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란체스코는 나에게 격정을 죽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다 아니다 대답하지 않았고, “밤이 깊었으니 들어가서 주무세요.”, 툴툴거렸다. 사제는 금색 머리칼을 헤집듯이 긁적이다가 “내일 얘기하자.”고 나의 무도한 어리광을 승인한다. 문안을 온 그가 떠나자마자 나는 서랍을 열어 빈 악보를 여러 장 꺼내 그의 이름을 붙였다. “기만자,” 종이에 그 선율을 적었다. 당신은 불타는 트로이아를 본 일이 없다. 까닭에 망국의 서러움은 알지 못한다.

 

2.

미셸 펠레티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화가 치밀었는진 그사이 고작 해가 저물었다는 이유만으로 잊어버렸다. 얼굴 마주 보고 서로 역겨움을 참아가며 차를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사소한 태도나 눈빛, 발언에 배어나는 연민을 참아주기가 어려웠다. 삶에 대한 강론이며, ‘그렇게 처신해선 안 된다’는 말이며, 옳고 그름과 무관하다. 이것은 발화하는 자가 ‘누구’인가(일종의 에토스(Ethos))의 문제다. 찻잔을 던지고 낮은 테이블을 걷어찼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레온하르트 군.” 돌이켜도 좆같은 새끼. 그는 나의 행위가 예절에 어긋난다는 말을 기어이 내뱉는다. 아는 체를 하고 나를 가르치려 드는 태도가 짜증이 치밀었다. “야.” 그가 나보다 세 살이 위건, 넉 살이 위건 관심 없다. 실낱같은 대화는 번개처럼 내리쳐 끊어버리자, 나는 이 개새끼와 더 나눌 말이 없다.

“네가 사람 새끼라면,”

펠레티에의 새까만 머리칼을 불현듯 움켜쥐고 당겨도 펠레티에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다. “…조언이 주제넘었습니까? 그렇다면 사과드리고요.” 말이 더 안 나왔다. 나는 서 있고 그는 앉아 있다. 명백히 내가 펠레티에의 머리칼을 힘으로 당겨서 나를 올려다보게 만들고 있는데도, 그는 번번이 나를 내려다본다. (피해망상,) “어떻게,” 그럴 적이면 내가 지금 누구의 혼으로 격노에 휩싸이는지조차 알 수 없다. 심장 소리가 커진다. 말문은 꼬이고, 미셸 펠레티에의 목소리에 일말의 변화조차 없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그의 오만한 영혼을 꺾고 무릎 꿇리고 모가지를 잘라다 너른 평원 무너진 성벽 앞에 던져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작자가 나의 세상을 남김없이 불태우리라는 본능적 공포가,

내가 내뱉은 단편적이고 날카로운 말이 문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펠레티에의 뺨을 친 후였고, 정말 귀신같이 그 순간에 카라가 돌아왔다. 그 오스만 제국 이교도 새끼는 좀처럼 화를 낼 줄 모르는 허허실실한 인격으로 온 주제에 그날은 내 사지를 토막이라도 내어 강물에 던져줘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굴었다. 나와 카라로 격정의 불길이 옮겨가니 응접실에 남아나는 집기가 없었다. 펠레티에는 어느새 나와 카라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기 시작했고, 거의 살인이 나기 직전에 프란체스코와 제냐가 피투성이가 되어 들이닥쳤다. “다들 정신이 나갔군.” 우리를 힘으로 갈라놓던 사제의 한탄이다.

 

3.

펠레티에는 스스로가 내게 한 발언을 증언하지 않았고, 그랬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저녁 식사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카라와 프란체스코는 지금 틈새를 수선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도 8명이라도 모이는 편이 좋다고 했지만, 글쎄, 만나봐야 꼴이 이렇다. 나는 가급적 사도라는 것들의 머리칼 한 올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만나면 얌전하던 신격도 날뛰는 것 같고,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나는 점점 더 출처를 알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처럼 침전한다. 기실, 펠레티에는 나에게 인생 조언을 늘어놨을 뿐이다. 같은 말을 프란츠가 했더라면 짜증은 좀 치밀어도 머리채를 잡아야겠단 격정에 미쳐서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을 터다. 펠레티에도 그 사실을 알지만, 그 재수 없는 사도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함묵했고 그 바람에 안 해도 될 사과를 종용받는 길을 골랐다. “재수 없는 새끼.” 나는 펠레티에의 악보에 붙일 이름을 아직 고르지 못했다.

프란체스코의 악보에 떠오르는 것을 몇 줄 적다가 금방 질려 깃펜을 내려놓았다. 펠레티에 저택의 객실은 구성이 나쁘진 않았다. 안락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핏자국 같은 장미 정원이 지척인 것만이 기분이 나쁘다. 바람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야.” 노크 소리는 현기증까지 밀려온다. “얘기 좀 하자.” 사도 오디세우스, 미셸 티모테 펠레티에가 재수 없는 새끼라면, 이쪽은 눈치 없는 새끼라고 하겠다. 빌어먹을 이교도 카라, 사도 아킬레우스.

그는 들어가겠단 통보도 없이 대뜸 잠긴 문을 힘으로 뜯었다. “미쳤냐?”고 물으니, 카라는 제 손아귀에 뚝 떨어진 문고리를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뜯길 줄 몰랐는데. 블랑한테 고치는 데 얼마 드냐고 물어보지, 뭐.” 이 저택의 어떤 물건이건 너나 내가 낼 수는 있는 가격이겠냐, 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당장은 귀찮았다. 그 또한 보나 마나 프란츠나 제냐 소볼로프로부터 화해할 것을 요구받고 마지못해 등 떠밀려 왔을 것이다. “됐으니까 끝났다 그래.” 나는 그가 망가진 문고리를 가까운 책장에 아무렇게나 끼워 넣는 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나 펠레티에가 이 멍청한 모임에 안 올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내가 꺼져줄게, 다시는 안 보면 되지, 사이비 사제가 뭐라든.”

“아무도 나한테 너하고 화해하라고 안 했는데.” 카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사과하라고 한 사람도 없어. 어떻게 사과해도 냉큼 풀릴 문제가 아니란 거 ‘사도’라면 다 아니까.”

그는 ‘사도’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어 강조했다. 격정이 치밀었을 때와 달리 카라는 인격이 안정적일 적엔 목소리가 깔끔하게 정돈된다.

“그냥 내가 사과하러 온 거야.” 반쯤 열린 문을 어깨 너머로 힐끔거리던 그는 문을 닫지 않고 나의 맞은편으로 걸어와 앉았다. “네 사과도 들으면 좋겠다 싶어서 온 거고. 뭐, 적어도 블랑을 때린 일만큼은 사과를 받고 싶어서. 날 때린 건 상관없고.” 나는 그에게 꺼지란 말을 할 타이밍을 재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가 관두었다. 호흡하기가 버거웠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우리’끼리 사과하고 화해한다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도 아닌데 이게 다 누굴 위한 쇼야, 프란체스코?”

“뭐, 우리 중에선 프란츠 녀석이 웬만하면 사도끼리 사이가 좋기를 바라는 편이긴 하지.”

“그럼 머리가 꽃밭인 네놈들끼리나 친하게 지내, 시발….” 현기증을 못 이겨 고개를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한껏 기대 반쯤 파묻으면 머리칼이 뺨을 간질이며 흘러내렸다.

“죽어도 금방 다음 녀석이 새로 올 텐데 서로가 뭐 곱다고 원하지도 않는 낯짝들을 보며 살아야 해. 난 네놈 새끼들이 사도랍시고 찾아오기 전엔 악몽 한 번 시달리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았어. 네놈 새끼들 때문에 속 시끄럽고 밤마다 시달려, 알아?”

우습게도 사실이다. 나는 내가 사도란 걸 알기 전까지, 이 개새끼들을 만나기 전까진 덜 미쳤고 멀쩡했다. 조부가 나를 거뒀을 적부터 얼굴에 있었다는 화상 자국이 불에 덴 것처럼 아픈 환각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가 불타며 녹아내리는 사람들이 발치에 매달리는 꿈 같은 것은, (“아들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자주 꾸지 않았다.

괴물이 아닌 사도라는 놈들이 나의 평화를 침범했다. (아르민 레온하르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평화롭고 목가적이었던 바이올린 연습곡과 아름다운 교향곡(과거형), 침울하고 우울한 오페라(현재형)) 이것은 일방적인 침략이다. “…아르민,” 나를 호명하는 그들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다. 불필요한 소음 같은 사명도 지겹다. 아아, 카라가 움직인다. 어느덧 내 앞에 선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여전히 슬퍼?” 멍청한 질문. “죽도록.” 한껏 몸을 움츠리고 내뱉는 그에 어울리는 어리석은 답이다.

“밉고, 버겁고?”

“정말 죽을 만큼.”

“그렇군.” 카라는 눈을 깜빡였다. 도로 자리에 돌아가 앉은 그는 뭔가를 골몰하는 것 같았지만, “그럼 아이네이아스라는 녀석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침략에 대해 사죄하지. 기억도 안 나고, 난 잘 모르는 일이지만 당한 사람은 여전히 시달리는데 저지른 놈이 모른다고 잡아 떼는 건 별로 좋지 못한 일이잖아.”

“…원하지도 않아.”

“그럼 뭘 했으면 좋겠는데?”

“…….”

“아르민.”

“시발.” 카라가 웃었다. “욕하지 말고 요구를 해. 아이네이아스를 불러.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 부른다고 기어 나오는 신격이 아닌 걸 알면서.

“우리가 져주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우릴 용서할 기분도 아니라면 뭘 어떻게 해야 네가 우릴 만나러 왔을 때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건데? 아아, 공정하게 승부라도 할까, 다치는 건 프란츠가 좋아하지 않으니까 뭐라도, 그리스도교 놈들은 뭘 좋아하지? 주사위 게임 같은 거?”

“내가 안 오겠다잖아. 말귀를 못 알아들어?”

“오스트리아 말은 못 알아듣지, 아무래도.”

“말꼬리 잡지 말고, 오늘부로 안 보면 되는 일을 왜 키우려 드냔 말이야.”

“그렇지만 아르민,” 내가 날을 세워 무슨 말을 쏟아도 카라의 온도는 올라가지 않았다. “우린 너를 힘으로 들어다가 여기 앉혀놓은 적이 없잖아.”

그는 눈치가 없다.

“다 떠나서 너라는 사도는 외로우니까 여기에 와 앉아 있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정말이지, 더럽게 눈치가 없다.

“사도라고 해봐야 세상에 고작 12명뿐이니까.”

그 숫자는 사실, 짊어지는 사명의 무게보다도 고독에 있어서 더 빈약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프란츠는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그래서 더군다나 우리끼리 싸움이 나길 원하지 않는 거겠지. 우리는 고작 12명뿐이다. 서로 죽을 만큼 미워하는 것은 사치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도망쳐도 좋을 대체 집단이 없고, 우리 또한 절반은 인간인 까닭에 고독에 취약해. 가끔 버겁도록 증오하면서도 그들이 나를 부르면 나는,

“나는 네 신격하곤 화합이 어려운 처지긴 하지만, 너하곤 잘 지내고 싶어.”

그들을 조금쯤은 사랑하고야 만다. 멍청하게도.

“그러니까 미안하단 말도 해야겠고 네 신격을 달랠 방도도 알고 싶어.”

“…외로우니까?”

“응.” 카라 녀석의 딱 하나 좋아하는 점이다. 아킬레우스가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는 대체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사람이잖아. 어머니가 신이거나 말거나.”

 이럴 때면, 우리 중에 내가 가장 미쳤다는 사실만을 직시한다.

“…주사위 게임 같은 걸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녀석일지는 모르겠는데.”

“해보지 않고서야 모르는 거지, 어설프게 져주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너랑 내가 주먹다짐으로 승부를 내기 시작하면 이 주변에 펠레티에 백작이 가구를 일회용으로 쓴다는 소문이 날걸.”

“그 새끼 평판은 우리가 안 싸워도 박살이 나 있잖아.”

“더 망가뜨리고 싶지 않단 말이지, 친구니까.”

“나하고 그새낀 친구였던 적이 없어.”

“아, 그러지 말고 내일부터라도 친구 해 봐. 블랑 녀석이 잔소리가 많아서 그렇지, 친해지면 꽤 웃겨, 들어봐, 전에 말이야….” 이 불합리한 세상에 현현하여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우리는 왜 이다지도 사람으로 나서 저미는 고독과 애증이라는 모순을 감내해야만 할까, (왜 나조차도 다면적일까? 나는 사도가 정말 싫고,) 아, 카라가 웃는다….

내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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