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또…."


희수는 일요일인 오늘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영인에 방문 앞에 섰다. 게임이 새로 나오면 두문불출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5월 초에 영인은 두문불출하며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열흘 가까이 지나도록 이러는 건 조금 걱정이 됐다. 새로 산 원피스도 자랑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좀 불안해서 시무룩강쥐가 되어선 게임 소리가 들리는 방문을 콩콩 노크했다. 


"영인아아…."

"응?"

"게임해?"

"응? 응. 급한 일? 이것만 깨고."

"으으응. 아니야. 그냥 잘 있나…. 궁금해서!"

"잘 있지. 실없긴."


문을 열 용기는 나지 않아서 희수는 노크하던 손을 내리고 문에 스르륵 기대어 미끄러지듯 앉았다. 그리곤 다리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사실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랬지."


평소에도 주로 서로 방이나 거실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게임 주간이라고 해도 뭐 별거 있겠나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둘이 있는 일상이 적응이 됐는지 영 심심했다. 

이쯤 되면 역시 그날 무언가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게 아닐까.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방안에 틀어박힌 영인에 희수는 조금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기엔 그래도 말 걸면 대답은 잘 해 줬다. 잦진 않지만 화장실이나 부엌에서 마주쳤을 때도 평범했다. 


"힝."


희수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곤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희수! 내일 너네 회식해?"

"어? 영인아!!"

"왜 이래? 회식 하냐구우."

"으으응? 월요일인걸. 안 해!"

"그럼 집에 빨리 들어와. 야식 먹게."


희수는 얼굴이 환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인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난 오늘 먹어도 되는데!"

"배불러. 그리고 게임 아직 한창이라구. 알았지?"

"응…. 알았어…."

"귀…엽게 굴긴. 내일 봐. 미안해."


영인은 희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담고 다시 방문을 닫고 게임을 하러 갔다. 희수는 짧은 만남이 통 아쉬웠으나 내일 약속을 잡았단 게 기뻐서 히히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스승의 날이었지? 오늘.'

학생이 내민 자그마한 선물꾸러미에 희수는 오늘이 5월 15일임을 떠올렸다. 비록 마음만 받겠다며 편지만 받고 선물은 돌려보냈지만, 평소에 감사했다며 인사를 전해 오는 학생들을 보면 자신이 허투로 산 것 같지는 않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월요일에 왜 회식이 있냐고 물어보았나 싶었는데, 스승의 날이라서 그런 거였구나. 영인의 말이 한 박자 늦게 이해가 갔다. 그러나 학원은 학교보다 스승의 날이라는 행사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적었고, 딱히 뭘 하거나 하진 않았다. 편지들을 챙겨 칼퇴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우와. 이게 뭐야?"

"짠."

"짠이 아니라~! 송편이랑 경단? 와 진짜 오랜만이다."

"책거리 때는 경단을 먹어 줘야지."

"으응? 그래?"

"어. 나 어릴 땐 구몽 한 레벨? 다 끝내면 할매가 꼭 경단이랑 국수 해 줬거든. 근데 찾아 보니까 송편이 국룰이라길래."

"이런 게 다 있구나."


냠 하고 경단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 영인은 평소와 같았다. 희수는 안심하며 차를 호로록 마셨다. 요새 영인이 마시는지 부엌에서 향이 감돌던 허브티였다. 몸이 훈훈해지는 온기에 희수는 미소를 띠었다. 


"맛있는데. 떡 안 좋아해?"

"아니. 좋아해. 차가 향이 좋아서. 무심코. 먹어 볼게."

"송편은 샀고 경단은 안 팔길래 빚었어."

"경단도 집에서 만들 수 있어?"

"어. 뭐 찹쌀가루만 있으면. 겉에 가루는 카스테라야."

"엄청 맛있다! 만들기 힘들지 않았어?"

"아냐 익반죽만 하면 돼. 가끔 막걸리 빚을 때도 하는 거라."

"술을 뭐 얼마나 자주 빚는 거야. 영인아…."


대답하기 곤란한 듯 차를 홀짝거리며 눈썹만 꿈틀거리는 모습이 답을 알 만했다. 희수는 송편도 하나 먹었다. 어련히 맛있다는 곳에서 사왔을 게 분명해서 맛있기는 했지만, 경단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팥과 카스테라의 부드러운 단맛이 조화로웠다. 오물거리며 먹고 있자니 영인 역시 송편을 우물거리며 답했다.


"1년 동안 고생했어. 스승님."

"푸핫. 스승의 날이라고 이렇게 준비해 준 거야?"

"뭐 겸사 겸사. 경단 먹고 싶었거든."

"고마워. 챙겨 줄 줄 몰라서 감동이다."

"그리고 미안. 게임하느라."

"아. 괜찮아!! 재미있었어?"


영인은 우물우물 경단을 씹으면서 희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수는 얼굴에 뭐 묻었냐며 히히 웃었다. 영인은 꿀꺽 경단을 넘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랬어."

"그래? 열심히 하길래 재밌을 줄 알았는데."

"그냥 뭐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생각나니까."

"그렇구나."

"어. 그래도 뭐 유의미한 시간이었어."

"어떤 내용이었어? 스토리."


영인은 허탈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잘 기억 안 나."



17.2. 


"아 맞다. 영인아! 나 그날 원피스 샀다?!"

"오."

"반응이 약해…."

"오? 오!"

"아하하."

"거참 성가시네. 어떤 원피스인데?"

"안 입던 스타일이라서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는데…. 입어 볼 테니까 봐 줄래?"

"이미 환불 기간은 끝난 거 아니야?"

"그래도. 응? 봐 주라."

"알았어. 갈아입고 와 봐."


신나서 붙들고 있던 팔을 놓고 방으로 향하는 희수의 뒷모습을 보며 영인은 내내 웃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머리를 식탁에 처막곤 두 손으로 뒤통수를 꾸욱 눌렀다. 그리곤 희수가 나오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산뜻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어때?"

"오…."

"괜찮아? 핏한 거 오랜만이라."

"잘 어울리네. 새ㄲ…. 새 옷 같네!"

"새 옷이니까? 다행이다."

"확실히 평소에 안 입던 스타일이긴 하네."

"응. 근데 까맣고 단정한 거 하나쯤 있음 좋겠어서."

"요긴하긴 하지."

"예뻐?"

"어. 예뻐. 구두 신어 봐."

"아, 맞아. 응. 뭐 신지~"


영 불편하게 신발장을 뒤적이며 고민을 하는 희수에 영인은 일어나 옆에 쪼그려앉았다. 그리곤 일어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옷 다 구겨지겠네. 내가 꺼내줄게. 넌 저기 가서 신문지나 꺼내 와."

"응. 고마워."


영인은 신발장을 뒤적거리며 고민을 했다. 오래 서 있는 직업이다 보니 희수의 신발들은 굽이 낮은 플랫이나 스니커즈류가 많았다. 그러나 아까 그 포멀한 원피스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고민 끝에 영인은 희수의 구두 중 그나마 굽이 좀 있는 펌프스 하나와 자신의 까만색 스틸레토 힐을 꺼냈다. 

그리곤 덜렁거리면서 걸어왔다. 신문지를 깔고 위에 서 있는 희수에 다시 손짓을 해 의자에 앉히고 발로 신문지를 주욱 끌고 와 의자 앞에 놓았다. 


"신어 봐. 까만 건 내 거. 240인데 맞을 것 같아서."

"아, 응! 나도 구두는 240 신어. 나 신어 봐도 돼…?"

"어."

"와. 구두 엄청 섹시하다…!"

"으른 여자는 이런 거 신는 거야. 꼬마야."

"누가 꼬마라는 거야! 나 펌프스부터 신어 볼게?"

"응."


굽이 그리 높지 않은 단정한 펌프스도 꽤 잘 어울리긴 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희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약간은 아쉬운 듯한 얼굴로 어때? 하며 물어 왔다. 영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기 구두 신어보라며 손짓을 했다. 

의자에 앉은 희수는 낯선 구조의 스트랩에 조금 허둥거리며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남의 신발이니까 조심조심 버클을 푸느라 더 그런 것도 있었다. 영인은 그 모습을 잠자코 보다가 콧방귀를 흥 하고 뀌더니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았다.


"하여간 손 진짜 많이 가네."

"으아. 미안해. 나 이런 거 신는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뭐 네가 평소에 신을 만한 스타일은 아니긴 하지."


영인은 그렇게 말하며 신발의 스트랩을 솜씨 좋게 풀고선 고개를 들어 희수를 올려다보았다. 굴욕적일 만도 한 그 각도에서도 예쁨을 잃지 않은 얼굴에 희수는 세상이 조금 불공평한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심스레 발을 내밀었다. 뭔가 창피한 것 같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발도 하얗네. 발에도 선크림 발라?"

"여름에 샌들 신을 때는? 아까 씻기는 했는데. 창피하다. 이거. 그냥 내가 신을게!"

"됐어. 자. 반대쪽."

"으아아아아."

"빨리. 나 무릎 아파요."


가는 발목에 스트랩을 채워 주곤 영인은 고갯짓을 하며 보챘다. 희수는 쭈뼛거리며 다른 발을 영인이 들고 있는 구두에 넣었다. 영인은 더 말하지 않고 마저 구두를 신겨 주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잠깐 무릎을 꿇었다고 허리를 툭툭 치는 모양새가 노인네 같았다. 


"서 봐."

"아. 응. 으아."

"어이구. 걸음마도 못 하네. 애기야. 애기."

"으아. 힐 너무 얇아아."


영인은 얇은 스텔레토 힐이 어색한 듯 휘청거리는 희수의 팔을 단단하게 붙들어 세웠다. 희수는 영인의 어깨를 짚고 겨우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리곤 입술을 안으로 말면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때……?"

"잘 어울리네. 역시 내 안목, 내 구두야."

"응. 예쁘다. 어른스럽, 으아아."

"어른은, 한참 멀었네."

"이씨."


허리를 붙들려던 영인은 조심스레 팔을 붙잡았다. 희수는 여전히 영인의 어깨를 붙들고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시야가 낯설었다. 본래도 키가 많이 차이나지 않았는데 힐을 신은 덕에 5cm 넘게 커진 탓이었다. 희수는 자신보다 작은 영인에 즐거워져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인이가 애긴데? 애기야~"

"뭐래. 내 신발인데."

"네가 나보다 작으니까 신기해."

"원래도 별로 차이 안 나잖아."

"그래도. 작으니까 귀엽다. 영인아~"

"나는 안 작아도 왕 크고 왕 귀여워."

"응. 응. 영인이 원래 귀여워."


미간을 좁힌 영인은 손 놔 버린다며 협박을 했고 희수는 미안하다며 다시 꽉 붙들었다. 영인은 희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벗어. 잘 서지도 못 하는 거. 못 신겠네."

"응. 그래도 예쁘다. 이보다 조금 굽 낮은 거로 비슷한 거 사볼까 봐."

"그러든지. 빨리 계단 위에서 내려와."

"계단까진 아니다. 뭐."


희수는 삐죽거리면서도 얌전히 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본 게 있어서 신을 때보다는 수월하게 풀어내는 모습에 영인은 살짝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아 들었지만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희수는 얌전히 구두를 벗어서 신발장에 넣어두고선 이제 갈아입어야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영인은 후 숨을 깊게 뱉으며 경단을 천천히 씹었다. 맛있네. 맛있어. 그때 방안에서 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영인아. 나 조금만…!"

"아 또 왜애애."

"미안해. 그 머리카락이. 아야야."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희수가 지퍼를 붙들고 낑낑대고 있었다. 지퍼 사이에 머리카락이 낀 것 같았다. 영인은 진짜 손 많이 간다며 투덜거리면서 지퍼에서 머리카락을 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면서 지퍼가 조금 내려갔고 흰 목덜미와 그보다도 더 하얀, 백설기 같은 등이 까만 원피스 틈 사이로 보였다. 영인은 뇌리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떨쳐 내려고 애를 쓰며 이를 악 물었다. 

플래시백을 일으키기에 너무나 적합한 환경에 영인은 후우 다시 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키 차이가 별로 안 났고 영인이 머리카락을 빼려고 꽤 바투 다가 서 있었단 것이었다.


"으, 흣!"

"?!?"

"미, 미안. 놀라 갖고…."

"어, 응. 다… 다 뺐다. 와아~!"

"와아~!"

"…."

"…."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에 영인은 갈아입고 나오라며 허겁지겁 희수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조희수의 방, 침대, 새하얀 등, 목소리. 눈앞에 생생하게 멤도는 광경에 영인은 주전자 안의 허브티를 맥주처럼 들이켰다.


"으앗. 아뜨뜨…!"


당연하겠지만 뜨거운 허브티는 맥주와는 달랐다. 혀를 내밀고 식히면서 영인은 현타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괴로워했다. 

자신만 잊어 버리면 되는 기억이었다. 실수는 실수로 묻어야만 했다. 조희수는 공영인에게 이미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이자 하우스메이트였기에. 



17.3.


마가 꼈다고밖엔 할 수 없었다. 그날 앉은뱅이 술인 소곡주 덕분에 희수도, 영인도 흠뻑 취해버린 게 문제였다. 민서의 일과, 지수의 일을 털어놓은 희수는 비밀이 없다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속시원해했다.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영이나아~."

"왜."

"그 개새끼한테…. 또 연락 와따?"


개새끼라는 말에 영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 개새끼재석?!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그러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받아 줬어?!"

"그럴 리가……. 근데에."

"왜? 그 새끼가 뭐래? 듣지 마 개소리."

"웅. 웅. 우리 영인이 강쥐~~"

"아. 머리 흐트러져!"

"이히히. 기여워~"

"완전 개꽐라네. 근데 뭐?"

"아. 그냥 뭔가 나도 좀 잘못한 게 있네에~ 했다?"

"뭘? 네가 뭘!"

"도베르만 같애~"

"아 웃지 말고. 니가 뭘 잘못해 99.99% 그 새끼 잘못이지."

"내 잘못이 0.01%는 있다?"

"오차범위야."


희수는 취기에 빨개져서는 마찬가지로 빨간 영인의 볼을 마구 주물렀다. 자신을 위해 숨김 없이 화를 내 주는 영인이 좋았다. 그래서 할말 못할말 없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가 별로 안 해 줘꺼드은."

"뭐를?"

"……섹스."

"아. 오. 어."


뜻밖의 화제에 영인은 희수가 정말로 만취했구나 생각했다. 천하의 유교걸 조희수의 입에서 나온 섹스라는 단어가 어색했다. 그래서 말리지 못했다. 신기해서 또 궁금해서. 얘는 어떤 섹스를 한 걸까. 나쁜 호기심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그치만…. 아기는 무섭구. 아프기만 하구."

"아프다고?"

"어…. 그거 할 때 무섭기도 하고. 재ㅅ, 그 개새끼."

"개새끼라고 잘했어. 진짜 더 개새끼네. 섹스까지 못하는 개새끼."

"원래 안 그래…?"

"사람에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안 그럴걸."

"그렇구나. 그래도…. 하아. 모르겠어."


한참을 얘기한 희수는 결국 식탁에 푸욱 엎드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성욕이 없나 봐…."

"사람마다 다르니까. 나도 뭐…."

"너도 해써?"

"그, 뭐, 그거?"

"응. 그 언니랑. 했어?"

"……그야. 몇 년을 사귀었는데."

"와아아."


손뼉을 치는 희수에 영인은 어이가 없었다. 귀엽게도 군다. 지금 이게 손뼉 치며 좋아할 일인가. 


"영인이는 잘할 거 같애."

"나야 뭐……. 끝내 주지?"

"와아아. 어떻게?"

"응, 억?"

"어떻게 끝내 줘?"

"그… 아니 뭐를 물어보는 거야."

"궁금하니까!"

"하아?"




이게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인지. 영인은 말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앞의 물음표 살인마를 도무지가 막을 수가 없었다. 조희수 술버릇 더럽네…. 순진한 얼굴로 물어오는 무지막지한 질문에 영인은 엉겁결에 지난 애인과의 성생활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

"그니까 아까부터 왜 와와 하냐고."

"재밌게따아."

"뭐가 재밌어?! 아오. 조희수."


영인은 맥주캔을 까서 꿀꺽 마셨다. 야한 얘기를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흥분이 올라왔다. 흥분을 식히려고 맥주까지 깠더니 점입가경으로 흥분이 식기는커녕 술기운 때문에 더 심해졌다. 꺄꺄 즐거워하는 희수를 두고 영인은 미치겠다는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해 보구 십따아."

"…뭐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시이러. 영인이랑 야한 얘기 하꺼야!"

"미쳤나 봐……."

"우웅. 졸려…."

"제발 자라. 자."


영인은 안 되겠는 듯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희수는 의자에 기대어 헤롱거리더니 양 팔을 내밀었다. 뭐하자는 거냐며 영인이 눈썹을 구겼지만 아랑곳 않고 "으으응!" 하며 보채는 꼴이 평소의 어른스럽고 착한 조희수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었다. 

영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선 마지못해 양팔을 벌려 희수를 안아들었다. 가벼운 편이긴 했지만 취해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해 묵직하게만 느껴졌다.


"무우거워어어!"

"미아내…."

"하 미친. 조희…. 아오."


맞다. 얘 가슴…. 컸지. 영인은 오만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죽고 싶어졌다. 9년을 가까운 친구로 지낸 애한테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혼란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지금 제 팔이 희수를 안은 걸 풀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영인은 겨우겨우 말을 안 듣는 다리를 움직여 희수를 방안까지 질질 끌고 와 침대에 눕혔다. 


"하아. 진짜 미치겠네…."


자신과 비슷한 키의 사람 한 명을 만취한 채로 옮기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인은 자타공인 약골이었으니 더 했다. 힘이 쫙 빠진 영인은 희수를 눕히고 도무지 일어설 기운이 없어 그 옆에 탈진하듯 쓰러져 누웠다. 다시 생각해 보며 그때 그냥 기어서라도 방에 갔어야 했다. 


"영인아아."

"아 안 자냐…. 자라 좀."

"나 궁금해."

"또 뭐가…. 꺅?!"


제 허리, 그것도 맨살에 닿는 감촉에 영인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손바닥이 가는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영인은 눈이고 머리고 팽팽 돌아 증기가 나올 것 같았다. 옆을 돌아 봤더니 완전히 눈이 돌아 있었다. 영인은 생각했다. 자기 좀 좆된 거 같다고. 


"지짜 안 아프고 기분이 그렇게 조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람마다 개체 차이도 있고, 그게 뭐 직접경험으로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했어?"

"아니이."

"너도 나 속여써?"

"미치겠네. 진짜. 왜 울려 그래. 왜애."


영인은 다급하게 희수를 끌어안고 어르고 달랬다. 희수는 울먹거리더니 훌쩍거렸고 영인은 미칠 노릇이었다. 취기에 세상이 뱅뱅 돌았다. 이러다 정말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알려 줘."

"씨발…."

"진짜루 기분 좋은 건지."

"이건 또 언제 벗었어…. 브라는 또 왜."

"우리 브라친구니까~"


그새 단추가 몇 개는 풀린 파자마와 자랑하듯 그 안의 속옷을 내보이는 희수에 결국 버티고 버티던 영인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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