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어찌 한 번을 안 와.”

지민이 무심하게 자신의 작업실에 앉아 편집을 하고 있는 윤기의 등을 바라보며 소파에 길게 누워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지민이 몸을 회복한 뒤 제일 먼저 한 것은 윤기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기는 지민의 말에도 대답 없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작업만 하고 있었다. 

“왜 미안해하지. 당신 책임이 아닌데.”

윤기가 의자를 빙글 돌리고 앉아 지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지민이 사다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안 미안하거든”

“미안한 거 맞는데. 맘 고생 좀 했는데 얼굴 보니까.”


윤기는 귀찮다는 듯 마른 세수를 하고는 눈썹을 찡그리며 지민에게 말했다.

“이제 좀 가라. 작업해야 해.”

“다시 한번 말해 봐.”

지민이 일어나 앉으며 윤기에게 말했다.

“가라고, 작업해야 한다고.”

윤기가 뚱하게 대답하자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윤기가 무슨 말이냐 묻는 듯 눈썹을 올렸다.

“다시 한번 말해 보라고. 공주라고.”


머리를 긁적이던 윤기의 손이 서서히 내려갔고 눈빛이 깊어지며 무표정으로 변했다. 지민과 윤기는 한참을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

윤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뗐지만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자면서도 들리는 건 들리더라고.”

“흠...그렇군..”

“언제부터?”

윤기는 말없이 입술만 씹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보는 사람인 거 자연스러웠지 당신..언제부터....왜...”

윤기는 몸을 돌려 캐비닛으로 가 안에서 종이를 한 무더기 꺼내 지민의 앞 탁자에 올려 두었다.

“처음 널 만나고 난 뒤부터 조금씩”




지민은 많은 것이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아주 어려 보이는 외모이지만 분위기가 너무 어른스러워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그랬고, 어느 누구도 그가 어디 학교 출신인지 실제 나이가 몇인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알지 못했다. 오죽하면 남자인가 여자 인가로 설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으니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비밀을 쌓으면 쌓을수록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윤기가 그와 ‘한낮의 걸음’이라는 단편영화 작업을 함께하는 한 달여 동안 생긴 호기심은 그런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이상한 감정. 뭉클해지고 울고 싶어지고 보고 있어도 그리워지는 마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울컥하는 마음이 그를 볼 때마다 생겼다.

처음에는 사랑인가 했다. 처음으로 찾아온 첫사랑이라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은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더 깊은 더 애절한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며 다음 작품을 준비하던 윤기에게 불현듯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지민이 눈앞의 종이를 들어 보며 윤기에게 물었다.

“내가 썼던 원고들”




*



바람이 불면 주위 대나무밭이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리는 곳이라 ‘녹우각’이라 이름을 붙인 누각에 세 사람이 모여 술 한 잔을 하고 있다.


윤기 : 달이 좋네

정국 : 좋네

지민 : 좋네

백호 : 와웅.

윤기, 정국, 지민 : 하하하하

정국이 지민의 술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댄 뒤 한 잔 마시며 윤기에게 묻는다.

정국 : 귀빈 두고 이렇게 밤 마실 다녀 서야 쓰겠어 폐하.

윤기 : 사는 게 재밌어야 말이지.

정국 : 재미있는데 왜.

윤기가 씩 웃으며 정국을 본다.

윤기 : 너네 요즘 얼굴이 좋다. 드디어 머리 올렸군.


지민 얼굴이 빨개지며 괜스레 백호의 앞발을 만지작거려 장난을 걸지만 백호는 귀찮은지 꼬리를 팡팡 내리치다 손을 빼고 뒤 돌아앉는다.


정국 : 후사 봐야지 얼른.

윤기 : 곧 생기겠지. 공주야, 넌 언제 조카 보여 줄래. 나 좀 보고 싶은데.

지민 멍하게 입을 벌리고 윤기를 본다. 

지민 : 사내가 어찌..


그때 정국이 윤기의 뒤통수를 살짝 때린다.


윤기 : 황제 몸에 이렇게 손 대도 되나?

정국 : 내 마누라 괴롭혀도 되나?

윤기 : 얘 내 딸인데

정국 : 아들이라고


지민 환멸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호수 앞으로 걸어간다. 그때 호수가 꾸르륵 거리며 검은 머리통이 호수에서 천천히 올라온다.


지민 : 이제 들어가시지요. 귀시입니다.

윤기 : 공주야

지민 : 네

윤기 : 내일 서원 뒷 뜰 석탑 안을 보거라.

지민 : 네?

윤기 : 자 이제 들어갈까.


다음날 지민이 손을 넣어 석탑 안에서 꺼낸 것은 고운 비단에 곱게 쌓인 작은 노리개였다. 정국과 지민의 합궁을 축하하는 윤기의 세심한 선물이었다.




*



지민이 놀라 고개를 들어 윤기를 봤다. 


“널 처음 만나고부터 그러더라고.”

“시나리오를 쓰고 나면 나도 모르게 그런 게 쓰여 있더라.”

“처음엔 내가 미쳤나 했지. 생각했던 얘기가 아니고 쓴 기억도 없는 게 써져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까지 쌓였고, 읽다 보니 얘기가 흐르면서 연결되더라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기억으로 자리 잡았고.”



지민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떨며 윤기가 쓴 종이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여기...세 사람...”

윤기가 가만히 지민을 보았다.

“그건 너 만나고 바로 쓴 거니까 거의 10년 전이야.”

“장군님 이름이..”

“내가 그 아름답고 위험한 소년을 너에게 안겨준 이유. 그래서 난 너에게 미안하지 않아”


지민이 윤기를 보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정국 씨가...장군 님이야? 당신 눈엔 보여?”

윤기가 가만히 지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난...."

“지민아”

“당신은 전생이니까, 영혼은 같아도 다른 사람이니까 혹시 잘못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닮아서 착각한 거 일수 있지 않을까?”

“지민아”

“....”

“내 동생이야 목숨을 나눈. 너만큼 나에게도 소중한.”

“....”


“정국이가 찾던 이라는 게 싫은 거야?”

“아니, 아니야”

“그럼”

“만일 아니면...어떻게 해 그게 무서워 그래.”

지민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왜 말 안 했어...”

윤기가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지민을 보았다.

“왜...”

“아파서”

지민이 고개를 들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윤기를 보았다.

“너무 아파서..”

“왜 아파..반가워 야지, 기뻐 야지...”


윤기가 일어나 지민의 머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배가 지민의 머리에 포근하게 감싸졌다.

“네가 그 긴 시간을 혼자 살아남았다는 걸 알고”

“너무 괴롭고 아파서.....”

“너무.....미안해서.....”

“이렇게 머리가 다 새 버리도록.....혼자.....얼마나......”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던 윤기의 손끝이 떨리고 목소리가 흔들렸다.

“미안해…”




지민이 윤기의 허리로 팔을 두르고 안았다. 너무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아 가슴이 터질 듯 아파왔다.

“그날 죽을 걸 미리 알고 있었어?”

윤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미리 알고 나를 산으로 보냈어?”

지민이 다시 물었지만 윤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만 살아남으라고.....그리로 보냈어?”


지민이 벌떡 일어나 윤기를 밀며 떨리는 눈으로 그의 가슴을 잡고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나 살리려고 보낸 거냐고!!!!”

윤기의 가슴을 쥔 손을 흔들며 지민이 고통에 차서 소리를 질렸다. 윤기는 눈이 빨개진 채로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지민의 손만 잡고 있었다.


“말해봐요...폐하.”

“네가 죽는 걸 볼 수 없어서....미안해.....”

윤기가 고개를 숙이고 지민의 팔을 어루만졌다. 마치 달래려는 듯. 마음을 전하려는 듯


“장군님도 그러자고 했어?”

지민이 윤기의 얼굴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물었다. 그는 거의 고통에 일그러져 온 몸으로 눈물 없는 오열을 했다.

윤기는 차마 지민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 봐, 봐 바요. 같이 죽어 야지 한 날 한시에....어쩌자고.......”

“당신들 없이 나 어떻게 살라고....”

“아.....!!!!!!”

윤기가 몸부림치는 지민을 꽉 끌어안았다. 지민이 반항하며 몸을 비틀었지만 윤기는 지민을 놓지않고 그저 한참을 안고 있었다.





“폐하”

“응”

“고마워”

“....”

“기억해줘서...나 알아봐 줘서....고마워”

윤기가 가만히 지민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지민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그럼 다 모인 거네…”

“응”

“폐하 등에 야옹이 있는 거 몰랐지?”

“아....정말?”

“응 수호신으로 와 있어. 폐하 태어난 날부터.”

“…”

“감동이지?”

“짜식..”





“제가 방해한 거예요?”

소파에 앉아 날이 어두워지도록 서로를 안고 가만히 있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윤기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작업실 문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한 채 두 사람을 무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정국이 보였다.

그의 표정을 보고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지민을 안고 있던 팔을 풀며 정국에게 말했다.

“방해는..잘 왔어. 얼른 데려가. 귀찮아 죽겠어”


정국이 인상을 쓰며 윤기를 보았다. 윤기는 정말 귀찮다는 표정으로 정국을 보았다.

“온 김에 저거 가져가”

윤기가 책상에 쌓여 있는 원고 뭉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뭔 데요.”

“네가 읽을 거. 숙제. 자 두 사람 이제 가 나 일해야 해.”

정국은 입술을 내밀며 책상위의 원고뭉치를 끌어안고 지민을 보았다. 자신을 보는 지민의 표정이 묘해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지민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국에게 말 했다.


“집에 가요. 이제”



Day_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