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쌓일 것 같네요."


 금요일 저녁, 주말 직장으로 출발하면서 확인한 일기예보가 옳았다. 일요일 아침,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출근한 동료는 ‘지금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보다 먼저 나온 나는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새벽에서 아침으로 다 넘어온 때부터 하늘에서 눈이 내린 모양이다.


 "커피 드실래요?"


 아무렴 혼자 마시는 것보단 같이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모두 ‘좋다’고 말했고, 근처 편의점으로 커피를 사러 나왔다. 여전히 눈은 날리고 있고, 학창 시절 장난으로 내 따뜻한 목에 차가운 손을 넣었던 친구처럼 차가운 바람은 쓱 들어왔다. ‘목도리를 할걸 그랬나’ 생각했지만, 편의점까지 많이 걸려야 5분이니 그냥 서둘러 다녀오기로 한다.


 직장과 편의점 사이에 아파트가 있다. 가로질러 가지 않아도 다른 길이 있지만, 굳이 그쪽을 걸었다. 놀이터가 보인다. 아이들이 있다. 모든 게 하얗다. 평소 같았으면 알록달록 칠해놓은 페인트가 보였겠지만, 하얗기만 했다. 


 아이들의 모자, 장갑, 그리고 패딩만이 새하얀 놀이터를 수놓는다. 눈이 내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뭐 그리 좋은지 아이들은 "와, 눈이다!" 소리치며 빨개진 볼로 뛰어논다. 커피를 사러 다녀오다가 본 아이들을 보고 문뜩 옛날 생각이 났다. 


 ‘저때 참 좋았는데’ 생각했다. 신나게 친구들과 놀다가 "점심 먹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소리에 "벌써 점심시간이야?" 툴툴대며 ‘빨리 먹고 또 나와서 놀자’며 들어가서 맛있게 밥을 먹고 또 놀았던 나의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참 행복했는데. 고민거리도 없고 좋았는데. 잠깐 추억에 잠겼다.


 "키가 안 커요!"

 "남자친구가 없어요!"

 "수학 60점 맞았어요..."

 "힘들어요. 학원이 옛날보다 더 많아요."


 한 공영 방송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을 만나 '고민이 뭐예요?' 물어봤던 인터뷰 영상에서 나온 고민이다. '그때가 좋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쎄. 아이들이라고 해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더라. 얼마 전 유치원에 들어 간 한 아이가 자기 동생으로 보이는 아기에게 ‘넌 좋겠다. 유치원 안 가도 되니까’ 말하는 것을 봤다.


 "지금이 행복해, 아니면 중학교 때가 행복했니?"

 "중학교 때가 좋았죠."

 "그럼 중학교 때랑 초등학교 때 중에 언제가 더 좋았니?"

 "초등학생 때가 더 좋았죠."


 "아, 진짜 전역 할 날 까마득해요 형."

 "야, 그래도 그때가 좋은 거다. 생각 없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잖아."


 '니들은 결혼하지 마라.'

 '왜?'

 '그냥 하지 마'



 우리는 종종 과거를 생각하며 ‘그때가 좋았는데’ 추억하거나 후회한다. 젊음은 부럽고, 늙음은 불행한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라고 말한다. ‘야, 그래도 그때가 좋은 거야’ 한참 어린 후배들에게 말한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까? 여기 사람은 아니지만,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동물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정원사의 집에 나귀가 있었다. 나귀는 그곳에서 나무며 나무에 줄 거름과 흙을 날랐다. 늘 등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야 하는 나귀의 운명으로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귀는 자신이야말로 열심히 일만 하고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웃집 나귀들을 보면 모두 자기보다 일은 덜 하면서 훨씬 나은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나귀는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일이 너무 힘들고 지긋지긋합니다. 나에게 새로운 주인을 주십시오.” 하늘이 나귀의 기도를 들어줬다. 정원사는 나귀를 이웃 옹기장이에게 팔았다. 그날부터 나귀는 전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다녀야 했다. 옹기를 팔러 나갈 때면 허리가 휘도록 짐을 실었고, 찰흙과 도자기를 실어 나르느라 쉴 틈이 없었다. 정원사의 집에서 일할 때가 오히려 천국이었다. 


 나귀는 다시 하늘에 대고 기도를 했다. “제발 저에게 제 품위와 성격에 어울릴 만한 새 주인을 구해주십시오. 이건 날마다 옹기와 흙 속에서 사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하늘이 그의 기도를 들어줬다. “이 나귀는 꾀 많고 엄살도 심해 우리 옹기점에는 맞지 않는군. 다른 나귀를 사 와야겠어.” 옹기장수는 이렇게 말하고 나귀를 팔아버렸다. 


 시장에서 나귀를 사 간 사람은 모든 짐승들에게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가죽쟁이였다. 말이든 소든 짐승들은 그의 집에만 들어서면 아무 불평도 하지 못했다. 팔려 간 나귀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은 어떤 짐승의 가죽도 척척 잘 다뤘다. 죽은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모습이었지만, 산 짐승의 가죽이라고 그렇게 다루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만약 불평하고 꾀를 부린다면 새 주인은 그날로 자신의 가죽을 벗겨버릴지도 모른다. 나귀는 신세 한탄처럼 말했다. “세상에, 나는 참 복도 없지. 예전 주인들과 함께 있는 게 훨씬 편했는데. 이제 저 새 주인은 죽는 날까지 나를 부리다가 마지막엔 가죽까지 벗겨버리고 말겠지.”


- 이솝 우화 중 '나귀와 주인' -


 왜 우리는 지난 일을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지’ 할까? 과거의 일이 현재보다 좋았다면, 분명 현재는 미래보다 더 좋을 텐데, 왜 우리는 지나고 나서 후회하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걸까? 정말 ‘그때’는 지금보다 더 좋았던 시절일까? 천만의 소리. 아니다.


 나귀는 정원사의 집에 있을 때도, 옹기장이의 집에 있을 때도, 가죽쟁이의 집에 팔려 간 마지막 장면에서도 힘들었다. 물론 다 다른 어려움이었겠지만, 힘든 일이 아예 없던 때는 애초에 없었다. 사람도 똑같다. 10대는 10대 대로, 20대는 20대 나름의 고됨이 있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고민이나 어려움이 없다고? 아니, 오죽하면 인생은 고해라고 누가 말하지 않았나.


 그래, 사는 것 자체가 고생이고, 삶이 고난이다. 대단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얼룩덜룩하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왜 오늘을 살아갈까? 무엇으로 우리는 오늘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괴로움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이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 ‘찰나의 행복’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영원히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밥을 먹는다고 해서 다시 또 숟가락을 들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젯밤, 불을 끄고 잠을 잔 사람도 오늘 다시 어둠이 내리면 이불을 덮고 다시 잔다. 왜 사랑을 하는가? 당신은 왜 밥을 먹고, 또 왜 잠을 다시 자려고 하는가? 


 잠깐이라도,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고, 배고픔을 물리칠 수 있으며, 피로를 해소 할 수 있으니까. ‘고작 그것뿐입니까?’ 묻는다면, '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글쎄, 너무 시시할까?


  중학교 3학년 때였나, 미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그림은 작은 점, 점에서 시작한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고, 그 모든 것들이 모여 그림이 된다고 말이다.


 어쩌면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통과 수고 뿐인 인생, 계속해서 이어나갈 원동력이 작은 찰나의 행복에서 나온다고 하면 코웃음 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그림이 작은 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고, 그렇게 그림 하나가 나온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 ‘저 사람은 참 행복했겠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순간이 다 즐거움과 행복으로 꽉 차 있었을까? 아니. 거기를 갈라보면 아마 즐거움과 행복보다는 괴로움과 수고가 더 많았을 거다. 


 하지만, 거기에 분명 찰나의 순간들이 빛나고 있겠지. 작은 점 몇 개가 모여 큰 그림이 나오듯 인생을 이어나가게 하는 것들은 분명 찰나의 순간들이니까. 그러니 오늘 느꼈던 그 찰나를 잘 간직해보는 건 어떨까? 모래알 같은 찰나의 행복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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