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스케줄 없잖아."
"네, 없죠."



인상이 영 별로인 얼굴로 나타난 민현을 본 대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커피? 라고 물었다. 고개를 젓는 민현을 보곤 아, 커피 안 먹지... 하고는 향긋한 헤이즐넛 향이 나는 원두커피를 내리는 지현. 그 바람에 민현은 먹지도 않으면서 커피향이 좋다며 누군가를 질질 끌고 이 카페 저 카페 다녔던 어느날이 떠올랐다.




"대표님, 나 첫 사랑 만났어요."
"대박. 첫 사랑이면 고딩 때?"
"아뇨. 그런 첫 사랑 말구요."
"그런 첫 사랑 말고는 무슨 사랑인데."



오늘 있을 다른 일정을 확인 하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하는 지현의 물음에 민현은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첫 사랑일까 너랑 나랑은. 죽고 못 산 사이, 단 하나뿐인 사이, 평생을 함께 할 사이... 뭐 이런 시덥지 않은 말로는 부족했었는데. 분명, 그때는.



"그냥... 그런 첫 사랑은 아니었어요."
"웃기네 사랑이 다 똑같지"



반박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노라고, 분명... 정말. 우리는 아니였다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엔 우리의 끝도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 심지어 재회 조차 참 볼품 없었기에 지현의 말에 민현은 그저 또 한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민현의 맞은 편에 자리한 지현이 그런 민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앞에 서류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지금 너 한테 추천 해 줄 만한 프로그램들 리스트. 기획서 한번 훑어 보고 두 어개만 결정하자."
"...나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럼 계약 해지 할거예요?"
"해지가 쉽나."
"......"
"소송해야지."



어우 독해. 하는 소리에 지현이 밉지 않게 웃었다. 민현이 다리를 꼬며 기획서 하나를 집어 들어 대충 눈으로만 읽어내려갔다. 리얼리티 예능으로 남자와 여자가 소개팅을 하거나 한 집에 몰아 넣고 관심도를 측정하는 신개념스럽지 않은 신개념 프로그램이라 소개된 것들이었다. 음... 다 별론데. 심드렁한 소리에 지현은 표정 변화 없이 툭툭 몇개를 밀어내고 두 개를 꼽아 민현에게 가리켰다. 이런거나 해보던가 그럼



민현은 지현이 골라준 것들을 다시 잡아 들었다. 하나는 밤 12시에 한 편씩 하는 총 4부작의 단만극과 하나는 가장 친한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고민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지현이 추천한 기획서 두 개만 챙겨 사무실에서 나간 민현은 곧장 집으로 가려던 걸음을 옮겨 마스크를 바짝 끌어 올리고 혜화동으로 향했다.




"현장 결제 하시면 20% 추가 할인 해드려요!"



평일에는 팔기 힘든 연극표를 열심히 홍보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민현은 그냥 가장 첫 번째로 부딪힌 학생에게 표를 사서 선착순 자리 중 가장 뒷편에 자리했다. 약 2시간 정도의 연극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별 관객도 없는 자리에서 민현은 웃지도 울지도 않고 멍하니 관람했다. 아마 배우들에게는 최악의 관객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또 보내고 택시를 타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간은 밤 10시.


거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쯤 사거리의 코너를 막 도는 와중에 카톡이 울려 확인하니 얼마 전 조연으로 출연했던, 그러나 사고로 촬영 스케줄이 뒤로 밀린 영화에서 만난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오빠 그 사고건 어떻게 하기로 한거예요?' 라는 톡에 잠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로 담배를 피고 있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택시에서 내린 민현이 집쪽으로 걸어가는 도중 무언가 허전함에 걸음을 멈추고 보니 손에는 회사에서 나올 때 챙겼던 기획서가 없었다.




"어, 아이씨 어디 뒀지."
"...와, 또 뭐 일아뿠나."



어둑어둑 오피스텔에서 빛이 가장 안 드는 곳에서 듣기 싫었고, 듣기 좋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피던 행동이 멈춰진 채 그렇다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민현. 그의 등 뒤에서 여러 불빛들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제게 가까워져 옴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알 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종일 할일 없이 여기 저기 배회하면서 보냈으니까.


며칠 전 그렇게 호기롭게 찾아갔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영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민현은 그런 얼굴으로라도 보고싶긴 했다.



"어..."
"여전한거가 아님 이것도 내가 몰랐던거가."
"...... 나 여기 사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쭈구려 앉아 담배를 피었는지 몇 까치가 널부러져 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전 밝았던 머리색은 지난 날 우리들의 시간처럼 흔적없이 사라져 있었다. 핑크도 아니고 금발도 아니고 잿빛도 아니었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꾀어 넣었던 그 날의 나도.



"고맙다고 인사할라고."
"......"
"감독한테 전화 왔다카더라. 미안하다고."
"잘됐네."
"영화 엎어졌뿠다매. 개안나."
"어차피 분량도 별로 없었어."
"......"



소방관이 된 너에게 가장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넸었다. 부디 가지 말아달라 애원했지만 그럼에도 그 길로 간 너를 보며 난 결국 응원해줄 수 밖에 없었으니까. 축하 받아도 모자랄 판에 나에게 눈물까지 보이면서 미안하다 하던 니가 참 싫었고, 너무 좋았다.


눈부셨던 너를 응원해주지 못함에 때로는 지옥이라는 말을 표현 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한결같이 사랑 해주었고 사랑 받았었던 날들이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이렇게 마주친 우리들에게는.



"인기 많대."
"...그런가."
"우리 소방관 식구들 다 알더라 형."



형이라는 말 이제 안한다. 내 사람한테 동생 노릇 할 생각도 없고, 사랑만 하자 사랑만. 자칫 오글거릴 수 있던 말임에도 강다니엘이 해서 그저 좋았다. 그 말을 하던 입술로 따뜻하게 안아오며 해주었던 키스도 불과 어제처럼 느껴졌다. 아니 거짓말이다. 기억이 나지 않아 괴로웠다.



"니엘아..."
"그래 부르지 마라."
"..."
"그래 부를 사이 이제 아니잖아."
"그럼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
"내가 진상 부려도 다시 이렇게 오지 말았어야지."



넌 왜왔니... 마지막을 채 삼켜내지 못한 채 토해냈다. 조금은 말랐지만 더 단단해진 몸의 그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다니엘의 눈에 민현이 담겼다. 마찬가지로 연예인 하려면 다이어트부터 라더니 죄다 살이란 살은 어디로 간 건지 제 눈에는 앙상하게 마르기만 한 민현이 보였다.


더운 여름날 코딱지만한 원룸에서 달달 거리는 선풍기 하나 틀어놓고, 그의 납작하고 판판한 배에 누워 젤리와 초콜렛을 번갈아 까먹던 제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지만 빌어먹을 기억이자 추억일 뿐이었다. 왜 왔을까. 굳이굳이 어렵게 수소문을 하고 옹성우한테 빌고 빌어 황민현 집을 알아내기까지 며칠. 왜 이러고 앉았냐 병신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머리통을 벽에 쳐 박았다.

그 모습을 보던 성운이 사고 현장을 그렇게 좀 뚫고 가라며 우스갯 소리를 해댔지만 전혀 웃기지도 않았다. 정기 소방훈련이라도 했으면 싶었으니까. 정신이 좀 팔리고 싶었는데 온통 팔린건 황민현 뿐이었다. 벼락맞을 소리겠지만 그 흔한 장난 신고도 걸려오지 않았다.



"우연이가."
"뭐가."
"촬영."



분위기와 전혀 상관없이 웃음이 나와버린 민현. 몇 천이 들었던 촬영 현장에 공기관인 소방서 협조를 일개 인기 좀 있는 연예인이라고 쉽사리 엮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을 해 왔을 다니엘이 문득 상상 돼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런 민현의 모습에 다니엘은 오히려 얼굴이 조금 굳었다. 

웃는 얼굴에 반했던 지난 날이 한이면 한이었으니까.


"와웃노."
"우연이야."
"..."
"진짜 싫다... 그치?"


그 때 마침 민현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오늘 종일 매니저의 연락을 쌩깠으니 아마 회사 쪽 더 높은 실장이거나 지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 그만."



민현은 다니엘을 지나쳐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가는 중에도 그의 얼굴을 부러 보지 않았다. 얼굴을 볼 때 마다 끌어 안고 입을 맞추고 눈을 맞추었던 얼굴이어서 그냥 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니엘은 그렇게 스치듯 가는 민현의 팔을, 어깨를, 허리를 끌어 안지 않았다. 제법 큰 키에도 낭창하게 잡히고 안겨드는 몸을 볼 때면 늘 그렇게 안고 만졌기에 그냥 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었다.


민현만의 잔향만이 텅 빈 자리에 남았다. 다니엘도 추가 달려 있는 듯 무거웠던 다리를 들어 기어코 자리를 비켜 나야만 했다.







written by. NUNA













"강다니엘! 내가 칫솔 여기에 넣으라고 했지!"



좁디 좁은 실평수 7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180이 넘는 두 남자가 복작복작 살기가 어디 쉽겠는가. 막 전역한지 얼마 안돼 아직 군기가 안 빠졌을만도 한데 이건 뭐 특수부대 출신이라면서도 아주 그냥 찌든 현세에 딱 맞는 적합유전자가 다량 보유된 것처럼 하루 아침에 고삐 풀린 말 아니 개새끼처럼 늘어져 있는 강다니엘이었다. 새벽 파트타임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민현은 온통 어수선한 집안 꼬라지에 들어와 쉬기는 커녕 잔소리부터 질러댔다.


"우리 잘생긴 형아는 피곤도 안합갑네. 오자마자 잔소리 해대는 거 보니까."
"죽을래 진짜. 야, 내가 일일이 말을 얼마나 더 해야 돼. 이거는-."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어느새 바짝 일어서 민현의 등을 끌어 안은 다니엘이다. 와와 또 뭐를 그래 내가 잘몬했노. 분명 혼내고 있는 사람 꾸중 듣고 있는 사람이 분명 하건만 그 표정은 서로가 바뀐 채였다. 방그르르 하게 웃으며 민현의 등에 얼굴을 부비는 강다니엘은 진짜 개다 개라는 생각으로 아무리 화를 눌러봐도 진짜 피곤해 죽겠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휴, 한 숨소리가 층간소음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놔라, 좋은 말로 할 때."
"싫은데."
"강다니엘."
"에에 성 좀 붙이지 말라니까 정 없그로."
"...아, 더워!"


덥기는 무슨 눈오는데 지금!! 진짜 창 밖에 눈이 포슬포슬 내리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말에 민현이 내던 짜증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방 한 가운데 있는 큰 창문 밖을 보았다. 진짜네... 이쁘다. 그세 얼굴이 펴진 민현을 보던 다니엘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째 새벽 내내 일한 얼굴이 이래 이쁘노.



"그리고 매번 이야기 하지만 난 그 쪽 취향 아니야. 너 한테 깔릴 생각은 추호도 없고."
"이쁜 얼굴로 입은 몬생깄네 진짜."
"니엘아 나는...-"
"아아 알았다고, 알았다니까."



심각해지기 싫었다. 1-2년 전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날. 더운 여름에 옹성우의 후임이라며 소개받았던 강다니엘을 알고 난 이후부터 그가 민현에게 좋아한다 고백했던 날에서 지금까지, 참 열심히도 거절 하고 있는 민현이었다. 왜 싫은데요. 하고 물었던 다니엘의 질문에 민현은 진짜 몰라서 묻나? 싶었다.


남자가 남자 좋다는 게 정상인가?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게 비정상입니까.
말장난 하지 마시죠.

장난 아닌데요.
적어도 그 쪽 같은 사람, 나한테는 비정상에다가-




"내 아직도 진짜 그 때 그 말 생각하면 천불 나거든."


배고프다는 말에 감자국을 끓이면서도 다니엘의 입은 한 시도 쉬지 않았다.



별로예요


"와씨, 별로란다 별로!"
"언제적 일을 아직도 말하냐. 그리고, 지금도 너 별로야.."



선풍기가 아닌 온풍기를 틀어놓고 전기 장판 위에 옆으로 누운 민현은, 한 팔로 얼굴을 받친 채 요리하고 있는 다니엘의 화나 있는 등을 보았다. 옹성우는 특수부대라도 저 정도는 아니던데... 아니야 걔가 마르긴 했지. 근데 쟤는 다리가 왜 저기 있는거야.



"내 그래서 별로에 별짜를 1년 넘게 안 들을라고 후임들 졸라 쥐어 잡았거든. 그라니까 옹성우가 내보고 뭐라카는 줄 아나. 별 지랄을 다 한다고 막-."
"야."
"어?"
"감자국에 네 침이 한 바가지겠다."
"어, 우리 간접키스?"
"미친놈아 고딩이냐."


킥킥 거리는 등이 참 넓다. 민현은 그 이후 가만히 생각을 하고 또 해봤다. 뭐 딱히 연애를 엄청 해 왔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게이는 아니었다. 전혀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세 번째 정기 휴가 때 만났던 강다니엘이 술 못 마신다는 저를 옹성우도 없는 호프집으로 불러 거하게 탄 소맥 세 잔을 연거푸 마신 뒤에 대뜸 좋아하고 자고 싶다고 말하는 얼굴에 사이다를 그대로 뿌리고 나왔었다. 그냥 욕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사이다를 얼굴에 뿌릴 지는 몰랐다는 다니엘의 말에 민현은 사실 한 대 치고 싶었는데 특수부대 출신이니까 덤비지 않았다며 솔직하게 말했더랬다.





"형, 내가 말은 잘 안들어도 요리는 쪼매 한다."
"... 근데."
"그니까 그냥 좀 생각만 진지하게 해주면 안되나."
"다니엘."
"아아아 오케이! 그럼 내가 다 백번 양보해서! 내가 형 포기할 때 까지만... 그 때까지만 아무 년놈도 만나지 마라."



웃기네, 저거 진짜. 말은 내뱉지 않았지만 이제는 바닥에 엎드려 뜨끈한 장판에 한 쪽 볼만 대고선 픽픽 웃는 민현이다.


"그럼 안지 좀 마. 언제 덥썩 덥썩 안아도 괜찮다고 허락했냐 내가."
"... 그건 좀 봐주지. 내 뭐 더 하는것도 아니고 그냥 안는건데."
"안돼, 이제 안지마."
"아 좀 봐도! 내도 이팔청춘이거든!"
"너 언제 집 구할거야."
"안 안을게."



진짜 가끔보면 덩치만 큰 강아지 같다. 꼬랑지도 내리고 귀도 내리고 흔들흔들 다 끓인 감자국과 밥 두 그릇 시장에서 산 반찬 두개 김치 하나, 나름 5첩반상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대며 다가오는 강다니엘을 보며 민현은 생각했었다. 그냥 지금은 좋아하고 이런 무거운 거 말고 그냥... 그냥... 옆에는 있어도 괜찮은 녀석이구나 하는 그 정도. 거기까지만 가고싶었다.




그래,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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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석가탄신일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은 여러가지로 설레는 일들이 많았던 날이었어요!

비긴디엔드와 함께 아쿠아님과 함께 하는 앤솔로지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




제대한지 얼마 안 됐던 여름날의 설정샷





민현이를 사랑하고 녤년을 지지하며 옹년을 짝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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