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댐호 댐호댐
  • 상중하로 나누어 쓰려던 것이 길어져서 넘버링을 붙입니다. 5편 안에 끝날 예정.
  • 230805 > 240130 수정






“이제 그만 집에 가봐요, 대만 군. 늦었네요.”

라멘 집을 나서고 보니 느릿한 양호열의 식사 시간 때문이었는지 어느새 해가 모두 기울어 어두운 하늘이었다. 밤이라고 하기엔 이르고 저녁이라고 하기엔 조금 늦은 거리의 빛을 두고 양호열은 정대만을 쳐다볼 기색도 없이 곧바로 등을 돌렸다. 한 걸음, 내딛는 속도가 줄곧 함께 걸었던 그 속도와 같이 매우 느렸다. 또 한 번 이번에는 목발을 내민다. 꼭 서툰 오른손 젓가락질로 어느 세월에 다 먹을까 싶었던 라멘 면발처럼 아슬아슬하게 지면을 짚은 채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잠자코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대만의 감상은 그가 익숙지 않은 오른손으로 면발을 집어 올리면서도 이쪽이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무어라 불평 한마디도 없이 세월에 네월아 그릇만 휘저었던 손짓을 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가겠냐.

갈 길 가더라도 집안 사정 걱정을 해 줄 거면 좀 살갑게 대할 수는 없는 걸까. 여럿이 있을 때엔 곧잘 농담도 걸기에 역시 제 친구들과 비슷하게 붙임성 좋을 녀석이라고 생각했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사실 본래 성격이 완전 안 좋은 거 아닐지.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한 양호열의 뒤통수를 다시금 쳐다보면서 결국 방금 떠올린 판단을 부정하듯 홀로 어깨를 으쓱였다. 뒤통수 반대편 아주 슬쩍 보이는 하얀 뺨 위로 무슨 표정을 지은 채 걷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으나.

정대만은 본능처럼 상대의 인상을 파악하는 데에 저도 모르게 특출난 면이 있었다. 역시 이 녀석, 안 좋은 성격은 아닌 거 같은데.

‘에이 씨.’

동그란 뒤통수를 두고 떠올린 불만을 섭섭함인 줄도 모르고 정대만은 애꿎은 뒤통수만 벅벅 긁었다.

‘사실 그냥 내가 싫은가?’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러저러한 사유보다는 그게 좀 더 확실했다. 싫어할 만한 짓을 했으니 딱히 남들 보는 눈이 없는 자리에서 살갑게 굴 필요도 없을 일이다. 참 쉽지 않은 놈이네, 그런 생각을 한다. 학교 담장 안에서는 누구와도 다를 것 없게 굴더니 벗어나자마자 저런 모습이라니 영 어색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학교 안에서도 어색하지 않느냐,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도 또 대답이 시원찮을 일이었지만…….

양호열이 움직인 거리는 정대만이 보기에 제자리걸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두어 걸음 성큼 발만 옮기면 바로 옆에 붙어버릴 수 있을 공간감을 두고 정대만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 하고 양호열이 잠시 멈춘다. 고개만을 슬쩍 돌린 그가 말했다.

“라멘 고마워요.”

가만보면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 같고 꼭 체한 것 같은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놨으면서도 하는 말은 겉으로나마 살갑기는 했다. 눈이고 입이고 웃지도 않고 그냥 던진 말이었지만 내용물에 고마움이 포함되어 있으니 애써 그렇게 생각 한다.

……다음에 쏜다는 말은 쏙 빼놓네. 물론 역시 안 받아 먹을 거지만. 다시금 양호열의 몸이 천천히 제 갈 길을 향해서 돌리는 것을 못 참고 또 성큼 그 옆으로 가서 서 버렸다. 목발 끝을 앞으로 옮기려던 양호열이 우뚝 멈춘다.

“안 가요?”

“데려다준다니까? 십 분만 더 가면 된다며. 여기까지 와서 뭘 라멘만 먹고 가냐.”

“아니, 집에서 뭐라 안 해요? 정신 차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뭐 씨, 내 정신이 뭘! 어차피 늦은 거 좀 더 늦는다고 집에서 뭐라고 하지도 않……는 건 아니지만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아니, 야. 나 그래도 이 정도면 좀 성실해진 거 아니냐? 방황했을 때만 두고 보면 이후엔 낙제 빼고는 별달리 책잡힐 것이 없으리라 생각한 정대만의 변명이 이어졌다. 아니 울 엄마가 늦게 오면 밥 주기 귀찮다고 화내시기는 하는데, 먹었으니까 뭐 괜찮지 않나. 아 물론 밥 준다면 먹을 거기는 한데. 양호열에겐 딱히 궁금하지도 않을 사정이다. 그가 무어라 떠들든 말든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이는 동안 자연스레 양호열의 한쪽 팔을 붙드는 손이 있었다. 정대만의 손이다. 양호열은 약간의 체념을 담아 온전한 걸음을 옮기는 데에 신경을 쏟으며 들이마셨던 공기를 한숨처럼 내뱉었다.

“뭐……. 그럼 마음대로 해요.”

그 뒤로는 또 말없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앞으로 십 분만 더 가면 도착한다고 했던 양호열의 집은 그의 걸음이 느린 탓이었을 지 한참이 지나도 도착했다고 말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십 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긴 거였나. 경기할 땐 힘들어도 길었던가 싶으면 지나 보니 짧은 시간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정도의 시간을 들여 걷다 보면 특대 사이즈로 거의 들이마시듯 뱃속에 밀어 넣은 라멘도 집에 갈 무렵엔 모두 소화될 지도 모르겠다. 정대만은 무심코 집에 돌아가 도착하게 될 시간을 그렸다. 여덟 시 반, 아니면 아홉 시……? 아니지, 걸어온 것일 뿐이니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그래도 그보다는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 가기 전에 전화를 걸어놔야 여사님 잔소리가 덜하겠다. 역시 배가 고파질 것 같다. 저녁 밥 달라고 하면 잔소리를 듣게 될지도 몰랐다. 밥 먹을 땐 그렇게 좋아하면서. 집에 돌아가면 늦은 저녁 식사를 은근히 졸라봐야겠다. 정 씨 가족의 실질적 우두머리라 할 수 있을 그의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이 뒤늦게 들어와 맛나게 저녁을 흡입하는 모습을 마주 앉아 보며 웃곤 하는 사람이었다. 방황하던 시절 하나뿐인 외동아들이 며칠 씩 집을 비우고 들어와도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려고 했던 가족이다. 가족이란 게 그렇지 뭐. 미안함과 쑥스러움이 담겨 잡생각이 섞인 채 부유한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내가 늦게 들어갈 건 핀잔 줘놓고 늦어서 한 소리 듣는 건 본인도 마찬가지 아니야?

양호열의 걸음은 갈수록 느려졌다. 딱 반걸음만큼 보폭을 줄였던 정대만이 잠시 멈추어 섰다가 걸어야 할 지경으로 느려져 간다. 중간중간 답답함에 못 이겨 물어보기도 했다.

“야, 업어줄까?”

“미쳤어요?”

“다친 사람 업고 가는 게 뭔 미친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냐…….”

“목숨이 하나라서 싫은데요.”

거부 의사는 확실했다. 아마도 양호열은 좀 싫은 사람이 진짜 싫은 걸 제안할 때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설마 뒤로 넘어지기라도 하겠냐.”

“누가 뒤로 넘어지게 한대? 대만 군 치과 갈 일이 한 번 더 생기겠지.”

협박과 비슷할 답변만 오가는 대화들이었다. 그래도 정대만의 숨통은 조금 트였다. 왼손잡이면 다쳐서 필기는 어떻게 해? 원래 안 하니까 괜찮아요. 엑, 너 그래도 괜찮은 거냐. 낙제생인 대만 군이 할 말은 아닌데. 아오 씨, 한 마디를 안 지냐. 핀잔 섞인 말들이 이어질 걸 알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내걸다 보니 끝물에 다다라서는 조금 웃는 얼굴을 보게 된 것도 같다.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너 알바하다가 다쳤다면서, 그럼 그 알바는 어떻게 된 거야?”

“못 가죠.”

“다쳐서?”

“그것도 있고. 어쨌든 알바하다가 다친 거니까.”

“사장이 그냥 나오지 말라고 했어?”

“다 나으면 나오라고 하셨는데……. 안 갈 거예요.”

왜? 순수하게 묻는 말에 또 양호열의 입이 닫혔다. 알바하다가 다쳤다며? 설마 일부러 다친 건 아닐 거 아니야? 부조리를 따지는 의문에 양호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겨우 방과 후 동행 길을 잠시나마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시에 찾아오는 양호열의 침묵은 비록 그 이유야 알 길이 없어도 제법 고집스럽다는 걸 알았다.

골목을 돌아서 또 골목, 낯선 동네라지만 동선이 희한하다. ㄱ자로 꺾어서, 이번엔 ㄷ자? 아니지, 이거 ㄹ자로 간 거 아닌가? 이거 돌고 도는 거 아닌가. 그러나 양호열의 집이 위치한 곳을 알 길이 없을 정대만은 묵묵히 그가 향하는 대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며 따랐다. 생각했던 시간 보다도 더 오래 걸렸다. 라멘집으로부터 십 분, 그 뒤로도 이십 분, 어쩌면 그 이상. 그래도 데려다준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으므로 딱히 난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부모님께는 조금 혼나고 말지 뭐. 몸이 안 좋은 후배 한 명을 집까지 바래다 줬다고 말하면 좀 너그럽게 넘어가 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말을 했을 때 온전한 신빙성이 전달될 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발 아래로 침묵이 밟힌다. 포장된 좁은 골목 위로 이따금 짓이겨지는 자갈 소리와 신발 밑창의 마찰 소리만 오갔다. 어디선가 얕게 들리는 풀벌레 소리, 뒤늦은 계절 어디에선가 바닥에 뒤집어진 채 이따금 버둥대고 있을 맥 없는 매미 소리마저 귀에 톡톡히 박혀온다.

“으, 어디 매미 떨어졌나 봐.”

“이 날씨에요? 매미가 왜요.”

“징그럽다고! 꼭 사람 지나갈 때만 미친 듯이 움직이잖아!”

“쫄았어요?”

좀 불쌍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양호열은 앞만 보고 있다. 정대만은 연신 제 발밑이며 주변을 살피며 호들갑을 떨었다. 시시콜콜한 대화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대화가 없다 보니 들릴 일 없을 목소리 대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살폈다. 불편한 걸음으로 지면을 살피는 까닭이었는지 조금 고개를 숙인 양호열의 목덜미 위로 어느샌가 또 다시 식은땀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그 팔을 붙든 정대만의 손바닥 안으로는 미적지근함 보다도 더 낮게 느껴질 서늘한 체온만이 전달될 뿐이었다. 바람은 대낮의 온기와 다르게 몹시 서늘했다. 차게 식은 계절이기에 식은땀을 흘린 뒤라면 조금은 춥지 않으려나 생각한다.

골목 귀퉁이 끝 너머에 철장으로 가장자리의 표식만 해둔 구석진 곳의 연립주택 아래에서 마침내 양호열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즈음 양호열은 걷는 중 내친김에 아예 허리를 붙들어 맨 정대만의 팔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질색하지도 않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아니라면 걷는 게 그만큼 힘들었던가. 그러게 버스비를 내줄 테니 같이 가자는 말은 즉시 기각했는지, 이해하려고 해봐야 정대만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목발을 짚고 멈추어 선 채로 고개를 든 양호열이 연립 주택의 층수를 살핀다. 딱 2층짜리의 오래되어 낡았지만 보기에는 흔한 연립 주택이었다. 양호열이 멈췄으므로 그가 사는 곳이리라 짐작했다. 양호열의 고갯짓은 1층이 아닌 2층으로 향하고 있다. 낮은 난간을 통해 훤히 보이는 2층의 복도와 세 개의 문, 그리고 세 개의 창문. 가정집의 조명을 제외하고는 어둡기만 했다. 두 개의 켜진 불과 하나의 꺼진 불, 세 가구 중 불이 켜지지 않은 가장 끝 집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어둡고 가장 구석진 곳이었다.

연립 주택의 2층으로 향하는 녹슨 철제 계단은 폭이 좁고 가팔랐다. 잠시 고민한 정대만은 이제 그만 지탱해주었던 팔을 놓아줘도 될까 싶어 슬그머니 손의 힘을 풀다가도 다시금 양호열의 허리를 붙들어 맸다. 그 손 위에 양호열의 손바닥이 얹힌다. 그리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떼어놓는 손길에 이번에는 순순히 물러났다.

“많이 늦어버렸잖아요.”

“뭐, 내가 미안할 일이냐?”

“……그게 아니라.”

“얼른 올라가 봐. 아니, 그보다 올라갈 수 있겠어?”

“대만 군.”

힘주어 다시 허리께를 받치고 먼저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양호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 어깨 아래에 낀 목발이 마치 축이라도 되어주는 것처럼 바닥을 짓이기며 몸을 돌렸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된 노란 가로등 조명이 양호열의 뒤편으로 비쳤다.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마치 그늘진 얼굴처럼 보인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정대만은 문득 양호열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어 눈만 깜빡였다. 다물린 입술만 조금 달싹이는 게 보였다.

“대만 군 혹시, 호구 소리 듣지 않아?”

마침내 나오는 목소리가 참 곱지도 못할 내용이다.

“뭣? 야! 넌 선배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후배 셔틀 시키는 선배 놈은 있어도 선배 셔틀 시키는 후배 놈이 어디 있냐? 버럭 성을 내려다가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주택가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재빨리 목소리와 함께 몸까지 낮춰 속삭이듯 말한다.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할 것처럼, 제 입으로 선배니 후배니 위아래 가릴 말을 지껄이면서도 가오는 커녕 제대로 된 모양새도 나오지 않을 우스꽝스러운 몸짓이었으나 양호열은 웃거나 골려대듯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이런 거 안 챙겨도 된다고요.”

“아니 강백호 녀석은 맨날 얻어먹다 못해 간식까지 사달라고 난리인데.”

가끔 걔랑 같이 죽 잘 맞아서 뻔뻔하게 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냐.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를 바로 할 생각도 못 한 채 정대만은 허공에서 양호열을 붙들다 만 손을 애꿎게 주물럭거렸다. 그깟 게 뭐 어떻다고. 용돈도 아직 남아도는데…….

“밥 사준 거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에요.”

정대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빤히 알겠다는 듯 한숨처럼 웃음이 섞인 뒷말이 이어졌다. 웃음은 웃음인데 어째 듣는 사람 기분에 따끔한 구멍 하나 내는 듯한 기분이다. 마치 개미가 슬쩍 깨물기라도 한 듯이.

“사실은 오늘 용팔이네 가려고 했어요.”

“어……. 그러냐. 그럼 여긴 용팔이 그 녀석네야?”

“걔 집은 여기서 정 반대고.”

“어, 그래. 그럼 뭐 그쪽으로 다시 갈까?”

양호열의 말에 곧바로 제 등 뒤를 향해 엄지로 가리키는 정대만을 보고 이번엔 양호열도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정대만이 자세히 볼 수만 있었다면 아마 눈꺼풀도 두어번 깜빡깜빡 댔던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호구?”

“호의라고 해라, 인마.”

“지금 대만 군의 그 호의가 나한텐 진짜 아무런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거에요.”

아까도 분명 말했잖아. 그럴 필요 없다고. 보이지 않는 표정과 그늘진 얼굴이 조금 숙여진다. 정대만은 이제 양호열의 입술조차 살펴볼 수 없었다.

"그러냐."

보이지 않는 얼굴을 살피는 대신 낮게 가라앉은 정대만의 목소리가 양호열의 정수리 위로 흩어졌다.

“성가셨다면 미안. 그런 건 계산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어 덧붙인 말은 진심이었다. 양호열의 어깨가 달싹인다. 고개를 들어 정대만을 보려다가도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됐어요, 오늘은. 안 가도 되었을 것 같으니까.”

양호열이 등을 돌린다. 어, 계단. 좀 위험한 거 같은데. 서둘러 붙잡으려는 손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몸을 먼저 비틀어 피했다. 확실한 거부 의사엔 아까처럼 도로 붙잡을 결심을 순식간에 물리게 하는 서늘함이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향한다. 함께 걷던 속도보다는 그래도 조금 서두르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새였다. 아니라면 원래도 그렇게 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은 괜찮거나. 천천히 철계단 아래에 다다른 양호열이 목발을 모로 기울여 오른손에 붙들고 그 손 그대로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통, 삐걱. 지탱 삼아 제자리 뛰기라도 하듯이 까치발로 한 칸 한 칸 오르기 시작한다. 계단 쪽엔 조명이 없어 자칫 헛디딜 수 있을 만치 위험해 보였다. 그래도 양호열은 이 어둠이 익숙한 듯했다. 절반가량 올라갈 때까지도 발을 헛딛거나 미끄러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삐걱 대는 마찰음과 통통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시간은 제법 걸렸다. 넘어지지도 않고 용케도 2층 복도까지 다다른다. 혹여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 당장에라도 뛰어갈 기세였던 정대만은 2층의 가장 첫 집의 창으로 비켜 나온 조명에 양호열의 모습이 비추어지자마자 뜻 모를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양호열이 계단을 모두 올라가는 동안 영문도 모르게 목젖까지 꽉 막히도록 차오른 숨이었다.

2층에 다다른 양호열은 이쪽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정대만이 등을 돌려 제집으로 향하든 말든 상관 없는 눈치였다. 벽을 짚고 선 그가 다시 오른쪽 어깨 아래로 목발을 짚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불 꺼진 복도의 맨 끝 집, 아무런 빛이 들지 않아 어두워지는 복도 끝의 그림자 속으로 양호열이 물들어 갔다. 톡톡, 바닥을 짚는 목발 소리와 낮게 끌리는 발걸음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이었다. 몇 초나 걸렸을 지, 혹은 몇 분이 흘렀을 지 알 수 없을 고요 속에서 마침내 금속이 맞물려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쿵. 기름칠을 하지 않은 낡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다. 정대만은 그 소리를 향해 고개를 올린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봐도 연립 주택 2층의 가장 끝 집 창으로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어둡지도 않나, 쟤는. 난 어두운 건 싫던데.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곧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

‘뭐, 바로 자려나.’

느렸던 걸음걸이를 생각한다. 확실히 걸어서 오기에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리는 하굣길이었다. 이 길을 내일도 걸어 올 생각인가? 운동 삼아서는 안 될 것도 없을 일이라지만 다친 사람이 떠올리기엔 별 미친 생각이기도 하다. 팔이나 다리나 꼭 그런 건 안 움직여야 낫는 게 상책이다. 다 낫고 나면 움직여야 본디대로 돌아간다는 아이러니함도 있다. 무슨 알바를 하면 저렇게 다칠 수 있는 거지? 딱히 용돈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던 정대만은 청소년이 할 수 있을 아르바이트 일감들 중 가장 위험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떠올리기 시작했다. 양호열이 즐겨 타던 분홍색 스쿠터를 떠올린다. 음, 아침 신문 배달? 사고 같은 거 날 수 있으니까. 아니 근데 꼭 말하는 건 가게에서 알바하다가 다친 것처럼……. 혹시 가게가 위험한 일인가? 근데 사장은 좋은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 그냥 다시 나오라고 한 것뿐이긴 하지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다가 퍼뜩 이런 것까지 또 왜 고민을 하며 걷고 있나 싶다. 육성으로 양호열에게 말했다간 아까처럼 조개같이 입을 다물거나 눈을 흘기며 핀잔을 줄 것만 같은 생각들이었다. 뭘, 그런 걸 다 알려고 하냐는 듯이.

가는 길에 공중전화나 찾아봐야겠다. 엄마한테 미리 전화해야지. 현관 앞에서 등짝을 맞는 건 아프지는 않더라도 매우 소란스러운 일이었으므로 까먹지 않기 위해 상기했다. 뒤늦게야 피로감이 밀려왔다. 예상했던 바대로 홀랑 마셔버린 특대 사이즈 라멘은 그 사이 모두 소화되었는지 허기도 지고 있다. 따뜻한 집, 따뜻한 목욕물, 맛있는 저녁밥과 포근한 침대를 향한 욕구가 문득 조급해졌다. 역시 집이 최고지. 본인이 2년간 바깥을 나돌았던 흑역사적 진실을 홀랑 휘발시킬 정도로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욕구였다.

‘그런데 저 녀석은 집을 놔두고 왜 친구네를 가겠다고.’

불꺼진 2층 끝자락, 양호열의 집을 생각한다. 들어가 놓고도 오래도록 밝혀지지 않은 불빛은 실로 그 안에 누군가가 있고 없을 지 짐작하기는 어려워도 늦은 밤 집으로 향한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으레 누군가가 있는 저녁 밤의 집안엔 불이 켜지기 마련이었다. 그 안에서 오직 불이 켜지지 않은 양호열의 집과 어둑한 복도를 떠올린다.

‘음, 설마 아무도 없어서 그랬나?’

외로움이라도 타는 걸까. 몰려다니는 친구들이나 종종 학교 안에서 보는 모습들로 보건대 스스로 떠올렸으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라고 느낀다.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쑬 사이도 아니고. 그저 다친 놈이 멀뚱히 불편한 자세로 서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을 뿐이다. 다리를 다치는 건 정말 성가신 일이니까. 다친 다리를 지탱해줄 목발도 하나일 때보다는 둘이 낫다. 한쪽 팔을 다쳐서 그나마도 지탱해보겠답시고 어깨 아래에 끼워둔 목발이 제법 위태위태해 보여서 그랬던 것도 있다. 그래도 별 상관하지 않아도 될 일이긴 했다. 양호열과 정대만의 관계는 딱 그 정도다. 어디서 무얼 하든 정대만은 하란 대로 일단 농구라도 잘 해 보이면 될 일이었고, 양호열은. 양호열은……. 양키 짓 안 하기? 싸움 안 하기? 그런 건 또 참견하기 뭐하네.

털레털레 골목을 돌다 보니 방향을 잃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이 씨, 되돌아 가는 길이나 물어볼 걸. 뒤늦은 아쉬움에 혀를 찬다. 가만 보면 딱히 복잡한 길은 아닌 것도 같은데 모퉁이를 돌고 꺾고 난리가 났던 동행 길인 탓에 방향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참 꼬아서도 갔다. 어지간히 데려다주는 게 싫었나보다. 이거 뭐 양키의 반항 그런 건가. 나한테 반항심 보일 것도 없잖아.

시간 끌기, 고집 부리기, 곧잘 말할 수 있는 넉살을 두고 침묵하기. 제가 해준 일을 담보 삼아 간식 하나 뜯어내듯 받아줄 수도 있었을 오지랖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방과 후 짧은 시간, 돌이켜보니 기껏해야 얼마 되지도 않았을 단 둘의 짧은 동행 길로 하여금 알아내게 된 양호열의 거부가 왜 이렇게 속이 쓰린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정대만은 호의에 대한 거부를 몰랐으므로. 그에게는 늘 주고받았던 행위였지만 가끔은 그저 넌지시 건네듯 일방적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정대만이 생각하기에, 양호열은 그냥 받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주거니 받거니 의사를 결정하기도 전에 양호열 또한 정대만에게 일방적인 호의를 건네어 준 사람이었다. 받아들여 줄 것 같은 사람, 다가가면 거부당하지 않을 사람, 혹은 그전에 호감을 보여준다던가 하는 익숙한 인상들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툭 건넨 도움과 호의가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그 녀석은…….

그때, 가로등 빛이 겨우 비추는 골목 담벼락 아래에서 웨에에에엥 요란한 소리를 내며 파드득 요동치는 것이 있었다. 와씨! 깜짝이야! 이번에야말로 정대만은 지금이 다들 조용한 시간을 즐기고 있을 주택가라는 것도 까마득하게 잊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검고 크고 소리가 요란한 것.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던 것이 가로등이 비추는 바닥까지로 넘어왔다. 웨에에에엥. 뒤집어진 매미가 날개짓과 함께 요동을 치고 있다. 목청 소리를 낼 기운은 없지만 뒤집힌 몸으로 발악이라도 하듯 바닥을 비비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정대만은 이내 슬금슬금 게걸음을 치며 미동 없는 매미에게서 멀어졌다. 한참 뒤늦은 계절 바닥에서 발견되는 매미는 좀 무섭다. 도대체 이 계절에 매미가 왜 있어? 잘못 나왔나?! 놀라서 지른 소리는 되는대로 아무말이었다. 죽은 듯하다가도 근처를 지날 때 요동을 떤다는 면에서, 크고 검고 죽어간다는 면에서. 우는 소리를 마저 내지 못한다는 것에서 약간의 측은지심이 들더라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계절의 풍경 중 하나였으며 지금은 그럴 계절도 아니다. 역시 잘못 나온 매미가 분명했다. 그런 경우가 있기라도 한 것인지.

매미는 정대만이 두어 걸음을 슬쩍 물러날 때까지 꼼짝없이 뒤집어진 채 누워 있었다. 어흠. 멋쩍은 헛기침 뒤에 정대만은 또다시 양호열을 떠올렸다.

‘에라이, 그래라. 부채감이고 뭐고 나도 신경 안 쓸란다.’

그러나 정대만은 그렇게 다짐해놓고도 한번 신경 쓰인 것은 해결 되기 전까지 자꾸만 미련을 두는 것에서 멋스럽지 못할 성정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좀 쪽팔린다고 생각하는 면에서 그렇다.) 아니 왜! 지는 그래 놓고 내가 하는 건 싫어? 집에 편하게 빨리 가면 좋잖아. 버스비 그거 얼마 하는 게 대수라고. 바래다 준다니까 길은 꼬아서 가고. 이거 알고 보니 일부러 천천히 걸어간 거 아니야? 꼭 집에 들어가기 싫은 것처럼……. 아, 젠장.

마지막은 탓할 사유가 아니다. 가족이 맞이해 줄 따뜻하고 편한 잠자리를 놔두고 나돌았던 경험이 있는 정대만이 감히 불평하며 들먹일 사유가 아니었다. 가만, 정말 그냥 아무도 없어서 그랬나. 몸이 불편하니까, 집에 혼자 있으면 곤란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 이용팔 녀석 집에 가려고 했던 건가.

“쩝…….”

그렇게 따지면 참 쓸모없을 오지랖이긴 했다. 뭐, 그런 거였으면 진작 말해 주던가. 그럼 이용팔네 데려다줬지. 여기서 정반대라는 이용팔의 집이 도무지 어느 정도의 거리가 될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써진 혓바닥을 축이며 입맛만 다셨다. 그래도 뭐 집에는 바래다 줬으니까. 결국은 집 안에 무사히 들어갔지 않았는가.

넘어지거나 그 바람에 또 다치는 일도 없이, 오늘은 들어가도 될 것 같다는 듯이.

됐어요, 오늘은. 안 가도 되었을 것 같으니까.

아무도 없는데도. 아무도 없어서 괜찮다는 듯이. 불 꺼진 채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 안이 마치 돌고 돌아 시간을 끌기만 했던 기나긴 귀가의 이유를 알리는 것만 같다.

정대만은 우두커니 선 채로 입가를 가렸다. 찌익, 찌익, 뒤집어진 매미가 마치 마지막을 알리는 듯 작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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