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후드와 로빈.

  제이슨과 데미안.

  

  이 두 사람은 처절한 견원지간이었다.

  첫 만남부터 그들은 서로를 애송이, 실패작이라 부르며 총질을 했었고, 그 다음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 둘은 그 이후에도 마주칠 때마다 서로를 향해 예수나 간디도 밥상을 뒤집어 엎을 수준의 온갖 욕설과 모욕을 퍼부었으며, 사이를 중재하는 인물들-배트맨, 나이트윙 등- 이 없을 때에는 공대신 총알과 수류탄을 서로를 향해 던지며 살의넘치는 놀이를 하곤 했다. 결국 나이트윙은 레드후드와 로빈이 대면할 때면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으며 배트맨은 제발 서로를 죽이지만 말아달라는 한 마디만 남긴채 포기했고 알프레드는 데미안이 집에 있을 때는 제이슨에게 밥 한끼 먹고 가라고 초대하지 않게 됐다. 이렇게 저 둘의 도를 지나친 투닥거림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드후드의 허리춤만 하던 로빈이 배트맨보다 더 크게 성장하고 "사이드킥 로빈" 이 아닌 "자경단 로빈" 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후에도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러했기에 자경단, 경찰, 민간인, 빌런 할 것 없이 모두들 레드후드와 로빈이 서로를 죽이지 않는 것은 빌런이 아닌 자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 는 공통된 철학을 갖고있기 때문일 뿐이며 상대방이 위험에 처해도 돕는다거나 하다못해 다른 리그 일원에게 상대의 위험을 알리는 일 따윈 없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저 둘이 상대방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일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세계 멸망의 때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로 모두의 인식 속 레드후드와 로빈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그러했기에 모두들 몰랐다, 하나의 조그마한 사건과 하나의 큼지막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

  

  

  " 그래, 데미안 그 꼬맹이는 사이드킥 시절부터 최악이었지. "

  

  

  조그마한 사건은 레드후드, 그러니까 제이슨과 간간이 팀플레이를 하곤 하던 로이의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로이의 저 발언에 데미안을 향한 어떠한 악의가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느 연구소의 실험을 아는가? 너무도 심심했던 한 연구소에서는 하나의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만약 A라는 차가 B라는 차앞으로 끼어들기를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B운전자가 성격이 괄괄한 경우, 십중팔구 B는 A에게 온갖 욕설을 내뱉거나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거친 운전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B운전석 옆의 조수석에 C라는 인물이 있고, 그 C라는 인물이 B보다 더 먼저 A를 향해 욕설을 퍼붇기 시작한다면? 놀랍게도, B의 흥분은 가라앉고 "나는 괜찮아, 저 사람에게 더 급한 일이 있었나 보지. 침착해" 라며 도리어 C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로이가 데미안을 비난 한 것 역시 그와 같은 이유에서 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제이슨과 데미안은 서로에게 온갖 욕과 총알을 주고 받았고, 제이슨의 흥분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을 가라앉게 하지 않으면 또다시 데미안을 향해 돌격하여 2차전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데미안을 비난하여 어떻게든 제이슨의 흥분을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그러했기에 로이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휘릭- 퍽.

  주르륵.

  

  제이슨의 옷소매에 숨겨져 있던 단도가 자신의 뺨을 스쳐 벽에 박힐 것이라고는, 진짜로 눈곱만치도 짐작할 수 없었다.

  

  

  " 야이 XXX야 니가 뭔데 욕하고 난리야 XXXXX. 그 새끼 욕은 해도 내가 해, XXXXXX "

  

  

  로이는 뺨에 그어진 가느다란 궤적을 따라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이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레드후드와 로빈의 2차 격돌이 일어났다.

  

  

*

  

  

  " 어, 어이, 로빈! 나, 날 풀어주면, 내가 너에게 큰 선물을 주지! "

  

  

  하나의 큰 사건은 로빈에게 사로잡힌 어느 빌런이 로빈에게 제의한 하나의 거래에서 비롯되었다. 안그래도 십 여 분 전까지만 해도 레드후드와 한바탕 했던 로빈이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어디 알려진 이름도 없는 잔챙이가 배트맨과 함께 밤의 고담을 지배하는 로빈이자 웨인사의 후계인 자신에게 도대체 어떤 거래를 하는지 들어는 보자, 란 심보였다.  

  

  

  " 네 놈― 아니 당신말이야. 레드후드란 놈, 마음에 들지 않지? "

  

  

  도미노 아래 드러난 입매에서 여실히 드러나던 지루함이 사라졌다. 옳다구나 싶었던 빌런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 날 여기서 놔준다면 말이야, 내가 그 놈을 제대로 박살내 줄게. 당신, 그놈 마음에 들지 않잖아? 날 여기서 놔주기만 한다면 내가 그놈을 댁 눈 앞에서 영원히 치워주겠단 말이야. "

  

  

  도미노 너머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빌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로빈의 이어윙 너머에서 빌런은 듣지 못할 누군가의 외침이 데미안의 귓가를 울렸다.

  

  

― 어이, 로빈! 네가 레드후드를 진짜진짜 싫어하는 건 알지만, 설마 저 말도 안돼는 거래에 응할 생각인건 아니겠지? 어이, 로빈! 이봐! 아오, 여기는 나이트윙! 아무나 지금 로빈이 있는 데로 서둘러 달려가봐!

  

― 로빈, 이성을 잃지 마라. 저런 말도 안돼는 헛소리에 넘어가지 마.

  

  

  말없이 빌런을 응시하던 로빈의 고개가 우측으로 살짝 까닥였다. 그것을 승낙으로 이해한 빌런은 금새 희희낙락해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그렇게 달려가던 빌런의 발이 허공을 내딛는다. 의아함에 아래를 본 그는 자신의 무릎이 몸과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어-? "

  

  

  땅에 몸이 구른다. 무릎 아래는 여전히 저 뒤쪽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의 뇌가 뒤늦게 찾아오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렸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그리고 이내, 그의 얼굴 바로 옆을 스쳐 땅에 꽂히는 12인치(약 30cm)는 될 법한, 피에 젖은 칼날.

  

  

  " 어디서, 쓰레기주제에, 감히, 그딴 망말을, 입에, 담아. "

  

  

  잘게 끊어져 울리는 저음 속에 깃들어 있는 단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강렬한 분노.

  

  그 분노는 곧 빌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잠시후 황급히 현장에 도착한 나이트윙과  배트맨은 말없이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내리는 로빈을 볼 수 있었다. 그 앞에는 누군가의 혀였을 조그마한 살덩이와 미세한 꿈틀거림이 아니었다면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큼지막한 살덩이가 피 웅덩이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등장한 레드후드로 인해, 2차 격돌이 시작되었다.

  

  

*

  

  

  " 야 이 XXX야, 얼마나 개짓을 하고 다녔으면 그 멍청이가 네놈 욕을 하고 앉아있냐! "

  

  " 그 멍청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참 할 일 없는 놈인가 보군. 사람 뒷담이나 까다니 말이야. 그전에 이 XXXXX가 누구더러 XXX라는 거야. 너야 말로 얼마나 개짓을 하고다녔으면 왠 쓰레기가 널 죽이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난리인거야, 이 XXXX같은 놈아. "

  

  " 그건 또 뭔 개소-, 야 이 XXX야 설마 저거가 그 쓰레기냐? 이 XXXXX가 더럽게 할짓이 없나, 왜 그딴 헛소리 하는 새끼한테 시간쓰고 지랄이야, 지랄이. "

  

  

  어김없이 욕설과 모욕과 총알과 수류탄이 오가는 격돌.

  

  하나의 조그마한 사건과 하나의 큼지막한 사건이 얽히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하나의 진실에 대해서 자경단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런 18, 우리는 현재진행형의 세계멸망 시나리오 중심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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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견원지간[犬猿之間].

  - 개와 원숭이 사이처럼 원수 같은 관계.

  - 서유기에서 유래된 표현.(천계에서는 이랑진군에게 손오공 토벌 명령을 내린다. 그에 진군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손오공과 대결을 벌인다. 2 시간 이상의 무술 대결에서는 승부가 나지 않자, 진군은 비술을 부러 큰 괴물로 변해 손오공을 공격하고 손오공 역시 그에 못지 않은 큰 괴물로 변해 격투를 이어간다. 두 거물의 격전 속에서 화과산의 원숭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는데, 이때 진군의 진중에서 개를 풀어놓아 적진의원숭이들을 습격햇다. 여기에 놀란 원숭이들은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도망치기바밨다.)

  

2. 데미안과 제이슨은 서로가 서로를 욕하는건 허용한다. 그러나 제 3자가 상대방을 욕하는 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정작 당사자는 누가 자신한테 욕을 하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

  

3. 사실 알프레드는 저 둘의 서로를 향한 욕설과 모욕은 사랑의 속삭임이고 오가는 총알과 수류탄은 사랑의 선물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뱃가의 반응이 워낙에 재미있었던 터라 그냥 입다물고 있었던 것 뿐이다. 그러게 집사님이 쉬라고 할때 얌전히 쉬셨어야죠 이 자경단 양반들아 ^0^)m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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