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방이라도 나가라고 할 것처럼 굴더니 정해준은 이원에게 나가라고는 하지 않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직 기억을 찾지 못하는 정해준을 보면 이원은 까마득한 불안감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느낌. 벌써 사고 이후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도 정해준은 기억을 찾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음.

그 사이 두 사람은 평소의 생활로 돌아감. 각자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같이 생활함. 그렇지만 그 생활이라는 건 그 전과는 많이 달랐음.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도 거의 없었고 서로 각방을 쓰는데다가 정해준은 집에서 식사도 거의 안 해서 한 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음.

꾸벅.

거실에 앉아 깜박 졸던 이원이 놀라 눈을 떴음. 잠깐 존 것 같은데 TV엔 어느새 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끝나고 다른 프로그램이 하고 있음. 멍하게 앉아 있다가 화들짝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음.

이제 금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임. 정해준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 이원은 딱 한 번을 빼고는 뺀 적 없던 반지를 만지작거렸음. 그러자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도 같았음. 해준과의 메시지 창을 열어봄. 항상 가장 상단에 고정되어 있는 해준과의 대화창 역시 새 대화는 사고 이후 뜸한지 오래임.

[어디야? 늦게 들어오는 거야?]

자신을 아예 남이라고 생각하는 정해준이 이 메시지를 받으면 좋아할 것 같지 않음.

메시지를 다 작성하고도 차마 보내지 못한 채 이원은 그대로 핸드폰 화면을 껐음.

 

 

그 시각 해준은 정서와 함께였음. 회사 일을 마치자마자 정서를 호출해 클럽을 찾았음. 밥 먹듯이 드나들었던 곳인데 어쩐지 어색함. 최정서에게 그 이유를 들었음. 윤이원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클럽에 발길을 끊었다고 함.

“내가?”

“그래, 네가요.”

“왜?”

이 좋은 곳을 왜 끊어?

“왜긴, 이원이 형에 미쳐서 그랬다고 몇 번을 말 하냐?”

최정서의 말에 해준이 눈썹을 찡그림. 찌뿌둥해서 나오면 즐거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에 밟히던 차에 최정서가 그 이름을 꺼내자 속이 불편해짐.

윤이원은 지금 집에 있겠지? 설마 금요일이라고 나갔나?

지금까지 지내면서 봤을 때 딱히 밖에서 노는 걸 즐기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한번 생각이 나니까 이원이 뭘 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짐. 그래도 한 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건가 싶음.

이원은 집에서 조용히 지냈음. 원래 조용한 성격인지도 모르겠음. 기억이 돌아오는 것도 없는 상태니 해준은 혼자 살 듯 지냈는데 이원 역시 별 말이 없음. 그래서인지 딱히 거슬린다는 느낌이 없어서 굳이 집에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음.

침실도 원래는 같이 썼을 텐데 지금은 다른 방에서 알아서 지내는 것 같음. 그러다 보니 출근 시간이 겹치는 아침을 제외하면 얼굴 마주할 일도 사실 많이 없음. 처음에 진짜 기억을 잃은 건지, 자신이 정말 생각나지 않는 건지 물어본 이후로는 그런 비슷한 질문도 하지 않음.

설마 기억이 돌아왔는지 안 궁금한 건가?

혼자 생각하던 해준이 미간을 찌푸림.

“근데 너 오늘 이원이 형한테는 말 하고 나온 거야?”

질겅질겅 마른안주를 씹던 최정서가 물었음. 정해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음.

“뭐? 말 안했어?”

“왜 말해야 하는데.”

“아니, 일단 그래도 같이 살고 있고 넌 기억이 그따위라고 해도 이원이 형은 아니니까!”

그렇지 않아도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는데 최정서가 저 따위로 말하자 기분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정해준이 “이제 여기도 재미없다.” 고 말하며 일어남.

“어어? 어디가?”

“야.”

“정해준!”

뒤에서 최정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해준은 무시하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음.

“아.”

그러다가 들어오던 사람이랑 부딪침.

앞도 보지 않고 옆에 있던 사람이랑 시시덕거리면서 거리를 좁혀오더니 처박고 지랄이야. 짜증이 치밀었음. 해준과 부딪친 남자 역시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틀다가 해준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풀었음.

그러거나 말거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지배당한 해준은 앞에 선 남자가 괜찮으시냐고 묻는 것을 무시하고 몸을 움직였음.

“저기요.”

그런데 남자가 자신을 지나치는 해준을 잡음.

“뭐야, 씨발.”

살벌한 표정과 낮은 욕설에 남자가 움찔했지만 해준을 잡은 손을 놓지는 않음.

“일행 있으세요?”

일부러 푼 건지 뭔지 남자에게서 희미하게 페로몬이 풍기기 시작함. 오메가 향이었음. 향 자체는 그냥 평범했음. 과일 향 비슷하게 달달한 향. 근데 속이 뒤틀릴 것 같음. 이게 기분을 잡쳐서 그런 건지 좆같은 오메가 향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음.

“있으셔도 오늘 저랑 같이…….”

그럴 주제도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저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처먹고 온 건지 남자는 정해준이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한 얼굴로 해준을 바라봄. 페로몬 향 때문에 두통까지 생길 지경인데 이 지랄을 해대니 얼마 있지도 않던 인내심이 기어코 바닥을 침.

“없어도 같이 안 갈 건데, 면상 갈아엎기 전에 놓지?”

“네?”

“귓구멍 막혔네.”

허튼 곳에 괜한 시간을 썼다는 생각에 정해준이 남자의 거칠게 털어내고 클럽을 나섰음. 마음 같아서는 진짜 면상이라도 치고 싶었는데 사람도 많은 밀폐된 공간에서 저 역겨운 오메가 페로몬을 더 맡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저 곳에 더 있고 싶지가 않았음.

“개새끼야, 나오라고 불러내더니 지 혼자 쳐 가는 예의는 어디서 배워먹은 거? 기억은 잃었대도 싸가지는 존나 똑같아, 시발. 사탄 새끼.”

뒤늦게 해준을 뒤따라 나온 정서가 해준에게 욕을 해댐.

“간다.”

“개새끼, 나 혼자 두고 이렇게 간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해준은 괜히 차까지 두고 나온 것을 후회하며 택시를 잡았음.

 


4.

새벽 두 시.

아직 해준은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도 없음. 혹시나 연락이 올까 싶어서 핸드폰만 한 시간 내내 들여다보던 이원은 팔이 뻐근해짐을 느끼고 폰을 내려놓음.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려고도 해봤지만 스멀스멀 기어와 이원을 점령했던 졸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달아 난지 오래였음. 졸다가 깬 이후엔 잠도 오지 않음.

고요함을 가장한 적막한 새벽.

기다리고 있는 잠 대신 다른 것들이 밀려들기 시작했음. 초조함과 불안 따위였음. 이런 불안정한 기분은 오랜만이었음. 그래서 더 힘든 건지도 몰랐음. 최근엔 정말 평화로웠는데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기억을 잃은 게 정해준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었으면 편했을 것 같음.

이런 생활이 영영 지속된다면?

앞가림 운운하던 정해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음.

늦게라도 기억이 돌아 올 거라고 했던 의사의 말도 점차 흐릿해져감. 신뢰를 잃어간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음. 사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 된 것 같음.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라 정해준의 뇌 어딘가가 완전히 망가진 게 분명함. 정해준은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불치병 같은 것에 걸린 것임.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 이런 상황은 말도 안 됨.

이제 정해준이 없는 삶 같은 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름. 혼자서 살았던 시절은 떠오르지도 않음. 막막해서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음.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혹시 오늘은 정해준이 전처럼 날 대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이젠 지쳐감. 회사에서는 아무 일 없는 척 전과 다름없이 일하며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데 그것도 점차 힘에 겨움.

특히 정해준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게 제일 힘듦.

마음 같아서는 네가 어떻게 나를 잊느냐고 네가 나한테 무슨 짓들을 했었는지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정해준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음.

그렇지만 진짜 그랬다가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날까봐 혹은 해준이 더 안 좋아 질까봐 그럴 수도 없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시간만 자꾸 지나감.

 

삑삑삑삑삑삑.

 

어둠 속에서 이원이 무너져 내리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을 때였음.

잠금장치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림.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음. 그러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진짜 정해준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음.

이원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죽였음. 청승맞게 굴고 있었던 것을 들키면 정해준이 싫어할 것 같았음.

주변이 조용함. 곧장 방으로 들어간 건가 싶음. 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런 관심이 없구나. 더욱 서러워짐.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감.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옴.

어쨌든 정해준이 돌아온 것을 알았으니 자신도 방에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슥, 스윽- 실내화를 끄는 소리가 남. 그 소리는 정확히 이원의 앞에서 멈춤.

이원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참았음.

“고개 들어.”

정해준이 차갑게 명령했음.

“머리채 잡고 들어올리기 전에 얼굴 들어보라고요.”

정해준이 기억을 잃었더라도 어떤 불가항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원은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음. 이원이 천천히 상체를 세웠음. 정해준의 발, 무릎 그리고 허벅지까지 시야에 담겼음. 이원은 거기서 더 고개를 들진 못하고 가만히 있었음.

해준이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임.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음. 이원이 놀란 눈으로 시선을 피했음. 사고 이후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적으로 눈이 마주친 건 처음이었음.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은 여전했는데 저 머릿속에 자신에 대한 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보고 있기가 힘듦.

“진짜 울었네?”

시선을 피하는 이원에 짜증 난 해준이 이원의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고정함. 눈가가 붉음. 살이 짓눌려서 더 그런 것 같음. 혼자 있는 집에서 뭔 생각을 하면서 질질 짜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더러움. 동시에 아랫배가 뜨거워짐.

씨발, 이 얼굴에 꼴려서 데리고 살았나?

“왜 울었어요?”

정해준이 피가 몰리는 아래를 모른 척하며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음.

“……그냥, 좀.”

“그냥 좀 뭐. 이 상황이 짜증나서? 지겨워서? 존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이원이 하지도 않은 뒷말을 붙이며 해준이 빈정거림.

십 년이나 같이 살았다며? 둘이 죽고 못 살았다며? 그게 사실이라면 분명 자신 혼자만의 감정으로 그 세월이 유지되지는 않았을 거다. 이원도 분명 자신에게 그 정도의 마음이 있으니까 한 집에서 같은 알파랑 살림까지 차린 거 아닌가? 근데 고작 사고 나서 기억 좀 잃었다고 자신이 있지도 않은 집에서 질질 짜면서 힘들어 한다고?

“그런 게 아니라, 조금 슬…….”

화를 내는 것 같은 해준에게 습관처럼 아니라고 설명을 이어가던 이원이 별안간 인상을 쓰며 말을 멈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원이 눈에 힘을 주고 날카롭게 물었음. 가까이 다가온 해준에게서 희미하지만 오메가 페로몬 향이 느껴짐. 지금껏 당당하게 말을 잇던 해준이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음.

이원은 직감적으로 해준이 오메가와 있다가 온 것을 알게 됨. 아주 적은 접촉이라도 있었다는 것도. 그러니까 이렇게 페로몬을 묻히고 온 거겠지. 이원은 발밑이 깜깜한 어둠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낌.

 

‘씨발, 내가 같은 알파 새끼한테 뭐 볼 게 있다고.’

 

해준이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오메가와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라고 믿었는데. 모든 게 부정당하는 기분임. 정해준은 오메가에게 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는데 사고로 그것마저 변한 건가. 그럴 수가 있는 건가?

그러면 진짜 어떻게 되는 거지? 순리대로 오메가를 만나겠다고 떠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된 이원이 고개를 떨궜음. 그에 정해준이 안절부절 못하며 “혹시 페로몬 향 때문에 그래요? 이거 그냥 부딪친 거야! 씨발, 안 그래도 존나 역해서 뒤질 뻔했는데.” 하고 말함.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감. 이원이 고개를 숙이기 전 보여준 지친 표정 하나에 불안해하고 초조해서. 그러나 해준의 말이 이원에게는 변명처럼만 들림.

사실 새벽 두 시면 뭔 짓을 해도 다 하고 올 수 있는 시간이니까. 이원의 머릿속에서는 정해준이 얼굴도 모르는 오메가와 뒹구는 상상이 펼쳐짐.

“……나 방에 들어갈게, 너도 쉬어.”

이원이 몸을 일으켰음. 할 말은 엄청 많았지만 자신을 기억도 못 하는 정해준과 무슨 말을 하겠나 싶음. 정해준은 지금 자신이 완벽한 솔로인 줄 아니까.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 해도 자신이 어디까지 용서하고 넘어 가줘야 하는지 모르겠음. 그저 괴로움. 서로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진 감정의 괴리가 사라지는 날이 올까?

정해준의 시선은 이원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다님.

“진짜라니까? 최정서한테 전화해?”

해준이 자신을 지나치려는 이원을 잡고 말함.

“정서랑 같이 있었어?”

“정서랑?”

“…….”

“최정서.”

“……최정서랑 같이 있었어?”

기억이 없는 와중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 이원이 어이없어하면서도 해준이 정정해준 대로 정서의 성을 붙여 다시 물어봄.

“어.”

“알겠어.”

“뭐야, 그게 끝?”

“응, 방에 들어가서 잘 거니까 놔줘.”

해준은 알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이원의 태도가 찝찝하기는 했지만 놔줬음. 해준이 놔주자 이원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림. 처음으로 이원이 자신과 같은 침실이 아닌 다른 방을 쓰고 있다는 게 거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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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상실 썰을 이렇게 좋아해주실 줄 몰랐어요...! ㅋㅋ

댓글, 하트,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

퇴고는 천천히 합니다 @.@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1차 BL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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