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관리, 다이어리 등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미 들어봤을 확률이 높은데, '불렛 저널'이라는 다이어리 정리 방식이 있다.


나도  어디까지나 주워들은 것에 불과해서 '불렛 저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요체를 간단히 정리할 수는 없지만 대강 아는 대로만  적자면, '노트를 달력과 퓨처 로그, 데일리 로그 등으로 섹션을 나누고,  생각나는 사항을 데일리 로그에 두서 없이 기록하되,  항목들을 기호로 분류해서 연기하거나 필요한 섹션으로 옮겨가며 생각을 정리하고 연결하는 기록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더 캐롤 씨가 도통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발견하지 못해 창안한 이 기록법이 유명해져 유행을 타게 된 지는 5년쯤 되는데, 나는 아주 뒤늦은 올해가 되어서야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 노트가 생긴 김에 시험해보게 되었다.


유튜브  따위를 뒤져보면 손재주 좋고 정리 잘 하는 사람들이 텅 빈 노트를 시판 다이어리 못지 않게 예쁘게 꾸미고 말끔하게 기록한  자료들이 많은데, 나는 영 악필인 데다 뭐든 날려 쓰는 버릇이 있어서 공개하진 못하겠다. 공개했다간 보는 사람들마다 '아,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라는 게 이렇게나 추잡하고 불편한 것이구나, 다이어리 따위 쓰지 말자' 할 게 뻔하니 산업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무튼  ios와 안드로이드, 맥북을 모두 쓰면서 만족할 만한 일정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do나 Calengoo,  toodledo, ticktick 등 다양한 앱을 시도해놓고 이제 와서 아날로그 수기 일정 관리를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히  답하자면, '그게 더 실감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느낌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 공감할 수  없겠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앱으로 간편한 일정 관리 시스템을 구축한다 해도 앱을 닫으면 그건 '거기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들이 어느 정도 모호하고 추상적인 영역에 머물게 된다.


해가 지는 광경을 실제로 보는 것과 인터넷으로 '곧 일몰입니다'라는 알림을 받는 것의 차이라고 하면 좀 과장이겠고, 시각을 아날로그 시계로 보는 것과 디지털 시계로 보는 것의 차이 정도라고 말하면 비슷할까?


시계  바늘을 보면 굳이 숫자를 인식하지 않아도 감이 오는 반면에 디지털 시계를 보면 어떤 뇌내 변환을 거쳐야 하듯이, 종이를 펼쳐서   내가 손으로 써넣은 기록을 보는 편이 키보드를 두드려 입력한 일정을 화면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또렷한 실감을 주는 것이다.


특히  나는 억울한 옥살이나 군역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하루가 지나면 달력에 빗금을 그어 표시하는 것을 일과로 하고 있는데, 이런 표시를  하고 있자면 시간이라는 게 참으로 유한하며 덧없고, 맥없이 흘러간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실감이 들어 엄숙해지기도 하고  뭐라 말할 수 없이 슬퍼지기도 한다.


연필이  종이의 면에 사각, 하고 갈려나가며 빗금을 치는 순간의 만감. 그것은 망쳐버린 시험을 스스로 채점하는 순간의 작은 절망처럼  '오늘 하루도 틀려먹었구나'하는 아련한 안타까움으로 가슴 깊이 쌓여간다. 이 느낌은 아마 애플 펜슬과 종이 질감 필름을 쓴대도  얻을 수 없는 것이리라. 꼭 얻어야 하는 느낌인가 싶긴 하지만.......


각설하고,  불렛 저널의 특장점이란 바로 '필요한 페이지는 내가 만든다'라서 오늘은 두 페이지에 걸처 1년의 모든 날짜를 볼 수 있게  '연력'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한 해를 한 눈에 보이게 해놓고 지난 날에 빗금을 쳐보니 2021년도 대략 24분의 1쯤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


아무튼  동일한 페이지를 계속 만들어 놓으면 한 인간의 생애조차 딱 한 권으로 정리해서 볼 수 있는 셈이다. 삶이라는 게 이처럼 짧고  허망한데, 거기에 자신이 채워가는 것들이 고작 빗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가슴 속에 찬 비가  들어차는 듯하다. 반대로 삶의 목적을 '여기 있는 빈칸들이 모두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삶이 더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손으로 쓰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디지털과 적절히 역할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수기 다이어리의 장점만 늘어놨는데, 사실 단점도 너무나 많고 명백하다. 당연히 검색도 안 되고 칸이 늘어나지도 않으며, 같은  항목을 두세 가지 달력에 다시 옮겨 적자면 영 귀찮기까지 하다. 중요한 사항을 다시 옮겨적으며 내 머릿속에 각인한다는 게 불렛  저널 시스템의 근간이라곤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게다가 이미 이용 중인 디지털 시스템과 연동되는 것도 아니며 알림을  설정할 수도 없는지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을 기록하기엔 영 맞지 않다.


따라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한데, 앞으로는

- 반복적인 일, 복잡한 편집이 필요한 일정 정리는 디지털로만 처리하고,

- 단순 일정은 양쪽을 다 쓰며,

- 문제 사항, 아이디어 정리의 초안, 더 넓은 시야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엔 아날로그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정립할 생각이다.


이렇게  이래저래 복잡하고 불편하더라도 역시 디지털이 최고라며 다이어리를 단기간에 집어던지진 않을 것 같다. 놀랍게도 도통 감이 오지  않던 문제들이 손으로 직접 써보면 금방 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물질계에 존재하며 육체로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축복이자 저주가 아닐까?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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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밀리의 서재: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카카오 페이지)을 썼습니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두서없는 잡상들을 올립니다. 간혹 게임이나 영화 얘기도 합니다. 트위터 @memo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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