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지민은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어. 멍하니, 창밖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를 얼굴로 있었어. 유모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지민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러고는 겉옷을 벗었어.

 

“배가 하나도 안 나왔어.”

“이제 나오실 겁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모를 수가 있나. 지민이 어색한 손짓으로 배를 쓰다듬었어. 속이 계속 좋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몸이 변하는 것도 몰랐지. 이 상황이 되기 전에 미리 알았다면, 그랬다면. 지민은 잠깐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착잡한 얼굴을 했어.

 

“많은 일이 있으셨어요. 어미가 슬프면 아이는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

“더구나 첫 아이면 배가 그리 나오지 않기도 하고요.”

“그럼 확실하다는 것이지?”

“그럼요, 마마.”

 

괜히 다시 물었어. 확실한 걸 알면서도. 혹시나 꿈인가 해서 물은 거야. 지민은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어. 유모가 겉옷을 덮어줬어.

 

“어의를 불렀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입니다, 마마.”


유모들은 그래도 기대하는 기색이 있었어. 상황이 심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민과 합궁한 사람은 황제뿐이잖아. 그것도 한의보다도 더 먼저. 그러니까 먼저 가진 아이인 거지. 즉, 무조건 지민이 예언의 상대가 되는 거야. 지민이 황후가 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지. 그러니까 다시 제자리. 다시 귀중한 황후. 귀인. 그 이유로 다들 조금 기대했어. 이걸 황제에게 말하면, 황제가 즉각 지민을 복위시킬 것이라고.

 

하지만 지민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 전혀 기쁜 기색이 없었고 그냥 똑같아. 기대하는 눈치조차 아니었지. 회임 사실을 말하기만 한다면, 분명 황제가 다 해줄 텐데. 지민은 그 기쁨은 하나도 없어 보였어. 그러니 곧 유모들의 표정도 변했어. 황제의 저주를 깨고 첫 아이를 가졌는데도 이런 얼굴이라니. 이건 분명 지민의 생각이 있는 거였지. 그것도 좋지 않은 생각.


“마마. 폐하께… 아뢰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뢰어야지요. 폐하의 첫 황손입니다. 분명 마마께서…”

“아니.”

“…예?”

“아니. 아뢰지 않을 거야.”


절대로. 지민이 조용히 말했어. 분위기가 고요해졌어. 지민은 울지도 않고, 그저 담담한 얼굴로 유모들을 바라봤어.

 

“한의가 아이를 가졌어. 그리고 황후가 됐고, 나는 이제 귀비야.”

“하지만…”

“한의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알 수 없어. 폐하를 속였을 수도 있고, 나 때문에 저주가 풀려서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

“…….”

“하지만, 이 아이는…”

 

지민이 배를 쓰다듬었어. 회임 소식이 먼저 알려진 건 한의야. 대단한 가문을 가진. 하지만 지민은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빼면 아무것도 없었어. 가문은 몰락했고 자신은 예언을 지어낸 부모의 자식이 됐지. 후궁들을 질투하고 적으로 돌리면서, 황제까지 독점했으니 이 궁에 남은 지민의 편이라곤 정말 몇 명 없었어. 다들 지민을 예뻐하기는 했지만, 회임까지 한 '예언의 귀인'인 한의의 가문에 맞서서 지민을 지켜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었음.

 

“믿어주시지 않을 거야.”

“그럴 리가요. 태후마마와 폐하께서는… 마마를 귀애하십니다.”

“폐하께서는 날 귀비로 강등하셨고, 태후께서는 내 가문을 박살 내셨어.”

“…마마.”

“난 궁지에 몰렸잖아. 회임하지 못했고, 한의가 진짜 귀인이 되어서 회임했어. 그런데 이 와중에 내가 먼저 회임했다고 아뢰면?”


그럼 나를 믿어주실까? 누가? 지민이 고개를 들었어. 억울한 눈에 눈물이 찼어. 당연한 거야.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겠지. 어쩌면 황제는 믿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그렇다고 그걸 인정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지민은 이미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예언을 날조한 대역죄인의 가문 사람인데. 만약 둘 다 황제의 아이라면 누가 봐도 한의의 아이가 더 권위가 높았음. 물론 한의의 아이가 황제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민은 그 불확실한 가능성에 제 아이를 걸고 싶지 않았음.

 

“꾸며냈다고 생각하시겠지.”

“하지만 정말 회임하시지 않았습니까. 진맥만 해도 다 알 거예요.”

“폐하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야.”

“그럴… 그럴 리가…”

“아이가 죽을 수도 있어. 나도 마찬가지고.”


지민은 배를 움켜쥐었어. 끔찍한 상황이야. 그래도 아이는 죽일 수 없어. 너무나도 이 상황이 미웠지만, 이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야. 그리고 지민의 첫 아이였지. 절대 포기할 수 없었음. 어떻게 해서든,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지켜야만 했어.

 

그러니 절대 아이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음. 만약 황제와 태후가 이 아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한의의 가문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가문이 몰락한 자신은 힘이 하나도 없었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한의의 황손이 진짜가 아니라는 이유로 안씨 가문이 몰락할 가능성이 제일 작았지. 나머지는 다 지민과 아이가 죽는 가능성이었어. 그러니 그런 위험한 일은 할 수 없어. 절대로.

 

“그럼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

“마마. 존재를 알리지 않아도, 아이 울음소리가 새어나갈 겁니다. 폐하께서 이 궁에 오지 않으신다는 확신도 없고요. 혹여 합궁이라도 하러 오신다면요?”

“…….”

“어떻게 숨겨도, 결국은 들킵니다.”

“맞아, 유모. 아이를 숨겨서 기르지는 못해. 여기는 궁이야.”


배가 부르면 바로 들키겠지. 그러니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아. 지민이 딱 잘라 말했어. 사실, 이 상황에서 방법이 하나밖에 더 있을까. 어차피 태생부터 이용당했어. 그러니까 뒷일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중요한 건 이 아이와 자신을 지키는 일뿐이었음.

 

“궁을 나갈 거야.”

“네?”

“궁을 나가야겠어, 나.”


지민이 힘주어 말했어. 그 방법밖에 없어. 겨우 웃으면서 다시 말했음. 궁을 나가야겠다고. 갓난아기 때 온 후로 단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궁이지만, 그래도 나가야만 했어. 지민이 그렇게 말하자, 유모들이 한숨을 뱉었어.

 

“들키면 바로 찾으실 겁니다. 어찌 도망하시려고요? 황손까지 품으셨는데…”

“못 찾게 하면 돼.”

“방법이 있으신 거예요? 폐하의 무사들은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국경을 넘어도 찾아낼 거예요.”

“방법, 있기는 있어. 대신 유모들이 도와줘야 해.”


생각이 났어. 태형의 말 때문이었음. 태형이 그랬잖아. 자결이라도 한다면 국경에 있는 친형제들을 죽여버리겠다고. 그 말을 들으니까 생각이 난 거야. 자결하면 국경에 있는 형제들이 죽을 거고, 아이가 있는데 여기 남아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럼 말한 대로 도망뿐인데, 쫓기지 않고 도망갈 방법은 딱 하나였어.

 

“죽어야겠어.”

 

나 말이야. 죽어야 해. 그래야 궁을 안전하게 나갈 수 있어. 자결은 안 되니까, 다른 방법으로. 지민이 말했어. 유모들이 경악하겠지. 지민은 그래도 덤덤했어.

 

“마마. 너무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너무 위험해요….”


마마가 잘못되시면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아기씨를 생각하셔야죠. 유모들이 만류했어. 하지만 지민은 이미 생각을 마친 뒤였음.

 

“독을 먹거나, 칼을 쓰면 자결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속이기도 어려워.”

“이미 다 생각하셨군요.”

“응. 말려도,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여기서 살 수 없어. 폐하의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아. 이 아이는 내 아이로 키울 거니까. 지민이 말했어. 그러고는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겠지. 죽은 척하고 나가야 하니까. 못 알아보게 하는 법. 결국 하나야. 지민이 마른 침을 삼켰어.

 

“시신의 얼굴이 없으면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얼굴이 없다니요?”

“얼굴을 돌로 쳐서 짓이기거나, 아니라면…”

“…불로 태우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응. 그래서 이곳을 태울 거야.”


활활 다 태울 거야. 나는 못 빠져나온 것이니, 자결도 아닐 테고 죽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지도 못하겠지. 지민이 말하며 유모들을 봤어. 다들 걱정하며 울고 있었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미 그렇게 하기로 했어. 모두를 위해서라도 이게 좋아. 유모들이 이 궁에서 힘들게 사는 것도 싫었거든. 그러니까, 그냥 자신만 사라지면 되는 거야. 죽은 사람이 되어서 감쪽같이.

 

“유모, 나랑 비슷한 시신을 구해줘. 아주 나쁜 죄인의 시신이면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아.”

“마마…”

“도와줘야 해. 그래야 나랑 아기가 살아.”


도와줘. 지민이 애써 말했어. 눈물이 나지만 꾹 참았어. 누가 키워준 어머니들과 헤어지고 싶겠음. 그리고 태형도, 태후도. 궁을 나가면 다시 볼 수 없었어.

 

“부탁이야.”

“…찾아볼게요.”

“고마워.”

“하지만, 마마. 궁을 나가면 어디로 가시려고요? 홑몸도 아니신데 생계는 어찌합니까.”

“…남은 패물을 조금 가져가려고. 그리고 난 국경으로 갈 거야.”

“국경이요?”

“응. 거기에 형제들이 있다고 했잖아. 보고 싶어서….”


내 유일한 가족들이야. 대답했어. 어차피 갈 곳도 없는걸. 그렇다면 가족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어. 물론 그들은 그곳에서 노비로 살겠지. 국경에서 노역하며 살 거야. 그래도 궁보다는 그곳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이곳에 남아봤자 아이는 지킬 수 없을 테고,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 태형과 태후를 마주하며 살아야 할 테니까.

 

“배가 나오기 전에 나가야 할 것 같아.”


시신만 구하면, 그렇게 하자. 난 괜찮아. 지민이 유모들을 달랬어. 하지만 다들 울고 있었음.

 

“제가 같이 가게 해주세요.”

“…힘들 거야. 그냥 궁에서,”

“마마.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리 중 하나라도 같이 가야 합니다.”


시신을 두 개 구해볼게요. 유모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말했어. 마마 혼자는 절대 국경까지 가실 수 없다고도 하겠지. 궁에서 가장 귀한 보물로 자란 지민이니까. 바깥이 어떤지, 뭘 하는지도 몰라. 물건을 사는 법도 모르고 백성들과 대화하는 법도 잘 모르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이를 혼자 밖으로 보내겠음. 비록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유모들 눈에는 아이였음. 그래서 결국 지민도 거부하지 못했어. 유모들 말이 맞기는 했거든. 무작정 나간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바깥세상에 무지한 건 맞으니까. 더구나 뭐든지 다 해주던 궁과는 아예 다르잖아. 그리고 아이 키우는 법도 모르는걸. 낳으면 잘 키워야 하는데 유모가 없으면 힘들 것 같았어. 어쨌든 우선은 제 아기였기 때문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 그렇게 하자. 말하자 유모가 웃었어. 아마 가장 잘 돌봐주던 원실 유모가 갈 거야. 가족도 놓고 가겠지. 그래서 더 미안했음.

 

“하지만 가족들은? 유모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가족한테는 미리 언질을 줄 거예요. 국경까지 모시고 그리로 가족을 부르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응.”

“미안하다는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지금은 아기씨 안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계속 마음고생을 하셨으니까요.”


우선 드세요. 무조건 드세요. 유모들이 말하며 급하게 식사를 다시 준비했어. 입덧이 와도 맞는 음식은 있으니 뭐라도 먹으라고. 지민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 그리고 다시 배를 쓰다듬었지. 태형과의 아이야.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망가트린.

 

하지만 지민은 이제 생각했어. 전처럼 살 수는 없다고. 지금 제 처지도 그랬지만, 생각부터 바꿔야 할 거야. 이제는 뭐든지 다 해주던 황제는 없으니까. 그리고 없어야만 하니까.

 

“내가 없어도 될 거야…”


다른 황후도, 다른 아이도 있으니까… 작게 중얼거리겠지. 자신이 그렇게 꿈꾸던 가족, 어머니 같은 태후와 완벽한 낭군인 황제는 결국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거야. 하지만 아이는 있어. 자신과 피가 이어진, 제 품에 있는 아이. 그래서 이제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음. 지민은 고인 눈물을 닦았어. 그러고는 유모들이 가져온 음식을 다시 먹기 시작했어. 눈물을 꾹 참으면서. 이젠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했음.

 

 

***

 

 

“마마. 황후궁 궁녀가 왔습니다.”

 

유모가 좋지 않은 얼굴로 말했어. 막 일어나서 따뜻한 국물을 마시고 있던 지민이 초조한 얼굴을 했어. 저번에 좋지 않게 보냈잖아. 물론 저번처럼 회임한 것을 몰랐다면, 어떻게든 되라고 마구잡이로 대했겠지만 이제는 몸을 보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걱정이 됐어.

 

“어쩐 일로?”

“…아인궁으로 문안을 오시랍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새벽이슬이 맺히기 전에 오시라고요.”

“…….”

“인비가 분명 입김을 넣었을 겁니다. 제가 당한 것이 억울하다고…”

“어쩔 수 없지. 가지 않을 수도 없어. 가야지.”

 

지민이 한숨을 뱉으며 일어났어.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었지. 신기하게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회임 사실을 알고 또 아이를 신경 쓰니까 배가 빠른 속도로 나오기 시작했어. 그래도 아직 작기는 했지만 만일의 경우가 있으니 배를 동여매고 옷을 입었지. 그래서 겉으로 보면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았어. 오히려 입덧 때문에 살이 더 빠져서 그냥 초췌해 보이기만 했음.

 

“마마. 이번에는 꼭 참으셔야 합니다. 혹시 벌이라도 내리면 큰일이에요.”

“응. 알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민이 말하며 가마 위로 올랐어. 그래도 걸어오라고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지민은 아인궁으로 향하는 가마를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어.

 

아인궁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유모 말로는 거의 태어나자마자 왔다고 했으니까, 아인궁이 지민의 집이었지. 그런데 그 궁을 뺏기고 다른 이를 황후로 모시러 가야 한다니. 생각할수록 비참한 건 사실이었어. 더구나 자신이 진짜 귀인이라는 사실까지 깨달아서 더욱 그랬지. 억울함까지 더해졌거든.

 

그래서 한참이나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어. 아마 후궁들도 다 있을 것이고, 대부분 인비처럼 못되게 굴 테니까. 얼마나 비참해지고 수치스러워지든 참자고 생각했지. 아기를 위해서.

 

그러자 곧 가마가 아인궁 앞에 도착했어. 지민은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을 했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궁이야. 어릴 적엔 태형과 술래잡기를 했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무궁화 꽃놀이도 하고, 같이 담벼락에 붓으로 낙서도 했어. 물론 태형은 담벼락에 낙서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지민이 괜한 소리를 들을까 봐 미친 척 같이해준 거였지. 그래서 그건 일부러 지우지도 않았는데, 아인궁의 주인이 바뀌면서 다 지워버렸는지 흔적도 남지 않았어. 지민은 낙서가 있던 자리를 잠시 손으로 쓸다가, 열리는 대문을 바라봤어.

 

“들어오십시오, 귀비 마마.”

 

상궁이 지민을 맞이했어. 지민은 담벼락에서 손을 거두고 대문을 넘었어. 아름답기로 소문난 아인궁 앞뜰에 후궁들이 양옆으로 서서 황후를 기다리고 있었지. 지민은 잠시 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어. 지민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는 게 싫었나 봐. 태형과 같이 꾸몄던 커다란 돌이나 배열한 꽃밭들이 전부 바뀌어 있었어.

 

또 마음이 아파. 쿡쿡 찔러와. 아마 안에 들어가도 똑같을 거야.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래도 태형과의 모든 게 사라진 기분이라 쉽게 진정되지 않았어.

 

“오셨습니까, 마마.”

“이르게도 오셨습니다. 계속 문안도 거르시고요.”

 

상빈이 나서며 말했어. 인비는 안에 먼저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음. 지민 때문에 벌을 받았었으니까,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거야. 지민은 고개를 돌려 상빈을 바라봤어.

 

“매번 새벽이슬이 맺힐 때 문안을 받으셨으니 어찌 문안을 오겠습니까. 창피하시겠죠.”

 

문 귀인이 이죽거리며 말했어. 지민은 눈을 꼭 감았다가 떴어.

 

“어찌 다들 그리 말씀을 하는 것이오. 나이도 한참 많으면서…”

 

그만 하시게. 송비가 지민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어. 그러자 상빈이 인상을 찌푸렸어. 마마께서는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한 마디 던지겠지. 지민이 혼례를 마친 후로, 황제는 그 어떤 후궁한테도 가지 않았지. 지민이 못 가게 막았으니까. 게다가 문안을 남용해서 후궁들한테 대놓고 질투까지 했으니 한참 어린 황후에게 당한 게 억울할 수도 있었어. 지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귀인이라는 것뿐이었는데, 심지어 귀인도 아니라니까 더 반감도 들었겠지. 지민 또한 그것이 잘못된 건 아니까 할 말이 없었음.

 

“무엇이 억울하다는 건가? 지금도 마마께서는 우리보다 품계가 높으신데.”

“품계는 그저 품계지요. 반역의 씨앗밖에 더 되냐는 말입니다. 죄인의 자식 주제에…”

“상빈! 그만하거라. 후궁이 어찌 그리 상스럽게 구는가.”

 

그러자 이번에는 원비가 나섰어. 송비와 같이 나이가 가장 많은 편인 후궁이었고 또 높은 품계인 비였지. 두 사람 다 태형보다 나이가 많아서, 지민에게는 엄마뻘이었고 또 그렇게 봐주면서 자라는 걸 봤기 때문에 편을 들어주는 거였어. 지민은 그게 미안해서 고개를 숙였음.

 

어쨌든 송비와 원비는 나이가 제일 많고 또 품계도 높으니 다들 더 말을 얹지는 않았어. 대신 씩씩거렸지. 지민은 저를 보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어.

 

“고맙습니다.”

“어찌 말을 높이십니까.”

“…이제 후궁이니, 말을 내릴 수는 없지요.”

 

지민이 말했어. 자신도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자애로워질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두 사람이 대단한 거였어. 그래서 더 고마웠음.

 

“몸은 어떠십니까. 궁이 멀고 또 찾아뵈면 좋지 않을 것 같아 가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그리고… 괜히 오셨다가 미움을 살 수도 있으니 오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원비와 송비, 두 사람과도 꽤나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었지. 그러다 지치면 업혀서 잠들기도 하고. 지민이 그 기억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다시 웃었어.

 

“황후마마께서 들어오시랍니다.”

“들어가세요.”

 

상궁이 대화를 끊었어. 황후가 손님 맞을 준비를 다 했나 봐. 상궁이 나와서 말하자, 두 사람이 지민을 먼저 들여보내려고 했어. 그래도 유일한 귀비니까. 서열상으로는 황후의 아래였지. 그런데 상궁이 그 앞을 막아섰음.

 

“귀비 마마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지요.”

“…무슨 말이지?”

“귀비 마마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합니다.”

“…….”

 

지민이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어.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면, 문안을 끝내고 보자고 하면 돼. 이렇게 밖에 세워둘 게 아니라. 그러니 이건 자신을 세워두려는 것이겠지. 심호흡을 한 지민이 들어가는 후궁들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어. 겨울이나 날도 추운데, 아이가 걱정됐어. 그나마 아인궁의 뜰 때문에 여기저기 불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래도 오래 있으면 곤란해질 것 같았음.

 

하지만 방법은 없어. 여기서 그냥 돌아가면 분명 궁으로 쫓아올 테고, 회임 사실을 들킬지도 모르니까. 그냥 견뎌야만 했음. 지민은 그렇게 계속 바깥에 서 있었어.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울고 싶지는 않았어. 이제 떼를 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까. 그냥 몸을 계속 움직이며 기다렸지. 비참하고 또 수치스러웠지만, 각오하고 왔으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참을 거였어.

 

한참이 지나자, 대화 소리가 멈췄어. 곧 후궁들이 나오겠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죄다 비웃는 얼굴이었어. 새벽 문안을 시키다가 본인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겠지. 지민은 고개를 푹 숙였어. 그러자 상궁이 천천히 다가왔어.

 

“귀비 마마, 황후마마께서 미령하시어 오늘은 이야기를 못 하신다고 전하셨습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내일부터는 꼭 새벽이슬이 맺히기 전에 오셔요. 상궁이 말하자, 긴장된 숨이 풀렸어. 차라리 불러서 조롱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까? 뭐든 서글펐지만 그래도 돌아가라니 어서 가서 몸을 녹여야 했어. 황후가 저를 도발하든 말든. 중요한 건 아기니까.

 

“알겠네.”

 

지민이 말했어. 상궁이 퍽 당황한 눈빛을 했어. 평소 지민이라면 들이닥쳐서 아직도 안에 있는 인비의 뺨이라도 칠 테니까. 그러라고 말한 것이었는데 그냥 수긍하고 돌아가겠다니 계획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어.

 

“괜찮아지시길 바라겠네.”

 

물론 지민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 아기가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 거야. 아인궁에서 난리라도 부려서 죽고 싶어 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것에 동조해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뒤를 돌아 가마에 다시 올랐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음.

 

“어서 가자.”

 

지민이 배를 감싸며 말했어. 그러자 가마가 출발했는데, 저 멀리서 황제의 깃발이 보였어. 아마 아인궁으로 오는 것 같았음. 그래봤자 지민의 궁은 반대쪽이라 만날 일은 없었어. 더 빨리 가라. 그래도 지민은 다시 한번 명령했어. 몸을 웅크리면서.

 

아마 아이를 보러 가는 것이겠지. 귀중한 황손을, 한의의 아이를. 좋아하니까 가는 거야. 그러고는 한의를 보며 웃고 배를 만지며 아이를 살펴주겠지. 어쩌면 악공들을 불러줄 것이고 또 어쩌면 직접 서책을 읽어줄지도 몰라.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니까…. 지민은 다시 살짝 깃발을 훔쳐보며 입술을 깨물었어. 그러고는 배를 더 감쌌음. 지금이라도 당장 뛰어가서 내가 반려의 첫 아이를 가졌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지.

 

“내가 더 많이 사랑해줄게.”

 

지민이 배를 보며 조그맣게 속삭였어. 가질 수 없는 건 탐내면 안 돼. 굳건하게 결심하면서.

 

 

 


24.

 



“마마, 그리 기쁘십니까.”

“기쁘다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이게 얼마만의 경사인지…”

“좋아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대가 끊길 뻔했어. 하마터면 간신히 얻은 황좌를 잃을 뻔했다.”

“이 아이가 지켜드릴 겁니다. 그렇지요, 폐하?”


한의가 물으며 태형을 바라봤어. 태형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음. 대화도 듣지 않은 모양인지, 멍해 보였어. 태후는 서운해하는 한의의 얼굴을 보다가 태형을 대신 불렀어. 그제야 태형이 고개를 옮기겠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물어.

 

“아이 말이다. 건강하니 기쁘다고 하였다.”

“…예. 그러셨습니까.”

“아비가 아니냐. 네 아이야.”

“예, 압니다.”

“그러니 네가 황후를 살펴야지.”

“…….”


몸조심하여라. 태형이 마지못해 한 마디 말했어. 어떻게 가진 아이인데, 관심조차 없어. 이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거였음. 태후가 한숨을 뱉었어. 진짜 예언의 귀인이 나타났고, 궁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를 가졌어. 평생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던 아이였지. 그런데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거야. 여전히 지민만을 반려라고 생각하는지, 태형은 새 황후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음. 회임이 확인된 이후로는 아예 황후궁에 가지도 않았지. 다른 후궁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회임한 황후조차 보러 가지도 않으니 태후가 일부러 둘 다 태후궁에 부른 거였는데. 태형은 여기서도 똑같았어.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라. 정무가 많아 그런 것이니까.”

“그럼요, 어마마마. 폐하께서 늘 바쁘시니 다 이해합니다.”

“그래. 착하구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마마마.”

“어딜 가는 것이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할 일이 많습니다.”

“…황후.”

“예, 어마마마.”

“잠시 내 정원의 꽃을 보고 있거라. 모자지간에 할 말이 있으니.”


태후가 한의를 내보냈어. 태형은 화가 나 보이는 태후의 얼굴을 그냥 보기만 했어.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물었음. 사실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누구랑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기 싫었어. 돌아가는 상황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전부 그랬어.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아직도 믿고 싶지가 않았음.

 

“아직도 황후에게 그리 대하는 것이냐? 네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있잖아.”

“어마마마는 어찌 다 쉽습니까?”

“뭐?”

“얼마 전까지 지민이가 황후였어요. 그리 귀애하셨으면서 어찌…”

“지금 또 지민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 애를 귀비로 내린 건 네 결정이지 않으냐.”

“아니라면 어마마마께서 가만히 있으셨겠습니까.”

“내 아들이지만, 넌 너무 정이 많아.”

 

이미 우리를 속인 죄인의 아이다. 알면서 왜 그리 편을 드는 거야. 그 아이 때문에 우리가 허비한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는 거야? 나도 지민이가 어여쁘지만, 지민이는 다시 황후에 오를 수가 없는 사람이야. 태후가 태형을 타일렀어. 가문이 거짓으로 일을 꾸며내다가 몰락해버렸어. 귀비의 품계이기는 해도 실권은 하나도 없었지. 이 상황에서 지민을 생각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였음.

 

“그럼 어마마마는 전부 끊어내셨습니까.”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겠지.”

“…….”

“너도 네 후계가 더 중요해서, 그 애한테 그런 모욕을 준 것이 아니냐.”


태후가 말했어. 태형이 고개를 돌렸음. 사실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지. 지민을 궁 밖으로 내보내서 멀리서 살게 할 수도 있었고, 아니라면 그냥 황후로 두고 아이를 빼앗아 줄 수도 있었어. 후자의 경우는 반발이 심하기는 하겠지만 황제가 작정만 하고 일을 꾸미면 가능할지도 몰랐어. 하지만 이미 다 늦었지. 다 엎질러진 물이야. 태형은 지민을 무려 황후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어. 태생부터 황후로 태어난 아이에게 그렇게 한 거야. 이제 너는 필요 없다고 버린 거였지. 네가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 안 되는 거라고. 지민이 죽고 싶어 하는 걸 알았어도 그렇게 했어. 왜냐면 그래도 자기 옆에 두고 싶었거든. 정말 지독한 이기심이었음.

 

“한의를 잘 돌봐주어야 한다. 앞으로 후계를 낳을 것이고, 이제 네 황후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태형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섰어. 다른 말, 더 듣고 싶지 않았음. 그래서 허락도 내리기 전에 밖으로 나왔어. 한의가 꽃을 구경하고 있었지. 배에 손을 얹은 채였어. 저 안에 자신의 아이가 있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음. 그래서 그냥 한의를 지나치려고 했어.

 

“폐하. 폐하!”

“…무슨 일이냐.”

“이리 가십니까. 같이 꽃이라도…”

“일이 많다고 하질 않았느냐.”

“폐하. 그리 신경이 쓰이시면, 귀비에게 가시지요.”

“뭐?”

“귀비에게 한번 가보십시오. 다만…”

“다만?”

“귀비가… 폐하를 저주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맞습니다. 또, 문안을 오면 황후마마께 무엄하게 하셔서 저희도 힘듭니다.”

 

상궁이 말을 덧붙였어. 예, 폐하. 그러니 몸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의가 말하겠지. 태형은 그냥 웃었어. 그 애는 그럴 애가 아니야. 딱 잘라 말하고 밖으로 나왔어. 그대로 어가에 오르니까, 내관이 쳐다봐. 태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지민에게 가자고 했어. 그때 이후로 처음 가자고 한 거였지.

 

어가가 천천히 움직였어. 저주라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을 텐데. 생각이 들어. 차라리 화를 내고 또 저주를 한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지민은 그 무엇도 하지 않을 테니 더 마음이 불편했음.

 

“빨리 가라.”

“예, 폐하.”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어.

 


***

 

 

“그래도 입덧이 심하시지 않아 다행입니다.”

“응. 그러게.”

“배가 작긴 하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나오고 계세요.”

“유모들이 챙겨주니까…”


당연히 건강하지. 덕분이야. 지민이 말했어. 시간이 지나서 조금 둥글어진 배가 만져졌음. 지민은 배를 쓰다듬으면서 유모가 만들어준 간식을 먹었어. 밖으로 나가면 잘 먹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무리해서라도 많이 먹어둘 속셈이었음.

 

“곧 이것도 못 먹겠지?”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나가도 제가 만들어드릴 거예요.”

“…응. 고마워.”


시신은 구해졌어. 지민과 유모 두 사람의 체구와 비슷한 시신을 내일 받기로 했거든. 독으로 사형당한 중죄인의 시신이었어.

 

“모레가 좋을 것 같아. 풍등제가 열리잖아. 불이 붙은 핑계가 될 거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럼 이제 곧이네. 짐도 미리 다 싸둬야겠다.”

“그런 건 제가 할 테니, 일단 심신을 가다듬으셔야 합니다.”


나가는 길은 많았어. 궁에는 문이 많으니까, 유모 한 명이 밤을 새워서 궁을 돌아다닌 끝에 개구멍 같은 곳을 찾았음. 그래서 불이 붙으면 그곳으로 빠져나가는 게 계획이었음. 남은 유모 두 명은 이곳에서 들키지 않도록 시신을 전부 태우기로 했고.

 

“궁을 나가면 나도 일을 해야 해. 이제 아이도 생겼으니까… 언제까지 유모가 해주는 것만 받을 수는 없어.”

“…우리 아기 마마. 많이 자라셨습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 어렸을 때는 매번 그렇게 불렀잖아.”


애기 마마, 애기 황후마마… 지민이 말하면서 씁쓸한 얼굴을 했어. 그 말이 좋은 적도 있었고, 싫은 적도 있었지. 지금은 다 소용없지만. 지민은 애써 웃었어.

 

“이젠 어른이니까…”

“마마! 폐하께서 오셨어요.”

“뭐…?”

“폐하께서 보러 오셨어요.”

“유모. 나 괜찮지?”


지민이 급하게 물었어. 배가 보기에 괜찮냐는 말이야. 네. 괜찮아요. 유모가 말하자마자,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어. 지민은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 절을 올렸음. 갑자기 왜 오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왔으니 절을 올려야지. 그래서 고개를 들어서 태형을 바라봤어. 두 달은 넘게 지난 것 같았는데, 살이 많이 내린 상태였음.

 

“어찌 오셨습니까.”

“궁을 옮긴 뒤로 한 번도 오지 않아서 온 거야.”

“…그러셨군요.”

“다들 나가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태형이 전부 내보냈어.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가만히 서 있었음. 앉아. 태형이 말했어. 오래 있지 않으실 거잖아요. 지민이 말했어. 옆에도 앉기 싫다는 의미였음. 태형은 그런 지민에게 다시 앉으라는 말은 안 했어. 그냥 앉아서 잠시 뜸을 들였지.

 

“궁을 옮겨주마. 오는 길도 좋지 않고, 너무 허름하네. 어마마마께서 그리 정하신 모양인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폐하께서 다시 오실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너는 내 귀비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이냐?”

“이런 저를 또 취하고 싶으십니까.”


대역죄인의 자식이라도, 그저 욕심이 나세요? 지민이 물었어. 날이 선 물음이 울려. 어차피 이틀 뒤면 사라질 거야. 그럼 태형도 자신이 죽은 줄 알 테니까. 죄책감 느끼게 하기 싫었어. 그래서 일부러 더 모질게 말했음.

 

“지금 짐을 모욕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도 가지지 못하는 저를 어쩌시려고요.”

“…….”

“하긴, 다른 후궁도 계속 두셨죠. 제가 황후의 자리에 있을 때도요.”

“계속 그리 건방지게 말할 거야?”

“이제 아이를 얻으셨으니, 하시던 대로 욕정을 채우시는 거잖아요.”


대역죄에 해당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어. 황제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하니까. 당장 즉결 처형을 해도 모자람이 없는, 그런 엄청난 말이었음. 태형은 그 말을 듣고서 가만히 지민을 노려봤어. 일부러 자극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알고 있었음. 더구나, 지민이 황후의 자리에 있을 때도 후궁을 둔 게 맞기는 하지. 지민이 자랄 때까지 욕정을 채운 것도 맞았음.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는 건 지민밖에 없어. 정말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그게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어.

 

“그런 말 해도, 널 죽이지는 않아.”

“…그럼 다시 오지 마세요.”

“넌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는데, 내가 더 체면을 세워야 하나?”


태형이 말했어. 지민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봤어.

 

“절 취하려고 오셨습니까.”

“황제가 갖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

“전 싫어요.”

“황제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폐하의 눈만 봐도 소름이 끼쳐요.”

“…….”

“폐하가 제 몸을 건드리시면, 저는 그냥 혀를 깨물어 죽겠습니다. 제 형제들을 죽이셔도 저는 죽을 겁니다.”


폐하의 손길 하나하나가 다 싫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폐하가 저를 그리 개처럼 길들이셨어도, 저는 그 손길이 싫고 역겨워요. 말하면서 이를 악물었어. 거짓말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 지민은 고요한 화가 올라와 있는 태형의 눈을 보며 눈물을 꾹 참았음.

 

“지금도 폐하의 손이 닿은 살갗을 도려내고 싶어요. 저주하고 싶다고요.”

“입 다물어.”

“저한테는… 겁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입 다물으라고!”


태형이 화를 내며 일어섰어. 지민은 끝까지 태형을 노려봤음. 태형이 지민의 어깨를 잡았어. 지금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려면 벗길 수 있어. 하지만 지민의 눈을 보니 그럴 수 없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손만 닿아도 살갗을 도려내고 싶다는데. 그냥 괜히 왔다 싶었어. 얼굴 보고 싶은 마음에, 모르는 척 왔는데 이렇게 또 서로 상처만 주다니. 잘못 생각한 거 같았음.


“보름 뒤에 다시 올 거야.”

“오지 마세요.”

“아니, 올 거야. 그때는 네가 싫다고 해도 봐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복종하는 법을 배워. 네 본분에 맞게 살라는 말이야. 네 말대로, 너는 그러려고 태어난 거니까. 태형이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어. 지민은 태형이 완전히 나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울음소리와 함께 주저앉았어. 지민이 우는 소리가 퍼졌어. 유모들이 달려 들어왔어. 지민은 그 자리에 앉아서 엉엉 울었음.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았어. 다 거짓말이잖아. 사실은 너무 좋았는데. 태형의 눈빛이 좋았고, 손길이 좋았고, 닿는 입술도 너무나도 행복했는데. 그렇게 거짓말을 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음. 지민은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울고 또 울었어. 여기에 아이가 있는데. 당신과 내 아이가 있다고 말도 못 하고, 축하도 못 받고. 아무 말도 못 하고 거짓으로 미워하는 게 너무 서글펐어.

 

“마마…”

“나를 미워하셨으면 좋겠어.”

“…….”

“평생… 이 기억으로 날 증오하고 미워했으면…”


그럼 괜찮을 텐데. 멈추지 않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음.




25.

 

 


풍등제가 다가왔어. 태형은 그렇게 간 뒤로 아무런 말이 없었지. 당연히 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었어. 아니라면 더 마음이 아팠을 테니까. 그리고 그사이에 지민은 떠날 준비를 마쳤음. 짐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또 더는 귀하게 살 수 없으니 만일을 대비한 패물 몇 개만 챙겼어. 옷은 나갈 때 궁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궁을 나가면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기로 했음.

 

지민은 배를 쓰다듬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켰어. 이대로 도망가다가 걸리면 죽겠지. 모두가 말이야. 그래도 지민은 갈 수밖에 없었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마.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건 챙기지 않으시고요.”

“…어떻게 알았어?”

“마마. 제가 모르는 것이 있답니까.”


스무 해가 다 되도록 마마를 모셨어요. 어찌 모릅니까. 유모가 다정하게 말했어. 지민은 입술을 꼭 깨물다가, 차마 열지 못한 작은 함을 가져왔어. 예쁜 자개가 곱게 새겨진 함을 열면 노리개가 나와. 지민이 늘 하고 다니던 거. 어릴 때 태형이 준 거야.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황제의 것. 황제만이 지니고 다니는 노리개인데, 지민이 달라고 하니까 망설임도 없이 줬지. 자기는 다른 것이 있다면서 상관도 없다고 했었어. 지민은 그 뒤로 이걸 꼭 달고 다녔고, 자랑도 많이 했어. 예전 일을 알게 된 후로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지만 지민에게는 제일 소중한 거였음. 유모는 그걸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는 거야. 지민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

 

“다시는 못할 텐데, 뭐하러 가져가.”

“가장 아끼던 것이 아닙니까. 아인궁에서 나오실 때도… 이것만은 가지고 오셨잖아요.”

“…….”

“가져가세요.”

 

유모가 말했어. 사실은 가져가고 싶어. 태형이 아무리 그렇게 했어도 이건 추억이야. 지민은 아주 어릴 적부터 태형과 쌓은 추억을 조금도 잊지 못했어.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지.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그럴 거야. 확실히. 노리개를 보는 지민의 눈가가 떨렸어. 지민은 그 노리개를 가만히 보다가, 노리개를 꺼냈어. 그리고 씁쓸하게 웃었음.

 

“그래도 이건 못 가져가.”

“…….”

“이걸 가져가면… 폐하를 평생 생각하게 될 거야. 지금보다도 더.”


지민이 유모에게 노리개를 내밀었어. 시신에 다는 게 좋을 것 같아. 말하겠지. 이걸 가진 건 지민뿐이니까.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리개를 가져갔어. 지민은 배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었어. 아이는 건강하고 몸도 건강해. 하지만 국경까지 가려면 쉽지 않을 거야. 그래서 자꾸만 괜찮다고 생각하고, 또 하고. 반복했어.

 

그러다 보니까 밤이 어두워졌어. 궁 곳곳에서 풍등이 올라오겠지. 아마 황제와 황후, 다른 후궁들은 전부 모여서 풍등을 날리고 있을 거야. 지민은 올라가는 수백, 수천 개의 풍등을 보다가 제 풍등에 소원을 적었어.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풍등을 날렸지. 다른 궁인들은 밖에 나가 풍등을 날리라고 해서 유모들과 지민, 이렇게 넷만 있었어.

 

지민은 방에 기름을 조금씩 뿌렸어. 유모들도 분주하게 움직였어. 어차피 허름한 곳이고, 작은 곳이라 다행히 별채 같은 곳은 없었지. 그래서 태우기는 쉬웠어. 풍등이 조금 더 올라가자, 이제 불을 붙이기 시작했어. 안에서부터 불이 나면 안 되니까 마당에서부터 불이 시작되겠지. 지민은 유모랑 바깥에 있다가, 궁이 반쯤 탈 때쯤 몸을 옮겼어. 어차피 죄다 풍등을 날리고 있으니까 이렇게 작은 곳의 불길은 나중에 알아챌 거야.

 

그 사이에 지민과 유모는 빠르게 움직였어. 미리 알아둔 궁의 뒤쪽으로 빠르게 이동했어. 반쯤 가서 보니까, 이제 불길이 더 커져서 다들 불이 난 걸 알아챌 수밖에 없었음. 그러자 근처에서 달려가는 소리가 나겠지. 불이야, 불이야. 외치는 소리도 잔뜩이었어.

 

지민은 담벼락에 난 작은 틈 사이로 몸을 통과시켰어. 유모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밖으로 나갔어. 통행패는 미리 훔쳐둬서 성문도 문제없이 통과했어. 어차피 풍등제라 다들 들떠 있어서 한결 더 수월했지. 지민은 궁 문을 빠져나와서, 또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어. 그제야 진짜 평민 같아 보이는 것 같았음. 그래도 일단은 수도를 빠져나가는 게 급하니 알아둔 주막까지 멀리도 걸었어. 발이 아파도 꾹꾹 참고 걸었어. 그러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지. 아이 때문에 무리하면 안 되어서, 주막에서 방을 구해서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어.

 

“유모.”

“네, 마… 아니, 네.”

“이제 말 높이지 마.”

“하지만…”

“나 귀한 사람 아니야. 가문도 다 역적이라며… 그럼 유모가 나보다 신분도 높아.”

“…….”

“지민아- 그냥 이렇게 불러줘. 알겠지?”

“…알겠어요.”

“또.”


지민이 애써 웃었어.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음.

 

“나… 살면서 궁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야. 여기가 내가 온 곳 중에 제일 먼 곳이잖아.”

“…….”

“그래서 기분이 이상해. 내가 여기까지 밖으로 나올 줄 몰랐어. 평생… 평생 그 안에서만 살 줄 알았거든.”

“…….”

“그래도 우리 아기가 있으니까… 난 괜찮아.”


슬펐어. 그냥 딱 그 느낌이었어. 들킬까 봐, 잡힐까 봐 무서운 것보다는 너무 슬펐어. 다시는 황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그 그리운 추억에 젖을 수 없다는 것. 모든 게 슬펐어. 행복한 모든 게 사라졌으니까.

 

“유모, 폐하는 지금쯤 다 아셨겠지?”

“아마도…”

“…슬퍼하실까?”


그냥 날 미워하면 좋을 텐데. 지민이 말했어. 유모가 소리 없이 우는 게 보였음. 난 괜찮아. 지민은 그냥 그렇게만 말하기로 했어. 괜찮아야만 하니까. 유모는 그런 지민을 토닥여줬어. 어릴 때처럼 재워줬지. 그래서 그나마 잠들 수 있었어. 아침이 올 때까지 말이야. 태형이 제발 슬퍼하지 말고, 그냥 자기를 미워하기를 바라면서 그냥 억지로 잠을 청했어.

 

아침이 됐어. 급하게 식사를 하고 마차를 빌렸어. 나귀를 타고 가도 됐는데, 유모가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안 된다고 우겨서 마차를 빌렸음. 오래는 아니고, 강가까지만 갈 생각이었어. 강만 건너면 우선 한고비 넘기는 거니까.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궁에 아주 큰불이 났대.”

“풍등이 아니라?”

“그려. 풍등이 아니라, 궁 하나가 홀랑 다 타버렸다고 그러던데…”

“난리도 아니었겠네. 그래도 궁은 많지 않나.”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는구먼.”


지민이 얼굴을 가리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어. 유모도 주변을 살피면서 마차 안으로 들어왔음. 그래도 궁과는 좀 떨어진 곳인데, 새벽 내내 난리였는지 소문이 벌써 퍼졌음. 그러니 더 빨리 움직여야만 했어. 혹시 그 시신이 지민이 아니고, 유모가 아닌 걸 알게 되면 사달이 날 테니까.

 

“빨리 가주시오.”

 

유모가 마부에게 말했어. 즉시 마차가 출발했어. 지민은 마차의 창문 사이로 멀리 보이는 궁을 바라봤어. 희미하지만, 아직도 연기가 나는 것도 같았어. 확실하진 않아도…. 그래서 그걸 보다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음. 그리고 또 애써 배를 만지겠지. 이래야만 한다고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마차가 서서히 더 멀어졌어.

 


***

 

 

불이라는 소리가 울려 퍼진 건, 풍등이 조금 더 날아간 뒤였어. 사람들이 요란하게 움직였지. 태형은 풍등제니 뭐니 하기도 싫어서 그냥 제 궁에 있었음. 황후나 태후는 같이 풍등을 날리겠다고 어화원 쪽에 있었는데, 밖에서 불이라고 외치고 다니니까 그게 태형의 귀까지 들어왔어. 무슨 일인데 소란인 게냐. 태형이 짜증을 냈어. 정 내관이 급하게 들어왔음.

 

“폐하, 풍등을 날리다 불이 난 모양입니다.”

“어디서 났기에 여기까지 난리야.”

“불이 꽤 커서… 다들 불을 끄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어디서 났냐고 묻잖아.”

“…아, 그것이, 황후마마께서, 괜히 폐하께서 신경 쓰시면 안 된다고 하셔서,”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어. 어디서 불이 났냐고 물었는데 아직까지 대답을 안 해. 말을 돌려. 그럼 뻔한 거 아니겠어? 셋 중 하나일 텐데, 아직까지 알리지 않은 걸 보면 딱 하나 남아. 황후궁과 태후궁이라면 먼저 알렸겠지만 지민의 궁이라면 황후가 말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되잖아.

 

“가자.”

“예, 폐하.”


정 내관도 황후 명이라 아뢰지 못해서 마음이 답답했던 모양이었어. 미리 어가까지 준비해둔 것을 보면 말이야. 태형은 어가에 올라타서 정 내관을 바라봤어.

 

“앞으로는 황후의 명을 듣지 마라.”

“예, 폐하.”


어가가 출발했어. 불이 크게 났다고? 태형이 물었어. 예, 하지만 저도 직접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리 큰일은 아닐 겁니다. 정 내관이 안심을 시켜. 그래. 별일 아니겠지. 풍등을 날리다 불이 붙는 경우는 풍등제마다 있었는걸. 지민이나 궁인이 실수라도 했나 싶었어.

 

화가 풀린 건 아니었음. 손이 닿은 곳의 살갗을 전부 도려내고 싶다는데,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화가 풀리겠음. 다만 보고는 싶었지. 화난 핑계로는 못 가니까, 불이 난 핑계라도 가보려고 한 거야. 너무 비겁했지만 황제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음. 태형은 어가에 몸을 기대고, 지민을 다시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어. 무슨 핑계로 궁을 옮겨줄지도 생각했지. 궁이 타버렸으면 핑계 정도는 될 테니까, 그냥 이참에 제 궁이랑 가깝고 넓은 궁으로 옮겨주자 싶었어. 어쨌든 귀비잖아. 누가 뭐래도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움직이는데,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어. 가마를 옮기는 궁인들도 놀라서 걸음을 멈출 정도였음. 태형은 눈앞에서 활활 타고 있는 지민의 궁을 바라보면서 넋 나간 얼굴을 했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태형이 소리를 지르며 어가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왔어. 그러고는 궁 앞으로 달려갔음. 폐하! 위험하십니다, 폐하!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내관들과 궁인들이 태형을 말렸지만 소용없었어. 거의 다 타서 무너져내리는 궁이 모두의 눈에 보였어. 태형이 눈을 돌렸어. 유모 두 명이 상처 입은 채로 나와 있었어. 태형이 그 앞으로 갔음.

 

“지민이는 어디 있어?”

“폐하…”

“지민이는 어디에 있냐고!”

“그것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유모들과 궁인들이 꿇어앉았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태형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음.

 

“나오시다가… 천장이 무너져서…”

“…….”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마마께서는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어. 동시에 궁 전체가 무너져 내렸음.

 

‘폐하의 손이 닿은 살갗을 도려내고 싶어요.’

 

그 말이 혈관을 타고 맴도는 것만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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