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기도 전에 신전 카엘룸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일 년에 한 번 뿐인 대미사가 그 이유다. 전 날 부터 사제들은 대성당 안을 광내고 그 주변의 불필요 하게 솟은 잡초들을 뽑아냈다. 


“일부러 농땡이 피운 거 아냐?“

”그래, 사실 소공작님 만나 뵌다는 것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니까?“


그 시각 루시는 재현과의 담소 아닌 담소로 인하여 참여 하지 못 한 바 재현과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사제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온 몸으로 받았다. 앞서 말했다 시피 눈칫밥을 수 없이도 먹어 온 루시는 그 모든 것을 소화한다. 떠들라면 떠들라지. 세례 때 쓰일 성수대를 마른 천으로 닦는 루시의 뒷모습을 보며 사제들은 숙덕 거렸다. 뒤에서 자신을 향한 수군 거림보다 제 주머니에 가득 채워진 금화가 신경 쓰였다.




”...제가, 소공작님의 청을 거절 할 수 있으리라 생각 하십니까?“


루시는 재현의 명령에 불복종할 명분도 권리도 없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해서 아리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고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일을 수행하는 이가 문제인 거지. 루시는 아리아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며, 귀찮게 또 성찬의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신실하고 간절하게 루치아를 모셔. 오늘과 같은 소동에 휘말렸다가는 정말 내쫓겨질지도. 루시는 벌써 폐로웠다.


“그것은 사제님의 자유입니다. 제가 다른 이가 아닌 사제님을 선택한 것처럼요.“


재현의 청을 받아들이는데에 루시에게 득이 될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재현과 자주 접촉 할 수 있다는 것, 그 뿐이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러한 장면은 원작에서 읽었었다. 루시가 아닌 일반 엑스트라 사제에게 재현은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 자리에서 부터 시작해 매 꾸준히 보고를 하며 재현에게서 미량의 금전을 지급받았던 그 사제는 이후.


”그 신실하다는 추기경이 이런 질 낮은 일을 시키든?“


마물 토벌로 아스타냐로 떠나기 전 기적적으로 만났던 아리아를 찾아온 동혁에게 들켜 죽는다. 그 진검으로 가차 없이 사제를 베니 그 참혹한 시신은 근래 후작가 기사단에 들어온 말단 기사에게 맡기고 저는 아리아를 다시 만나러 갔더랬다. 피도 눈물도 없는 남주라 생각하기도 잠시 아리아의 개새끼라 생각하면 순응이 되었다. 걔한테 죽고 싶진 않은데. 루시는 느릿하게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다시 소공작을 마주했다.


“그럼 저도, 한가지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발칙해라. 그런 생각이 듦과 함께 재현은 자신의 안목에 대한 미세한 만족감을 느꼈다. 입에서 홍차의 잔향이 남으니 재현이 다시금 홍차를 입 안으로 밀어 넣어 남은 잔향을 모두 씻어 넘겼다. 자신이 명했을 때 보다 가늘어진 눈매에 루시는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잃을 것이 없는 이는 대담한 일을 벌인다. 잃을 것이 많은 이들은 그만큼 제 몸을 사렸고. 그리고 루시는 현재 잃을 것이 없었다. 


“지금 제게 600 카르트를 주세요.“

* 600 카르트 : 600만원


공작가에게 600 카르트가 큰돈이겠는가? 귀족들에게는 큰돈이 아니었지만 루시와도 같은 평민들에게는 제법 고가였다. 그 돈으로는 다섯 달 하고도 며칠을 매일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리라.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하루 한 끼에 쓰일 금액이지만 평민들은 그 돈으로 며칠을 굶주림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재현은 그 돈이 쓰일 용도를 묻기 전 돈의 가치를 물었다. 


“그만한 돈을 드리면 사제님께서 제 눈과 귀가 되어 주시는 건가요?“

"그 이상이 되어 드려야지요."


재현의 입매가 매끄럽게 곡선을 만들어냈다. 검은 머릿결과 검은 눈동자. 온통 검은빛의 사제에게서 다채로운 색이 투영된다. 재현은 루시의 발칙한 요구도, 그 이상의 답변도 모든 것을 수용을 넘어서 흡족했다. 카엘룸에 귀속된 신분만 아니었더라면 공작가에 꽤 직위 높은 사용인으로 두고 싶을 정도였으니. 일방적인 명령에서 직접적인 거래로, 루시는 작은 판도를 뒤바꿨다. 


"실례가 안된다면 그 돈은 어디에 사용 될지 궁금하네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있던 재현이 등을 떼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우호적인 행동에 루시는 입을 달싹 거렸다. 물욕 적이게 보여도 상관 없었으니까. 원작 소설 속 엑스트라 사제가 100 카르트를 받았던 것으로 보아 루시는 그 금액의 약 여섯 배를 불렀다. 곧 받을 600 카르트의 대부분은 헌금으로 쓸 것이었다. 고위 귀족, 공작가와 후작가는 그 보다도 훨씬 높은 금액을 카엘룸에 헌납 하지만 아무런 연줄도 없는 일반 사제가 백작가나 자작가와 비슷한 정도의 헌금을 낸다. 보통 대미사 때 받는 세례는 무한한 영광이자, 평생 루치아의 가호가 깃든다고 한다. 황가는 대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니 황가 다음으로 고귀한 공작가에서, 세례를 받아야 할 이. 본래라면 작년 이맘때 쯤 아라벨라가 받았을 세례. 

내일, 아리아는 대미사에서 교황의 세례를 받는다. 물을 붓는 주수례로 거행 되며 영세자*는 미사보를 쓴 채 교황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성수대에서 자연수(自然水)를 길러 영세자의 이마에 세 번 부어 흘려보낸다, 그리고 성유를 손에 묻혀 영세자의 눈꺼풀에 바르는 것이 수순이었다. 세 번 자연수를 흘려보내는 것은 이제까지의 악습을 말끔히 씻어 내린다는 의미이며 눈꺼풀에 성유를 바르는 것은 영세자가 이후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원작 소설에서 또한 아리아의 세례식이 거행 되었기 때문에 상세한 세례식의 순서는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일 대미사에 세례를 받는 이는 여자 주인공, 아리아 단 한명 뿐이다. 고귀한 날, 고귀한 작위의 소공녀는 그렇게 루치아의 축복을 온 몸에 감쌌다. 

* 영세자 : 세례를 받는 사람. 


"신앙심을... 좀 더 고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례와 없이 아무런 작위 조차 없는 사제가 낸 헌금, 600카르트. 거룩한 카엘룸은 매달 6,000 카르트 이상의 헌금을 거두어들인다. 그 헌금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것이니 헌금을 내는 명단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6,000 카르트에서 600 카르트. 고작 10분의 1. 고작.


"이봐, 여기 처음 보는 이름이 있는데?"


600 카르트. 루시는 대미사의 준비를 마치고 재현에게서 받은 600 카르트를 모두 헌납하여 명단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다. 




/




이른 아침부터 혹은, 그 전날부터 와 있던 귀족들이 2층에 모여들었다. 본래라면 대성당 맨 앞으로 자리 잡아야 했지만 이번 대미사에서의 세례는 교황이 직접 주도하기 때문에-보통 교황은 설교만 한다, 대미사 집전은 대주교가 하고 일반적인 미사에는 주교가 한다-이곳 저곳에서 일정한 헌금을 내고 대성당으로 모여드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넓은 대성당이 빼곡히 채워졌으니, 이번 대미사의 세례성사가 얼마나 화두에 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아리아의 명성 또한 드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고. 

빼곡한 사제들 사이 중간, 이도 저도 아닌 자리에 자리 잡은 루시는 루치아의 대리인, 교황이 등장하자 누구 할 것 없이 일어서 두 손을 꼭 모은 채 성스러운 이를 바라본 듯한 눈길들 사이로 슬그머니 2층을 바라보았다.

2층 사방에 튀어나온 자리들은 귀족들로 빠짐 없이 채워져 있었다. 루시는 2층을 슬쩍 둘러보다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여 자리를 비운 아리아 옆으로 재현과 공작. 2층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보니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


공작가 옆으로 자리 잡은 후작가에는 다소 익숙한 머리칼이 눈에 들어 찼다. 루치아와 닮은 달을 연상케 하는 은빛이 그것이다. 루치아를 혐오하는 재민은 이 자리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턱을 괸 채 다른 곳을 응시 하고 있었다. 혹 붉은 태양 또한 있을까 주위를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동혁은 양자로 입양 된 것이 아니라, 용병으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을 테니. 게다가 루시 또한 그리 사라졌으니 후작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루시는 가슴 한편으로 작은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재민과 그 옆 후작에게서 모로 돌리니 대성당 맨 앞자리로는 대주교와 주교인 성찬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백색 수단을 입은 성찬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례를 받는 아리아의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그녀가 더욱 성스럽게 느껴졌다. 

구원의 성녀 中 


곧 있을 아리아의 세례식에 본인이 더 긴장한 것은 아닌가, 루시의 작은 추측을 끝으로 교황이 일어서 단상에 서자 어수선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비로소, 대미사의 시작이었다. 




이 제국에 성녀 루치아의 은혜가 내리길!

교황이 손을 뻗고 그리 외치니 모두가 아멘. 두 손을 모으고 동의 했다. 이는 루시 또한 다를 바 없어 눈을 감으니 쿵쿵 뛰어대는 제 심장 박동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세례식은 본래 교황의 설교 바로 다음 이루어졌다. 루시는 이 순간만큼은 이 세계로 들어온 이후로 가장 크게 심장이 뛰었다. 제 600 카르트가 효용 가치가 있었는지, 아리아의 세례식은 얼마나 성스러운지. 앞으로의 판도는 어찌 뒤바뀔지. 


"....."


교황의 설교를 끝으로 천천히 대미사의 출입문이 열렸다. 환한 빛과 함께 미사보를 쓴 아리아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가벼운 걸음으로 대성당을 가로질렀다. 그녀가 내딛는 걸음마다 무수한 시선들이 따라붙는다. 모든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필수 클리셰인데 루시는 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시선들에 속아리가 울렁거렸다. 그녀를 선망하거나 부러워하는 눈빛들도 있지만 매음굴에서 공작가로 신분을 세탁한 그녀의 민낯을 아는 이들은 저들의 시기의 단두대에 아리아를 올렸다.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죄와 악습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새로이 태어나는 마음으로 이 세례성사에 임하도록 합시다."


일흔이 넘는 교황의 말을 시작으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사제들은 일제히 일어나 오로지 아리아만을 위한 성가를 부른다. 그것이 제법 기괴하기도 하여 루시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완벽한 타인을 이리도 축복한다, 이리도 아리아에게 강복을 내린다. 


"영세자는 루치아에게서 무엇을 청합니까?"


나는 루치아 에게서 무엇을 청할까. 루시는 마치 제게도 묻는 것 처럼 그리 되묻는다. 성녀 탈환. 그것이 진정한 목표 이자 소망이다. 전과 같이 소실 되지 않도록.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은 영세자에게 무엇을 줍니까?"


이 머리 색이 물들 때, 이 죄가 루시를 덮칠 때, 지성은 그리도 말했었다. 신성력을 일깨우면 자연스레 저주는 없어질 것이라고. 신성력이 몸에 돌면 자연스레 성물은 반응할 테고 그럼 오롯한 성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테다. 무릎을 꿇고 교황의 다소 형식적인 물음에 답하고 있던 아리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가여운 이들을 구원할 힘과 그들을 보살필 지혜를 내려주십니다."


루치아를 믿고 받들면 가엾은 이들을 구원할 힘을 내려준다. 원작에서 아리아가 성녀로 발현되기 전까지 여섯 명의 남주 중 황태자와 마탑주를 제외한 과반수를 만났다. 남주들을 구원하는 여자 주인공 아리아. 아리아는 성녀로 발현 된 이후 구휼원*에도 자주 드나 들며 더 많은 이들을 보살폈다. 루치아를 신실히 믿음과 동시에 내려지는 축복. 누군가를 구원할 힘. 

* 구휼원 : 황가 관할의 사회적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에게 금품/식품을 주어 구제하는 곳. 


“영광스러운 영세를 위하여."


어쩌면 신성력과 구원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교황은 구마 기도 후 자연수를 아리아의 머리 위로 세 번 붓고 눈꺼풀에 성유를 발랐다. 그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는 수백 명의 관중, 그 사이의 남자 주인공들. 사실상 이 모든 관중과 관행 들은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 아리아를 빛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하도록, 그녀를 우러러보게 하기 위한 장치. 


"아멘."


그리고 루시가 내건 600 카르트라는 장치는 대미사가 끝날 때까지도 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짭성녀

: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일 년에 한 번, 특히 이번 대미사는 특별한 영세자로 인해 이례적인 인파가 몰렸고 그에 따라 형편 없던 식사가 온갖 산해 진미로 탈바꿈 되었다. 귀족들은 각자 카엘룸 내 배정 받은 처소에서 식사를 했고, 일반 사제들은 어김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오로지 루시만은 식당으로, 그렇다고 매일 잠을 청하던 처소로 향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도래 한 곳은 오늘 오후 대미사가 이루어졌던 대성당이다. 닉스가 밤의 장막을 일찍이도 치는 것인지 아직 초저녁인데 밤하늘이 새카맣다. 드 넓은 대미사를 빼곡히 채웠던 아리아의 세례식. 지금 루시만이 그 광활 하다못해 공허한 공간에 있었다. 아리아가 사뿐히 가로질러 다다랐던 성수대 앞, 루시는 그 발자취를 따라 성수대 앞에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퍼 온 지도 모르는 물 주제에 성수라 불리며, 흔해 빠진 올리브유 기름일 텐데 성유라 일컬어진다. 도대체 이 일그러진 세계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 거지? 루시 안의 김여주는 물 위로 비친 모습을 무던히 바라보았다. 600 카르트를 내고 자신 또한 아리아와 같은 영세자 라는 동등한 위치로 세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예상 했던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세계는 미쳤어. 오로지 아리아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 시킨다. 아리아에 의한, 아리아만을 위한, 아리아의 세계. 그런 곳에서 제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


성수 끝에 제 검은 머리카락 끝이 닿았을 때 뒤에서 대성당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탓에 저 높디높은 층고 끝자락까지 닿을 듯한 소리였다. 루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조용하게 다가오는 걸음발에 귀를 기울였다. 황태자? 아니면 재민이려나? 차라리 루시는 황태자가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시야는 불규칙한 무늬로 덧칠해졌다. 제 머리 위로 얹어진 미사보가 그것이었다. 


"교황께서 루시라는 이를 찾으셨습니다."

"...주교님."

"소공녀와 함께 세례를 받게 하자고도 하셨죠."


백색 수단의 성찬이 루시의 머리 위에 미사보를 씌우고 성수대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사보에 가려진 탓에 성찬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리었다. 성찬이 내뱉는 음성들이 뚜렷 해 루시의 귀를 지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의 할아버지, 즉 교황은 명단에 적힌 루시를 찾으려 했다는 것에 한 번. 제 600 카르트가 효용 가치를 냈다는 것에 두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의도 대로 아리아와 함께 세례를 받게 하려 했다는 것에 세 번. 그 모든 말마디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내 가장 크게 박동 했던 순간은 지금이다.


"제가 막았습니다."

"....."

"그 루시가, 당신일 거 같아서요."


헌금 명부는 가장 먼저 성찬에게 돌아온다. 지겨울 법도 한 똑같은 이름들. 매번 엇비슷한 금액들. 무료하게 가장 마지막 장을 넘기었을 때 자작의 바로 아래 적혀 있던 600 카르트와 낯선 이름. 카엘룸에 자신이 모르는 세례명은 없을 텐데, 명부에 적힌 그 두 글자를 곱씹던 성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얼굴의 정확한 이름을 모른다. 수상한 방랑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며 굳이 이름을 알아봤자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후작가의 녹석을 가진 것도 모자라, 600 카르트 라는 돈을 어디서 구했는지. 더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 수록 수상 쩍다는 생각 대신 불순하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그런 불결한 자를 소공녀와 함께 세례를 받게 하자니, 성찬은 처음으로 제 할아버지의 말에 반박했다. 


"..루치아를 섬기는 마음이 불순해요."


교황은 제 손자의 난색을 처음 보았다. 제 손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표정을 지을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알겠다며 제 제안을 덮었다. 

그 명부에 적힌 제 이름 때문에 그 대미사때 그런 묘한 표정을 지었던가. 세례라도 받으면 이 저주가 조금이나마 씻겨 내려갈까 싶었건만. 이 몸이 아리아를, 저가 사랑하는 이를 해치기라도 했나? 루시는 순간 이유 모를 분통스러움에 제 머리 위에 있던 미사보를 벗으려 손을 뻗었다. 


"벗지 마세요. 지금 세례식을 집전할 테니."


허공의 뻗어진 루시의 손이 우뚝 멈추어 섰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마음이 루시를 쿡쿡 찌르다 못해 쑤셨다. 미사보 사이로 성찬을 질기게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성찬은 올곧게 성수대의 자연수를 손에 담는다. 


"영세자는, 루치아에게서 무엇을 청합니까?"


진정 세례식을 집행 하려는 것인지, 성찬은 세례식의 절차에 따른 기본적인 물음을 내뱉는다. 오후 대미사 때 스스로 되물어 보기도 하였고, 이러한 세례식에서는 고정되어 있는 답변이 있다. 아리아가 내뱉은 그 답변들이 그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의 루시는 그런 고리타분하게도 일관된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구원을 청합니다."


구원을 내리는 힘이 아닌 진정, 내게도 구원을 내려 깊은 곳에 달라붙은 이 저주를 씻겨 내려주소서. 간소하게 생략된 절차 뒤로 성찬이 미사보 위로 자연수를 부으니 미사보 위로, 혹은 그를 따라 물줄기가 떨어졌다. 하여 검은 머리를 군데군데 적시기도, 루시가 입은 백색 수단에 스며 들기도 했다. 이윽고 머리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성당 바닥에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루시는 그 규칙적인 소음을 따라 두 눈을 깜빡 거리니 제 얼굴을 흐릿하게 가렸던 미사보가 뒤로 넘어 갔다. 그리고 올려다본 곳에는 선명하게 자리 잡은 성찬이 있었다. 


"...창공의 루치아시여, 제 앞의 어린 영세자가 바라던 것을 얻게 하시고."

"....."

"온갖 죄악으로부터, 보호하소서."


아주 잠시간 두 눈을 서로 마주하니 성유를 덧바른 손길이 다가와 눈꺼풀에 내려앉는다. 오른 눈꺼풀에 내려앉은 손길이 눈꺼풀을 부드럽게 좌우로 문지르니 미끈거리는 감각이 낯설어 발가락을 오므렸다. 가늘게 뜬 한쪽 눈으로 바라본 성찬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표정이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손길을 언제까지 받아 내야 할지, 대미사때도 이 정도로 길지 않았던 것 같은데, 루시는 무언가 이상해 손을 들어 제 오른 눈꺼풀에 내려앉은 성찬의 수단 끝을 잡아 챘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주교님?"


루시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성찬의 손길이 떨어지니 가늘게 떴던 두 눈을 온전히 떠 보았다. 분명 방금까지 마주했던 성찬은 무감하기 그지없었는데, 어째서. 혼돈의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성찬을 루시가 다시금 마주했다.


"...이로써, 집전을 마치겠습니다."


다소 급박하게 루시를 지나치던 성찬이 크게 침을 삼키었다. 루시의 눈꺼풀에 성유를 바를 때 스쳐 지나간 것이 기이해 성찬은 대성당을 빠져나와 불규칙적인 숨을 토해냈다.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던 루치아의 외관이 그대로 루시에게서 투영됐기 때문이다. 백발의 머릿결과 가늘게 뜬 눈으로 비친 안광에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일련의 행동만 반복했다. 루시가 제 백색 수단 끝을 잡음과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일깨운 듯 제 눈에 비치던 것이 사라졌다. 다시 루시를 보았을 때는 그녀의 본래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인데도 성찬은 그것이 이젠 혼란스러워 미칠 것만 같다. 고작 그 일련의 투영이 성스럽게 느껴져서.


“...하,”


일평생을 루치아의 대리인으로 불리우던 제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현세에서 가장 루치아를 가까이 섬기는 제 할아버지보다도 먼저, 루치아의 현신을 목도했다. 누군가 제 가슴을 쥐어짜는 듯 했다. 잘 못 본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선명 했고 그 일순간 숨을 들이 마실 수도 내쉴 수도 없었다. 부정하기엔 제 몸이 반응을 한다. 성찬은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고 고개를 돌려 뒤의 대성당을 바라봤다. 

아리아를 루치아라 간주하던 안일한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후작가의 처소 안에는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온갖 때깔 좋은 음식들을 내버려 두고 풀떼기만 기계적으로 씹고 있던 재민이 상당한 거리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루시의 죽음 이후, 후작은 아예 그날을 마치 루치아가 제게 내린 예지몽이라는 듯 치부했다. 곧 진정 그 루시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다소 광적인 신념 아래 동혁을 엄하게도 굴렸다. 동혁이라는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도, 후작은 그를 무시하고 동혁을 그저 천애 고아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았다. 매일 피딱지가 앉도록 훈련을 시키고 기사 단장의 보고를 들어도 알아서 하라느니 손을 휘휘 젓는다. 재민은 매일을 구르며 악착 같이 버티는 동혁을 보며 이상한 동질감이 들었다. 저 버러지도 믿지 않는 거야. 

제 어미를 살릴 유일한 해결책, 오로지 독일무이한 그 안광. 재민은 그날 목련 향을 타고 제 머리에 앉은 손길을 잊지 못했다.


"그만 드세요. 벌써 두 병을 비우셨어요."


벌써 두 병째, 후작은 음주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않고 포도주를 입안에 잠시 머금다 그대로 식도로 넘겼다. 메마른 재민의 만류에 후작은 잔을 내려놓고 재민을 바라보았다. 부자가 서로를 마주 보니 재민은 일순간 토기가 일렁였다. 


"네 어미는 애초에 신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요."

"네 어미가 아픈 게, 내 탓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아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 무엇이 달라지더냐."


일렁이던 토기는 기어코 속을 뒤집는다. 재민은 식기구를 거칠게 내려놓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불규칙한 숨을 내쉬던 재민에게 후작은 또다시 말을 얹는다.


"루치아께서 다 살펴주실 것이다."

"그놈의 루치아..."

"방금 무어라 했느냐."

"최근에 어머니를 찾아뵌 적이 있으세요?"


재민의 날카로운 지적에 후작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원래도 재민의 모를 자주 찾진 않았지만 근래 들어 루시의 일로 인하여 후작은 매일을 후작가 안 깊은 곳에 있는 루치아만을 향한 기도실에 처박혀 있었다. 대미사 때 겨우 모습을 드러낸 제 아비는 볼이 다 패였지만 마치 다시 살아난 것 마냥 눈을 반짝이며 카엘룸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대성당에서 아리아의 세례식을 보았을 때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루치아의 축복을 받는 새로운 소공녀. 공작가에 새로이 공녀가 입양 되었다는 것은 이미 사교계를 한번 뒤흔들었던 주제다. 제 아무리 소공녀 아라벨라의 넋에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들 이런 일은 제 상식선에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일 후작도 제 어미가 죽으면 또 루치아의 머리색을 가진 이를 들이려나 싶은 생각에 구역질이 난다. 세례식 내내 빼곡히 채워진 검은 머리들을 내려다 보던 재민은 턱을 괸 채 시선을 돌려 이내 눈을 감았다. 


"만일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해도 공작가 처럼,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진짜 구역질 나니까."

"..이 애비한테 무슨 말 버릇이냐."


후작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붉으락푸르락 해진 제 아비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식사는 이만 파하는 게 서로에게 낫다는 생각에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후작가 처소에 카엘룸의 사제가 찾아왔다. 후작은 잔과 병을 재빠르게 식탁 아래로 숨기었다. 신전 카엘룸에서 음주 가무는 허락 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사제의 품에는 익숙한 것이 들려있었다. 


"헌금 납부 명부입니다,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제게 주시죠. 아버지께서 이번 대미사에 감명하시어 간략하게 음주를 하셨습니다. 곧바로 침소에 들 예정이니 제가 확인 하겠습니다."


양피지 종이에 가문의 이름과 그들이 헌납한 헌금액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재민은 아직 가라앉지 못한 후작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사제를 붙잡았다. 사제 또한 후작의 근처에서 풍기는 냄새와 그 몰골에 걸음을 재민에게로 틀었다. 사제는 이를 함구 해달라는 재민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명부를 재민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얼마를 처 부으셨나. 매번 이런 쓸데없는 대미사에 돈을 헌납하는 아비가 한심했다. 명부 끄트머리에 꽂힌 펜을 들고 재민은 명부에서 제 후작가를 찾았다.


"....."


그때 루시의 목을 졸랐던 건 자신인데, 지금, 이 순간 마치 루시가 자신의 목을 조이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재민은 애써 떨리는 손을 감추고 혼란스러운 동공을 바로잡았다. 1,900 카르트. 어김 없이 돈을 퍼부은 제 아비 보다도, 600 카르트의 헌금을 지불한 이의 이름에서 시선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명부에 사인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재민을 향해 사제가 조심스레 물으니 재민은 간투사를 내뱉고 후작가의 가문 옆에 펜을 휘갈기고 명부를 넘기었다. 


"..아닙니다."


재민의 입매가 비틀어짐과 동시에 익숙한 목련 내음이 코 끝에 맴돈다.


"내가 루치아가 되게 도와줘."


알게 모르게 머리색을 제외한 재민의 모든 것이 제 아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600 carte 

루시



 










짭성녀

: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제국의 저주 받은 황태자황가와 대립하는 공작가의 소공작아리아를 선망하는 빈민가의 개새끼신전 카엘룸의 추기경상단 제일 가는 후작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황가와 맞먹는 크기의 마탑 주인







미사보


머리색을 제외한 재민의 모든 것이 제 아비와 닮아가기 시작했다.

= 재민도 루시의 신실한 신도가 된다 ~ 

루시랑 성찬 둘만의 세례식 쓰고 싶었음. 

카르트는 짭성녀 돈 단위임. 그냥 내가 만든.. 수학자 데카르트에서 따온 거 맞음

지금 조금 바빠서 사담은 낼 추가할게요 일단 잡숴.

+ 이번 편은 제법 긴 텀을 가지고 오진 않았죠? 2-3화 부터 생각해오던 구상이었기 때문. 아무래도 특정 종교를 참고하여 쓰다 보니 짭성녀를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서 이런 종교적인 부분들에 있어 혹 불편을 끼쳐드리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되었던 회차네요. 

그리고 또다른 염려로는 누누이 언급 되었듯 벌려놓은 작품들이 많기도 한데 짭성녀 같은 경우는 그 중에서도 가장 공을 많이 들이고 있는 작품이에요, (브금도 하루에 두세번 바뀔 정도) 근래 추세를 보면 아무래도 조금 템포를 늦춰가야할 것 같더라구요 

제일 걱정인건 내가 지금 암투, 암살, 살얼음판인 이런 로판물 짭성녀 쓰다가 몽글 몽글한 학원물을 오빠동생들을 쓸 수 있겠냐는거임.ㅋㅋㅋㅋㅋㅋ...아니 써보겠어요.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요새 진짜 지독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보니 청춘이 다 죽었어요 (?)  돌리됴..... 내 청춘. 

암튼 이번 짭성녀 8화도 즐감해주시고 다음에는 다른 작품으로...? 만나뵐 것 같아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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