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제 모험가는 달의 수호자 미코테 용기사로, 성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여성체이긴 합니다.
  •  5.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므 아랭에서 돌아와 콜루시아 섬으로 떠나기 직전 시점이에요. ←이건 시점 안내로 김칠해둘게요.
  • 모험가도 알리제도 개인 해석 다분합니다.



해가 지지 않는 세상은 도통 낯설기만 하다. 백 년 동안 끝나지 않는 백야라고 하니 시간을 가늠하는 건 오로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바늘 뿐인 것이다. 밤 11시, 원초 세계라면 별이 반짝여야 할 하늘은 온통 희기만 하다. 구름도 없고 태양도 없는 하늘이라니. 모험가는 펜던트 거주관의 창가에 앉아 바깥을 한참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아직 환한 밤에 제 몸도 적응을 못 하는 건지 그토록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불면은 익숙하지만, 다음 날 또 먼 길을 떠날 걸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쉬어야 하는데…… 아까 보았던 장면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이미 아까 정비를 끝낸 창을 다시 꺼내고 만다.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은 점차 이어졌다가 끊기기를 반복했다. 아므 알랭, 죄식자, 할리크, 테슬린…… 그리고 알리제. 멍하니 날을 다듬던 손이 멈췄다. 그 애가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법 긴 시간을 함께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고 하긴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은 알리제의 ‘검’이었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비록 그동안 많은 일이 있긴 했어도…… 그러고 보니 아까는 수정공에게 보고는 자기가 할 거라며 등을 떠밀기에 펜던트 거주관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알리제를 더 살펴볼 걸 그랬다. 정신이 없어 미처 주변을 보지 못하는 건 모험가의 단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아니지, 알리제는 이곳에 익숙해졌을 테니 쉬고 있을 텐데. 내일 찾아가야 하나.

갈피를 못 잡고 서성거리고 있을 즈음 문득 창가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몬스터인가, 싶어 신경이 곤두섰으나, 적어도 크리스타리움 내부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수정공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이 규칙적인 소리는 뭔데? 모험가는 창을 한 손에 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너무 살벌한 거 아니야? 좀 넣어두지, 그 창은.”


아래쪽에서 새초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창을 등에 넣어두고 나서야 고개를 내리자, 알리제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툭툭 차고 있었다.


“알리제?”

“불이 켜져있길래 불러봤어. 당신, 이 시간에 왜 안 자는 거야? 아까 쉬라고 보낸 건데.”


그러는 너는 왜 그러고 있냐고 묻기 전에 창틀을 디딤돌 삼아 바닥으로 뛰어내리자, 알리제가 화들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거니와 용기사에게 점프란 숨쉬기나 다름 없는 건데, 매번 놀라는 게 귀엽기도 하고……


“위험하다니까!”

“나는 괜찮은데.”

“…그야 그렇겠지만! 보는 사람은 놀라잖아! 몸 아낄 줄도 모르고….”

“걱정했어?”


…이렇게 물을 때마다 말문이 막혀서 괜히 노려보는 것도 귀여워서 자꾸 놀리게 된다. 모험가의 검은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을 보며 알리제는 괜히 그의 팔을 때리고는 투덜거리면서 아무렇게나 걸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으나 괜히 팔을 문지른 모험가는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마치 낮 같은 광경에도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광장은 영 한산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알리제의 뒷모습을 보니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내일 머쓱하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지만, 이 시간까지 알리제도 잠에 들지 못한 걸 보면 아까 보았던 게 상심이 크긴 했겠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이런 상황에선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것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과,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때의 무력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되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말도 쉽게 와닿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기 때문에. 불면의 밤도, 혼자 있는 시간도 모두 그 감정에서 비롯되므로.


“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미안.”


알리제가 멈춰선 것도 모르고 움직이다가 부딪혀, 하마터면 나란히 넘어질 뻔 했다. 알리제는 됐다고 말하면서 손을 저어 그를 제 옆으로 오게 했다. 모험가는 잠자코 옆에 서서 알리제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제야 방향을 가늠한다. 보이지 않는 구름 너머에는 아마도 아므 알랭이, 그리고 여행길 여관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알리제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하는 말은…… 그냥 듣고 잊어버려. 알겠어?”

“응.”

“…테슬린 말이야. 그건 사고였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테슬린은 할리크를 가만 둘 수 없었을 거고, 우리는 멀리 있었으니까. 그곳은 세상의 끝이고 죄식자들이 자주 오가는 곳이니까… 언제라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 거야.”


모험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잡아도 될지 고민하다가 잠자코 곁에 서 있기로 했다. 알리제의 성격상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싫어할 테니까. 두서 없는 말은 계속 해서 이어졌고, 그 말을 끊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자꾸만 화가 나. 그걸 막을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걸 견딜 수가 없어.”

“알리제….”

“당신은 알고 있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불가능해. 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까. 내가 더 강했으면, 조금 더 힘이 있었으면…… 그럼 이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 이런 마음은.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당신은 어떻게 견디는 건데?”


그는 아직도 종종 자신이 잃은 것을 생각한다. 구해낸 것, 지켜낸 것, 얻은 것이 아닌, 이미 스러진 것, 버려진 것, 잃은 것을 생각하는 건, 그가 그런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등에 진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모험가는 알리제가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니까…… 이런 순간에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모험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알리제의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알리제,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알리제의 ‘검’이야. 적어도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

“너는…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난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지? 앞으로 나아가고 바꿀 거라고 맹세했으니까.”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할 거야.”

“응, 그러니까 나를 검으로 삼은 너는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될 거야. 나는 그걸 믿어.”


모험가는 고개를 들어 알리제를 보고 말을 이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건, 알리제, 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고 있기 때문이야.”

“…….”

“그러니까… 네가 가는 길에는, 반드시 내가 함께 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믿을 거야.”

“……바보.”

“어,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힘이 나긴 하는데…… 알리제? 울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알리제는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고, 모험가는 당황하여 꼬리까지 터트리면서 알리제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나마 사람이 없는 늦은 밤이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허둥거리는 모습이 어지간히 우스웠는지 알리제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다가, 당신이 그러니까 호구 소리를 듣고 남들이 다 부려먹는 거라고 때 아닌 악담(?)을 했다. 모험가는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이런 상황에서 들을 말인가 싶어 다소 억울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까보다는 기운이 난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왜 1세계로 넘어오고 나서는 항상 알리제를 울리기만 하는 것 같지? 알피노에게는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다. 안 그런 척 해도 알피노는 제 쌍둥이에게는 퍽 각별한 편이었으므로, 제 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알리제를 울렸다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알피노가 화를 내지는 않겠으나 어쩌면 그보다 더 곤란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모험가는 저도 모르게 알리제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리제는 쫑긋거리는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며, 어떻게 저렇게 숨길 줄을 모를까… 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저기, 알리제.”

“왜?”

“잠이 안 오면 같이 잘래?”


부지런히 움직이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알리제를 울려 다소 의기소침 해진 모험가는, 자신이 뭘 잘못 말했나 싶어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아니… 보통 사람 온기가 있으면 잠이 잘 오니까. 나도 잠이 안 오기도 하고. 굳이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닌데, 겸사겸사 그러자는 느낌으로.”

“당신… 다른 사람한테도 이래?”

“응?”

“…아냐.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냥 각자 방으로 갈까?”


무시하려고 했으나, 꼬리가 흔들리는 속도가 다소 느려진 데다가 귀가 축 처지는 걸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펜던트 거주관에 다시 도착하고 나서야 모험가의 볼을 살짝(정말로 아주 살짝이었다!) 꼬집은 알리제는, 무어라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방으로 먼저 들어가버렸다. 영웅의 볼을 꼬집다니, 밖에서 들으면 아주 기겁을 하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모험가가 괘씸한 게 가장 컸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고 태연할 수가 있지?

알리제,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볼과 귀가 붉어진 걸 들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는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숨었다. 아무래도 평소보다 훨씬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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