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해도 낮만큼은 볕이 들었다. 죠스케는 그 날 이후로 아예 짐을 싸들고 와서 로한의 집에서 다시 지내기 시작했다. 축하연 날 밤, 그 이후의 일을 로한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드문드문 이미지들이 기억날 뿐이었다. 책장에 있던 만년필, 죠스케의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서 고개를 젓는 죠스케의 얼굴. 조각난 퍼즐은 로한의 힘으로 맞춰지지 않았다. 그 퍼즐을 대신 맞춰준 것은 죠스케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날처럼 술을 그렇게 마시는 건 좀 곤란함다. 로한. 죠스케의 목소리. 머리를 쓰다듬는 죠스케의 두터운 손. 그 날? 죠스케가 캘린더를 톡톡 쳤다. 붉은 동그라미 하나가 로한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들 로한의 손이 돌아온 걸 축하해줬슴다. 기억하죠? 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로한은 만화만 그리면 되는 거에요. 죠스케의 눈동자에서 순수한 기쁨이 반짝였다. 이후에 로한은 자신의 기억에서 빠진 퍼즐 조각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로한은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죠스케는 그런 로한의 곁에 있었다. 키시베 로한은 금방 어디로 떠나려는 사람처럼 원고에 몰두했다. 마치 자신이 만화를 그리지 못하는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로한- 장 봐왔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구는 것은 죠스케도 마찬가지였다.로한의 펜이며 종이들, 작업 도구들을 다시 갖다주고 만화에 대한 생각을 다시 일깨워준 것은 죠스케였다. 만화, 다시 그릴 거죠? 걱정했잖아요. 당신이 만화를 포기할까봐. 로한이 대답했다. 그럴 생각 없어. 죠스케가 가볍게 받았다. 응, 당신이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슴다.  만화를 다시 그릴거냐는 물음 이후에 죠스케는 다시는 로한의 손에 대한 일을 입 밖에 올리지 않았다. 죠스케는 부지런히 로한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직접 병원에 가거나, 약 먹을 시간을 챙기거나. 로한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오거나. 원고에 매진하는 로한을 위해 직접 아침을 만들거나. 그런 것들.

아마 오늘도 그렇겠지.

"오늘은 이것저것 만들 생각이라서요. 마침 타임세일도 하고. 햄버그 어떻슴까?"

죠스케가 환하게 웃었다. 현관 앞에서 그 미소를 본 적 있다. 현관 바깥의 공기에 방금 끓인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로한은 죠스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죠스케가 축하연 이후 짐을 싸서 이 곳에 왔을 때였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죠스케가 제일 먼저 뱉은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미안함다. 저, 로한에게 귀찮은 존재라는 거 알고 있슴다. 그래서 로한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의지하라고는 안할게요. 꾸물꾸물 말을 내뱉는 죠스케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가득 메었다. 다시는 죠스케가 없는 곳에서 외로워지고 싶지 않다. 저 미소, 저 눈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싫다. 단순한 그 생각들이 죠스케의 미소와 함께 로한을 허물었다. 로한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마시고 있던 커피와 함께 넘겨버렸다. 넌 왜 이렇게까지 해. 로한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인정할 지 이미 알고 있었다. 죠스케와의 다툼 이후 자신이 얼마나 죠스케를 그리워했는지, 그 순간 죠스케에게 얼마나 큰 감정을 가졌는지 깨달았다는 사실을. 로한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하게 아릴만큼 깨닫고 있어도 죠스케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다. 이제야 아문 기억을 들쑤시고 싶지 않아 로한은 결국 죠스케를 받아들였다.

로한의 반응이 없자 죠스케가 걱정스레 눈썹을 내렸다. 바스락거리는 봉지를 내려놓고 죠스케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가벼운 농담이 곁들여진 말투였지만 바라보는 눈은 걱정이 가득했다. 로한, 아파요? 로한 얼굴보니 저녁은 햄버그 대신 죽이라도 만들어야 될 것 같슴다. 그 상냥한 미소가 로한을 다시 과거의 상념에서 끌어냈다. 아냐, 괜찮아.

저녁을 먹고, 차와 간단한 다과를 차린 뒤 로한 옆에서 죠스케는 즐겁게 떠들었다. 오늘의 주제는 오쿠야스가 생제르망 샌드위치를 동네 떠돌이 개에게 뺏길 뻔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코이치가 샌드위치 반을 나눠줬슴다. 히로세 코이치. 반가운 이름이었다. 문득 축하연 날 밤이 떠오른 로한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코이치군, 언제 한 번 초대해야겠어. 전에 도와준 것도 있고. 잠깐 말이 없던 죠스케가 웃었다. 제가 전하겠슴다. 로한은 원고 해야죠. 아냐, 내가 할게. 로한이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죠스케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로한이 고개를 들자 죠스케가 웃음지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약 안 먹었죠? 의사가 먹으라고 했잖슴까. 하루에 한 번씩. 그. 신경 안정이었나. 로한이 익숙하게 알약을 집어 삼켰다. 손바닥에 놓인 흰 알약이 익숙했다. 일주일이면 이제 약 먹는 것도 끝나겠군. 애도 아니고, 투정하지 마십셔. 죠스케가 미소지었다. 누구처럼 주사를 무서워하진 않지. 로한이 짧게 웃었다. 의사가 먹으라고 했던 신경안정제는 두통을 줄여줬지만 대부분의 진통제가 그렇듯이 로한을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그덕에 로한은 저녁 늦게까지 원고하는 습관을 억지로 고쳐야 했지만. 로한은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저녁 먹고, 차 한 잔 하고 난 후가 로한이 약을 먹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챙기는 것은 대부분이 죠스케였다. 맞아. 오늘 타는 쓰레기 내놓는 날임다. 로한 자면 청소해야죠. 또 음식 쓰레기도... 죠스케의 말이 점점 멀어졌다. 로한이 완전히 고꾸라지기 전에 죠스케가 얼른 어깨를 갖다댔다. 로한의 눈이 까무룩 감겼다.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제 어깨가 베개라도 되는 양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로한을 내려다보던 죠스케가 미소 지었다. 로한, 잘 시간임다. 그래도 여기에서 자면 안되죠. 죠스케가 가볍게 로한을 안아들어 2층으로 올라갔다. 로한의 팔이 축 늘어졌다. 잘자요. 침대에 뉘여지자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파고든 로한이 흐릿한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응.

로한이 잠든 것을 확인한 죠스케는 거실로 다시 내려왔다. 소파에 걸터앉은 죠스케가 손가락을 꼽았다. 보자, 설거지도 다 했고, 로한도 재웠고. 앗, 쓰레기 버리는 거 까먹었슴다. 죠스케가 조심해서 밖으로 상자를 끌어냈다. 온갖 고지서와 광고물들, 로한이 버린 원고 뭉치들을 들어내자 각양각색의 편지들이 구겨지거나 처박힌 채 뭉쳐진 덩어리들이 보였다. 앗차. 잊을 뻔 했다.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을 쓰레기 봉투에 쏟아부은 죠스케가 봉투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우편함을 열자마자 안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키시베 로한 선생님께.  주워드는 것과 동시에 반으로 찢긴 편지마저 전부 봉투에 던져넣으며 죠스케가 짧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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