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해, 스바루."

두 번째였다.

첫번째는 고백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흩어져 버렸으니까.

'하?' 라는 얼빠진 한숨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은 채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율리우스가 곧게 뜬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조용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달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잔잔한 호수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청아한 눈빛이, 흘러내리는 꿀처럼 진득하고 달콤한 눈동자가 오롯이 스바루를 담았다. 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두번째 고백을 들었다.

 기분좋게 들리는 울림이 고막에 닿아 울려 그제서야 말을 형성한다. 나지막한 고백을 머금고 되새기고 이해해 그 의미를 삼킨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황당하다는 듯이 떠오른 얼굴이 황금빛 눈동자에 부딪혀 노을처럼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율리우스의 시선 너머로, 거울처럼 비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바라보던 스바루가 이윽고 눈을 감고 웃음을 터트리는 율리우스를 보며 노성을 내질렀다.

"너... 너, 바... 바보아냐?! 그런 말도 안되는....!"

"후후, 미안. 너무나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라서."

"너, 너 지금 그 말 뻥이지? 누가 그렇게 고백하고 스무스하게 평소처럼 재수없게 굴어?! 이젠 놀릴게 없어서 이딴걸로 놀리냐?!"

"...평소처럼 보이는가? 이렇게 보여도 제법 긴장하고 있었다만, 네 그 얼굴을 보니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이야." 

시원하게 머리를 쓸어올린 율리우스가 후련한 듯 웃어보였다. 

얄미운 놈. 마음편히 웃는 것은 고백한 쪽이다. 고백받은 사람의 마음은 뒤죽박죽인데. 

반신반의한 채로 씩씩거리는 스바루를 향해 율리우스가 손을 뻗었다. 바보같이 몸을 움찔 떨어버리자 멈칫한 손이 조심스레 스바루의 머리로 향했다. 차마 껴안지도, 얼굴의 따스한 온기를 어루만지지도 못한 채 머리끝자락만을 사라락 스친 손가락이 아쉬운 듯 제자리로 향했다.

"특별히 네게 부담을 줄 생각은 없어.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 때 대답해 줬으면 해. ... 너만 괜찮다면 그때까지는 평소처럼 지내줬으면 좋겠는데."

 별만 총총히 떠 있던 밤. 미소를 머금은 채 밤인사를 건넨 율리우스는 아쉬운 듯 발걸음을 돌렸다. 잘 다듬어진 도보를 자박자박 걷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와 섞여 사라지고, 커다란 나무를 지나 길 모퉁이를 돌 때까지 마지막까지 인사라도 하는 듯 펄럭인 망토를 끝까지 눈에 담으며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 좋아한다니, 그런 거."

말도 안되잖아. 

그제서야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스바루가 마찬가지로 발걸음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향긋한 꽃내음, 찌르르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 발목을 스치는 들꽃과 청량한 밤공기. 그리고 기억속에서 맴도는 율리우스의 목소리.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 작은 돌멩이 하나가 운동화에 치여 도보 구석으로 도르르 굴러갔다. 눈으로 의미없이 돌멩이를 쫓던 눈이 이윽고 질끈 감겼다.

"아아!!! 뭐야 이게, 정말!!"

아무도 없는 길가 위로 소리를 내질러도 아무런 풍경도 바뀌지 않는다. 찌르르 찌르르, 반짝이는 별들, 그리고 마음의 실타래 어느 하나 풀린 것 없이 여전히.

혼자 중얼중얼 불평을 내뱉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이 작은 속삭임이 들린 듯 했다.

'너도 사실은 좋아하는구나?'

그 질문에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저택으로 돌아가 침대에서 이불을 뻥뻥 걷어차고 밤새 뒤척이느라 베아코에게 딱밤을 얻어맞은 것 밖에는.



*



왕성의 복도 위로 검은 구둣발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간만의 재회에 사담을 나누던 기사들이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보고는 다급히 인사를 올리자,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다급히 쓸어올린 율리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의례적인 행사. 겉치레뿐인 행사라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기강을 바로잡고 차후 왕성에서 열리는 행사나 중요한 회의 등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행사중 하나이다. 왕선 후보의 기사들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서신을 통해 중요한 내용들은 전달되지만, 보는 눈이 많고 눈으로 타 진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대부분의 진영에서는 기사들을 출석시키고 있었다. 

 아나스타시아는 특별히 율리우스에게 크게 강요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본인의 성실한 성격과 기사단에 대한 애정 탓에 율리우스 역시 자의적으로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물론 오늘 만큼은 조금의 사심이 들어간 것도 사실이지만. 

  "아, 여기 있었군."

눈 앞의 호리호리한 어깨를 잡자 다갈색 머리의 귀여운 얼굴이 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아, 율리우스! 그렇게 급하게 페리를 다 찾구.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흐음... . "

노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이던 페리스가 묘한 소리를 흘렸다. 하얀 살결 위로 내려앉은 갈색 머리카락 위로 두어번 예민하게 귀를 쫑긋거린 페리스가 너무 뻔해서 재미없다는 듯 툭 내뱉었다.

"스바루큥이라면 정문에 있는데?"

"그건 알고있어. 단지 음, 그의 상태에 대해 조금 얘기해줄 수 없을까 해서."

"아~! 그러고보니 아침에 상태가 꽤나 안좋기는 했지? 완전 피곤에 쩔어서는."

평소와 다르게 비틀거리며 나타난 스바루는 행사 내내 율리우스에게는 접근도 하지 않았었다. 단지 페리스가 스바루를 잡아끌며 무언가 설교하는듯한 모습을 봤었던 것 뿐인데, 추측대로 스바루의 상태는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성격 상 자신의 고백 때문에 고민하느라 잠을 설친 것은 아니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니만큼 그의 상태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만나러 안갈거야?"

 굳어진 안색을 곰곰히 살피던 페리스가 물었다. 페리스의 물음에 황금빛 눈동자를 내린 율리우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스바루에게는 부담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가 나를 피하는게 명백한 이상 만나러 가는것은 내 욕심일 뿐이야."

"율리우스는 이상한 데서 고집 부리더라? 페리는 보고싶으면 보면 된다고 생각해. 스바루큥이 율리우스를 안만나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니라. ... 아."

말을 멈춘 페리스가 서둘러 입을 막았다. 삐질삐질 흐르는 땀방울이 눈치없이 흘러 명백하게 무언가를 숨긴다고 자백한다. 

"페리스."

진지한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어가며 페리스를 잡은 팔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피할 수 없는 압박감에 애써 눈을 돌리던 페리스가 이윽고 졌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고는 불만스러운 듯 율리우스를 노려보았다.

"말한다구, 말 해! 스바루큥은 저주에 걸린것 때문에 율리우스를 걱정시킬까봐 안만나는 것 뿐이라구!"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 바람이 일었다. 미처 잡기도 전에 바람처럼 정문을 향해 사라진 율리우스의 뒷모습을 보며 페리스가 잡혔던 팔을 살살 쓰다듬었다. 

"뭐, 그것도 저주라고 할 수 있는건지 페리도 잘은 모르겠지만."



잠깐 눈을 뗀 사이 이렇게나 빨리 위험해지다니. 제 몸은 아낄 줄 모르면서, 능력도 실력도 전부 부족해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 몸을 내던지는 사람. 그가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같은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줄 것을 믿기 때문이리라.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불의의 상황에서는 제 몸을 깎을 줄 밖에 모르는 바보같은 남자. 

그런 스바루를 사랑하게 된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정신없이 뛰어가던 시야 끝자락에 정문 입구가 보였다. 벌써 사라진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해 일단은 중앙 광장으로 가봐야하나, 생각하던 차에 벤치 위에 느긋하게 앉아 졸고있는 사람을 발견해 율리우스가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스...... ."

팔짱을 낀 채 벤치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이름을 부르려던 율리우스가 급하게 말을 삼켰다. 고른 숨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와 일단 한시름 놓은 율리우스가 살며시 스바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피곤이 역력한 얼굴. 도대체 무슨 저주를 받아 저리도 피곤해 보이는 것인지. 

멀리서 들리는 광장의 호객소리. 느긋하게 날아와 얼굴앞을 지나가는 나비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보면 스바루가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가. 상냥하게 내려간 눈매에 한가닥 내려온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흔들거린다. 조금 벌려진 입술 사이로 평화로운 숨소리가 들려와 어쩐지 급하게 뛰어온 자신이 바보같게 느껴졌다.

어깨에 힘을 뺀 채 율리우스가 잠자코 스바루를 바라보았다. 늘 만나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기 일쑤지만, 가끔 보여주는 웃음이 눈부시게 예쁘다는걸, 너는 아마 모르겠지. 

"자는 얼굴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인데 말이야."

조용히 읊조리자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스바루가 어설프게 눈을 떠 율리우스를 마주보았다. 아직 비몽사몽인 듯 반쯤 뜨여진 눈 앞으로 율리우스가 긴 다리를 피고 바로 서 인사를 건네자 몇번 더 깜빡인 눈동자가 이윽고 커다랗게 뜨여진다.

"좋은 아침."

"...유.... 히익?? 네가 왜 여기에...!"

"잠깐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스바루?"

"급한 용무가 생겨서. 바이바이!"

불쑥 손을 내밀어 율리우스의 얼굴을 가리는가 싶더니 벤치에서 긴급탈출. 광장 쪽으로 뛰어가는 모양새가 불안해보여 따라가자 앞서가던 스바루가 비명을 질렀다.

"왜 따라와?!!"

"왜냐니. 네가 도망가서... 인게 당연하지 않나?"

"도망인거 알면 놔달라고!! 고양이가 쥐 가지고 노는거야 뭐야, 너 달리기 나보다 빠르면서?!!"

마지막으로 왕도의 거리를 숨 가쁘게 뛰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근위기사단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늘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 시간들은 의미있고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분수 앞으로 생기는 작은 무지개라던가. 기분좋게 숨 찬 느낌이라던가. 경악하면서 뒤쪽을 바라보는 재미있는 얼굴이라던가. 간만에 느끼는 일상의 모습이 너무나 즐거워서.

"웃지 마--!! "

"아, 스바루?"

"부르지도... 어, 으아ㅏ?!"

뒤를 돌아보며 뛰던 스바루가 분수대 앞에서 앞으로 성대하게 고꾸라졌다. 풍덩, 높이 솟아오른 물줄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작은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러게 앞을 보고... 스바루?"

얕은 분수 속에서 엎어져 꼬르륵 공기방울을 내뱉는 스바루를 보고 그제서야 율리우스가 다급하게 분수 안쪽으로 첨벙, 들어갔다. 평소라면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역정을 낼 터인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스바루가 추욱 늘어져 얕은 숨만을 쉬어낸다. 

페리스도 스바루의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었는데, 평소처럼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반가워서 애써 피하는 모습에도 기어코 쫓아가버린 나 때문에.

"스바루! 스바루?!"

"으... ."

다급히 보채는 소리에 반쯤 눈을 뜬 스바루가 몽롱하게 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보이는 인상이 어렴풋이 미소를 자아냈다. 그 변화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힘없이 올라간 손이 부드럽게 어깨에 놓여졌다. 

푹 젖은 옷이 물방울을 똑똑 떨어트리고, 차갑게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한방울 톡, 떨어진 물방울이 율리우스의 뺨에 떨어졌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검은 눈동자는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고혹적으로 내려뜬 눈이 서서히 다가와 율리우스의 입가 근처에서 얕은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영락없이.

너와.


닿을 듯 말 듯 스친 입술에 열기를 느끼기도 전에 다시금 정신을 잃은 스바루가 미동도 없이 율리우스의 품 안에 떨어졌다. 



  *



율리우스가 고백을 했던 밤. 어쩐지 이불을 뻥뻥 차고 밤새 뒤척이던 스바루에게 딱밤을 한대 때렸던 베아트리스는 곧이어 스바루의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원래라면 미량의 마나가 베아트리스에게로 흘러들어와야 정상이었으나, 그 개미눈물만큼의 마나가 그대로 소멸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정체모를 피곤함에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뻗어서 누워버리지만, 겨우 잠든 잠에서조차 가위에 눌린다거나, 중얼중얼 헛소리를 내뱉거나 노성을 지르는 듯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해 슬슬 무언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즈음, 왕성에서 행사가 열렸다.

옆에서 끙끙대는 스바루 옆으로 정체모를 '저주'의 증상에 대해서 듣게된 율리우스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 날, 헤어질 때 까지만 해도 스바루는 멀쩡했다. 돌아가는 길은 메이저스령으로, 누군가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진영 내의 사람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바루가 했다던 묘한 증상은... .

'아자아자 스바루 쾌유 위원회' (작명: 에밀리아)의 일원으로 들어오게 된 율리우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바루의 경우가 같은 사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문헌에 의하면 죽은 자의 원혼...  즉, 유령이 깃들어 일시적으로 이상행동을 했던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깐 기다리는것이야. 유령이란건 그러니까 분명... '홀로?'"

 율리우스의 대답에 희망을 걸고 눈을 빛내던 에밀리아와 베아트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하게 변했다. 하얗게 질려 물러나는 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에밀리아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바닥을 짝, 부딪치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면 콧쿠리상에게 스바루를 낫게 해달라고 하는건 어때?"

"에밀리아님. 그 콧쿠리상이란 분은...?"

"저번에 스바루가 불러내줘서 친해진 '홀로'님인데, 그 분은 엄-청 친절하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대화에 도움을 청하듯 베아트리스를 바라보지만, 테이블 위로 종이를 올려놓으며 어느새 무언가의 준비를 하는 자세를 보고 율리우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종이에 글자와 숫자를 적어넣던 베아트리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율리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전, 내놓는 것이야."

잠깐의 침묵 후에 앙증맞은 손에 작은 은화 한닢을 내려놓자 베아트리스가 작은 손으로 동전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시작된 제 2회 콧쿠리상. 참가인원은 앓아누운 스바루, 진지하게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에밀리아, 베아트리스, 그리고 이 정체모를 강령술에 반신반의로 참가하게 된 율리우스와 관전하는 람 되시겠다. 

"...람을 불쌍하게 쳐다봐도 떨어지는 건 없어."

어떠한 설명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결국 고개를 글자판 위로 돌린 율리우스 앞으로 이미 이름 모를 강령술은 시작되고 있었다.

"콧쿠리씨. 음, 저 오랜만이에요! 혹시 스바루를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어... ."

"그런 서두는 필요없는것이야, 에밀리아. 콧쿠리씨는 지금 있는것일까?"

"베아트리스, 못 써! 오랜만에 초대하는건데 제대로 인사하지 않으면 안되잖니!"

도무지 두 사람의 행동에 따라가지 못하던 율리우스가 문득 손가락이 스르륵 움직이는 것을 느껴 고개를 내리자 놀랍게도 동전이 '예' 라고 적힌 곳으로 이동했다. 마찬가지로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낀 두 여성진이 말싸움 하던 것도 잊고 금새 두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혹시, 실례지만 스바루가 앓아누운것은 당신 때문인가요?"

에밀리아의 질문에 손가락이 스르륵 움직인다. 세 사람의 손가락이 올려진 동전. 따라서 누군가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조작이 가능한 움직임이지만, 실내를 기이하게 감돌기 시작한 정체모를 마나가 느껴져 율리우스가 호박색 눈을 빛냈다. 실전마법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는 율리우스지만 이런 식의 오컬트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깊게 알지 못한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기현상에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순간, 동전의 움직임이 멈췄다.

'응, 미안.' 

정중하게 종이 위를 오간 답변에 세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미안? 그래도 제법 호의적으로 느껴지는 답변에 율리우스가 처음으로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스바루에게서 떠나가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동전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놓여져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상황도 나타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찻잔이 달그락대며 람이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정적을 울렸다. 치솟았던 기대가 낙담으로 바뀌고 이내 무슨 말이라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자 문득 뒤에서 스바루가 벌떡 일어나 유령같은 눈빛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키스.... 우아학?!"

단어를 내뱉자마자 몸 중앙을 관통하는 발차기에 침대 너머로 굴러 날아간 스바루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평온하게 치마를 정돈하고 차를 내려놓은 람이 짐승 이하를 보는 눈빛으로 스바루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바루스의 음흉함에는 질렸어. 어디까지 밝힐 셈이야?"

"마치 평소에도 밝힌다는 듯한 말투 그만 둬!! 내가 뭐라고 했는데?!"

"맞아, 람! 콧쿠리상이 있는데 손님 앞에서 무슨 짓이야!"

"에밀리아땅?! 내 인권은?!"

몸 컨디션이 좋지만은 않은지 이불을 돌돌 말고 테이블로 내려온 스바루가 베아트리스 옆으로 다가가 작은 정령 옆으로 몸을 기댔다. 스바루의 체중에 떠밀려 점점 자세가 아래로 내려가던 베아트리스가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기겁을 하며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빠.. 빠냐의 인형이 움직이는것일까?!"

어수선한 테이블 위로 날아온 인형은 굴러다니는 펜을 잡고는 직접 무언가를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나 대신 사랑을 이루어 줘.'



*


'너도 사실은 좋아하는구나?'


그날 밤 그 질문에 뭐라고 답했었더라. 소녀는 스바루의 머릿속에서 열흘 내내 율리우스에 관해 묻고, 스바루의 마음에 대해 물었으며 장난처럼 스바루의 심장 고동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작작 좀 해! 네가 이런다고 율리우스를 좋아한다고 착각이라도 할 거같아?'

피곤하고 괴로워 내뱉은 노성에 머릿속에 조용히 대답이 울려퍼졌다.

'네 심장고동으로 장난친 적 따위 한 번도 없어.'



"저, 그럼 스바루 화이팅!"

달칵, 에밀리아가 닫고 나간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스바루가 진심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말도 안돼."

스바루의 넋두리같은 말에 율리우스가 스바루를 바라보았다. 율리우스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의 소원 때문에 자신이 좋다고는 하나 억지로 입맞춤따위를 해야 한다니. 동화 속 공주님도 이런 식으로는 키스 안한다.

어쩐지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 다시금 한숨을 폭 내쉬자 잠시 뜸을 들인 율리우스가 스바루가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네 안에는 없는 것인가?"

"아마도? 방해되니까 협탁 위에 화분에라도 들어가서 지켜본다나 뭐라나. 그건 그거대로 소름돋지만."

공연히 협탁 위를 바라보며 스바루가 말을 내뱉자 율리우스 역시 화분을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두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화분은 그 자리 그대로. 화분과 눈싸움을 하는 것도 어처구니 없게 느껴져 스바루가 먼저 율리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아... . 말해두겠는데, 나는 너 좋다고 한 적도 없고, 이건 일종의 의료행위! 심폐소생술! 비지니스! 니까 말이야. 이상한 사심같은건 집어넣어라?"

"좋아하는 상대에게 키스하라고 해놓고서는 너무 무리한 요구하고 생각하지 않나?"

"첫키스도 아닐텐데, 그정도 프로페셔널은 요구해도 괜찮잖아?"

"...... ."

율리우스의 침묵에 비아냥을 기다리던 스바루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진짜? 이정도 미남에 특기가 에스코트인 율리우스가 첫키스라고? 얼굴로 놀라움을 전부 표현하는 스바루 앞으로 어쩐지 겸연쩍다는 듯 볼을 긁적인 율리우스가 미소 띤 얼굴로 스바루를 마주 보았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끌리는 상대를 만난건 네가 처음이라서 말이야."

"율리우스씨, 무겁습니다만...?"

"이것이 네 대답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있다. ... 뭣하면 없던 일로 해도 좋아."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스바루의 뺨으로 다가왔다. 별만 총총히 떠 있던 밤, 차마 닿지 못했던 손이 이제야 닿아 보드랍게 뺨을 쓸어내린다. 장갑, 언제부터 벗고 있었더라. 기사복을 입은 채 장갑 벗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없었던 일로는 하지 않아."

네가 이렇게나 진지하게 마주해주고 있으니까. 뒷 말을 잇기도 전에 뜨거운 입술이 숨을 막는다. 조금씩, 천천히 집어삼키는 숨이 부드럽게 스바루를 감싸안았다. 기뻐하고 있는걸까나. 귓가를 울리는 쪽, 쪽하는 소리가 어색해 어깨에 힘을 주자 뜨거운 손이 허리를 감싸안는다. 

"긴장 풀어, 스바루."

"읏... . 웃기지 마."

허세부리는 말에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자아낸 율리우스가 사양않겠다는 듯 입술을 빨아온다. 갈구하는 숨이 겹치고, 보드라운 혀를 포근하게 감싸안는다. 미끌미끌, 기묘한 감각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것만 같아. 흘러나오지 못한 신음이 삼켜져 설탕처럼 달큰한 감각이 전신에 퍼진다. 너는? 너는 어때? 

탁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이 눈앞에서 빛나는 것을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눈빛. 그제서야 깨닫는다. 줄곧 원하고 있었구나.

자연스레 떨어진 얼굴이 스바루를 마주보았다. 이미 알고 있다. 구조활동은 끝났다는 걸. 기묘한 마나의 흐름은 사라지고, 지금 이 방에 남은 것은 오롯이 두 사람 뿐이라는 걸.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그것은 완전한 사심.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몸을 떨어 트릴 수 없는 이유는.

 "..... 한번 더."

스바루의 속삭임에 율리우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먼저 입을 맞춘 것은 나였을까. 아기새처럼 벌린 입으로 갈구하듯 율리우스의 입술에 장난치자 참을 수 없다는 듯 덮쳐들어온다. 

달디 단 감각에 매달리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좋아 몇 번쯤 더 율리우스의 어깨에 팔을 올렸던 것 같다. 몽롱하게 녹아내린 기분 속에서 입을 열어 속삭이자 율리우스가 세상 어느때보다 아름답게 웃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무래도 나, 너를 좋아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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