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종말에 대한 준비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은 아니다. 도심 한복판과 비교하면 시작동의 밤은 시골이라 해도 될 정도로 조용했다. 아무것도 없어 조용한 것인지, 혹은 모두가 숨죽이고 있어 조용한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민현은 포털사이트 뉴스 페이지의 사회란을 훑어보았다. 상단에는 최근 핫이슈로 떠오른 여러 기사가 선명한 사진과 함께 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민현이 찾는 게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려가며 전체 페이지를 훑었다. 하단부에 잡다한 사건·사고 소식이 목록처럼 나와 있는 부분에서야 그가 원하던 소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똑똑똑.


민현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서둘러 노트북을 닫았다. 그가 벽에 걸린 낡은 동그란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가 다 된 시각. 그를 찾아온 건 누구일까.


"들어오세요."


무거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민현의 누나, 황지은이었다. 설마 주임신부님일까 봐 가슴 졸였던 것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무표정하던 민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자, 지은 역시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결 좋은 생머리가 가볍게 나풀거렸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본당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네 생각나서 왔지."

"성지순례는 잘 갔다 왔어?"

"응, 어차피 가까운 데 가는 거라서. 아 맞다."


지은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민현에게 내밀었다. 무거운 것이 들었는지 아랫부분이 볼록했다. 봉투를 받아든 민현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꺼내 봐도 돼, 라는 지은의 말에 민현은 손을 뻗어 물건을 꺼냈다. 단단하고 차가운 것은 다름 아닌 성모상이었다.


"이건..."

"선물이야, 민현아."


이미 민현의 방에는 성모상이 여러 개 있었다. 하지만 성지순례를 갔다 올 때마다 지은은 버릇처럼 성모상을 사 왔다. 누구보다 민현이 신부가 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인 만큼, 그녀가 주는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였다.


"고마워."


남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선물 전달이 목적이었던 듯, 민현이 책상 한쪽에 성모상을 내려놓자 지은은 곧장 돌아섰다. 잘 자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들어왔던 때와 같이 나풀거리며 민현의 방을 벗어났다. 탁. 조용하게 문이 닫히고, 민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지은 역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머?"

"수녀님, 안녕하세요."

"마리아 자매님. 왜 숙소에 가지 않고..."


마침 지나가던 중이었는지 나이 지긋한 수녀 두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늦은 시간 민현의 방에서 나온 지은에게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왜'를 묻는 말에, 지은은 모르는 척 생긋 웃으며 상황을 피해 갔다. 경쾌하게 본당을 나서는 지은의 뒷모습을 보던 수녀들은, 마저 가던 길을 재촉했다.


"유난히 사이가 좋은 남매네요."

"사이가 좋달지, 너무 다정해서 친남매가 맞나 싶던데요."

"생긴 건 달라도 친남매던 데요. 저번에 서류 전달할 때 봤어요."

"근데도, 저래요?"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문 앞에서 멈춰있던 민현은, 수녀들의 자취가 아예 남지 않게 되어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주먹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끝없이 오해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해명할 필요도 없는 오해였다. 민현에게 지은은, 너무 소중해서 감히 함부로 쳐다도 볼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그의 편. 고독한 남매에겐 서로의 상처를 핥아줄 수 있는 사람이 서로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을 비뚤어진 애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이야말로, 애욕에 흠뻑 젖은 방탕한 사람들이나 다름없었다. 쾅! 민현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 반동으로 마리아상이 약하게 떨렸다.


별도 뜨지 않는 새카만 밤이 지나간다.





〈불기소처분〉


하... 김율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사건 파일에는 불기소처분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얼마 전 그녀가 맡았던 경찰 성매매 사건이 결국 혐의없음으로 끝나게 된 것이었다. 흐린 CCTV 화면으로는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고,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더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율은 이런 식의 결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기소처분으로 결정하게 된 오전 회의 이후로 내내 저기압이었고, 덩달아 사무실 안의 계장과 비서, 성우까지 그녀의 눈치만 보고 있던 참이었다.


"성우야."

"넵."


성우는 재빨리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


"우리 오늘 점심으로 냉면 먹을까."

"저는 좋습니다."

"그래. 그럼 냉면이나 먹으러 가자. 계장님, 김 비서님 점심 맛있게 드세요."


일방적으로 김율의 의도대로 점심 메뉴가 결정되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보다 이르게 사무실을 나왔지만, 다른 형사3부 검사들이 전부 외근 가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상관없었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냉면 먹으러 가겠어. 아저씨들은 맨날 국밥 타령이나 하잖아. 잔뜩 화난 데다가 더위까지 타는 율이 볼멘소리를 냈다.


둘은 서부지검 근처의 냉면집으로 들어가 앉았다. 식당엔 아직 손님이 없어 한산했다. 두 사람은 물냉면 두 그릇과 찐만두 하나를 시켰다. 주문을 마치고 나자 둘 사이엔 정적이 맴돌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성우가 티슈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던 율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이게, 일하다 보면 말야."

"네."

"감이라는 게 와. 용의자로 특정된 사람의 진술을 듣다 보면 진짠지 거짓말인지 느낌이 온다고."

"네..."

"그 경찰 아무리 봐도 구렸는데, 증거불충분 무혐의로 놔줘야 한다니. 아, 속 터져."


성우는 용의자로 특정되었던 경찰을 떠올렸다. 불과 어제 봤던 사람이었다. 언뜻 보면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근데 말을 섞다 보니 착해 보이는 얼굴 뒤로 무언가 구린 느낌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편견일까 싶어 그 느낌을 지워버리려고만 했었는데, 이렇게 먼저 율이 말을 해 주니 성우도 용기가 났다. 안 그래도 맘에 안 들던 부분이 있었다.


"맞아요! 저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 선배한테 말끝마다 여자 검사가, 여자 검사가 하는 게 얼마나 싫었는데요."


성우는 자신이 욕먹은 것처럼 양 주먹을 꽉 쥐면서 말을 했다. 성우에게 율은 대학 시절부터 멋진 선배였다. 그런 율을 '여자 검사'라며 비아냥거리고 깔보던 남자 경찰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다지만, 그가 여기까지 와서 담당 검사에게 보인 태도는 묘하게 침착하고 기분 나쁜 데가 있었다. 이것도 성우가 느꼈던 이상함에 속했다.


정작 싫은 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었던 율이 피식 웃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게 생긴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들고, 순수하게 분노하는 성우의 모습이 귀여운 탓이었다. 그 사이에 주문한 물냉면과 찐만두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만두를 성우 쪽으로 밀어 주곤, 그녀는 물냉면에 겨자와 식초를 뿌리며 말했다.


"여기 있다 보면 그런 말 자주 들어. 욕 같은 건 차장검사님이 하실 때가 제일 무섭지. 뭐, 부장검사님은 숨만 쉬어도 카리스마가 엄청나지만."

"헉... 부장검사님이 그 정도예요?"

"그럼. 우리 부장검사님이 어떤 분인데. 그분 전설 몰라?"


부장검사 정동현에 대해서는 골프장에서의 모습과 대면식 때 보았던 모습밖에 몰랐다. 두 번 다 허허 웃는 모습이었어서, 아직은 무섭다기보단 좋은 이미지만 있었다. 그치만 대부분 사람이 화가 나면 무서워지니까 부장검사님도 그렇겠지? 부장검사님이 화를 낸다면... 그것도 일하다가 실수해서 화를 내시는 거라면... 으으. 혼나는 상상을 한 성우가 움츠러들었다. 아직 본 적 없지만 무서울 것 같았다. 순진한 신입 티가 폴폴 나는 성우를 보며 율은 부장검사에 대해 전설로 내려오는 썰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상사의 업적에 대해서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부장검사님이 딱 우리만 했을 때, 기여동 재개발 계획이 발표됐거든. 옛날 기여동이 어땠는지 혹시 아니?"

"어.... 아니요. 잘 몰라요."


어쩐지 이야기가 길어질 낌새에 성우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정자세를 했다. 그러자 율이 젓가락을 들라는 손짓을 했다. 대단한 이야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먹던 밥도 내려놓고 들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율 역시 단무지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땐 나도 유치원이나 다닐 때였으니까. 여튼 기여동이 옛날에는 달동네였대. 판자촌 알지?"

"네."

"당시 시장이랑 대통령이 바뀌면서 재개발 계획이 세워졌어. 정부에서 이주 보조금부터 챙겨 줬는데, 거기 사람들이 나가질 않더래. 그래서 행정소송이며 뭐며 다 걸어서 대법원까지 갔다더라? 당연히 정부가 승소했지. 재개발 계획 문제없었고, 절차상 이주 통보랑 보상금 지급에도 문제없었으니까. 근데도 안 나가더래. 심지어 마을 사람들끼리 찬성파, 반대파로 싸움까지 붙어서 가관이었다던데, 반대파 중 과격한 몇 명이 최종 대법원 판결을 듣고 각목 들고 무작정 서부지검으로 온 거야."

"헉."


영화같은 스토리에 성우가 젓가락을 멈추고 율을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린 채였다. 그녀는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고 마저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이 뭘 알겠어. 그냥 눈앞에 검사 한 명 지나가니까 다짜고짜 공격했겠지. 근데 하필 재수 없게 지나가다 맞은 사람이 부장님이었던 거야. 그래서 형사부까지 사건이 넘어온 거고. 폭력사태가 벌어진 거니까."

"세상에..."

"거기서 부장님의 쇼맨십이 드러난 거지. 부장님을 위해 특수팀까지 조직됐지만, 오히려 부장님은 언론 브리핑을 열어서 자신을 공격한 기여동 주민을 용서하고, 불기소하겠다고 했어. 엄청 말을 잘 포장해서 했다더라. 그래서 그 말에 감동한 반대파 사람들이 물러나면서 사건은 훈훈하게 마무리됐고, 부장님은 스타 검사가 되었던 거지. 뭐 그런 얘기야."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어요. 부장님 진짜 멋있는 거 같아요."

"그치? 당시에 카리스마 엄청났대. 지금도지만."


말을 마친 율이 마지막으로 남은 찐만두 한 개를 집어들었다. 길게 이야기하는 사이 찐만두가 식었다. 괜찮아. 여기 만두는 식어도 맛있어. 율은 한 입 크게 만두를 베어 물었다.





"황 신부님!"


점심을 먹고 본당으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 소리가 난 쪽으로 민현이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낯익은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성당 부속 보육원 담당 사회복지사였다. 사람 좋은 그녀는 행정일 외에도 개인 시간을 내어 자주 아이들을 보러 오곤 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과 공작놀이를 하러 왔을 것이다. 민현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생기셨네요. 점심은 드셨어요?"

"네. 복지사님은요?"

"저는 오면서 김밥 먹었어요. 아 참!"


뭔가 떠오른 듯 그녀가 물었다.


"죄송한데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 어떤 부탁이요?"

"그게..."


크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모자란 미술 재료 몇 가지를 사다 주면 되었다. 복지사가 사 오기에는 문구점은 멀리 있었고, 아이들 활동 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먼저 아이들과 다른 거부터 하고 있을 테니 혹시 사다 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민현은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평일 저녁 미사 전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다.


사실 이런 자잘한 부탁은 들어줘도 그만, 들어주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재료를 미리 준비해 놓지 않은 건 보육원 행정 직원의 실수였고, 없으면 없는 대로 복지사도 임기응변을 발휘해 다른 활동으로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부탁을 한 건, 평소에 민현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잘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런 복지사의 생각은, 민현이 오늘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한층 강화되었다.


"... 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자신의 방에 들러 지갑을 챙긴 민현이 주임 신부에게 외출 사유를 고하고 허락을 맡았다. 사정을 들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주임신부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허락했다. 그는 다른 지역의 평범한 성당보다 많은 자유를 보장해주는 편이었고, 특히 민현에겐 더욱 그랬다. 믿으니까. 그는 민현이 뭘 해도 믿는 사람이었다.


그 믿음에 응답하고자 민현은 성실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과 문구점은 좀 떨어져 있었다. 보통 필요한 걸 살 때 대량구매로 배달을 시키거나, 직원들이 차를 끌고 다녀오곤 했는데 큰 걸 사오는 것도 아니고, 민현 혼자 갔다 오는 거라 그는 걸어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걷기에 좋은 날씨기도 했고, 걷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어쩌면 성당 밖으로 혼자 나간다는 사실에 설렌 걸지도 몰랐다. 어쨌든 좋았다. 그는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자유를 즐기기로 했다.


성당은 시작동의 옛 장승 터에 지어진 것이다. 그 말인즉, 성당은 마을의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옹성우가 길을 잃은 채 돌고 돌다 오게 된 곳이 성당이었다. 성당은 일종의 이정표였고, 마을을 지키는 상징이었으며,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경계였다. 성당에서 기여동 방면으로 쭉 들어가야 시작동 시내가 있었다. 그 시내 한쪽에 있는 큰 문구점이 민현의 목적지였다.


쉴 새 없이 걸으니 금방 시내에 도착했다. 신호등 한 개만 건너면 문구점이었다. 그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차들이 쌩쌩거리며 지나갔다. 잡다한 생활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러던 중 톡 튀어 오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 이 나라 검찰은 썩었어!"


흥분한 듯 톤이 높아진 목소리. 모르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근데 누구였더라. 말의 내용 때문에 누군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마침 문구점 바로 옆의 벽에 기대어 선 사람에게서 나오는 소리였다. 적당히 덩치가 있고 건장한 몸과 촌스럽게 빡빡 민 뒤통수를 보자마자 민현은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았다. 어젯밤 읽었던 뉴스 기사의 주인공이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민현은 주인공이 있는 쪽으로 한 칸 한 칸씩 나아갔다. 가까워질수록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죄도 없는 사람을 검찰청까지 오라 가라, 어? 내가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똥개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억울한 모양인지 그가 씩씩거렸다. 그의 말을 들어주던 주변 몇 사람이 작게 맞장구를 쳤다. 동료 경찰인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경찰과 교류하고 지내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간 쌓은 자잘한 친분을 이유로, 길바닥에 멈춰 서서 경찰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중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민현과 눈이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그는 성당 신자였다.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했다. 민현 역시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누구길래 인사를 하는 건지, 경찰이 궁금증 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경찰과 민현이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경찰 역시 민현을 알아보았다. 그는 성당에 다니진 않았지만 여기가 워낙 작은 동네다보니 각각 경찰과 신부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서로의 존재를 모를 순 없었다. 아.... 경찰은 텁텁한 소리를 내곤, 대충 인사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민현이 그를 지나쳐 걸었다.


인사를 안 받아준 게 아니다.

못 본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분노의 화살은 이제 민현을 향해 겨눠졌다. 그러나 경찰에게 남은 사회적 지위와 체면, 주변의 시선은 그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그는 만만하게 씹을 수 있는 상대를 골랐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으로.


"그 새파랗게 어린 여자 검사가, 어? 얼마나 싸가지 없이 쳐다보던지. 경찰을 우습게 보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확 그냥 본때를 보여주고 올 걸 그랬어."


일부러 들으라는 듯,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주어는 여자 검사였지만, 말이 향하는 대상은 민현이었다. 욕설 섞인 말이 민현의 귓가에 화살처럼 꽂혔다. 하지만 민현의 걸음은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이어졌다.


문구점에서 필요한 것을 사고 다시 나왔을 땐,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민현은 다시금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이번에는 차가 쌩쌩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사람 소리는 없었다. 마을은 다시 고요해졌다.


다행히 활동이 중반으로 넘어가기 전에 민현은 공작놀이반 교실 앞에 도착했다. 정말 감사하다며 복지사가 환하게 웃었다. 바로 교실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일요일 자원봉사에 새로운 선생님 오셨나 봐요?"

"아, 네."

"황 신부님만큼 잘생긴 분이 오셨다고 애들이 난리예요. 엄청 마음에 든 거 같더라고요. 신부님께서는 어떠셨어요? 같은 남자분이라서 편했으려나?"


평범하게 물어볼 수 있는 말이었다. 어쨌든 여긴 그녀의 담당이었고, 자원봉사자에 대한 관리 역시 그녀의 업무 중 하나였으니.


그런데 왜 평범하게 대답하기 어려울까. 민현은 지난 일요일에 보고, 또 화요일에 보았던 성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왠지 어설픈 자원봉사자이면서 동시에 경찰 성매매 사건을 조사하던 검사 옹성우. 그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많았다. 영 범상치 않은 것들 투성이였다. 이걸 평범하게 대답하려면 뭐라고 해야 할까. 민현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대답했다.


"... 다른 분들과 다를 거 없죠."


입안이 꺼끌꺼끌해졌다. 익숙지 않은 거짓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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