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그런 고백은 많이도 들었고 많이도 거절했다. 자신의 어디가 좋아서 그러는 건지 묻고 싶기도 했으나, 그건 또 예의가 아니라서 그저 넘어갔다. 그렇게 나현은 자신의 어디가 좋아서 고백을 한 건지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친절 한 번에 금새 좋아한다느니 뭐니, 그렇게 마음이 쉬운 거냐고.


이면적인 면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현은 자신이 꽤나 히스테릭한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미지 관리는 힘들고, 쌓아올린 이미지가 추락하는 건 한순간이니까 딱히 그런 모습을 많이 드러내지는 않을 뿐이다.


나현은 그 날을 떠올렸다.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그 날을.


이사하는 와중에, 방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앨범은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나현은 물티슈로 꼼꼼하게 닦고는 생소한 표지의 앨범에 호기심을 느끼며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있을 줄 알았으나.. 생전 처음 보는 아이와 자신의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 뿐이다. 자신은 외동이다. 이런 아이는 본 적도 없다. 친적도 아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나현은 호기심을 굳이 참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 길로 앨범을 나현의 모에게 들고 갔다. 그는 앨범만 보았을 뿐인데도 동공이 확장되며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고는 말을 돌렸다. 나현은 그 모습에서 어떠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엄마는 이 앨범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구나.


그렇게 그냥 덮고 넘어가는 줄 알았다. 나현도 억지를 써가며 굳이 꺼림직한 부분을 들쑤시고 싶진 않았다.


나현의 가족이 다같이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밤이 깊어가고 나현의 모는 예고도 없이 옛날 얘기를 시작했다. 저번의 앨범의 그 애는 네 언니라고, 나현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렸던 언니라고.


그 날 나현이 들은 사실은 나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현의 언니의 이름은 라희였다. 라희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아픈 아이였다. 간신히 얻은 딸은 병을 앓고 있어서 출산 직후에도 몇번의 생사를 오갔다. 나현의 모는 라희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어서 모든 정성을 쏟았다. 아픈 사람의 목숨을 연명하는 데는 아주 큰 돈이 필요하다. 나현의 모는 맞벌이를 시작했고, 나현의 부는 허리가 빠질 정도로 일했다.


그런 바램이 있다면 건강해질 법도 했는데,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순 없는 듯 전날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아이는 문득 숨을 거뒀다.


나현의 모는 이야기를 마치고 눈을 감으며 말을 이어갔다.


"엄마는 그때 다 포기해버렸었어. 아빠고 뭐고, 그냥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어."


나현은 그의 모가 가끔씩 방에서 오열하는 것을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특정 날만 되면 연차를 내곤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다시 집으로 왔던 것을 떠올렸다. 가끔씩, 아니 꽤나 자주 히스테릭해져 자신을 힐난하는 모습도 떠올렸다. 이해가 가지 않거나, 이유 모르게 보여주었던 미웠던 모습에는 자신이 모르던 이유가 있었다.


나현은 그의 모에게 썩 애정을 가진 편은 아니었다. 그의 모는 그를 매우 엄하게 키웠고 놀러다니는 것도 몹시 못마땅해했다. 그래도 이유를 알고나니, 나현은 마음이 쓰렸다. 자신은 엄마가 자주 미웠는데,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나현은 울기시작하는 그의 모를 꼭 안아주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그날부터 나현은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엄하기만 했던 그의 모는 한번의 실패 이후로 나현에게 정도 이상의 애착을 갖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나현은 자신을 매일같이 꾸짖는 모를 보면서 대꾸 한 번 내지 않았다. 내가 이해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불쌍하니까. 자신이 한발자국 물러나면 될 일이니까.


나현은 돌이켜보니, 모든 일이 진실을 알게된 그 날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연을 처음 봤을 때, 이유 없이 눈길이 한번 더 갔던 것은, 사진을 보았을 때 상상했던, 챙겨주고 싶던 작고 어렸던 누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예지가 옥상에 올라가 있던 걸 발견했을 때, 눈 앞이 어지럽고 식은 땀이 멈추지도 않고 흘렀던 것은 누군가의 숨이 꺼져가는 마지막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예지의 행동이 점점 도를 지나칠 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이때까지 어떤 힐난을 받아도 꾹 참아왔던 관성 때문이다.


예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실려갔을 때, 그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나현은 토할 것 같았다. 속이 메스꺼워서 게워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텁텁해진 속을 비워내도 마음은 전혀 편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꽉 막힌 것처럼 자신을 얽매고 있었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를 봤을 때, 자동 반사적으로 누군가가 생각났다. 마음 한 켠에서는 숨쉬고 있는, 어쩌면 찜찜하게 남아있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다시 예지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알고보면 예지는 불쌍하고, 말 못할 사정이 있는 애다. 그러면서도 계속 위태위태한 행보를 보란 듯이 보여준다. 나현은 예지가 자신의 언니이자 엄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예지에게 반항심이 들기도 하면서 마냥 내칠 수만은 없는 이유였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정이 있다. 이런 성격이 만들어진 사정이 있고, 그런 말을 하게 되버린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나현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고, 그러니까 못된 말을 해도, 어느 정도 나쁜 짓을 해도 그 사람의 편에서 생각해보곤 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나현은 다른 사람의 사정을 상상해보곤 하면서도 모순적이게도, 남들이 자신의 사정을 지레짐작하는 것에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남들의 비호감을 살 일은 조심하게 되었다. 언행도 평소보다 가려서 하게 되었다. 조금 더 친절하게 굴게 되었다.


나현은 가만히 다연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다가가고 싶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잘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을 귀신같이 알아채곤 한다. 나현도 다연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애라면 내 숨구멍이 되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이 팍팍한 삶의 한 줄기 빛이 되주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다.


다연의 언니를 봤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자랐다면 분명 저런 모습이었을 그를 떠올리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물론 죽은 이의 얼굴 한번 직접 마주한 적 없기에, 큰 감정의 동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랬을 수도 있었을까, 그런 가정을 했을 뿐이다.


다연이 울 때 안아주었던 것은 상처 받은 자신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쳐보였기 때문이다. 다연이 우연의 행동으로 상처 받았으면서 아닌 척 하는 모습을 보며, 나현은 자신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상처 받아 왔음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스스로 괜찮을 거라고 애써 생각해왔는데, 사실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이들의 감정을 받아내는 역할을 기꺼이 자처했으나 꽤나 지쳐있었던 것이다.


네 언니 이상해, 그런 말은 결국 나현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이나현 네 엄마 이상해. 박예지도 이상해. 이나현 네가 계속 받아주니까 끝을 모르고 그러는 거 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둬. 너 자신을 학대하는 건 그만 둬.


그래서 끝까지 다연이 우연은 이상하지 않다며 변명하는 것을 보고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현은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진짜 마음을 숨기면서까지 자신보다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하고 싶은 거잖아..’


역시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그런 친구. 나현은 그런 걸 원했다. 다연은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들어서 알겠지만..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처음 봤을때부터 신경쓰였어. 시간이 지나고 가끔 대화를 하고 가까워질 때마다 설레고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졌어. 너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서 주위를 멤돌기도 했는 데 그걸 알았을 지는 모르겠다. 이런 마음 싫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기적이지만.. 말할게. 좋아해..’


나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까지 많이 들어왔지만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도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게..


‘여자한테 고백받은 건 처음인데..’


다연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나서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나현은 자신이 들은 말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 결국 고백했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나현은 옆을 보았다. 지현이 지나가다 보았는지, 팔짱을 끼곤 지켜보고 있었다. 나현은 들었나 싶어서 물었다.


“어디서부터 봤어?”


지현은 주저 없이 말했다.


“음.. 고백하는데부터?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나현은 혼란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결국이라니.. 알고 있었어?”


“어쩌다보니까? 나현이는 모르고 있었나보네.. 은근히 둔하단 말이야.”


“.....”


나현은 자신이 이런 문제에 있어서 조금 둔한 편이라는 데에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지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 받아줄거야? 아니면.. 거절?”


나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말했다.


“... 모르겠어.”


나현은 다연과 같이 있을 때를 떠올렸다. 그 애와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불편함이 있다. 같이 있으면 좋으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한번도 내가 여자랑 사귀어본다는 상상을 해본 적조차 없는 데..’


나현이 그런 고민을 하는 걸 지현이 알아챘는지 말을 걸어왔다.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 지 알려줄까?”


지현이 중요한 비밀이라도 알려줄 것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현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지현이 한참 뜸을 들이더니 결국 한다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키스하는 상상해 봐. 그닥 나쁘지 않으면 사귈 수 있는 거고, 절대 못할 거 같으면 관둬야지.”


“... 최지현..”


나현은 얼굴이 붉어졌고 지현은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나현은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으음..


잠시 후, 나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 변화를 관찰하던 지현이 물었다. 어땠어?

나현은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뭔가.. 엄청 부끄러운데. 하면 안되는 상상한 거 같고 죄책감이 좀 들어.”


지현은 본론으로 돌아가 물었다.


“그래서 좋았어, 싫었어?”


그러자 나현은 또 고민을 하다가 말을 꺼냈다.


“좋다기엔 민망한데 싫다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모르겠어.”


지현은 어깨를 으쓱인다. 나현 자신도 답답했다.


그 이후로 다연만 보면 저도 모르게 피해다녔다. 왜인지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했기 때문이다. 가끔 가다 눈이 마주칠 것 같은 순간은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 했다. 다연은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피해다니기만 하면 안되는 걸 알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예지가 자신에게 ‘다연이 이간질 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진짜인가 싶어 착잡하다가도, 한 편으로 정말 자신을 좋아해서 그렇게까지 했나 싶은 기분이 들어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도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거 뭔가 이상한 거잖아..’


하루종일 머리 싸매고 괴로워하는 나현을 지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보고는 따로 불러내서 얘기를 꺼냈다.


“잘 생각해봐. 내 생각에는 너도 그렇게 막 싫어서 부정하고 있진 않잖아.. 그치?”


나현은 서영을 떠올렸다. 얼떨결에 고백 작전을 돕게 되었던 일. 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서영이 혜주를 좋아하는 게. 그 일 이후에 사실, 혜주가 옆 학교에 여자친구가 있다고 들었을 때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자신의 일이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때였다.


나현은 눈을 감았다. 다연을 보면 자기 자신도 정의하기 힘든 마음이 퐁퐁 솟아오른다. 아직은 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선뜻 마음을 정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시간은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국엔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해야 한다. 더 이상 길어지면 다연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줄 것 같았다.


나현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다연을 잠깐 불러냈다. 깜짝 놀라할 것 같았던 다연은 의외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실 밖을 따라 나왔다. 나현은 설마 그 사이에 마음을 정리했나 싶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러면서도 왜 편치 않은 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나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번에.. 네가 말했던 거 있잖아.”


언제나 자신의 할 말은 하고보는 나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다연은 그 까만 눈으로 자신의 대답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나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시선은 다연을 살짝 비껴간 채였다.


“미안..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어.”


다연은 예상했다는 듯이 여상한 얼굴로 말한다.


“..응. 대답해줘서 고마워. 곤란했을텐데.”


다연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라 나현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 그래도 친구지?”


이 일로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포한 말이었다. 다연은 평소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미소를 보고 나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이대로가 좋아. 어정쩡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간 다연이에게 상처만 남길 거야.’


나현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으나, 아직 한 구석에 찝찝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것을 굳이 들춰보지는 않았다.


***


다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회색이다.


다연은 우산을 쓰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플랫 운동화를 신어서 그런지 발에 빗물이 들어간다. 학교를 나오면서 신아가 오늘 같이 하교하자고 하는 걸 거절했던 일을 떠올렸다. 신아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흐어어어엉...”


다연은 우산을 쓰나마나 한 채로 비를 맞으면서 걸었다. 내리는 비 때문에 눈 앞이 뿌얘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다연은 전에 들었던 나현의 거절의 말을 떠올리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언니이...”


다연은 한참을 밖에서 방황하며 비를 맞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쫄딱 젖어있는 채였다. 다연은 집이 어두컴컴함을 발견하고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언니? 어딨어?”


이때쯤에 돌아와 있어야 하는 우연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연은 집을 돌아다니며 계속 우연을 불렀으나 집은 적막했다.


다연은 바로 다연의 모에게 전화를 걸어서 우연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연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왜인지 아까부터 자꾸 이유 모를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다연은 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빈은 전화를 받더니 우연이 없어졌단 소리에 간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채빈 언니도 모르면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잠시 후 채빈이 집 앞에 도착해서 다연은 밖으로 나가서 그를 맞았다. 채빈은 말문을 열었다.


“걔 오늘 학교 안 나왔던데. 아예 핸드폰도 꺼놨더라. 그래서 집에서 쉬기라도 하나보다 했는데.. 집에도 없으면..”


다연은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채빈에게 화가 났다.


“언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잖아요..!”


울컥한 다연이 목소리를 높이자 채빈은 표정을 굳혔다. 말투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바뀌었다.


“걔 자주 그래. 그걸 내가 어떻게 일일이 보고해?”


다연은 채빈을 노려보았다.


“제가 채빈 언니 말에 장단 맞춰주고 그러면 언니에 대해 알려준다면서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언니에 대해 잘 알려주지도 않고..!”


채빈은 다연의 말을 끊더니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걔 팔목 자세히 봐보라고 말했지. 그래서 봤어, 안 봤어?”


“....”


다연은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채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려줘도 모르잖아. 걔 가끔 자해해. 이건 알았니? 팔목에 그 상처 보면 알았을 텐데.”


다연은 귀를 의심했다. 그럴리가... 

채빈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다연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걔 최근부터 학교 거의 안 나왔어. 집에도 없었다면 대체 어디간 건지도 모르겠네.”


"... 그런.. 거짓말하지 마세요."


다연은 어제까지는 학교에 갔다온 것처럼 집에 있던 우연을 떠올렸다. 학교를 안 갔으면 갔다온 척 했을리가 없잖아.. 채빈은 자꾸 거짓말을 한다. 우연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자신은 그저 언니에 대해, 자신이 잘 모르는 언니의 모습을 알려달라고 했을 뿐인데 채빈은 자꾸 악의 섞인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다연은 채빈의 악의에 분노해서 온몸이 떨렸다.


“걔가 하도 동생을 끔찍하게 아껴서 그런건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네. 이것도 내 잘못이야? 안 알려준거?”


끝도 없는 빈정거림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다연은 말을 꺼냈다.


“... 언니는 진짜 최악이에요. 다시는 보기도 싫어.”


다연의 말에 한참의 정적이 흘렀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지나다니기라도 하듯 찰박거리는 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채빈은 어깨를 으쓱인다.


"그래 그래. 그렇다면야."


"전 채빈 언니 말 안믿어요. 언니를 직접 찾아가서 물어볼 거에요. 채빈 언니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냐고."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는 듯한 채빈이 여상한 말투로 말한다.


"그래보던가~"


다연은 채빈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몸에 힘이 점점 풀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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