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들어선 황궁은 상상에 넘치도록 거대하고 웅장했다. 고개를 꺾어도 꼭대기가 눈에 닿지 않는 성벽과 망루, 그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길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이렇다 할 꾸밈새 따위는 전혀 없이 사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또각또각 바닥을 밟아가는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리는 게 마차 안에서도 또렷하게 들렸지만, 옆에 앉은 이명헌은 딱히 긴장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이 황궁은 그의 집이었을 테니.

그나마 앞자리에 앉은 이가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오히려 이달재는 한껏 여유로움을 꾸며낼 수 있었다.

“송희야, 그리 손을 쥐고 있으면 상처가 생길지도 몰라.”

나름 침착하게 낸 목소리가 잘 먹혀들었는지, 송희는 금세 손아귀에서 힘을 풀고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거렸다. 그 후에는 곧 크게 한숨까지 내쉬며 호흡을 가라앉혔는데, 이달재는 문득 이런 송희의 태도가 이명헌에게 거슬리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친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것은 오직 이달재의 얼굴뿐이었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마뜩잖은 기색 따위는 없었다. 이명헌은 그저 이달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산왕비는 역시 긴장이 되지 않는 모양이오. 시녀에게 신경을 써줄 정도라니.”

“……. 아뇨. 저도 긴장하고 있습니다. 전하.”

“그래? 그렇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자.”

이명헌이 손을 펼쳐 내밀자, 이달재는 머뭇거리면서도 그의 손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앞에 앉아 있는 송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찌 시야에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달재는 애써 한숨을 삼키며, 슬쩍 시선을 들어 이명헌과 눈을 마주쳤다.

내내 굳어있는 것만 같았던 이명헌의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보니, 그는 이 상황이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달재는 그래도 세 사람 중에서 한 명은 마음이 편하니 다행이라 여기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숨을 꾹꾹 내리눌렀다.

두 사람이 마차 안에서 마저 연극을 하게 된 연유는 분명 새롭게 산왕부에 들어 산왕비의 시녀가 된 송희 탓이었다.

송희는 양호열이 구해온 아이로, 그의 말로는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어 강백호와 셋이 함께 어울렸던 사이라고 했다. 앞으로 황궁에 들어야 한다면 믿음직스러우면서 입이 무거운 아이를 시녀로 대동하는 편이 좋을 테니 사람을 추천해도 되겠냐고 양호열이 물었을 때. 이달재는 이명헌이 새로 시녀를 들이는 걸 허락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본래 이 연극은 그리 길어질 만한 것이 아닌 데다가, 또 이명헌이 특별히 시녀가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은 듯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탓이었다.

한데 의외로 이명헌은 양호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순순히 허락하더니만 ‘할 수 있다면 오늘 중으로 데리고 와라.’라면서 그날 바로 산왕비의 시녀가 될 아이를 산왕부로 불러들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안이 벙벙한 것은 오직 이달재 혼자인 듯싶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 산왕부에 들어선 송희까지도 양호열에게 모든 설명을 다 들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산왕부의 새로운 식솔이 된 송희가 아는 것 중 진실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산왕비가 남자라는 사실.

이에 대하여 어떤 설명을 덧붙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송희는 제 주인이 왕비를 자처하는 사내인 게 조금도 꺼려지지 않는 낯이었다. 그 대범함이 대단하게 느껴졌으니, 첫 만남에 이달재가 송희를 몇 번이나 힐끔거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명헌이 넌지시 저 아이가 마음에 들었느냐고 물어서, 이달재는 고갯짓 없이 솔직히 대답했다.

‘산왕비가 사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리 침착할 수 있다는 게 놀랍네요.’

‘음. 그게 전부라는 말이지.’

대꾸를 마친 이명헌은 송희의 처소를 후원 안에 딸린 작은 방으로 정해 준 뒤에 곧바로 이달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달재는 순간 깜짝 놀랐으나, 눈앞의 송희가 아는 것은 산왕비의 성별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며 애써 미소 지으며 그를 따라나서야만 했다.

졸지에 처소에서까지 산왕의 사랑을 받아 산골에서 성도까지 들어온 산왕비가 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에야 이달재로서는 연극에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품에 안긴 이달재가 잠자코 이명헌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용을 쓰는 사이, 이명헌은 태연스럽게 송희에게 첫 명령을 내렸다.

‘오늘 갑자기 왕부에 들었으니, 저녁부터는 쉬도록 해라.’

의외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본디 송희와 같은 시녀는 주인을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어야 하겠지만, 이명헌은 특별히 오늘은 산왕비와 단둘이 외출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서 휴식을 명했다.

사실 이달재로서도 갑작스럽게 시녀로 들어온 송희가 뒤를 따라다닌다면 이래저래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몸과 마음이 편하겠구나 싶어 이달재가 반사적으로 생긋 웃었다. 그리고 송희가 힐끗 시선을 옮기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멈칫거렸다.

이리되면 새로 들어온 시녀에게 산왕과 산왕비는 둘만의 나들이를 반기는 철없는 신혼부부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연유로 성도에 들었던 것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달재는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순응하듯 몸을 맡긴 채로 지난밤에 이명헌의 손을 잡고 거리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지난번의 연등처럼, 어젯밤에는 동물 모양의 가면과 사탕이 이달재의 손에 들린 채 산왕부로 들어왔다. 그저 눈길 한 번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선물을 받게 된 이달재는 조금 머쓱한 낯이었으나, 이명헌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다지 값비싼 물건이 아닌 탓에 전하께서 쉽게 너그러이 베풀어 주신 게 아닌가 싶었다. 이달재는 후원으로 향하는 동안 나직하게 내려앉는 이명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애꿎은 가면의 토끼 귀를 괴롭히다가 기어이 끝을 똑 분지르고야 말았다.

새카맣게 그늘진 나무그림자 사이로 달빛이 찬란한 탓에, 이달재가 부러트린 가면이 또렷이 잘 보였다. 이달재가 당황하며 아쉬운 듯 탄식하자, 이명헌은 금세 그것들을 제 손으로 거두어서 말했다.

‘부인께서 기운이 좋으시니, 다음에는 좀 더 튼튼한 것으로 사드려야겠군.’

농이 분명한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리는 걸 보면, 분명 주변에 송희나 다른 시종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이달재는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자리에 선 채로 여기저기 기웃거려 봐도 후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건 오직 이명헌과 이달재 단 둘뿐이었다.

‘무엇을 그리 찾아?’

의아함이 가득한 조용한 물음을 듣고서야 이달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조금 전에 이명헌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여긴 것이 오직 그의 착각일 뿐이라면, 이건 분명히 정도를 넘어선 오인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근래 들어서 이상한 기운이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일이 잦은 걸 보면, 역시 거짓말은 심신에 해가 되는 게 맞았다. 이달재는 붉어진 얼굴을 어찌 숨기지도 못한 채로 그저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뒤에 남은 이명헌이 급히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느냐고 걱정하는데도, 이달재는 막무가내로 내달려서 냉큼 처소로 들어섰다.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이 움직인 탓에, 문에 기댄 채 잠시 숨을 고르던 이달재는 곧 안에 들어서 침상을 정리하고 있던 송희와 눈을 마주치자 덜컥 호흡을 멈췄다. 잔뜩 굳어버린 주인의 낯으로 무엇을 짐작했는지 모를 얼굴의 송희가 넌지시 산왕 전하께서 바깥에 계시는 모양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젯밤 이달재는 이명헌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정녕 그리되었더라면, 오늘 아침에 만났을 때는 더욱 어색했을 테지.

이달재는 그런 생각으로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이명헌과 눈을 마주쳤다. 기나긴 길을 지나면서 홀로 상념에 빠져있었던 걸 들켰다는 생각에 움찔한 이달재의 낯을 지긋이 바라보던 그는 곧 여상스럽게 말했다.

“거의 다 도착했겠군.”

이명헌의 짐작대로 마차는 곧 멈췄다. 시녀인 송희가 먼저 마차에서 뛰어 내린 뒤에 이명헌이 밖으로 나섰다. 그는 마차 옆에 댄 발판 옆에 서서 가만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달재는 괜히 크게 숨을 고른 뒤에야 그 손을 다시 마주 잡았다. 마차와 시녀인 송희, 호위까지 남겨둔 뒤 단단한 손을 붙잡은 채로 두 사람은 계단을 올랐다. 정전(正殿)에 들어서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관이 큰 소리로 산왕과 산왕비가 당도하였음을 안쪽에 고했다.

낮지 않은 음성이 카랑카랑하게 허공에 퍼져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열렸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은 전각의 크기에 걸맞게 거대했다. 마른 바람이 불어 드는 통에 잠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이달재는 익숙하다는 듯이 먼저 발을 내딛는 이명헌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이달재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였다. 이명헌이 황궁에 들기 전에 고개를 너무 숙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그러했듯, 정전 역시 넓고 거대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널마루를 밟아 걸음을 옮기던 이명헌은 내관이 미리 깔아 놓은 방석 앞에 서서야 겨우 이달재의 손을 놓았다. 그 옆에서 이달재는 이명헌을 따라서 공수한 뒤에 무릎을 꿇고서 연습했던 그대로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당연히 목소리를 낸 것은 이명헌뿐이었다. 이달재는 잠자코 입술을 벙긋거린 뒤에 엎드려 절한 뒤, 고개를 들라는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황제는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당황스러운 탓에 자연스럽게 이명헌에게 옮겨가려는 고개가 제 자리에 머물도록 붙잡고 있는 건 순전히 실낱같은 이성 덕분이었다.

다행히 황제가 무언가 손짓이라도 했는지, 곁에 서 있던 내관이 “그만 일어나시지요.”라고 말을 전한 덕분에 이달재는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편히 앉으세요, 숙부.”

한참을 찬 바닥에 엎드려 있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었다는 듯이, 황제는 너그럽게 말했다. 이명헌이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지만, 옆에 있던 이달재는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하여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이명헌을 쳐다보았는데, 그러자 이명헌은 기민하게 고개를 돌려 손을 뻗어서 손수 이달재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제게 숙모가 되실 분인데, 어찌 먼저 소개해 주지 않으시고요.”

갑작스러운 언급에 몸을 살짝 움츠리자, 이명헌이 소맷자락 아래로 숨어버렸던 이달재의 손을 꼭 잡았다. 단단한 손에 감싸이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호흡을 고르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있으려니, 이명헌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공무가 다망하시니, 신하 된 도리를 아는 제가 어찌 시간을 내어달라 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형님이신 선황과 태후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모를까, 숙부의 혼사를 조카에게 모두 고하여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태여 아무도 모르게 혼사를 치를 필요가 있었을까요.”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목소리는 분명히 여성의 것이었다. 이달재는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이 황후라고 짐작했다. 하기야 이미 황제가 산왕을 숙부로 대하며 가족으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그 곁에 황후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무심결에 끼어들고 말았네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황제의 용서를 구하는 황후의 목소리가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잘못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사실 황제가 추궁하거나 벌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신경 쓸 것 없소. 이건 가족끼리의 대화가 아니오. 황후도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하셔야지.”

황제가 태연하게 대꾸한 뒤에 다시 이명헌에게 물었다.

“세간에서 산왕비께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한다더군요. 산골에서 나고 자란 데다가……. 말씀조차 제대로 못 하신다고요. 사실입니까?”

“웬일로 제대로 된 소식이 도는 모양이지요. 맞습니다. 산왕비는 북산과 능남 사이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앓은 열병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고저 없이 평온하기만 한 목소리로 대꾸하던 이명헌은 가볍게 이달재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산왕비’가 작은 마을 출신이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몸으로 보여준 셈이었다. 그래서 이달재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을 애써 숨기지 않은 채로 살짝 고개를 들어 이명헌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다정한 낯으로 이달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꾹 다물린 입술 사이의 고집스러운 기운도 지금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탓에 그리 도드라져 보이질 않았다. 이달재는 내심 의외라고 생각했다. 입술 사이로 잠깐 흘리는 웃음이 아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을 때 이명헌의 인상이 이렇게나 달라진다니. 이달재가 정신없이 이명헌을 쳐다보는 사이, 머리 위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인연이 닿아 부부로 연을 맺었다고 하시니, 저도 더는 숙부의 혼사에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 대신들이…….”

“대신들이 뭐라 하던가요?”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묻는 이명헌의 목소리가 거슬린 탓인지 황후가 대신 대꾸했다.

“산왕께서 황실의 품위는 안중에도 없이 필부(匹夫)처럼 혼사를 맺은 까닭이 궁금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한데 그것은 대신들이 아닌 병부상서의 궁금증이 아닙니까?”

이명헌이 되묻자, 곧 황후는 입을 다물었다.

“숙부.”

짧은 침묵 끝에 황제가 약간의 책망을 담아서 이명헌을 불렀으나, 이명헌은 그에 아랑곳없이 다시 황후에게 물었다.

“정전에 자주 들지 않으시는 황후께서 어찌 여기까지 걸음 하셨는지, 저야말로 궁금했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됩니다. 병부상서가 입궁하여 출가하신 따님께 여쭙던가요?”

“숙부!”

황제가 결국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명헌은 태연자약하게 시선을 옮기며 대꾸했다.

“폐하. 대신들이 황실의 집안일에 끼어들게 하지 마십시오. 이는 황실의 유일한 어른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산왕께서 궤변을 늘어놓으시니 곤란하군요. 어찌 산왕의 혼사가 일개 집안일일 수가 있습니까?”

병부상서를 언급한 계속된 질문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던 황후가 다시 묻는 말에, 이명헌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혼사가 집안일이 아니라니, 아, 설마 제가 가지고 있는 병부 탓입니까?”

“…….”

정전이 침묵에 잠겼다. 누구 하나 자리에서 숨소리 한 번을 허투루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병부를 이명헌이 가지고 있다니? 이달재는 앉은 채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나, 애써 의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기실 어찌하여 황제가 어린 숙부를 견제한다는 것인지 그동안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자 시절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천하를 손에 넣은 천자가 아닌가. 그러니 황제가 친왕에 머무르는 나이 어린 숙부를 안중에 두어야 할 까닭이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이달재는 이명헌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이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병부라면 황제의 이런 날 선 태도와 적대감에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이명헌은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전군을 움직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때가 오면 병부를 내어드리겠다고요.”

이명헌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무덤덤했다. 그는 마치 책을 읊는 것처럼 무감하게 굴었다. 이미 아주 오래도록 몇 번이나 되풀이한 말을 다시 소리 내어 보는 것처럼. 그러나 황제는 그런 이명헌의 태도조차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내가 즉위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한데 숙부는 오늘도 예전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시는군요. 그날이 정녕 오기는 하는 것입니까?”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옵니다, 폐하께서 마음만 굳게 다잡으신다면.”

아주 쉬운 문제를 풀어내는 것처럼 명쾌하기까지 한 이명헌의 대답에, 호응하듯 이를 가는 소리가 정전에 크게 울렸다. 이달재는 오늘 이렇게 분노한 황제를 마주할 줄은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그저 산왕비로서 인사만 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미처 상상하거나 짐작할 수도 없었을 정도로 황궁의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매서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렇군요. 한데 어찌하여 선황의 유지를 따르지 않으십니까?”

“그때 부황(父皇)께서는 정신이 혼미하시어……!”

“핑계를 대시면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선황이 명하신 건 단지 그뿐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날 선황의 말 한마디로 폐하께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황제의 말을 잘라낸 냉담한 목소리를 끝으로 정전이 고요해졌다. 마치 폭풍처럼 몰아쳤던 기운이 한순간에 흩어져 사라지는 게 살갗으로 느껴졌다. 곧 황제는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실언 했군. 숙부께서는 잊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심려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저와 왕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으니.”

담담하게 말을 마친 이명헌은 황제의 허락이 없었는데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손을 마주 잡고 있었던 덕분에 따라서 몸을 일으키게 된 이달재가 난처한 낯을 하자, 이명헌이 몸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오늘 가족을 소개한다는 말에 부인께서 기대를 많이 하셨는데, 거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합니다. 돌아가면 함께 차분하게 차를 마시는 게 좋겠군요.”

조용히 건네는 말이었지만, 정전이 워낙에 넓고 조용했던 탓에 그의 목소리는 이미 황제와 황후에게 닿아 있었다. 곧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짧은 사과를 한 뒤, 물러날 것을 허락하자 이달재는 이명헌의 손에 의지한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지방을 넘어서며 긴장이 풀린 이달재가 반사적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자, 이명헌이 몸을 더욱 바투 붙이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리 한숨을 내쉬면 사람들이 그대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 앞으로는 조금 더 참아야 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건네는 조언에 이달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이 넓고 차가운 황궁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이명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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