽겠다고 하냐고."


짜악-!, 짝-!!



찬이 다시 입술을 씹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도 그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나마, 내가 힘들었던 만큼 겸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었다.



짜악-!!


"그래 놓고 왜 혼나야 하냐는 말이 나와?"



다른 건 몰라도,


네가 강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말을 내뱉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 말을 하면, 네가 상처 받을 거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진짜 몰라서 물어?"



겸과 찬의 눈이 고요하게 맞닿았다. 찬의 눈동자도, 겸의 눈동자도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두 눈이 기류의 한 가운데서 진득하게 얽어 붙었다.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가슴에 뚫린 구멍이 부피를 늘려갔다.


그 고통에, 겸의 눈시울 마저 붉어지고 말았다.



"......"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말 만큼은 하지 말 걸.


상처주지 말 걸. 죽겠다는 말 하지 말 걸. 죽으라는 말 하지 말 걸.


불공평해.


나는 네가 없는 그 7년을 그리움 속에서 몸부림 쳤는데. 그깟 상처 하나 주면 안 되는 거야?


찬이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눈물이 소낙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도무지 이 고통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시리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장기를 다시 재배열하는 느낌이었다. 안에서부터 뒤엉키고 망가지는 이 불쾌감.


왜 나마저 아픈 건데.


상처 받은 건 너면서, 왜 나까지 같이 아픈 건데.


너만 아프면 될 일을, 왜 나도 아프게 해서.


날 자해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데.



"진짜... 하아..., 더럽게 이기적...,이야."



찬이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면이 축축히 스며드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젖은 신발을 신은 것처럼 찝찝한 감촉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불쾌한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지만 아직도 겸이 제 손목을 단단히 쥐고 있었기에 일어날 수는 없었다.



"...찬아,"



그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뇌 척수 하나 하나를 부드럽게 그루밍해주는 듯한 다정한 말투였다. 바라고 바라왔던, 무려 7년을 기다렸던 그 목소리였다.


마치 꿈만 같은 이 현실은,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사라질 것 같았다. 내가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키스하고 싶어."



찬이 눈을 감고 웅얼 거렸다.



정말 꿈인 걸까.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엉덩이가 터질 것만 같았던 그 감각조차 무뎌졌다. 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어떤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눈 뜰 이유가 사라졌다. 그래, 겁이 났다.


네 품에 안겨있다 잠에서 깬 적이 숱하게 많았다. 깨고 나니 넌 없었고, 네 품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불 안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무의식에 속아 넘어간 내가, 그게 현실인 줄 알고 온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 다신 널 떠나지 않겠다 선언한 내가.


또 이 망할 꿈에 속아서 내 기억 속 너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단 걸 실감하고 나면 가슴에 구멍이 뚫린 건 마냥 허해서.


깨고 싶지 않았다. 다시 잠에 들어도 같은 꿈은 꾸지 않을 거라는 걸 뼈 저리게 잘 알아서.



"......"



꿀꺽, 타액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입 안으로 들이 닥친 말랑하고도 따뜻한 무언가가 목구녕까지 들어찼다. 요란하게도 제 입안 곳곳을 훑고 다녔다.


제 혀를 부드럽게 옭아맨 겸의 것은, 텅 빈 속을 한가득 채우며 치아 하나 하나 어루만지며 훑어 지나갔다. 가만히 그 감촉을 느끼던 찬은, 이끌리듯 겸의 것을 밀어내고 그의 안으로 침투했다.


보고 싶었던 만큼, 격렬하게 파고 들었다.






-






"우리 찬이, 7년 새에 많이 늘었더라."



겸이 찬의 엉덩일 조물거리며 말했다. 아마 키스를 말하는 거겠지. 찬은 베갯잇을 꼭 쥐고 방금 전의 뜨거운 입맞춤을 회상했다. 아직도 겸의 혀놀림이 입가에 맴돌았다.



"당연하지. 내가 7년 동안 주구장창 너만 기다리면서 아다로 있었을까봐?"



짜악-!

"아!"



연고가 묻어 진득한 엉덩이 위로 널찍한 손이 퍽 떨어졌다. 구둣주걱과 버금가는 쓰라린 아픔에 찬이 또 허리를 튕기며 손을 가져다 댔다. 아씨, 더럽게 맵네.



"딴 새끼랑 키스했어?"

"허, 섹스도 했다."


짜악-!

"아...!! 아, 왜자꾸 때리는데!"



결국 찬이 벌떡 일어나버렸다. 겸은 찬의 성화에도 꿈쩍 않고 그를 노려봤다.



"괘씸하잖아! 내 앞에서 딴놈이랑 섹스했단 얘길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어?"



버럭 화를 내며 닦달한다. 찬은 허, 어이없는 콧숨을 내쉬었다. 한 걸 했다 했더니 왜 화를 내? 7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데.



"넌 안 했어? 지도 무슨 구렁이마냥 혀 굴려놓고,"



키스 경력은 나보다도 지가 더 많은 것 같더만. 캐 물으면 미영이 나리, 계순이, 춘향이 온갖 이름이 다 나올 거다, 아마.



"너 이후로는 안 했거든? 난 오랜만에 물 만나서 신난 거야."

"순애보 납셨네."



그딴 거짓말에 속아 넘어 갈 줄 알고? 나도 이젠 알 건 다 알아.


찬이 겸을 째려보니 겸이 입안을 씹었다. 무언가 캥기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단지, 내 이런 말을 대하는 찬의 태도가... 그간의 공백을 실감시켜 주니까. 그게 아쉽고 속상해서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많이 힘들었어?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삐딱해졌을까?"



안타까움이 잔뜩 묻은 말투였다.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에 찬이 입술을 천천히 다물었다.



"...그래서, 싫어?"



겸과 찬의 시선이 진득하게 맞닿았다. '그래서, 싫어?' 그 말은 겸이 과거에 찬에게 버릇처럼 내뱉었던 말이다. 빠꾸 없이 플러팅 하는 겸을 수줍음 많은 찬이 자꾸 밀어내는 바람에 안달이 나서 그랬다. 뽀뽀하면 하지 말라 그러고 쳐다만 봐도 얼굴 붉히며 눈 깔라고 하니까. 분명 좋아하면서도 피하니까. 냅다 입술부터 박으면 찬이 제 뺨 찰싹 때리며 '야 이 변태야!!!' 소리를 빼액 질렀다.


맞아 난 변태야.


["그래서, 싫어?"]


종종 물었었다.


그때 마다 찬은 또 다시 얼굴을 붉혔고, 내가 토라져서 등을 돌리면,



"...아니, 좋아."



마지못해 대꾸했었다.


그때 네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싫진 않은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건 변함 없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걸 지금 나한테 하고 있단 말이지?


왠지 모르게 괘씸해서 찬의 엉덩이를 꽈악 쥐었다. 찬이 '아아...!' 신음하며 겸의 손을 떼어내려 안달복달 했다. 그래봐라, 내가 어디 힘을 푸나.


변해도 어쩜 이렇게 변해? 난 왜 그런데도 네가 좋은 건데? 심지어는 이 엉덩이도 예전 같지 않단 말이야... 그새 살이 쪽 빠져서 그립감이 상당히 퇴화됐다. 쩝, 입맛을 다시며 찬을 놓아준 겸이 '마음에 안 들어...' 중얼 댔다.


눈물 고인 얼굴로 뒤로 물러나는 찬을 다시 붙잡아 눕혔다. 아직 약 덜 발랐는데 어딜 도망가. 이놈새끼.



"하 씨..."



어쭈? 이놈 봐라. 말 막 하는 버릇이 다시 도졌구나? 



"우리 찬이, 앞으로 나한테 엉덩이 많이 맞겠다."

"내가 맞고만 있을 거 같아?"

"뭐. 너도 나 때리게?"

"......"



그러게. 안 맞고만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힘으로는 얠 못 이길 거고. 그럼 도망쳐야 하나? 그건 싫어. 그랬다가 또 잃어버리면 어떡해.



"할 수 있으면 해봐. 우리 찬이가 때리면 기꺼이 맞아 줄 수 있을 것 같아."



깐족... 깐족. 내가 자길 때리지도, 떠나지도 못 할 거라는 걸 아니까 저러지.



"...짜증나."

"응. 근데, 나 손가락 절단된 거 같아. 아까 네가 물어서."



짜증난다는 말을 저렇게 가볍게 쓰루하고 지 말을 한다. 바로 앞에 코팅된 원목으로 뚜까 맞은 사람이 있는데 엄지 손가락을 들이밀며 엄살을 떠는 겸에 찬이 허,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더 세게 때렸잖아."

"응, 괘씸했어."



그 놈의 괘씸. 그때도 뭐만 하면 괘씸하다며 딱밤을 놓고 매를 들더니.



"호 해줘."

"아, 뭔... 초딩이야?"



찬이 질색했다.



"나도 약 발라주잖아."

"그럼 나도 약 발라줄게, 손 줘 봐."

"이건 약으로 안 돼. 호 해줘야 나아."

"아, 그럼 그냥 아프든가."



부루퉁. 입이 댓발 나온 얼굴로 저를 밉게 노려본다. 그렇게 보면 뭐. 어쩔 거야? 찬이 고개를 팩 돌렸다.



"앗...!"



몸이 붕 뜨더니 배 아래에 단단한 것이 깔렸다. 약 바른답시고 알궁뎅이 상태로 있었더니 금세 또 맞기 좋은 조건이 성사된 것이다. 찬이 불안한 시선으로 겸을 올려다 봤다. 설마 지금 입김 하나 안 불어줬다고 날 때리려고 한다든가, 그런 건 아니지? 동공을 마구 흔드니 겸이 싱긋 미소 지으며 제 엄지 손가락을 찬의 입가에 갖다댔다.



"호 해줄 때까지 맴매~"

"아니 미친,"



진짜라고?



짜악!

"아!"


찬의 머리칼이 폴짝 들썩였다. 이 자식 진심이다. 장난으로 치는 거라기엔 데미지가 꽤 컸다.



짜악-!

"아, 알았어! 할게. 해줄게. 하면 되잖아!"



결국 찬이 겸의 손가락을 덥썩 잡고 소리를 빽 질렀다.



"역시 우리 찬이. 맞아야 말을 잘 들어."



겸이 흡족한 미소를 내보이며 찬을 옆구리를 잡아 무릎에 앉혔다. 다시 달아오른 엉덩이를 대신 문질러준 그는 삐죽 튀어나온 찬의 입술에 쪽, 소리내어 가볍게 입 맞췄다. 절 노려봐도 예쁜 얼굴이었다.



"얼른 호 해줘."



겸은 한쪽 손으로는 찬의 엉덩이를 매만지고 다른 손으로는 엄지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찬이 불만 어린 눈으로 겸의 손가락을 째려봤다.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어야 할 때, 딱 저런 표정이었는데.



"안 해?"



싸아, 겸이 급정색했다. 그 모습에 움찔한 찬이 입술을 씹다 눈을 질끈 감았다.



후,


"......"

"...끝."



성냥 불 끄듯 대충 입 바람을 부는 찬에 겸은 찬을 조물거리던 손을 멈추고 사기 당한 사람 마냥 벙 쪘다. 이때다, 얼른 일어나려는 태세에 겸이 찬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장난해? 다시 해."

"난 한 번 물었잖아. 근데 두 번 호 해주는 건 불공정 계약이지. 너 악덕업주야?"



...머?



"네가 한 건 '호' 가 아니야! '호'랑 '후'는 달라. 내가 '후' 해 달라고 했어?"



겸이 잔뜩 흥분하며 이 사태가 부당하다는 근거를 다 갖다 붙이며 와르륵 토해냈다.



"난 '호'였는데?"



아! 얘 진짜 왤케 뻔뻔해졌어?



"아냐, '후'였어. 내가 똑똑히 들었어. 분명히 '후'였어. 다시 해."



내가 지나 봐라. 이건 명백한 계약 사기지. 또 우기면 엎어놓고 진심으로 '호' 해줄 때까지 때릴 거야.



"쫌생이."

"어...?"

"밴댕이, 소갈딱지."

"...아니,"

"유치하다, 정말. 호랑 후, 발음까지 따져가면서... 참."



팩트를 폭격타로 쳐 맞은 겸이 툭 치면 울 기세로 글썽였다. 우리 찬이가... 변해도 너무 변했어... 어떻게 사랑이 변해...?



"너 나 싫어...?"

"아니? 내가 언제 싫대?"



에헤헤.


내가 싫은 건 아니구나~!


겸이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찬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찬의 얼굴이 온통 겸의 침에 버무려질 때 쯤 찬이 인상을 빡 쓰며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아...!!!"

"아 이제 그만해!"

"그럼 네가 해주든가!"



방금까지 뽀뽀 퍼레이드를 펼쳐 놓고선 이제는 저보고 해달라며 난리 부르스다. 찬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에 겸이 또 상처 받은 개새끼 표정을 했다.



"난 네가 키스하고 싶다고 해서 키스했는데..."

"키스는 쌍방이야. 뽀뽀는 일방적인 거잖아."



나한테 그딴 건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그냥 해줘."



따지지 말고.



"해주세요~. 해봐."



찬이 개구진 표정으로 지시했다. 아 진짜, 킹 받아. 근데 또 안 하면 나만 손해라 짜증나. 찬, 진짜 괘씸해. 못 됐어.



"해주세요."

"아, 뭔가 고분고분하니까 해주기 싫다."

"...야. 나 눈 돌아가는 거 보고 싶,"


쪼옵,


물렁한 촉감이 입술 위로 끈적하게 붙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흡입하며 짧게 맞대어진 혀의 감각은, 찬이 입술을 뗀 즉시 솜사탕 녹듯이 사라졌다.


야릇하다. 겸의 위에 올라탄 찬이, 그의 두 볼을 감싸고 풀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저 광경이. 찬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포갠 채 그를 올려다 보는 겸의 그윽한 시선이.



"...찬아, 키스."

"싫은ㄷ, 우읍,"



이건 섹텐이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편백입니다.

이게 뭐냐구요? 왜 E.N.D 32편이 아닌 단편을 들고 왔냐구요? 네 죄송합니다. 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거 치곤 여전히 퀘퀘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가끔 이런 일상물도 적곤 해야... 더 추진력이 붙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커미션 (or 커스텀) 단편은 아닙니다. 그 소재는 적재적소한 때에 맞추어 게시할 생각이오며..., 부디 여유롭게 기다려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귀엽고, 달달하고, 애처로운. 그런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단편이다 보니 디테일한 사건을 부여하진 않았어요. 찬과 겸은 전애인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뒷이야기는 열린 결말이에요. 겸이 달라진 찬을 여전히 사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 다음에 둘이 뜨밤 보낼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어째 제 소설의 수들은 성격이 다 괴팍한 것 같습니다. 내 사전에 아방수 천상수란 없다. 그치만 공들도 호락호락 하지 않아야 또 제 맛이죠. 고로 이번 편도 쓰는 내내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달달한 소설 쓰니 기분이 새롭네요. 맨날 서로 죽인다 어쩐다 네가 개새끼라느니 내가 개새끼라느니 그런 글을 쓰다 이렇게 몽글 몽글한 이야기를 전개하니 조금은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생각도 좀 나고요.

그나저나 이걸 성인물로 취급을 해야하는 건지 애매하네요. 경고 뜨면 성인물로 전환하겠습니다.

10월 입니다. 그것도 1004. 천사네요. (((존나 어쩔티비?)))

...네. 가을 독감 조심하시고요. 곧 추워진다니 겉옷 잘 챙기세요.

사랑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


트위터: @PB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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