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를 막아낸 후의 이야기를 가정합니다.

*엘리트 스토리 업데이트 전에 구상된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반영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날조 다수 포함

*상하편으로 나뉩니다. 모두 무료공개 예정입니다.






재앙이 끝나면 행복이 찾아올까?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무너진 건물과 돌아오지 않는 사상자들과 모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절망과 공포를 몰고 왔던 그 재앙은 끝맺음과 함께 질긴 희망을 가져왔다. 맞서 싸운 모든 이들은 아픔 위에 흙과 재를 덮고 새로운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그 주역에는 아발론의 군주가 있었다.


폐허를 재건하려는 바쁜 움직임 사이에서 전 갈루스 황제의 장신은 눈에 띄었다. 그는 갑자기 자기 깜냥 이상의 선물을 한 아름 받은 아이처럼 조금 들뜬 얼굴을 한 채 우두커니 한 자리를 지켰다. 카르티스는 꽤 오랜 예전부터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고 있었다. 그에게 재앙이란 보상이 약속된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저 막아야 할 하나의 거대한 파랑이었을 뿐.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지금, 그는 그 여운을 곱씹고 서 있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저 허탈했을 뿐.


“폐하.”


그의 뒤에서 비죽이 튀어나오는 존재를 카르티스는 용인하였다. 시선만 돌렸을 듯 표정은 변함없는 그의 태도에 프라우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그에게서 떨어져 앞에 섰다. 갈루스 식 예법에 맞추어 황제에게 예를 올리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이번 생의 프라우는 제국의 8검이 아니었으니까. 상념에 빠진 카르티스와 상관없이 프라우는 금세 한 쪽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여기 계속 있으면 다들 불편해한다?”

“짐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원래 잔소리하는 팀장보다 구경 나온 부장님이 더 짜증나는 법이라고.”


전생이었던가, 더욱 그 전이었던 가에도 프라우는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곤 했다. 체자렛이었다면 입술을 비틀며 못마땅해 했을 테지만 카르티스는 그저 고개를 약간 젓고 말았다. 말을 섞기보다는 용건을 묻도록 한다.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그에게 다가올 이유는 만무하므로.


“왜 짐에게 왔지?”

“로드가 찾아.”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문다. 그는 프라우의 날카로운 시선을 고스란히 견디었다. 그는 그런 태도에서도 생경함을 느낀다. 그 누구도 붙잡아 두지 못할 거라 했던 이 날뛰는 망아지 같은 존재에게 멍에를 걸고 심지어 스스로 목매게 만든 존재라는 것은 항상 카르티스에게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함께 동맹을 맺은 후에도 로드의 많은 기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카르티스를 훑어보았다. 그것은 탈 인간적인 그의 능력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카르티스가 로드에게 조금이라도 이빨을 들이댄다면, 로드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은 제 목숨은 하나도 아깝지 않은 양 그에게 덤벼들 터였다.


“어이, 카르티스 폐하?”

“불경할 건지 예절을 차릴 건지 하나만 하도록.”

“반 반 무 많이 가 인기가 많은 법이라고.”


카르티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용건을 다한 보라 머리의 엘프는 자신의 블레이드를 타고 휙 저 멀리 사라졌다. 안내는 필요 없었다. 재해가 끝난 뒤 소국이었던 아발론의 왕은 밀린 내정처리와 종전기념식 준비로 행정관들과 함께 왕궁에 자의로 감금당해 있었다.


효율적인 시스템일수록 지도자가 할 일은 줄어드는 법인데 아발론은 군주가 처리할 일이 제법 많았다. 출정 중 내관에게 전권을 위임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완연한 격무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일이 많다는 점도, 내관 한 명에게 권한이 집중된 점도 카르티스의 입장에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국정운영이었으나 아발론은 꽤 훌륭하게 굴러가며 발전하는 국가 중의 하나였다. 그가 버릇처럼 효율을 따지던 생각들은 로드의 개인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호위병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았다. 그 방이 로드의 방이라는 것을 구분 짓는 유일한 증거는 문패에 새겨진 아발론 왕가의 문장뿐이었다. 카르티스는 문을 두드렸다. 방 안쪽에서 카펫이 깔린 바닥을 밟는 가벼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검은 머리카락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옅은 샴푸 향이었다.


“아, 루인 인가? 아까 전의 축제 치안 유지와 관련된 사안 말인데.”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에 덜 가신 물기가 방울방울 져 있었다. 평소 잘 갖춰 입던 정복 대신 걸친 실크 셔츠가 피부를 제대로 닦지 않고 그대로 껴입었는지 몸에 살짝 달라붙은 채 큰 키에 비해 최소한의 근육뿐인 마르고 작은 체형을 부각했다. 그녀가 채 카르티스를 눈치 채기도 전에 그는 로드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 어? 얼빠진 소리가 황제의 품에서 비어져 나왔다.


“대적자.”

“아, 그대였군. 천천히 와도 되는데 바로 왔나 보네. 다음에는 이렇게 밀고 들어오지 마. 네 흉갑에 코가 부딪히면 꽤 아파.”


바둥거리는 것도 잠시, 상대를 파악한 로드는 붉게 변한 코를 문지르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카르티스는 먼저 한 발 그녀에게서 물러난 후 팔짱을 꼈다. 무엇인가 마음에 차지 않은 것 같은 그의 태도에 로드의 입이 다물어진다. 미간 사이 주름이 잡힌 카르티스가 잔소리를 쏟아내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의 거처 앞에 호위 기사가 없을 수 있지?”

“종전기념으로 다들 노는 분위기인데 호위들만 순번이 밀려서 집에 못 가길래 내 깜냥 내에서 휴가를 줬을 뿐이야.”

“호위도 없는데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여는 조심성 없는 태도에 대해선 뭐라고 할 셈인가.”

“잠을 깨려고 씻고 있는데 루인이 먼저 왔다가 그냥 돌아갔거든 그래서.”

“지금 시녀도 없이 몸을 씻는데 이성의 행정관이 왕의 사저에 마음대로 들어왔다고 말하는 건가?”

“루인은 괜찮아.”

“그대가 지금까지 암살위협에 대한 대책도 구설수에 대한 조심성도 최소한의 체계도 없이 대책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매번 이런 식으로 일깨워주지 않아도 괜찮다.”


배려 없는 매서운 말에도 로드는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는 것 이상의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항상 제 사상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해서는 결과만 좋다면 굳이 반추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카르티스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그만둔다. 어차피 그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왜 부른 거지.”

“아, 이번 종전기념식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


로드는 턱을 괴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한다. 생각을 할 때의 버릇임을 아는 카르티스는 그저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린다. 시간은 많았다. 그는 스스로가 로드를 자세히 관찰하지 않도록 노력하였으나,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희고 깨끗한 이마라던가, 단호함이 엿보이는 가지런한 눈썹, 검고 깊은 눈빛을 가진 눈, 쉬이 조잘거리는 입술에 닿은 손끝 같은 것들. 관찰은 주의력을 흩트린다. 그는 로드의 앞말을 놓친다.


“춤 출 줄 아나?”

“뭐?”

“아발론식 볼룸댄스는 복잡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박자가 있어서. 그렇다고 갈루스의 황실 폭스트롯은 내가 한 번도 춤 춰 본 일이 없고. 역시 제일 괜찮은 건 널리 알려진 플로렌스 왈츠인 것 같아.”


그는 다시 로드의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녀는 시각적인 공격보단 정신적인 공격에 특화된 사람인 것을 잠시 잊은 탓이다. 방심했다고 잔소리를 들을 것은 그녀가 아닌 그였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는 짐짓 심각하게 미간을 짚는다. 그사이 로드는 한기를 느끼는 지 셔츠 위에 겉옷을 하나 더 껴입었다. 덕분에 그는 정신을 차릴 시간을 번다. 로드가 하는 말은 거의 듣지 못했지만 요지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나에게 종전 기념식 연회에서 춤추자고 하는 건가?”

“아까까지 뭘 듣고 있었던 거야. 그래, 첫 춤은 상징성이 있다고 해서.”

“…”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된다.”


카르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뜻을 보인다. 그가 대답할 기운조차 없다는 사실은 오직 그 만의 비밀이었다. 로드가 말하는 상징성이란 그 어떤 사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재앙을 막아낸 대표적인 두 공로자가 종전기념식에서 첫 춤을 추는 것이 평화의 상징적인 첫 발걸음이 될 것이며, 아발론의 국력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여론이 좋지 않았던 갈루스의 이미지를 개선해 보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였다. 저 작은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나왔을 리는 없고, 반 묶음을 한 그 유능한 행정관이 제안했을 것이다. 다른 의미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곧 로드의 행정관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 용건이 사라진 카르티스는 다시 로드의 방에서 쫓겨나듯 나오고 복도에 남겨졌다.


그는 우두커니 선 채 생각에 빠진다. 로드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종전 기념 연회에서 출 첫 춤의 의미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지나치게 가까워 보이는 행정관과의 사이 같은 것들. 결국 모든 생각은 맑은 눈으로 자신은 똑바로 바라보는 자신의 대적자로 이어진다. 모두를 이끄는 힘이 있는 이. 감히 하룻강아지가 호랑이에게 덤비게 만드는 경애 받는 지도자. 사랑받기에 마땅한, 그러나 사랑하기에 마땅치 않은.


어찌 자신에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스스럼 없이 자신과 함께하고 대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과거를 끄집어낸다.


-

 재앙을 막아낸 직후, 그 혼전, 혼란, 격앙. 일생일대의 위기를 처음으로 헤쳐 나간 뒤, 들끓어 오른 감정을 억제하는데 실패한 자신과, 기사들과 떨어져 그를 처음 발견한 로드. 부딪힘에 가까운 포옹과 잡아 먹는 듯한 입맞춤.


“안돼.”


입맞춤은 상대의 거부로 찰나에 그쳤으나 카르티스에게는 영원으로 남았다. 재차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로드의 양팔을 붙든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를 멈춰 세운 것은 그 스스로 의지가 아니었다. 로드는 말 한마디로 땅을 부수고 산을 가르는 이들을 다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제 팔에서 전해오는 아린 감각에도 로드는 미간만 조금 좁혔을 뿐 황제를 담담히 마주 본다. 분노도, 환희도, 두려움조차도 없는 그 눈에 카르티스는 압도당한다.


“그 감정은 안돼.”


그리고 또 한 번의 거절. 확인사살과도 같은 말에 카르티스는 변명의 기회조차 잃는다. 그는 아주 힘겹게 로드를 놓아주었다. 천천히 잦아드는 바람과 깨끗해지는 시야에도 카르티스의 시선에는 오직 로드의 얼굴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기사들이 로드와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리는 중에도, 그는 마비당한 사람처럼 서서 로드를 보았다. 로드는 단호한 얼굴로 서 있다가, 카르티스가 그녀를 놓아주자 표정을 풀었다.


“나는 아직 헤아릴 것들이 있다. 네가 이해해 주었으면 해.”


카르티스는 그 순간, 거절당한 자신보다 로드를 스쳐 지나갔을 사랑을 추측한다. 그녀의 거대한 이상에 펴보지도 못하고 사라졌을 마음들을. 카르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는 자신을 찾는 기사들을 향해 간다. 로드. 로드! 나 가고 있어. 로드의 망토가 흩날리며 그를 스치고 지나간다. 카르티스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애원해 보기로 한다.


“로드.”

“카르티스. 나는 우리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굴종조차 그의 권한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충심 뒤에도 숨길 수가 없었다. 사랑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하지만 원체 카르티스의 인생에 쉬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는 곧 새로운 고난에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


회상을 끝낸 카르티스는 재차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는 자유였다. 그것은 참으로 사무치게 외로운 기분이었다.

망사랑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 댓글 피드백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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