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가방을 챙겼다. 허둥대는 성격이 아닌데 며칠만에 기력을 회복한 위텅은 분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짐이 차곡차곡 가방 안에 쌓였다. 그런 위텅의 행동에 침대에 앉아있던 그가 웃었다.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아니."
"조금만 챙겨, 우리 완전히 떠나는 거 아니잖아."
"아니야, 필요할지도 몰라."
"금방 올거야."
"그냥 사라지면 안되나?"
"그러고 싶어?"
"응."

챙기던 옷을 손에 쥔 채 위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그가 일어나 위텅을 안아주었다. 아이를 달래 듯 불안해 하는 위텅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잘될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게.넌 그냥 우리만 생각해."
"응."
"이번엔 잘할게. 네가 믿을 수 있게, 내가 만회할 기회를 주는거야."
"알았어."

위텅이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곤 해사하게 웃었다. 단지 바다를 보러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마치 큰 일을 치르러 가는 것처럼 위텅은 긴장하고 있었다. 거의 일주일 가까이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먹을게 떨어지면 그가 밤에 나갔다 왔고 위텅은 나갈 필요가 없었다. 이젠 세상으로 나갈 차례가 됐다. 모든걸 걸고서라도 그는 위텅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두운 밤, 둘은 인적 없을 시간에 집밖을 나섰다. 주차장 구석에 세워둔 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그는 위텅의 손을 꽉잡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부모에게 일탈을 들킬까 조심하는 것처럼 보폭을 맞추어 걸어갔다.

위텅의 시선은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문을 열어주자 위텅은 차에 올라탔다. 그는 뒷좌석에 가방을 던져넣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갈까?"
"근데 어디로 갈거야?"
"가보면 알아."

그가 웃었다. 새벽공기가 제법 차가웠지만 괜찮았다. 옆에 그가 있으니까 등받이에 머리까지 기대어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검은 밤이 감청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차가 거의 없는 도로는 평온했다. 엔진소리와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만 울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그냥 흘러가는 것뿐,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이슬을 머금은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깊게 숨을 들이쉬곤 입으로 내쉬며 그 공기를 만끽했다.

덜컹거림이 좋았다. 창문에 살짝 부딪혀도 그것마저도 좋았다. 아무말 하지 않아도 둘만 있는 그 공기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다 문득 잠이 들었다.

감청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점점 푸른빛으로 물들어 갔다. 하염없이 달리던 차는 이내 자갈이 깔린 바닷가 앞에 멈춰섰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시동을 끄고 그는 잠든 위텅을 바라보았다.

아이같은 얼굴은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에 그늘이 생겨 있었다. 수많은 감정이 담긴 표정을 한 그가 잠든 위텅의 뺨을 손등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 사람을 아프게 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 때 위텅이 눈을 떴다. 그리고 사랑이 깊어져 미안함을 비워내지 못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을 모를리가 없었다. 5년동안 마주쳤던 시선, 그의 눈동자,
순간 그가 환하게 웃었다.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그가 말했다.

"내리자."
"도착했어?"
"응."

그가 운전석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조수석 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위텅은 이미 차에서 내려 그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둘은 손을 맞잡고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얀 거품을 내며 일렁이는 바다는 끝이 없이 이어져 있었다. 해안가에는 자갈들이 가득했고 걸음을 옮길때마다 자갈이 부딪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푸른빛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위는 붉게 물들어갔다.

"멋지다."
"너랑 해뜨는건 처음보는거 같은데."
"아닐걸?"
"그래?"

위텅의 말에 그는 불현듯 거실 창가에 앉아 높이 솟아 있는 빌딩 숲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봤던게 생각났다. 붉게 피어오르는 태양은 얼굴에 고스란히 닿아 주변으로 흩어져 갔었다. 그 붉은 빛에 위텅의 얼굴이 빛났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일어나봐."
"왜 더 잘래."
"우리 공주님 일어나서 저랑 해뜨는거 안볼래요?"
"더 자고싶은데."
"일어나봐."

위텅이 칭얼대며 일어나지 않자 그는 이불에 위텅을 돌돌 말아 어깨에 들쳐멨다. 그리곤 거실로 나가 큰 거실창 앞에 위텅을 내려놓았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위텅이 무어라 얘기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이불에 싸인 위텅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바닥에 앉았다.

"저기봐, 저기 건물들 사이로 해가 뜨기 시작하잖아. 바보야."
"누가 바보야, 졸린데...엄청 예쁘네.."

반쯤 눈을 뜬 위텅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잠이 깨는 듯 보였다. 그가 위텅의 뺨에 키스를 하고 붉어져가던 하늘은 이내 붉은빛이 흩어지고 눈이 부신 하얀빛으로 변해갔다.

"여기살면서 한번도 본적 없는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깨웠지."
"이제 다시 자면 안돼?"

위텅의 말에 그가 웃으며 검지로 이마를 톡 쳤다. 미간을 찌푸리며 웃던 위텅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눈을 감았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와 함께한 소소한 일상들,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위텅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그런 위텅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넌 그때도 이뻤는데."
"넌 여전히 잘생겼고."
"그래?"
"아니야?"
"니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난 여전히 널 사랑하고."

위텅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사랑한다는 말, 위텅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단어였다.

"유스케."

그가 잊고 있었던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고보니 떠나던 그날, 그날 역시 그가 그 이름을 불렀던 게 생각났다. 그는 차마 양위텅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미안함에 화가나서 떠난게 아니라 그 이름을 더이상 부르기 힘들어 스스로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기에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잊고 있었던 이름으로 부르는 건 그 동안의 미안함과 고독했던 시간들을 털어내버리기 위함임을  위텅은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리고 있었다.

"한번도 사랑이 아닌적 없었어."
"린즈홍."
"거짓말 아니야, 널 상처줬을때 난 더 상처 입었고 널 아프게 할때 차라리 죽고싶었어.너만 괜찮다면 너의 내일을 나로 채워가고 싶어. 앞으로 계속,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정말 너만 괜찮다면 그래도 될까?"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고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 있고 그의 심장은 이미 위텅의 것이었는데 그러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처음 사귀던 그날 처럼, 그날, 그 방에서 고백하던 그날 처럼 위텅은 또 다시 설레임을 느꼈다.

"그래도 돼?"
"응."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웃은 위텅의 얼굴에 그의 긴장했던 얼굴이 풀어지며 위텅을 끌어당겨 안았다. 파도는 여전히 몰려왔다 흩어져 나갔고 해가 떠오른 하늘은 영롱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바다는 그렇게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가 대충 음식을 시키곤 둘은 음료를 마셨다. 새벽에 출발했으니 배고플게 뻔했다. 위텅은 추운 듯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추워?"
"약간."
"따뜻한거 시킬걸 그랬나?"
"괜찮아. 배고파서 그래."

  그가 일어나더니 의자를 위텅이 앉아있는 쪽으로 끌어당겨 다시 앉았다. 그리곤 어깨를 당겨 안아 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위텅은  웃어보였다.

"이제 괜찮지?"
"응."

곧 음식이 나오고 둘은 웃으며 식사를 했다. 벌레가 나올것 같은 지저분한 식당이었지만 음식 맛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둘이 방해받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여서 행복했다.
일상적인 일들, 그런 일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이었는지 둘은 알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그가 오길 기다리던 위텅의 전화가 울렸다. 매니져, 받을까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어디야? 기사들 쏟아지고 난리야. 너랑 린즈홍이랑..
"알아요."
-알아?
"네."
-나 이제 못막아.

그 때 그가 전화를  가져가버렸다.

"나랑 있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그렇게 끊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전화 받지마."

위텅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그의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전원을 꺼버렸다. 그러는 동시에 위텅의 핸드폰 역시 꺼버렸다.
팔짱을 끼고 있던 위텅이 말리려 했지만 이미 전원을 꺼버린 후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어버린 터라 말리지 못했다.

"어떻게 하려구?"
"일단 차에 타."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지만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위텅의 눈빛이 흔들렸다.

"린즈홍. 우리 이제..."
"너 다 포기할 수 있어?"
"뭐?"
"난 그럴 수 있어. 너만 있으면."
"나는..."

그의 단호한 표정에 위텅은 말문이 막혔다.

"나 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 우리 다 그만두고 떠나자."
"어디로?"
"네가 태어난 곳."





  두려울게 없어 너만 있다면






#시작



하늘빛이 아름다웠다. 비가 갠 뒤라 아마도 더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햇살을 느끼기로 했다. 상쾌한 공기가 숨을 쉴 때마다 폐부로 흘러들어오는 듯 했다. 일상이 주는 행복이랄까?

"린상 뭐해?"
"자유만끽 뭐 그런거요. 아저씨 어디가세요?"
"마누라가 빵 좀 사오라길래 좀 줄까?"
"혹시 계단아래 거기?"
"맞아."
"그럼 주세요."

그는 건네주는 빵 한봉지를 받아들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파도가 치는 바다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딸랑 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는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세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자리는 꽉 차 있었다. 멎쩍은 듯 그는 작은 커튼이 쳐져 있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그가 사랑하는 또 다른 그가 있었다.

분주한 뒷모습에 그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왜 이제와?"
"보지도 않고 알아?"

위텅이 뒤돌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종소리가 그렇게 크게 나는데 몰라? 바쁜데 빨리오지."
"이거."

아까 받은 빵봉지를 들이밀자 위텅이 화냈던 건 잊은 듯 웃었다.

"설마?"
"거기."
"이거 줄서야 되는데."
"그니까 늦었지."

그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뭐 진실이 중요한가 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이번만 봐준다."
"고마워."

그가 위텅의 뺨에 소리가 나게 키스를 하곤 뒷정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을 위해 모든걸 내려놓았다. 잡고 있을 수록 괴로웠다. 그 땐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서서히 어두워 지기 시작하자 손님은 모두 돌아갔고 작은 가게 안 작은 불 하나만 켠채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갓내린 고소한 향이 나는 커피에서 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위텅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빵 직접 산거 아니지?"

위텅의 말에 그가 뜨끔한 듯 눈을 피했다.

"아닌데 내가 산거 맞아."
"아닌거 같은데?"
"그냥 맞다고 하면 안될까?"

그가 무마하려는 듯 일어나 등 뒤에서 위텅을 끌어 안았다. 그리곤 하얀 목덜미 위로 자신의 입술을 낙인처럼 찍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입술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후회한 적 없어?"
"아니."

여전히 목덜미에 얼굴을 뭍은 그가 대답했다.

"돌아가고 싶은 적은?"
"아 그건 있다. 말 안 통할때."
"그것만이야?"
"다른거 필요해?"
"아니."
"난 필요한거 같은데."
"뭔데?"
"너."

그가 위텅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양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리곤 곧 위텅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살짝 내린 위텅이 그의 목을 양팔로 감싸안았다. 맞닿은 입술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떨어졌을 때 아쉬운 듯 보이는 위텅읠 얼굴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 방금."
"웃지마."
"가자."

어둠이 곧 내려앉았고 둘은 가게 불을 끄곤 문을 잠갔다. 그가 손을 내밀자 위텅은 그 손을 꼭 잡았다. 예전 그때의 모습처럼 깍지를 낀 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나란히 그리고 천천히 파도가 치며 젖은 작은 길목을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한 채 걸어갔다.



 


#처음이자 마지막





낯선 곳에 섰다. 먼저 보인 건 눈앞에 계단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됐지만 아닌척 하기로 했다. 매니저의 뒤를 따라 계단을 하나씩 오를때마다 심장박동 수가 미친 듯 올라가는 게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계단의 끝에 다다를때쯤 누군가 내려왔다. 폭이 좁아 옆으로 살짝 비켰다. 눈매가 짙은 그 사람이 위텅을 쳐다봤다. 그리곤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알싸한 담배향이 났다.

그리고... 그와 처음으로 만났다. 그날, 그 곳에서...










손을 놓았다.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리곤 다시 놓았다. 
곧 후회했다. 
그리고 다시 잡았다. 
그게 끝이었다. 
잡은 손을 다신 놓지 않았다. 
놓치는 순간, 
그 순간은 없다










#마지막회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샘유포타쟁이 그러나 BL작가가 되고싶은 평범한 사람

mamyR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