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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봐도 막장이네."


최근 계속되던 살인적인 스케줄에 파업을 선언하고, 가까스로 얻은 오랜만의 휴일. 나는 집안에서 굴러다니던 DVD를 꺼내 틀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집에 있던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 DVD는 뻔한 클리셰들로 범벅되어 있는 싸구려 로맨스 영화였다. 하지만 대체로 그런 B급 영화가 재밌는 법이지 않은가? 특히나 일찍 잠들기 아쉬운 주말 밤에는 말이야. 나는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와인 한 병을 마시며 영화에 집중했다. 10년도 전에 촬영했던 영화에서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아역배우로 활동했던 내겐 익숙한 얼굴들로 가득했다. 저 선배는 이때 연기가 더 나은 거 같은데, 이 시점에서 여자 주인공이 왜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되냐고! 개연성이 부족하잖아.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취기가 오르자 나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던 영화는 소리만 들어도 자동으로 눈앞에 화면이 그려졌다. 이 영화는 다 좋은데 결말이 너무 구려…. 나는 티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천천히 잠에 들었다.



"샤를리나 황녀님?"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불편한 옷을 입고 하니의 앞에 서있는 걸까.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과도한 업무로 인한 단편적 기억상실?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니에게 물었다. 하니야, 혹시 말인데… 우리 지금 촬영 중이니?








그러니까, 정신을 차린 나는 낯선 세트장에 앉아있었다. 내가 이곳을 세트장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첫째로 시대 배경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규칙 없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서양 건축물들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핏대까지 세워가며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눈앞의 상황 때문이었으며, 셋째로는 그들이 나를 바라보며 황녀님의 의견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황녀님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오늘따라 생각이 많으시군요. 평소답지 않습니다."

"내 의견을 묻는 겁니까? 이제 와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당신들 뜻대로 하시지요."


나는 나를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에 눈앞의 상황을 머리에서 이해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다행히도 나의 대답에 고개를 저을지언정, 의문을 품고 되묻지는 않았다. 아역배우로 어릴 적부터 연예계에 구르던 짬밥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나는 들려오지 않는 감독의 컷싸인에 마음을 놓았다. 이후로도 내게 넘어오는 대사가 없자 안심한 나는 눈앞의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 동안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세트장은 특이하게도 카메라나 스태프들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카메라가 돌고 있는 거지? 내가 카메라를 찾는 사이 눈앞의 배우들은 자신들이 연기해야 할 분량이 모두 끝났는지 대화의 결론이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세트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 상황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배우 한 명에게 박수를 치며 다가갔다.


"저기, 수고하셨습니다. 아주 멋진 연기였어요."

"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샤를리나 황녀님."

"설마 아직도 카메라가 돌고 있나요?"

"카…메라요? 그 무거운 게 왜 돕니까?"


그와 나는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 배우는 아직도 연기를 이어가지? 카메라가 돌고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배우들이 모두 세트장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내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고민을 이어가는 동안, 눈앞의 남자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내게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말입니다. 황녀님… 패인 소공작님께서 와계신 거 같더군요."

"패인 소공작이요?"

"네. 아무래도 이번에는 꼭 황녀님과의 약혼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모양입니다."


그는 회의 전 패인 소공작의 마차가 황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며 아마도 그가 응접실에 있을 거라고 내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데.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황녀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주치의를 불러오겠다며 회의장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나는 떠나는 그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몸을 짓누를 듯 무겁게 땅에 끌리는 망토 덕택에 붙잡을 수 없었다. 


이게 만약 촬영장이 아니라면, 내게는 지금 무슨일이 생긴거지? 황녀라는 직책과 알 수 없는 공간,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보던 전개들까지. 이건 마치 쉬는날 가끔 읽어보던 판타지 소설 속 같지 않은가. 나는 이어지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회의장에서 도망친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일단 응접실로 가보면 되려나….


"그런데, 응접실은 또 어디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돌아오는 대답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이 넓은 공간에 혼자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회의장 안에는 어느새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들이 들어와 있었다. 저런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하녀인가? 나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그녀를 따라 넓은 황궁(으로 추정되는)을 돌아다녔다. 하녀가 안내한 응접실이라는 곳은 회의장과 제법 먼 거리에 있어서 나는 그녀를 따라가며 황궁의 대략적인 내부를 제법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이곳은 세트장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회의장과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 배경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중구난방으로 장식되어 있는 건축, 예술품들과 내게 동경의 시선을 보내며 묻지도 않았던 국가의 소문을 알려주는 사람들, 게다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의심은커녕 약혼자가 생기게 되니 황녀님도 긴장하시는 거냐며 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하녀들까지. 정말 흔해빠진 로맨스 판타지적 클리셰가 가득했다. 나 설마 진짜로 빙의라도 하게 된 걸까.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나는 정말로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머릿속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하녀와 나는 패인 소공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황녀님, 들어가시지요."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응접실의 문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이 안에 자칭 황녀님의 약혼자가 계신다 그건가? 나는 현실에 두고 온 사랑스러운 남자친구가 그리워졌다. 하니라면 분명히 아침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있을 텐데. 팔자에도 없던 약혼을 할지도 모르게 된 나는 하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직 이 약혼은 기정사실이 아니니 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현실로 돌아가고 나서 진짜 몸의 주인인 황녀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아마도 이 약혼을 거절한다고 해도 황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익숙지 않는 상황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감정을 잡았다.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 일은 쉬울 것이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응접실 소파에는 슬비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슬비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달려가 안겼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놓인 슬비는 꽤나 불안했었다. 슬비는 그에게 안겨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야기했다. 남자는 자신에게 안긴 슬비를 어찌하지도 못하다가 손을 올려 마주 안아주었다.


"하니, 이거 혹시 몰래카메라야?"

"저희가 아직 애칭을 부를 정도의 사이는…. 패인 소공작이라고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샤를리나 황녀님."


하니는 자신에게 안겨 이름을 부르는 슬비를 보며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평소와는 어쩐지 조금 다른 하니의 말투와 행동에 슬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 잘생긴 얼굴은 내가 아는 고하니가 맞는데.


"응? 무슨 소리야. 이제 끝난 거 아니야? 장난이 너무 지나친데…"

"황녀님이야말로 장난은 그만둬주세요…. 저희의 약혼도 아직 확실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슬비는 끝까지 자신을 모른척하는 하니를 보며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게 있어서 고집을 부리는 걸까? 나와 약혼…이 하고 싶어서? 사실 평소의 그도 자신과 함께 있을 때면 가끔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었다. 다만 아직 우리는 나이가 어렸고, 직업상의 이유로 결혼을 하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이 섰기에 장난삼아 넘기고는 했었는데. 그래서 자신과 약혼이라도 하고 싶어진 걸까? 그의 재력을 생각해 보면 조금 무리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황궁도 프러포즈의 일종으로 제작한 세트장일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슬비는 조금쯤은 그의 장단에 어울려줄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마친 슬비는 붉어진 얼굴로 자신에게 떨어져 소파에 앉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어쩐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나랑 약혼이 하고 싶어?"

"예?"

"아니야? 나랑 약혼이 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패인 소공작."

"아, 네…. 맞습니다. 그러려고 황녀님을 찾아뵌 거니까요…"

"글쎄 어쩔까…. 사실은 거절할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말이지?"


슬비는 자신의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하니를 보며 씨익 웃었다. 사실 정말로 그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지만,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인 자신의 기분을 그도 느껴보았으면 했다. 다만 하니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슬비는 굳은 결심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제게 황녀님의 약혼자로서 모자란 점이 있습니까? 제 가문 또한 황녀님께 많은 도움이 될 텐데요…."

"도움은 되겠지. 너는 얼굴만 보여줘도 내게 도움이 돼."

"그러면 왜 저와의 약혼을 고민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좋아. 그런데 나랑 데이트하자. 그러면 알려줄게."


하니는 갑작스러운 슬비의 데이트 신청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따라 황녀는 어쩐지 자신을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이전번 만남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자신에게 쌀쌀맞은 태도를 고수했었는데…. 이것은 기회일까 아니면 자신을 시험하려는 황녀의 계략일까. 하니는 굉장히 진중한 모습으로 고민을 이어나갔다. 어느 쪽이던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 회의는 끝나신 겁니까?"


하니의 말에 슬비는 밝게 웃었다. 어쩐지 제게 거리감 있는 모습을 보여도 결국 그는 자신이 아는 하니였다. 자신이 먼저 데이트를 신청할 때면 멍한 표정으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스케줄은 괜찮은 거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그러면서도 결국은 수락하는 모습이 꼭 그랬다. 슬비는 소파에서 일어나 하니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데이트는 어디서 하면 될까? 나 여기는 잘 모르는데."

"황녀님은… 정원을 좋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산책 정도로 만족해 주실수 있을까요?"

"그럼 다음 데이트는 언젠데?"

"…황녀님의 일정이 괜찮으신 날에요."


슬비는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도, 이 연극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은 한동안은 계속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이 들었지만, 자신의 옆에 있는 하니가 평소 그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슬비는 이대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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