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화산귀환(1649화까지 완독)

* 오메가버스AU(임신소재有)

* 가상의 배경(천마를 잡고 잔당을 처리하는 시기)

* 이 글은 개인의 취미로 만들어졌으며, 공식(관계자)과 일절 관계없습니다.

* 해당 글은 2024.01.21. 아이소에서 배포했으며, 일부 수정된 파트가 존재합니다.



忘却




백천의 고운 뺨을 타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새벽부터 제 혈육들에게 여간 시달린 게 아니었다. 후발적 고아가 될 방법을 고민하던 차 집안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들이 장로에게 불려 가지 않았다면 여태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저 둘을 한 번에 끝낼까를 고민했을게 분명 했다. 불순함으로 흩어지는 정신을 다잡고 검을 내리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을 서성이는 기척에 백천은 소매로 대충 이마를 훔치고 부러 소리를 냈다. 높게 묶은 머리칼이 산뜻하게 흔들렸다.

"여기까지 할까-"

저를 기다린 것이 맞는지 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익숙한 무복에 백천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부당주께 인사드립니다."

마주 인사를 건넨 백천이 물었다.

"남궁의 무인께서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그, 다름이 아니옵고… 그러니까, 사실은… "

불안함이 가득한 몸짓에 백천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자리를 옮길까요?"

"아니! 그게, 그게요."

"예."

"소, 소가주께서-"

다시 주변을 살핀 남궁의 무인이 힘겹게 말을 전했다.

[소가주께서 쓰러지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백천의 기세가 사납게 일렁이자 남궁의 무인이 포권을 취하곤 고갤 푹 숙였다.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처소에 있습니까?"

무인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백천은 걸음을 옮겼다. 남궁의 처소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미묘한 분위기에 백천의 걸음이 느려졌다. 사람이 없다. 주변을 경계해야 할 무인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듯 주변을 살피는 무인에게 무언갈 묻기는 어려워 보였다. 남궁도위의 처소에 가까워질수록 백천은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백천의 걸음이 다시금 빨라졌다.

일순 저를 발견한 남궁명의 낯에 황망함이 떠올랐다. 곧이어 뒤 따르는 남궁의 무인을 보고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네 녀석."

"장로님. 무슨 일입니까."

뒤따르던 무인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크게 하더니 비명처럼 외쳤다.

"장로님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더는 버틸 수 없는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도망치는 무인을 매섭게 노려보던 남궁명의 시야에 걱정스럽게 남궁도위의 방 앞을 서성이는 백천의 모습이 담겼다. 제 조카가 마음에 품었다는 이.

"장문대리는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얼굴만 보고 가겠습니다."

"아니요. 안 됩니다."

"어디가 아픈 거랍니까? 왜, 왜-"

저리 앓는 겁니까. 차마 큰소리로 묻지도 못하는 백천의 모습에 남궁명은 앞서 생각해 둔 변명을 꺼낼 수 없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남궁명이 말을 피하자 백천은 갑갑해졌다.

“장로님.”

백천은 모르겠지만 문밖으로 새어 나온 남궁도위의 향이 백천을 조금씩 감싸고 있었다. 어찌 알았는지 벌써 눈치를 챈 것이다. 제 정인이 저를 달래줄 이가 왔다는 걸. 저이가 다칠까 항시 애면글면하는 조카를 뻔히 알고 있는 남궁명은 고갤 저었다.

"재발현입니다."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다.

"재, 발현이요. 도위는 극양인으로 알고 있는데요."

"간혹 재발현 하기도 합니다. 더 향을 잘 다루고 능숙해지지요. 허나 위험합니다. 저도 언제까지 예서 지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문대리도 어서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위험하다니요? 재발현은 열병처럼 앓는 게 아닙니까? 발현열과 비슷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소가주는 조금, 특별합니다."

"무엇이요."

좀처럼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백천을 보며 남궁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가주는 첫 발현 때도 위험했습니다. 재발현은 열락기와 함께 오기에 첫 발현보다 더 위험하다 들었습니다. 지금 이곳엔 소가주의 향이 가득합니다. 이 정도면 평인에게도 해가 갈 수 있습니다. 저는 가까운 혈족인지라 아직까지도 괜찮은 겁니다. 그러니 장문대리는-"

"그렇다면 더더욱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장문대리. 음인도 버티기 힘든 향인데 하물며 장문대리는 평인이지 않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음인입니다."

"…예?"

남궁명은 순간 백천이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인상을 찌푸렸다.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

"농이 아닙니다. 모자라게 태어나 향은 없지만, 향인도 음인도 맞습니다. 그러니 들어가 보겠습니다."

"장문대리!"

남궁명이 다급하게 백천을 잡아 세웠다.

"안 됩니다."

"왜요. 음인이라 괜찮습니다."

"위험합니다. 그리고 …회임,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니-"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말씀드렸다시피 부족하게 태어난지라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장문대리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장로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 부분은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천은 몸을 바르게 세워 남궁명을 마주했다.

"…어렵다고 합니다. 향을 제대로 낼 수 있지 못하니 열락기가 제대로 오지 못하고 그러니 향인으로서의 능력이 한없이 부족하다 덥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아닙니다. 장문대리. 다칠 수도 있습니다."

염려가 가득한 눈에 백천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제가 향을 내지 못하니까요?"

"예. 소가주는, 도위는 지금 열락기를 함께 겪고 있습니다. 장문대리를 배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괜찮을 겁니다. 심려치 마세요."

거듭 붙잡으려는 남궁명의 손을 백천이 느리게 피했다.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 제가 자리 비운 명분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더는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남궁명이 고갤 저었다.

"두 분의 고집은 정말… 천생연분이 맞군요. 알겠습니다. 하나, 위험하다 싶으면 소가주를 패서라도 멈추게 하십시오."

"…패요?"

"예. 두들겨 패십시오."

맷집은 걱정하지 말고 힘껏 패라는 남궁명의 말에 백천은 얼결에 고갤 끄덕였다.

"그럼, 무리하지 마세요. …소가주, 아니 도위가 많이 걱정합니다."

"예."

시원하게 웃은 백천은 거침없이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상 위의 남궁도위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백천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고작 두 걸음.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남궁도위의 움직임이 멎었다. 실이 뚝 끊어진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춘 남궁도위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세요"

"도위?"

"나가세요."

저를 집어삼킬 것 같은 눈으로 남궁도위는 백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백천이 움직이려고 하자 남궁도위가 목을 긁는 듯한 거친 음성으로 재차 으르렁댔다.

"나가요. 당장."

거듭된 단호한 거절에 백천은 손끝이 떨려왔다. 반쪽짜리인 저는 믿을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역시 나론 부족한 걸까. 백천이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남궁도위의 시선만 피했다.

"도위… 저는-"

부족합니까. 뱉어내지 못한 고통에 조용히 손을 말아쥐었다.

"백천, 그대를…"

퍼석함 속에 담겨있는 다정에 길잃은 백천의 눈동자가 천천히 남궁도위를 담았다.

"그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세상 누구보다 저를 귀히 여겨주는, 서툴지만 그 누구보다 다정한 제 정인이 맞았다. 알게 모르게 남궁도위의 기세에 잔뜩 경직됐던 백천의 몸이 차분하게 늘어졌다. 백천은 남궁도위의 눈을 마주한 채 걸음을 옮겼다. 결국 먼저 피한 건 남궁도위였다. 혹여 제 정인을 다치게 할까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의 지척까지 다가선 백천이 남궁도위의 젖은 머리칼을 만지며 물었다.

"도위- 응?"

어찌 거절할까. 달큰한 음성에 남궁도위는 홀린 듯 고갤 들었다. 제 앞에 앉은 백천이 느슨하게 웃으며 남궁도위의 머리칼 끝에 입을 맞췄다.

"나 정말 나가?"

나직하게 읊조리는, 흡사 숨소리와 같은 밀어에 남궁도위의 향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남궁도위는 이제 찰나도 아까운지 허겁지겁 백천을 먹어 치웠다. 너무 조심스러워 도리어 부끄럽게 만들던 이는 백천에게 황홀경보단 공포를, 희열감보단 고통을 주었다. 백천이 조금이라도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남궁도위는 우악스럽게 백천을 잡아당겼다.

저를 거칠게 잡아 벌리고 거듭 몸을 겹쳐올 때마다 백천은 제가 누구와 몸을 섞고 있는지 헛갈렸다. 그럴 때마다 바닥부터 치솟는 혐오감에 두어 차례 남궁도위를 밀어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마다 입술을 씹었다. 제 비명에 혹여 저를 아니 제 조카가 상처받을까 걱정해 서성이는 이가 들어올까 겁이 났다.

엉망으로 짖밟혔다. 각오가 무너지고 다시 쌓이고를 무수히 반복했다. 도움을 구할까. 모든 감각이 곤죽이 되었다.

그 무엇도 담지 않은 눈동자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백천을 가뒀다. 또다시 제게 몸을 숙여오는 모습에 백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가올 고통에 긴장하던 백천의 목덜미에 얕은 숨이 스쳤다. 고갤 파묻고 킁킁거리는 정인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무척이나 익숙한 행동이었다. 백천이 흥분하면 향이 난다며 틈이 나면 제 목덜미를 못살게 괴롭혔으니까. 코끝으로 백천의 목덜미를 꾹꾹 누르고 잔뜩 열이 오른 피부를 혀로 핥고 이를 세워 깨물었다. 가벼이 입질하는 꼴이 제게 늘 순하게 웃는 남궁도위를 떠올리게 해 우스워 잘게 웃었다.

이 순간에도 너는 너구나. 남궁도위가 저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 따라 웃었다. 잠시간 숨을 돌린 남궁도위가 재차 백천의 모든 숨을 앗아갔다.

 

이리 아픈 적이 있었나.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색사로 혼절을 할 수 있구나. 백천은 양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아직 숨이 더웠지만 향이 많이 진정됐는지 남궁도위는 꽤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가 일어나기 전 몸을 씻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에 백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상을 붙잡고 일어난 덕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없었지만,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리 없이 경악한 백천은 꼼짝도 못 하고 굳어버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제 다리 사이에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지금이라도 남궁도위를 쥐어박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기도 전 백천의 허리를 남궁도위가 감아 당겼다.

그대로 다시 끌려간 백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깨어난 걸까. 그를 부르기 겁이 났다. 남궁도위의 손이 백천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허벅지를 타고 내려간 정을 무감이 쓸어모으더니 다시 안쪽에 꾹꾹 눌러 넣었다. 백천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이 차올랐다. 빠져나오려고 몸을 살짝 뒤틀자, 남궁도위가 백천을 다시 깔아뭉갰다. 무섭게 짓쳐들어오는 감각에 백천은 끊어질 듯 숨을 토해냈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남궁도위는 끝끝내 단 한 번도 백천을 부르지 않았다.

 

 


 

 

보름이 가까워졌을 무렵 남궁명은 결국 문을 두드렸다.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남궁도위의 향이 많이 옅어지기도 했고 백천의 안위가 너무나 염려됐다. 만약 제 조카가 정신이라도 차리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겁도 났다.

"…장문, 대리."

기척은 있으나 답은 없었다. 허나 쉬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건 오히려 잠잠해진 남궁도위의 향을 폭발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에. 이각이 지났을까 메마른 답이 돌아왔다.

"예…"

"곁방에 욕탕을 준비하라 이를까요?"

"감사합니다."

무인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음성이 남궁명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궁금하실 것 같아서 알려드립니다."

남궁명은 합방한 지 열나흘이 지난 것과 집안일로 갔던 진가 사람들과 마교 잔당의 흔적을 확인하러 떠난 화산의 제자들이 다른 일이 겹쳐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렸다. 백천은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남궁도위의 팔을 치우며 겨우 침상에 앉았다.

"다행이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무어요. 씻으시는 동안 의원을 대기 시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입이 무거운 이로 모셔 왔습니다."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장문대리. 진맥을 받으셔야 합니다."

"장로님."

"예."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싶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침상에서 푹 자고 싶네요."

명백한 거절에 남궁명은 쏟아내고 싶은 말을 눌러 넣었다.

"…그럼, 탕조 준비하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통증이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건너온 곁방은 훈기가 감돌았다. 세심한 배려에 백천은 날카롭게 군것이 조금 멋쩍었다. 김이 펄펄 나는 탕조와 그 옆에 작은 물동이들과 빈 바구니 하나 그리고 영건 가득 쌓여있었다. 과분한 준비에 백천은 머릴 긁적였다.

따뜻한 기운에 긴장이 조금 풀린 백천이 탕조로 다가간 순간 다리를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욕지거리를 집어삼켰다. 거듭 심호흡한 백천이 다시 움직이려는데 순간 작은 물동이들이 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설마. 생각해 보니 남궁도위가 항상 따뜻한 물과 영건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백천은 아무래도 저쪽에서 퍼질러 자는 남궁도위를 한 대 치고 와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작은 물동이 앞에 선 백천은 내 존엄성의 바닥은 어디일지 고민하며 영건을 집어 들었다.

'원시천존이시여.'

사투 아닌 사투를 끝내고 탕조에 들어간 백천은 온몸이 나른해졌다. 생각보다 넓은 탕조에 몸을 푹 담그며 눈을 감았다. 고단함이 물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드르륵-

이각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열린 문에 화들짝 놀란 백천이 눈만 깜빡이며 남궁도위를 바라봤다. 아직도 조금 멍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던 남궁도위가 문을 닫더니 탕조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물동이로 때리면 안 되겠지. 백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탕조에 다리를 턱 올리는 남궁도위를 보고 백천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물론 무척 작게-

"더는 못해! 이 짐승 새끼야!"

탕조에 꾸역꾸역 들어온 남궁도위는 백천을 품에 안았다. 바짝 긴장한 백천이 몸을 뻣뻣하게 세우든 말든 남궁도위는 백천의 목덜미에 얼굴을 쿡 박았다.

"도위?"

그저 말없이 제 목덜미를 코끝으로 꾹꾹 누르는 남궁도위의 행태에 백천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그의 품에 기댔다. 머리통을 쥐어박을까.

 

 

한참 몸을 풀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보이는 것은 아주 깨끗해진 침상이었다. 백천은 조금 어쩌면 많이 죽고 싶어졌다. 그와 그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난장을 피웠는데 그게 말끔해져 있었다. 침구만 가져다주시면 되는데 누가 치웠을까. 백천은 도리질 치며 생각을 떨쳐냈다. 생각하지 말자. 여기서 더 지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신이 녹초가 된 백천이 침상에 앉았다.

"도위, 우리 제발 잠 좀 자자."

백천이 억지로 남궁도위를 침상에 눕혔다. 곧바로 그의 곁에 누운 백천이 눈을 감았다. 멀뚱하게 백천을 바라보던 남궁도위가 몸을 움직여 백천의 품을 파고들었다. 제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고른 숨을 쉬는 남궁도위를 보다 백천도 이내 잠이 들었다.

이틀이 더 지났다.

 

"백천?"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 듣는 이름이 이리도 달콤할 줄이야. 백천이 남궁도위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이제 좀 정신이 드십니까?"

"왜…"

황망함이 가득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바쁘게 저를 살피는 남궁도위의 모습에 백천은 조금 분하면서도 안도를 느꼈다.

"그대가 안 보여서 보러 왔다가 이리되었습니다."

"전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제가, 제가 혹여-"

혼란스러운 눈을 마주하며 백천이 웃었다.

"오랜만이라 조금 힘들었지만, 괜찮습니다. 덕분에 푹 잤습니다."

"정말 다치신 곳 없으십니까?"

"예."

백천의 옷깃 사이로 보이는 순흔들은 평소 자신이 남겼던 자국들과 비슷했다. 손을 가만두지 못하던 남궁도위가 조심스럽게 백천의 어깨를 잡아 품에 안았다. 손거스러미 같은 불안감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 물어도 답해주지 않을 것을 알아 그저 제 정인을 품에 소중하게 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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