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썰체로 연재했던 글을 소장본으로 만들기 위해 글체로 수정한 버전입니다.

- 소장본 제작을 위한 퇴고 과정에서 몇몇 표현이 추가되거나 삭제되었을 뿐 크게 변경된 부분은 없습니다. 






13.

하얗고 몽실해 보이는 털과 반짝이는 까만 눈. 거기에 길쭉한 꼬리와 세모꼴 귀가 곁들여졌다면 위무선은 빤히 바라보긴커녕 냉큼 뒤돌아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겠지만 다행히 코앞에서 알짱거리는 털뭉치의 꼬리는 동그마니 짧은 데다가 덩치도 아주 작았다.



“토끼!”



위무선은 저도 모르게 그 앞에 다리를 접어 쪼그리고 앉았다. 왼쪽 발목에 찌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자 팔짝 뛰어 저만치 도망갔던 토끼는 위무선의 손이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곳까지 멀어진 후 멈춰섰다. 손을 뻗으면 멀어지고,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그러는 주제에 완전히 도망치진 않으니 처음엔 단순히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었을 뿐인 위무선도 조금씩 약이 올랐다. 너 내가 꼭 잡고 만다. 위무선은 드물게 환하게 웃는 낯으로 푸른 대나무가 듬성히 자란 야트막한 둔덕을 분주히 뛰어다녔다.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서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밤마다 어두운 창밖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걸 빼고는 평화롭다 못해 한가롭기까지 했다. 강징은 위무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진 수업에 나오지 말란 엄포를 놓았을 리가.


이대로 방에 틀어박혀 참선만 하다가는 어설프게 자리 잡은 금단이 완전히 맺어질지도 모른단 생각에 위무선은 정처 없이 방 밖을 떠도는 일이 늘었다. 비록 연화오에선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게 일상이었다지만 실은 위무선은 정적에 익몰할 것만 같은 외로움이 아주 싫었다. 외로운 게 싫은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사람을 피해 다녔냐 묻는다면, 잠시의 쓸쓸함을 참지 못해 그 다정을 영영 잃어버리는 게 더 무서웠기 때문이라 답할 테다.


태양을 좋아하고 간절히 바란다고 그것을 쏘아 바닥에 떨어트리려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는 상황이라도 몹시 기쁘고 행복하여. 위무선의 만족이란 대개 그렇게 하찮은 문턱을 가지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금단 형성을 억제하느라 심력을 소모하고 있으니 작은 상처라 한들 잘 낫지 않아 위무선의 발목 부상은 벌써 나흘째 차도가 없었다. 부은 것은 얼추 다 가라앉았고 뼈에 가늘게 금만 간 상태라 크게 아픈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무리 없이 뛰어다닐 만큼 회복되지도 않은 채였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어디 갇히기라도 한 듯 속은 답답한데 말 한마디 편히 나눌 사람도 없는 신세가 참으로 처량했다. 그러니 위무선이 운심부지처 안이 아닌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창을 내다보면 깎아지른 절벽만 즐비해 보이는 고소에도 힘들이지 않고 쉽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는 잘 갖춰져 있었다. 세 개로 나뉜 길 중 제일 평탄해 보이는 길 하나를 골라잡아 걷기 시작한 위무선은 얼마 가지 않아 나지막한 둔덕을 이룬 풀밭과 그 주변을 둘러싼 대나무숲을 발견했고, 그리고 곧장 그 틈바구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토끼에게로 눈을 돌렸다.


주변에 당근밭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고소의 토끼들은 선자처럼 수행이라도 하나. 어떻게 이런 산속에 난데없이 토끼들이 살고 있담. 눈치 살필 사람 하나 없는 공간에서 모처럼 마음 놓고 구르고 달리며 놀던 위무선은 간신히 토끼 한 마리를 붙잡아 품에 안았다.


볼에 와닿는 보드라운 털과 손바닥 아래에서 팔딱거리며 뛰는 작은 심장 소리. 사양하지 않고 받아도 죄가 되지 않을 따스함. 그렇게 열심히 도망 다니더니 막상 잡고 나니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안긴 토끼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위무선은 그제서야 욱신거리는 통증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망기가 약을 발라준 밤에 많이 가라앉았던 발목은 의약원에서 받아온 약엔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위무선이 워낙 제 상처 돌보는 걸 대충 한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외부 수학생에게 내어주는 약과 직계 혈족이 사용하는 약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남망기에게 지난번의 약을 좀 더 빌려줄 수 있겠느냐 물어볼 염치나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나마 방까지 돌아가는 것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몇 발자국을 걷던 위무선은 뒤따라와 제 발치에 달라붙는 토끼 한 마리를 더 안아 들었다. 둘이 부부라도 되니? 그런 웃음기 어린 질문과 함께.

 






운심부지처에서 토끼를 키웠던 장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장서각에서 토끼 두 마리를 떠넘기듯 내주고 도망친 이후로 정말 남망기가 그 토끼들을 잘 돌보고 있나 궁금해서 운심부지처 내를 이 잡듯 뒤졌던 위무선이 있었기에. 그러니까, 이번 역시 포산산인이 보여주었던 미래 속에서 말이다.


미래라는 건 아직 오지 않은 일을 일컫는 말이었고, 또한 위무선에게 있어선 제가 저지르지 않은 일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니 부족한 체력에 끙끙 앓으면서도 토끼를 데리고 돌아오던 위무선이 도중에 딱 굳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더랬다.


아차,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나, 돌아서기가 무섭게 또 남망기와 눈이 마주친 위무선은 이번에야말로 이미 끝없이 한탄했던 제 운명 위에 원망 하나를 더 얹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너는 내가 가규를 어길 때만 나타나선. 아니, 어쩌면 내가 가규를 어겼기에 너를 만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너를 다시 보고 싶진 않았어.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바랐던 것은 차라리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무정한 시선이지 경멸이 아니었는데도.


아직 마음을 놓기엔 너무도 이른 생이란 것을 알면서도, 이렇듯 제가 해야 할 후회의 총량에 도무지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몹시 쓰라렸다. 조금의 안도도 용납하지 않는 게 제 살아가는 현실이란 걸 언제쯤 깊이 새겨들을지. 위무선은 그만 서러움에 눈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며 오늘도 남망기의 몫이었을 질책을 가로채 스스로에게 내리쳤다.



“알아. 운심부지처 경내에 동물을 키우는 건 금지지. 나도 알아. 아는데,”

“…….”

“내가… 착각했어. 미안해. 이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다시 뒷산에 돌려놓고 올게.


위무선은 고개를 숙인 채 남망기를 지나쳤다. 색이 옅어 밝은 곳에선 찬연한 금빛으로 빛날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조차 꺼려졌다. 그 안에 무관심보다 온도 낮은 냉담이 깃들어 있으면 어쩌나 두려워서. 보지 않는다고 타인의 감정이 없어질 리 만무하나 외면만이 위무선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였다.


남망기는 위무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내주고 그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련하는 사람에겐 그다지 큰 부상도 아니었을 텐데 아직까지 발걸음이 불안정했다. 제대로 약을 바른다면 사흘이면 다 나을 상처가 왜 저리 오래가나 싶다가도 금단을 맺지 않은 수사는 본래 저러한가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남망기는 이미 금단을 맺기도 했고 또 맺기 이전에도 뼈가 상할 정도로 크게 다쳐본 적이 없었던 탓에 위무선의 부상 정도를 좀처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실상 그가 위무선의 부상을 염려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음에도. 단지 그 날 밤에 같은 장소에 있었고 제 손으로 붕대를 한 번 감아주었던 일이 답지 않은 책임감이라도 형성한 것인지. 보지 않아도 퍽 풀 죽어 시무룩해 있을 얼굴이 이미 눈에 선해 남망기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의 손을 탄 들짐승은 무리에 섞이지 못해.”



위무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남망기의 말이 꼭 제가 욕심을 부려 토끼들에게서 가족을 빼앗았다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다. 종일 가슴 언저리에서 울렁거리던 답답함이 어느새 목까지 타고 올라 간신히 마른침을 몇 번 삼킨 위무선은 반사처럼 품 안의 따스한 털 뭉치들을 더 꼭 껴안았다.


책임, 책임을 지면……. 어떻게든. 무엇으로든.


하얗게 비었다 빠른 상념으로 다시 채워지기 시작한 머릿속에 얼핏 세상 모든 잘못이 네게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 안타까워하던 강염리의 목소리가 스친 것도 같았지만, 그저 스치기만 하고 사라져버렸다. 그 역시 위무선이 듣기엔 분에 넘치는 위로였기에.



“…그럼, 채의진에 맡기고 올게. 누군가는… 돌봐줄 사람이……”



남망기는 가늘게 떨리는 위무선의 어깨를 보곤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이미 사람 손을 탄 짐승은 본래 속해 있던 무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맞는데. 바른말을 했는데 그른 결과가 돌아오는 걸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남망기는 혹시나 위무선이 우는 걸까 싶어 희미하게 손끝이 저렸다. 만일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진정 위무선이 그 탓에 울게 된다면 자신에게도 책임을 질 이유가 생기게 되니 그를 경계함이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한 번도 제게 봐달라거나 구구절절한 사정을 설명해가며 자비를 구하지 않는 위무선이 대단히 신경 쓰였다. 상황에 맞지 않는 발칙한 생각을 조금 하자면, 신기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아는 것을 곧이곧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걸 보면 꼭 어른이 일러준 말을 달달 외우기만 하고 직접 겪어 깨우쳐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발아래가 비틀리면 버티지 못해 위태롭게 무너지고, 그러면서도 아득바득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홀로 애쓰는.


그 선善과 정正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 그다지 느끼고 싶지 않은 동질감마저 불러일으켰다.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실수하고 마는 인간미가 스스로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해서 불쾌했다.


푸른 용담꽃이 소담하게 핀 작은 집. 더이상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찾아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어리석은 아이. 기대하고 바란 것 중 무엇 하나 손에 쥘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 끝에 남는 것은 가해자 없는 배신뿐인 것 역시 알면서도.


전부, 알고 있음에도.

전지全知조차 막을 수 없는 우행愚行은 늘상 그리 시린 색채를 띠는 종류의 것이라.


이대로 뒤를 돌아 물러서면 모든 것이 끝난다. 더 이어지는 것도, 늘어지는 것도 없이 둘 다 제자리로 돌아갈 테였다. 남망기는 남망기의 자리로, 위무선은 위무선의 자리로.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했고 무엇을 더해줄 의義도 정情도 없었다. 다시 한번 되새기지만 둘은 하룻밤에 스치듯 만나 짧은 달빛을 공유하고, 다음 날 아침 같은 햇살 아래를 걸었단 접점밖에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러나 남망기는 끝내 물러선 한 걸음을 앞으로 두 걸음 걷는 것으로 둘 사이의 거리를 바꾸었다. 바뀐 것이 비단 몸의 거리뿐이었을지, 혹은 마음 역시 뒤따랐는지는 평정을 잃은 머리론 따질 수 없었다.



“…두 마리 정도라면, 형장께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될지도 몰라.”



위무선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들려온 남망기의 목소리에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형장? 남잠의, 형장? 하고 바보처럼 따라 하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한 순간 위무선은 인고의 통제를 벗어난 기쁨에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 남망기를 마주했다.



“고마워!”



그 낭랑한 목소리에 남망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좀전의 우울은 어디로 날려버린 것인지 붉게 물든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도록 말간 웃음을 내건 이는 안고 있던 토끼를 떠넘기는 동작도 부산스러웠고, 강징이 찾을지도 모른다며 혼자 놀라 팔짝 뛰는 모습도 소란스러웠으며, 마지막으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며 손을 흔드는 것조차 기운이 넘쳤다.


남망기는 다만 제 입은 옷자락만큼이나 새하얀 토끼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속았다는 생각이나, 속였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너도.

사죄 대신 감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14.

어깨 위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조금 덜어진 덕분이었을까. 지지부진하던 발목의 부상도 마침내 다 나아 위무선도 다시 남계인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첫 수업을 제외하곤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동문들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이들과 실제로 인사와 이름을 나누려니 가슴 언저리가 어쩐지 간질간질 떨렸다. 큰 웃음소리와 함께 호탕하게 어깨를 내리치며 이름을 물어야 할 것만 같은데 현실은 강징의 옆에서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강징은 위무선이 또 지나치게 예를 차린다며 그렇게까지 대우해 줄 애들이 아니라고 투덜거렸지만 그 이상 무어라 타박하진 않았다. 제 사형이 소심했던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자기가 끼일 자리가 아니라고 슬금 내빼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입가엔 슬쩍 상기된 미소를 매단 채였다. 물론 인사를 마친 위무선은 아침 일찍 일어났더니 피곤하다고 자리를 피하긴 했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수업마다 강징과 같이 다른 세가자제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하거나 웃곤 했다.


그런 위무선을 보며 강징은 이번에는 제 짐작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우자연의 말대로 위무선을 평생 운몽의 연화오에서만 살게 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강징은 위무선이 정말로 그러기를 원한다면 그 뜻을 이루어줄 요량이었다. 오 년 꼬박 걸려 겨우 이만큼 다가오게 만든 위무선이 어설프게 상처받고 마음을 다쳐서 다시 방 안에만 틀어박히는 것보다는 나중에 종주가 될 자기 그림자 안에서라도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기에.


이유 없는 헌신. 위무선이 운몽의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어리다 해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무겁고 진득한 감정이라 강징은 내심 위무선이 두려웠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다 맞아주고, 화를 내면 그마저도 고스란히 받아주고, 늘 과할 정도로 타인에게 양보하는 데다가 받은 은혜를 갚는다고 하면서 정작 한 번도 제 몫을 제대로 챙겨가지 않은 사람.


위무선의 나이가 이제 고작 열다섯이라 여기에서 그친 것이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그 바닥 모를 헌신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어서. 이러다 정말 자기 대신, 혹은 다른 가족들 대신 목숨까지도 내놓을 것만 같단 불안은 항상 강징을 서글프게 만들곤 했다.


모두의 평온平穩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만은 절절히 알겠는데 그 연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평온 속에 왜 자기 자신의 모습은 그려 넣지 않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햇수가 길어질수록 강징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져 가고, 그 가운데 위무선의 자리는 언제나 공백으로 존재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무엇도 물을 수 없지만, 강징 역시 위무선만큼이나 간절하게 가족들의 평온을 기원했다. 그래. ‘가족들’의 평온을.

 

아버지는 왜 위무선을 형이 아니라 사형이라고 소개하셨을까.

보나 마나 어머니 심기 건드릴까 노심초사해서 그러셨겠지.

그럴 거면 애초에 저지르질 말던가, 하여튼.

 

위무선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콧방귀를 흥 뀌는 강징을 의아하게 돌아보았고 그 얼굴이 삐딱하게 찌푸려진 걸 보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늘은 또 뭐가 못마땅해 저러나.

 





며칠 간은 우자연의 당부대로 늘 위무선의 곁을 지키던 강징도 시간이 지나자 슬슬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자연과 강풍면, 그리고 장색산인, 이 세 명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선문세가들 사이에선 그다지 큰 비밀도 아니라 처음 강풍면이 장색산인의 아들을 주워왔단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위무선은 이미 화제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이름 석 자 알아주는 사람보다 연화오에 빌붙어 먹는 하인의 자식이란 설명이 더 널리 퍼졌던 위무선이기에 강징은 운심부지처에 오는 내내 걱정을 그칠 수 없었더랬다.


누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앞에서 대놓고 편을 들어봤자 위무선 입에선 괜찮다는 만류밖에 나오지 않을 텐데. 그냥 그놈 입을 후려쳐버릴까? 그럼 위무선이 놀라서 자기 괜찮단 소리보단 남 보고 괜찮으냐 묻기 시작하겠지. 그래, 차라리 그편이 내 속이 시원하겠다.


운심부지처에 가란 소릴 들었을 때 알지도 못하는 장소를 좋아한다며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던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 떠오를 적마다 강징은 그 결심을 굳게 다지곤 했다. 일단 치고 보자. 어머니도 사정을 들으시면 화내지 않으실 거야. 게다가 강징은, 위무선이 맞은 상대보다는 그 상대를 때린 제 주먹을 더 걱정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가재는 게 편이니 위무선은 당연히 강징의 편을 들어줄 거라.

 

그랬던 강징이기에.

잠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사달이 난 건 결코 그를 탓할 수 없을 터였다.

 

 






15.

위무선은 난간 근처에 주저앉아 세가 공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할 때면 적절히 짧은 말 몇 마디를 얹었고 웃어야 할 땐 웃어주면서, 반 정도는 무관심의 영역에 발을 걸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대화에 참여하고 있기는 했다. 청하 섭씨의 섭회상은 시끌벅적한 위무선을 동경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차분하고 조용한 위무선에게도 서슴없이 위 형이라 부르며 자주 말을 걸어주었다. 강징이 없는 자리에 아직까지 위무선이 끼어 있는 건 그의 덕이 컸다.


한창때의 사내 몇 명이 모였으니 암만 고고하고 점잖은 척하는 공자님들이라도 호기심 어린 주제가 빠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다들 세가 공자의 품위가 있어 질 낮게 여인을 품평하기보단 본인의 이상형과 미래의 정혼자에 대한 상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대화의 화살이 위무선에게로 돌아온 건 우연 같은 필연이었다. 그 자리엔 섭회상을 제외하고도 오대세가의 자제인 금자헌이 있었고 금자헌과 강염리의 혼약을 이야기하다 강염리의 동생인 위무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위 형, 위 형은 어때요?”



이 대화가 끝나면 주방에 부탁해 남은 채소나 좀 얻어올까. 토끼가 당근을 좋아할까 배추를 좋아할까, 따위의 한가로운 상상을 하던 위무선은 갑작스레 발화자의 소임을 부여받곤 습관처럼 웃었다.



“생각해 본 적 없어.”

“에이, 그런 말 말고요!”

“정말로 생각해 본 적 없는걸.”

“그럼 지금 생각해봐요!”

“생각할 필요도 없지.”



마지막 말은 섭회상의 것도, 위무선의 것도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 어쩐지 묘해서 섭회상은 재빨리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부채를 가지지 않은 위무선은 반쯤 가신 미소를 여전히 입가에 걸고 목소리의 주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거기서 멈추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세상엔 무모한 이가 많고 무도한 이 역시 꼭 그만큼이나 많으니.


금자헌의 왼편에 앉아있던 군청색 옷을 입은 남자는 애매한 정적이 내려앉은 틈새에서 들으란 듯이 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어. 위무선은 그 공자가 일전 강징의 검술 대련 상대였단 걸 쉽게 알아보았다. 강징에게 간발의 차로 진 뒤에 판정에 불복해 따졌단 것도 기억났다. 그러니 정말로 묻기 싫었지만,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될까?”



상대의 뜻을 못 알아먹을 위무선이 아니니 그건 마지막 경고와 같은 것이었다. 말실수를 했다면 깨달을 기회. 잘못을 깨달았다면 사과를 할 기회. 하지만 모든 선의가 호의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기에, 상대는 오히려 그릇된 질책이라도 받은 양 얼굴을 붉히곤 불쾌한 목소리를 낮게 뱉었다.



“누가 하인의 자식 아니랄까 봐 물어보지 않곤 질문도 제대로 못 하네.”



그럴듯한 옷을 입고 이 사이에 끼어 있으니 네가 정말 세가 공자라도 되는 양 착각한 것 같은데, 강만음이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넌 어쩔 수 없는 하인의 자식이야. 결혼 상대? 따질 걸 따져야지.

강만음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혼인은 네 뜻대로 할 수 있고?


금자헌의 낯빛도 이제는 제법 좋지 않았다. 섭회상은 아예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물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게, 그리고 수줍음으로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도 언짢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중 누구도. 단 한 명도, 위무선을 위해 나서주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편을 들어주는 이가 있었더라면 위무선은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테였다.


허나 그 냉담이, 이기利己에 의한 무관심이, 손익을 따지는 방치가 되려 위무선을 침착하게 만들었다.


위무선은 남은 반 조각의 미소도 더 내어주기 싫어 운심부지처에 온 이후 처음으로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아른한 햇살 같던 분위기가 그림자에 잠긴 석벽마냥 서늘한 온도로 가라앉아 희미한 한기가 끼치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하인의 자식인 건 맞지만, 강징을 인리도 도덕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으로 만드는 건 그만둬줬으면 하는데.”



본능적인 위압감에 입을 닫았던 공자의 얼굴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위무선의 말은 뒤바꾸어 생각해보자면 그가 인리도 도덕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놈이라는 뜻이었다. 위무선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전, 저 소년이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네 가문이 하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이 자리에서 그렇게 전시해 보일 필요는 없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걸 보니 너는 고소에 오길 잘 한 것 같구나. 남계인 선생님이라면 너 같은 녀석도 수학이 끝날 무렵엔 사람 꼴을 하게 만들어주실 테니까.”



말을 잃은 인간은 쉽게 폭력에 기댄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멱살이 잡혀 끌려간 위무선은 다만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늘어트린 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처럼 세 치 혀를 날카롭게 놀리는 것뿐이지 선문세가의 적자에게 손을 대는 건 도를 넘는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차라리 몇 대 맞아주면 강징이 이 사람에게 화를 낼 구실도 더 생길 테고, 그럼, 나중에라도 강징까지 이 일에 엮여 크게 혼날 일은 없겠단 얄팍한 계산도 얼마쯤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할 뿐 중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운몽 강씨와 혼약을 맺은 금자헌마저도. 실은, 다들 강징이 위무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자주 들었지만 위무선은 늘 방 안에만 있었으니 실제로 두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본 적이 드물었다. 둘의 관계가 어떠한지, 위무선의 위치가 운몽에서 어느 정도 되는지를 모르는 이상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의義를 행한다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걸, 이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몇 번 멱살을 잡아 흔들던 상대는 위무선을 거칠게 밀쳤지만 위무선의 얼굴엔 조금의 금도 가지 않았다. 이 정도야 훗날 겪었을지도 모르는 숱한 모욕과 오욕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어릴 적 강징이 휘두르는 주먹을 그대로 다 맞아주었던 것처럼. 위무선의 반응이 그렇게 초연하니 자연스레 분이 풀리지 않는 상대는 씩씩거리며 주먹을 들어 올리다 문득, 위무선의 다쳤던 왼발을 떠올렸다.


우둑,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작게 남과 동시에 위무선은 새하얗게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왼쪽 발목 아래론 아예 감각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혈향이 풍겼더라면 분명 잘려나갔을 거라 생각했을 정도로 섬찟한 격통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자 남자는 이미 잔뜩 흐트러진 옷자락을 다시 낚아챘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에 목이 꺾이기 전, 위무선은 부옇게 흐려진 시야로 제 멱살을 잡은 손이 매섭게 내쳐지는 것을 보았다.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향기는 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 선 이의 이름을 알리고 있어서. 위무선은 그만 암담함에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말았다.

 


아.

사적인 싸움도 금지인데.

결국 음주 금지의 가규 빼곤 이번에도 지켜낸 게 없네.

 

미안해. 정말로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

이런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어.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바라지 말 걸 그랬어.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조차 내 것이 아니었을 텐데.

 


과연 남망기는 위무선의 예상대로 냉랭한 목소리로 가규를 읊었는데, 자신의 가슴팍에 기댄 채로 식은땀이 맺혀 가늘게 경련하는 위무선의 얼굴을 흘긋 내려다보곤 드물게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비겁해.”



소란을 일으킨 당사자는 온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도 차마 남망기에게까지 대들진 못하고 울분 가득한 침묵을 지켰다. 위무선은 그 선택적인 비굴함을 보며 저의 불안한 처지를 새삼 깊이 통감했다. 내가 어엿한 선문세가의 공자가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어. 굳이 이렇게 쓰라린 방식으로 되짚어주지 않아도.


운심부지처 내에서 체벌을 관장하는 남망기는 폭행을 한 당사자에게는 태형을, 그리고 싸움을 관망한 자들에게도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가규 필사를 명하곤 위무선을 부축해 자리를 옮겼다. 달빛 아래에서 무게를 나누어 걸었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 위무선은 아예 왼쪽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사람이 없는 곳까지만 반쯤 끌고 가다시피 걸어간 후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안아 들려고 하자 가볍게 고개를 저은 위무선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딱딱하게 굳은 남망기의 얼굴을 보곤 흐리게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차라리 업어주면 안 될까?”



남망기는, 이번만큼은 제 고집을 내세울 수 없었다. 웃고 싶지 않은 순간까지 함부로 웃지 말란 말은 끝내 하지 못한 채.

 

 






16.

남망기의 등에 업힌 채 의약원에 가는 내도록 위무선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망기는 위무선을 업은 걸 후회했다. 안았더라면,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대략적인 감정이라도 추측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업은 등에서 느껴지는 가느다란 떨림이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묵묵히 걷는 속도를 높이면서도 발목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던 남망기는 답지 않게 느린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그들이 내 말에 대꾸하지 못한 건 내가 고소 남씨의 둘째 공자라서가 아니야.”

“…….”

“단지 내가 체벌을 주관하기 때문이지.”

“…….”

“그저 더한 벌을 받을까, 고개를 숙인 것뿐이야.”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다물고 익숙한 침묵을 끌어왔지만 위무선은 남망기가 삼킨 뒷말을 쉬이 읽어냈다.

네가 하인의 자식이고 나는 귀한 공자님이라 그들의 태도가 달랐던 건 아니야.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게 웃곤, 답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조금 더 편히 몸을 기댔다.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지는 목덜미가 간지러워 입매를 단단히 굳힌 남망기는 더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말을 뱉어놓고 후회하는 일 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17.

그 날의 늦은 오후. 오후라기보단 저녁이 더 가까운 때. 일이 있어 운심부지처를 잠시 떠났다 돌아온 강징은 여럿이 입을 모아 떠드는 사정을 듣곤 눈을 반쯤 까뒤집고 미쳐 날뛰었다. 꼼짝없이 누워만 있으란 처방을 받은 위무선이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섭회상의 손에 이끌려 말리러 갔어야 할 정도였다.


위무선을 때린 당사자에겐 감히 운몽의 대사형에게 그딴 망언을 지껄이고 다리까지 부러트렸으니 내 어머니가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며 똑같이 멱살을 잡아 흔들었고 그 꼴을 구경만 했던 섭회상과 금자헌에겐 더한 폭언을 퍼부었다. 특히 금자헌에겐 네가 그따위로 행동하고도 운몽 강씨와의 혼약이 무사하리라곤 생각지도 말라고 크게 화를 냈다. 위무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난릉 금씨가 운몽 강씨의 강염리를 어떻게 대할지도 빤하다는 논리였다.


강징은 위무선을 때린 놈보다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섭회상과 금자헌이 더 미웠다.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이기에 지금 강징이 느끼는 감정은 거의 배신감에 가까웠다.


어떻게, 너희들마저, 네놈들마저, 그 사람을.


운심부지처에 온 첫날부터 이야기했었다. 실은 위무선이 이곳에 같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었다고. 우자연은 위무선이 사람들 속에 섞여 더 단단해지기를 바라지만 자기는 그 과정에서 제 사형이 다치고 상해 자칫 돌이킬 수 없어질까 겁이 난다고. 연화오의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불안과 걱정 서린 말을, 제삼자이기에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이들이었는데. 그랬었는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잠시의 무관심도 못 견딘 횡액이 기다렸다는 듯이 위무선을 덮쳤으니.


졸지에 자신의 일로 운몽이 오대세가 중 둘과 척을 지게 생겼으니 위무선은 파랗게 색이 빠진 얼굴로 강징을 붙들었다. 위무선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강징은 위무선을 향해서도 노호를 질렀다.



“설마 내가 화낼 줄 몰랐다는 소린 하지도 마!!”

“강징, 아니야, 나는, 그게,”

“네가 모욕당하고 다쳤다는 소릴 듣고도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대답 따윈 들을 필요도 없어!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반항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겠지!”

“강징, 강징. 아니야, 네가 화낼 것 같았어. 그렇게 생각했어. 내 말 들어봐. 하지만 나는,”

“넌 아직도 네가 운몽 강씨가 아닌 것만 같지! 내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아직도!!”



위무선은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조금 더 좋게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너를 보호하고 싶었어. 네가 다치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어. 비난받지 않게, 상처받지 않게, 구태여 겪지 않아도 괜찮을 소란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비켜나게 하고 싶었어. 휘말리는 것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니 너라도 평온하길 바라서. 오직 그것만 생각했는데─


…지금의 너는 도리어 내가 원망스러워 죽겠다는 눈을 하고 있으니.


위무선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어 감출 생각도 하지 못 하고 반사처럼 시선을 피했다. 앞서 말했었지만, 그게 위무선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라.


강징은 울화가 터져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거기에 걷지도 못하는 위무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섭회상에게도 연거푸 화가 치솟았다. 대체 쟤를 여기 왜 데려와. 뭘 하라고. 가해자들 앞에 피해자 세워놓고 나 사실 괜찮단 거짓 고해라도 하라고? 그딴 걸 바라서?


큰 소란이 일어나니 자연히 남망기와 남희신, 그리고 남계인까지 달려왔는데도 강징의 분노는 멈출 줄을 몰랐다. 당장 강풍면과 우자연을 부르겠다 난리 치는 건 둘째고 거진 난동을 부리는 수준이다 보니 보다 못한 남계인이 잠시 머리를 식히란 의미로 금언술을 걸었다. 강제로 입이 다물린 강징의 눈에 핏발이 서고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니 그게 금언술인 걸 눈치챈 위무선은 곧장 남계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남 선생님, 입을 막는다고 가슴 속에 품은 화가 저절로 사그라들겠습니까. 오히려 몸을 해칠까 염려되니 부디 풀어주십시오. 따지고 보면 이 소란은 전부 제게서 기인한 것이니 차라리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남계인의 옆에서 언뜻 이치에 맞는 것 같으나 인과를 차근히 따져보면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망기의 미간이 언짢음에 살짝 찌푸려졌다. 남망기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징이 날뛰는 것마저 곱게 볼 수 없었다. 또다시 자책하고 용서를 구하는 건 위무선의 몫이 되지 않았나. 남망기는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깎아 희생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드는 위무선의 태도가 아주 거슬렸다.


네가 무엇이기에. 네가 뭐라고 그렇게 쉽게 남을 대신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네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기에, 그렇게 일상 같은 전희牷犧가 몸에 배었는지. 이는 꼭 운몽 강씨만을 위해 만들어진 번제물燔祭物이 아닌가 하여.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그게 거슬리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것이란 걸 깨달았겠지만,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지나치게 부족했던 그때의 남망기는 아직 알 수 없었더랬다.


다리까지 다친 죄 없는 사람을 계속 꿇어 앉힐 수도 없으니 남계인은 얼마 못 가 강징의 금언술을 풀어주었다. 입이 열려도 말없이 씨근덕거리기만 하는 강징에게로 기다시피 다가간 위무선은 얼른 눈앞에 보이는 다리를 꼭 끌어안고 매달렸다. 할 수만 있었다면 얼굴을 끌어안았을 테였다. 일어설 수만 있었더라면.



“강징. 강징? 착하지. 화내지 마. 화 풀어. 일 크게 벌이지 말자. 나 정말 괜찮아. 다리는 금방 나을 거고 아까 싸울 때도 별로 속상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강징은 이를 악물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위무선의 손을 떼어냈다.



“속상하지도 않았다고?”

“나는……,”

“난 네가 그런 말을 듣고도 속이 상하지 않는 게 속상해.”



위무선은 이젠 아예 숨조차 멎을 것만 같았다. 심장이 이렇게 미친 듯이 뛰는데도 몸에는 피가 돌지 않는지 음산한 한기에 사지가 덜덜 떨렸다. 강징은 그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이미 울분과 눈물에 일그러진 지 오래인 눈으로 한 자 한 자, 피를 토하듯 말을 뱉었다.



“네가 화를 내지 않는 게 화가 나고, 네가 슬퍼하지 않는 게 슬퍼서 미칠 것 같다고.”



네가, 그렇게, 아직도 내 형이 아니라, 내 누나의 동생이 아니라, 내 부모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잠시 머물렀다 떠날 손님처럼 행동하는 게 가장 싫다고!


그런 단말마 같은 비명을 끝으로 강징은 죽은 듯이 굳은 위무선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위무선은 끝내 멀어지는 이의 그림자 한 조각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남계인이 벌을 받을 사람은 벌을 받으러 가고 치료를 받을 사람은 치료를 받으러 가라며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남망기는 바닥에 주저앉아 꼼짝도 않는 위무선에게로 발을 옮겼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위무선에게 신경 써 줄 이는 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누군가의 손에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너와 나, 언제 이다지도 엮이었다고.


어깨에 손을 얹어도 평소와는 달리 놀라지 않은 위무선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과 시선이 맞았다. 그 공허의 너머에 깃든 끝없는 불안과, 공포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 역시도 미지의 격류에 휘말릴 것이 두려워 남망기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무엇으로라도 타인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에 새겨지는 숱한 다짐과는 달리 두 팔과 다리는 일순의 시간 동안 마음을 물들였던 다정을 거역하지 못해서. 잠시 위무선을 도와줄 수 있는 다른 수사들의 이름을 몇 개고 떠올리던 남망기는 결국 손수 위무선을 등에 업었다. 수학생들이 머무는 처소로 가는 길이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졌다.


황급히 나오느라 문을 닫지 못한 방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업고 온 몸을 침상에 내려두자 곧장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웅크리기에 따로 불을 밝혀주지는 않았다. 문턱을 넘기 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루어진 사과가 남망기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미안해.”



그것이 그만 제 속마저 쓰리게 만들어 남망기는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미안하단 말 대신 고맙단 말 하던 게 바로 얼마 전인데. 또 네 탓 아닌 일로 무작정 사과만 해대니. 흡사 혼나기 전에 이미 나 자책 많이 했으니 너무 화내지 말고 어여쁘게 보아 달라 비는 어린아이 같아서.



“……네 탓 아니야.”



그 한마디만 그림자 속에 남겨둔 채 남망기는 침상으로 무너지듯 쓰러진 이의 어깨가 작게 들썩이는 것을 못 본 척하며 문을 닫았다. 아직 서로 눈물 닦아줄 정도로 정情에 물들지 못한 관계란 대개 그런 무관심으로 서로를 보호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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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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