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진짜 졸려서 죽는 줄 알았어."

"나도."


 공세실이 투덜투덜거리며 계단을 가볍게 내려갔다. 그 뒤를 노다한이 가방을 고쳐매며 뒤따랐다. 공세실이 오늘 수업이 어땠는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국어쌤은 오늘도 진도 나가다가 딴 소리를 잔뜩 했는데 너무 어이없어서 들어주질 못하겠다는 둥, 과학 쌤의 정수리가 오늘따라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 눈을 뜰 수 없었다는 둥. 이런저런 말을 하지만 사실상 공세실은 오늘 정규 수업 중 내내 수업은 안 듣고 딴짓을 하거나 졸았다는 소리다. 노다한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몇 분 남았을까? 제~발 두 정거장 전이어라!"


 공세실이 걸음을 재촉하며 남은 계단을 다다닥 내려갔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과 직장인, 어쩌면 대학생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섞여 텅 빈 역사 내를 걸어갔다. 각자 불규칙한 걸음으로 개찰구 앞으로 향했다.


"중앙로는 가게도 있고 북적북적한데 여기는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어. 다른 지역은 지하철에 편의점도 있다던데, 여긴 그런 것도 없고."

"아무래도 수요가 없으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 바로 편의점 있잖아."

"그래도~ 있으면 좋잖아. 델리만쥬도 팔고, 호두과자도 팔고."

"핫도그도 팔고?"

"그치, …아니지. 아무래도 여기는 가게를 낼 만한 공간이 없어서 못 하겠다. 포기!"


 이 이야기는 일주일마다 한 번씩 하는 것 같다.


"아, 저기 너희 오빠다."

"그렇네."


 물론 반대편 출구에 있는 전광판 광고를 보며 하는 말은 일주일 내내 듣고 있다. 노다한은 전광판 광고를 물끄러미 보았다.

 콘서트 중 찍힌 건지, 음악 방송 중 찍힌 건지, 홈마가 후보정을 빡세게 한 얼빡샷이 광고판에 가득했다. 그리고 정갈한 폰트로 'HAPPY B DAY', 그 밑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오빠의 생일이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전광판에 가득 붙어 있다.


"헐, 곧 열차 들어오겠다. 빨리 들어가자!"


 공세실이 노다한의 체육복 옷깃을 잡아 끌었다. 개찰구 위 화면에 그려진 귀여운 열차가 서서히 이번 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둘이 개찰구에서 급하게 교통카드를 찍고 허겁지겁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 …안전을 우선으로 하여 고객을 모시겠습니다. ] 녹음된 단조로운 안내방송이 끝나고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 열차 들어옵니다. ]


"어?"


 어딘가 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다. 멘트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노다한은 입술을 달싹이며 공세실을 보았으나 공세실은 열차 탑승 후 자리에 앉는 게 더 중요한 모양인지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들어오는 차량을 살펴보기 바빴다. 빈 좌석이 어디 있나, 매의 눈으로 살펴보다가 적당한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끼이익─, 바퀴가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정위치에 섰다. 스크린 도어가 열리는 알람음이 나고, 뒤이어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열차의 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이 없나 확인한 후 공세실이 안으로 먼저 쏙 들어가더니 봉이 붙어있는 귀퉁이 자리에 앉고, 제 빈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노다한은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고선 공세실의 옆에 털썩 앉았다.


"평소보다 더 조용하네."

"그런가? 원래 이 정도 조용하지 않아?"


 공세실은 대수롭지 않은지 썰렁한 차량 내를 슥 훑었다. 둘 말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맞은편, 엇비슷한 위치에 앉은 어른 두어명이 끝이었다. 뭐, 퇴근 시간은 한참 지났으니까. 공세실은 말을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승강장에 얼마 없던 사람이 다 타고, 뒤이어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 열차가 곧 출발하오니 아직 열차를 타지 못하신 고객께서는 노란선에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 단조로운 알람음이 흘러나오며 출입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 영어 안내문까지 다 나온 후, 열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소리를 내며 창문 너머로 빠르게 승강장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어둠만이 엄습하고, 창문에는 둘의 얼굴이 비쳤다.


"오늘 너무 열심히 자습했나 봐~. 진짜 피곤하다."


 공세실이 우는소리를 하며 노다한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교실 뒤쪽, 서서 공부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던 노다한은 야자 시간에 공세실이 무엇을 하는지 다 보았으나 말을 아꼈다. 인터넷 강의 보는 척 하면서 유튜브에서 예능 클립이나 보고 있었으면서. 나름 예능 공부를 열심히 하긴 한 셈이다.


"어차피 몇 정거장은 가야하니까 잠깐 자. 깨워줄게."

"그래도 돼? 그럼 어깨 좀 빌릴게."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겠다고 뒤척뒤척거리더니, 어느새 눈을 감고 곤히 잠에 빠졌다. 공세실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얕은 숨소리를 들으며 노다한은 가방 앞에 대충 꽂아두었던 단어장을 꺼내 야자 시간에 못 외운 단어를 마저 외우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열차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음을 듣고 있자니 어째 노다한마저 솔솔 잠이 오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공부하려고 고카페인 음료까지 잔뜩 먹었는데, 이렇게 잠이 오는 건 고등학교 입학 이후 처음이다. 노다한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애써 깨어 있으려고 했으나 잠의 수마와 싸워서 이길 수가 없었다. 점차 시야가 흐려지더니, 이윽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노다한의 고개도 툭 떨구어지고, 두 학생은 사이좋게 서로에게 기대어 쿨쿨 자기 시작했다. 열차는 순조롭게 종점을 향해 나아갔다. 사람이 타고 내리는 것을 반복하다가…….


[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쪽입니다. ]


 공세실이 번개맞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내방송이 나온 뒤, 열차는 거친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공세실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차량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열차의 문은 닫길 생각이 없었다. 설마 종점인가? 창문 너머로 어디 역인지 확인하려고 했으나 창문에 습기가 가득 차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


 공세실이 옆에서 부스럭거리자 노다한 역시 눈을 비비적거리며 잠에서 깼다. 공세실이 옆자리에 뒀던 가방을 급하게 챙기며 노다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역 지나쳤나 봐! 빨리 내리자!"

"어?"


 노다한은 제대로 정신도 못 차렸으면서 가방을 어떻게 잘 챙겨서 열차에서 내리는 공세실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별 다른 안내방송 없이 열차 문이 닫혔다. 그리고 열차는 역에 들어올 때와 다르게 소리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역에는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뭐야."


 공세실이 신경질적으로 한마디 뱉었다. 떠나는 열차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노다한의 정신이 퍼뜩 들었다.


"왜?"

"이런 역이 있었어? 아니 근데 이거, 대체 어떻게 읽는 거야?"


 공세실이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켰다. 노다한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가, 간판에 머물렀다. 역명을 적은 익숙한 간판이지만 어째 낡고 삭았다는 느낌이다. 거기다, 역명이 적혀있는 중간은 분명 어떠한 글자가 적혀있다는 건 알겠는데,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뇌에서 이 글자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는 느낌이다. 계속 글자를 보고 있자니 뇌가 지끈지끈 아파지며 머리에 열이 확 몰렸다. 노다한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시선을 돌린 역은 이상하게도 허름했다. 이렇게 허름한 역이 있었나? 물론 오래된 역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낡아빠지진 않았다. 거미줄이 구석구석에 있다 못해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로 잔뜩 있고, 당장 승강장 내 있는 설치물 위에는 먼지가 잔뜩 앉아있다. 거기다 설치물은 멀쩡하냐, 어디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유리나 플라스틱은 깨져있고, 바닥 타일 역시 어긋나 돌출되어 있다. 천장에 달린 전등도 LED 등이 아니라 수명이 다 되어가, 하얀색을 잃었거나 점멸하는 형광등이다. 어떤 곳은 아예 형광등조차 달려있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아무도 없어요?!"


 공세실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이제 눈치챘겠지만, 이 역은 스크린도어조차 없었다. 공세실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그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둘이 서 있는 곳 건너에는 맞은편 승강장이 보여야 마련이건만, 맞은편 승강장조차 보이지 않고 어둠만이 가득했다. 철도가 깔려있긴 했지만 오직 승강장 내에만 존재한다는 듯, 승강장 너머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공세실이 계속 외치며 승강장 내를 돌아다녔으나 역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노다한은 가만히 서서 열차가 다시 오길 기다렸으나 열차는 올 기미조차 없었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공세실은 목이 쉬어라 외치다가 그만 울화가 치밀었는지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낡은 싸구려 자판기를 발로 퍽 찼다.


"우쒸! 아, 아야…. 아파……."


 오히려 본인의 눈에 눈물이 찔끔 나, 그만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노다한은 공세실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자판기를 보았다. 자판기에 불이 들어오긴 하지만, 판매하는 품목은 역시나 알아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간판의 역명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위에 올라가 볼까? 역무원은 있을 거 아냐."

"헐, 노다한. 진짜 개천재."


 공세실이 쌍따봉을 날리며 벌떡 일어나, 무릎을 탁탁 털었다. 그리곤 누가 무어라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 본인이 앞장서서 저 멀리 보이는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노다한은 가방을 고쳐 매곤 공세실의 뒤를 따랐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이게 뭐야. 내일부턴 지하철에서 안 졸래."

"그래, 그래."

"그러면 학교에서 더 많이 자야되나?"

"계단 조심해. 낡아서 잘못 밟으면 미끄러지겠다."


 유지보수도 제대로 안 되는 상태인지 계단 타일 몇 장은 깨져서 내부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거기다가 쓸데없이 계단이 가파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층에 쉽게 도달할 수 없다. '대체 얼마나 깊은 거지?' 같은 호선의 다른 역은 이렇게 가파르고 긴 계단이 없다. 공세실의 말수가 점점 적어지고 대신 숨소리가 그 자리를 메웠다. 어째 계단도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다.


"그냥 올라가지 말까?"


 위층이 있는 건 맞나? 그런 의심을 하며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끝없는 어둠만이 있었다. 저기로 내려가면, 어둠에 삼켜져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느라 힘들어 땀이 나는지 아니면 공포감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다 온 것 같은데?"


 묵묵히 올라가던 공세실이 위쪽을 가리켰다.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둘은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러자 여태 계단을 올랐다는 게 거짓말처럼, 금세 위층에 도달했다. 그리고 둘은 인상을 찌푸렸다. 상당히 강한 빛이 둘을 향해 비추었다. 두 사람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자 불빛의 위치가 조정되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멀쩡한 사람의 목소리다. 사실은 꽤 무서웠나보다. 목소리를 듣자 노다한의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졌다. 공세실 역시 내내 안 좋던 표정이 밝게 변했다.


"저희가 역을 잘못 내려서요. 지금 헤매고 있거든요. 혹시 막차 끊겼나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공세실은 손그늘을 만들며 손전등 불빛 건너를 보았다. 어두운 역사 내, 번지는 손전등 불빛으로 얼추 구분은 가능했다. 정모를 푹 눌러쓰고, 역무원 복장을 한 실루엣이 보이긴 하나 그의 얼굴은 모자 그림자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평소 겁대가리라는 것을 상실했다는 평을 듣는 공세실이건만, 저 손전등을 든 사람을 자세히 쳐다보려고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치밀었다.


"일단 개찰구 밖으로 나오시면 사무실에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둘의 앞에 있는 개찰구를 가리켰다. 둘과 역무원의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존재다. 공세실과 노다한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공세실이 아주 조심스럽게, 노다한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괜찮겠지?"

"…다른 방법도 없으니까."


 평소 공세실답지 않은 어투와 태도다. 노다한 역시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빨리 나가는 편이 좋겠지. 노다한이 앞장서자 공세실은 주춤거리다가 노다한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개찰구를 나오자 역무원은 손전등을 앞으로 돌리며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역사 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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