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여름아. 오랜만이야.


2022년 6월 너의 행정학교 수료 이후로 편지를 못 썼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뭘 적어야할지 모르겠어서 못 썼어. 전화로는 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일은 어떤지, 이런 것만 묻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전화도 안 했지만, 사실 누나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근데 하고 싶은 말 대부분이 기쁘기보다 슬픈 것들이라, 그중에서도 너에게 의미 있을 말만 고르려고 하다 보니 그냥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서 다시 봄이 와 버렸어. 사실 이 편지를 쓴 건 분명 봄이었는데 지금은 또 여름이다. 이렇게 쓰는 편지에는 전화나 카카오톡보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휘발되지 않아도 괜찮을 만한 것들만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어쩌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모순을 낳았구나.


한 일주일 전 쯤에, 지금은 49일도 넘었지만, 이 모순적인 침묵을 깨야겠다는 다짐을 정말 제대로 했는데, 실행은 오늘에서야 겨우 한다. 실행 동기는 너도 알 거야. 어제, 아니, 언젠가 너랑 통화하면서도 말했지, 누나가 응원하던 가수가 별이 되버렸다고. 소식 들었을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네가 돌려서 말하지 않고 누가 죽었냐고 물어봐서 누나는 조금 놀랐어. 누나는 항상 돌아갔다거나, 별이 됐다는 식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돌려 말하곤 하니까. 그런데 오히려 네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죽음을 표현하면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거고 누가 죽었어도 시간은 가지."라고 말해주는 것에 위로가 되더라. 누나는 그게 참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라 세상이 잔인하다고 원망하고 있었는데, 네가 말하는 세상은 그냥 흘러가는 자연일 뿐이라서, 괴로운 원망의 마음이 조금 사라진 것 같아. 나보다 어린 네가 그저 담담하게 불변하는 사실을 말해줄 때마다 그런 위로가 됐음을 어제 다시 느꼈다. 


아직 기억하고 있어, 네가 내 방 구석에 적혀 있던 메모에 답글 달아준 거. 나보다 2살이나 어린 네가 철학가처럼 적어준 거 귀엽고 웃겼는데, 그런 식으로 네가 그냥 했던 말들은 여전히 오래된 철학가의 답처럼 맞다. 그때 네가 했던 말 중에 너무 달리다보면 지쳐서 금방 수명이 닳는댔나, 잠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자야 한댔나. 뭐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말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일리 있는 말이거든. 그땐 내가 토끼처럼 달리면 나는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내가 달린 값을 보상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달리는 토끼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너무 빨리 달리면 그 사람이 너무 빠르니까 그 사람의 온몸에 묻은 땀을 못 보고 온몸에 흐르는 찌릿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감각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더라.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뭐든 쉽게 생각해. 그래서 말 한 마디로도 한 사람의 전체를 재단하며 그 사람의 모든 걸 자르고 상처내지. 너무 쉽게 한 사람을 망가트려. 타인의 삶에 담긴 모든 걸 보지 못하고 한 사람, 두 사람 같은 숫자로만 세서, 누군가가 생명을 잃는다는 걸 무섭게 여기지 않아. 그들이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으니 그들이 지니고 있던 빛이 안 보여서 보호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없던 걸까? 2023년 4월에는 누나가 사랑하는 가수가 별이 되더니, 7월, 이 편지를 이어가는 얼마 전에는 누나와 동갑인 서울 어느 초등학교의 선생님이 학교에서 별이 되었고, 폭우가 끝난 어느 강에서는 군대에 가 있는 너보다도 어린 해병대 일병이 별이 되었다. 그들이 조금만 덜 빨리 달렸더라면, 조금만 덜 열심히 살았더라면, 조금만 그냥 도망칠 용기를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타인의 말을 조금만 덜 들었다면 싶다. 이런 말을 생각했다가도, 결국 끝은 세상 원망이야. 다시 또 괴로운 원망이네. 우리는 계속 달리다보면 지친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고, 잠은 자고 싶을 때 자야 내일의 일정에 무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사람에게는 뭐든지 거부할 수 있는 권리와 의지가 있다는 걸 알지만, 세상은 그런 '앎'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단순한 시스템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세상을 원망하지는 않도록 노력하려고 해. 네가 말했듯 세상은 시간을 흐르게만 할 뿐이니까. 세상을 원망하는 것보다 세상을 바꾸게 하는 것에 힘을 들여야겠지. 원망은 당사자 분과 당사자의 가족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나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노력은 생각보다 잘한다. 나에게 학교폭력을 가했던 애들이 무사히 졸업을 했을 때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그냥 내 삶을 잘 살기로 결정했고 이후에 더 좋은 인연들을 만났거든. 이전에 누나가 자주 대화했던 아이들을 그들의 어머니가 무작정 하늘나라로 데려가버렸을 때, 중간고사를 치르던 기간에 불이 동네이웃 셋을 데리고 가버렸을 때,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할머니를 병으로 인해 더는 볼 수 없게 됐을 때, 그때도 세상을 원망하기보다는 주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었고, 그 결심은 내가 앞으로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누군가의 안전과 기쁨을 생각하는 일이 나에게는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자 모든 것이야. 지난 학기에 미술 활동이 있는 수업을 들었을 때도 우리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좋은 성적을 받았어. 그리고 학교 축제 서포터즈를 하며 슬펐던 일도 조금이나마 잊었지. 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건 상대방이 있어야 가능한 감정이라 상대가 어떻게 변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의 누나는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었다는 걸 알아. 앞으로도 그래볼게.


다만,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건 잘하는데 아직 내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우리의 끝을 생각하지 않는 것.' 부모님의 타지 생활과 너의 군생활로 내가 집에 혼자 있게 됐을 때, 누군가의 죽음을 알게 됐을 때, 사실은 훨씬 전부터, 나는 항상 언젠가 올 끝을 생각하며 미리 외로워하고 씁쓸해하고 가끔은 울었다. 올해 알게 된 'Lemon'이라는 곡이 있는데, 부검 시에 시체의 냄새를 덮기 위해 사용하는 레몬 향을 모티프로 했대. 그 곡을 듣고 나니 우리의 끝을 더욱 생각하게 되더라. 아버지가 들고 오는 어성초나 샐러리나 살구의 향, 어머니가 바르는 화장품의 향 혹은 가끔 해주는 기름진 음식의 향 , 네 방에 가면 나는 시원한 민트의 향 혹은 네 머리카락에서 나는 비누 향. 그런 향이 없는 순간을 겪을 때 문득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삶은 혼자 시작해 혼자 끝난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그 향들이 우리의 끝엔 씁쓸하게 남아 기억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또 울게 된다. 나는 십 년도 더 전의 장례식에서 맡은 초의 향도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노래의 가사처럼 누군가를 잃었다는 슬픔도 나는 사랑하게 되었고, 그 슬픔은 나의 글과 나의 이야기가 되지만, 가끔 머릿속에 남은 향은 지우고 싶다. 얼굴도 희미해지고 기억도 희미해지는데 어째서 그런 향들은 남아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더 슬프다. 향은 다시 맡을 수 있지만, 함께 했던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끔은 버겁다. 누군가와 같이 들었던 음악도 아무리 음원이 망가져도 다시 재생할 수 있는데, 죽은 사람의 몸은 다시 재생하지 못하는 기술이 안타깝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정을 주는 게 무섭다. 한 번의 만남도 헤어짐을 만들고 그 헤어짐의 기억은 그날의 향으로, 그날의 날씨로 오래가니까. 그리고 나는 약, 물, 불, 바람, 좁은 곳, 높은 곳, 경사진 곳도 무서워한다. 내가 아는 헤어짐은 그런 것이거든. 그런 것들을 마주하면 헤어짐을 예상하고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려. 그러다 보니 세상을 원망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세상이 원 없이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6월 말 시작한 다큐멘터리 리서처 일이나, 7월 초에 시작한 독서지도 일에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얘기한다. 아름다움 중에서도 가장 존재를 믿기 힘든 희망을 얘기한다. 희망이 보인다고 말하고, 희망은 만들면 되는 것이라고 아이들을 지도한다. 충분히 틀려도 된다고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가끔은 틀린 선택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민다는 것을. 나는 이중인격자다. 매일 모순적인 생각과 행동을 한다. 어쩌면 모두가 그렇겠지. 레몬도 씁쓸함과 새콤달콤함을 가졌으니까 이 세상 만물은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세상을 원망하기보다는 바꾸는 것에 힘을 쓰겠다. 세상이 버겁더라도 같이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레몬의 씁쓸함마저 후회없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겠다. 헤어짐이 무서워 만남을 하지 않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 나를 응원해줘. 나도 언제나 너를 응원하니까, 너도 항상 건강하렴. 이젠 병장이 됐으니까 후임과 주위 모든 사람도 더욱 챙기고. 좀 있다가 또 편지 쓸게. 안녕.

Time is flowing.우리의 시간은 다 다르게 흐르지만,모두가 행복하기를.

글짓는 코끼리. 무지개빛 세상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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