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이 시점쯤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인공들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과거의 일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겠다. 대체 펠릭스 멘델스존과 에투아르 베를리오즈 사이의 엇갈려버린 이 감정과 작전은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작전이 어떤 배경 속에서 나왔는지, 지금껏 너무도 펠릭스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었으니 이제 에투아르 편의 항변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초조하게 머리를 잡아뜯다가 말고 또 침울해져서 거울을 보는, 1830년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고 붉은 머리카락의 소유자인 저 숙녀는 여러분들이 프롤로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속마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에투아르 베를리오즈이다.

펠릭스를 만나기 이전의 에투아르는 날뛰는 한 마리 야생마와도 같았다. 경주마와는 다르게 아무데서나 쉬며 풀을 뜯고 아무데서나 잠들 수도 있으며, 가족들이 하라는 것은 절대 듣지 않고 자신이 좋을 대로만 하는-숙녀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냥 사람이었다. 가슴속에는 눈물도 불꽃도 가득차있는 모순적인 에투아르는 가출을 하며 머리도 잘라 봤고, 남장을 해가면서 파리에서 유명한 음악계 인사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결국 가족들은 에투아르를 포기하고 네 좋을 대로 해라, 라고 하며 음악을 배우게 해 줬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에투아르가 있게 된 것이었다. 음악을 배우게 된 이후 에투아르는 좀 더 책임감이 생겼고, 훨씬 성숙해졌다. 본인이 직접 돈을 벌었으며, 대위법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음악적 방면에서 누구와 논쟁해도 지지 않을 날카로운 세치 혀도 그때 길러졌다.

에투아르에게 가장 처음 찾아왔던 변화는 음악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찾아왔던 큰 변화는 사랑 때문이었다.

에투아르가 펠릭스를 처음 만났던 것은 4년 전의 봄이었고, 당시 펠릭스는 스물이 되고 얼마 지나지도 않은 앳된 소년에 가까운 청년이었으며 에투아르는 딱 결혼하기 좋은 나이의 숙녀였다. 만일 에투아르 베를리오즈가 딱 그날 그 순간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에투아르 베를리오즈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으리라.

5월이었다. 5월 2일이었다. 에투아르는 다양한 인사들에게 소개를 받았고, 마침내 펠릭스 멘델스존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껏 펠릭스의 외양에 대해 제대로 묘사를 한 적이 없으니 에투아르의 생각을 잠시 빌려 적자면, 펠릭스는 눈부실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아주 자세히 보면 갈색인 듯도 싶은 따뜻한 까만 머리카락은 구름처럼 폭신하면서 강물처럼 흘렀고, 짙은 속눈썹은 감겨 있을 때면 우아했으며 떠져 있을 때면 찬란했다. 웃는 입매는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그대로 반영해주었고, 붉은 과일같이 싱그럽게 익은 입술에 입맞추는 상상을 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었다. 발그스름한 뺨과 숨막히는 눈빛, 그 모든 것을 한 군데에 모아놓은 것이 펠릭스 멘델스존이었다. 멘델스존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고, 에투아르도 배운 이래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무릎인사를 그에게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었다.

펠릭스 멘델스존과 단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으면, 그 따뜻한 눈빛이 눈치챌 수도 없을 정도로 서서히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에게 온전히 사로잡혀버리는 것이다. 에투아르 또한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날벌레였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명주실로 자신을 묶어놓은 그 까만 거미는 에투아르를 묶어놓은 채 여유롭게 먹어치울 날을 가늠해보고 있는 듯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그야말로 모든 예의범절 교과서에 예시자료로 실릴 듯한 인물이었다. 종교에 대한 모독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고, 섣부른 헛된 말을 내뱉지도 않았고, 작은 생명조차 소중히 여겼으며 모든 방면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기반도 탄탄했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에투아르는 그날 펠릭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연할 수 있다. 그 어조마저도 기억할 수 있다. 조심스럽고 고급스러운 모든 단어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무려 4년이 지나서 펠릭스 멘델스존은 앳된 티를 벗고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고, 에투아르 베를리오즈는 혼기를 완전히 놓쳐버린 지금까지도 말이다. 그 날은 에투아르에게 인생의 전환점과도 같은 날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사람은 반드시 붙잡아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기에 에투아르는 지금까지 받아온 미묘한 경멸과 무시의 시선을 견뎌낼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에투아르가 늘 그랬듯, 에투아르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보장이 없다는 점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한 펠릭스에게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에투아르에게 이상형을 묻기 한참 전, 에투아르는 이 불안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스스로를 더욱 펠릭스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펠릭스에게 이미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변은 한참 동안 에투아르를 소름끼치게 해버렸다.

-글쎄요, 저는... 제가 성깔이 있다보니 차분한 사람이 좋은 것 같고, 뭐보다 정숙해야겠지요, 그래요, 맞아요. 정숙한 건 필수죠.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군요...

물론 이렇게 말 할 때 펠릭스는 이미 에투아르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본인이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그랬기에 주위에서 자신과 잘 어울릴 것 같다던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읊었을 뿐이었다. 만일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냐' 라고 당시 에투아르가 물었더라면 둘은 몇 년 전에 이미 신혼부부가 되었을지도 몰랐겠으나, 안타깝게도 펠릭스는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알기에는 어렸다.

덕분에 펠릭스가 '에투아르가 내게 이렇게 느꼈으면 좋겠다' 라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효과가 일었다. 그 답을 듣고 에투아르는 너무나도 두려워졌다. 초조함과 불안에서 멈추지 않았다. 비이성적인 수준의 공포였다. 다른 때에는 얼마든지 평상시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펠릭스만 없다면 괜찮았다.

하지만 펠릭스를 보는 순간 에투아르의 심장은 불타는 열정과 싸늘한 긴장감에 늘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고 모든 행동에 금제가 걸려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에투아르가 생각했던 속박이라는 이름의 사랑,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순간부터 에투아르는 제 굳은살로 첫 마디가 움푹 들어간 셋째 손가락도, 기타줄에 다 부르튼 손끝도, 짧게 잘려버린, 흉측한 붉은빛 머리카락도, 너무 말랐던 몸도, 모든 것이 신경쓰이고 의식되기 시작했다. 펠릭스의 앞에서는 식사를 할 때조차 장갑을 벗을 용기를 내기 쉽지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걸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장갑을 벗으려고 하면 벗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은 충분히 위대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가능성을 너무나도 믿었음에도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에투아르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에투아르의 음악만은 여전히 사랑의 검열 아래서 자유로웠지만 에투아르 자신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다.

에투아르는 집착 없는 사랑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제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음악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이상형과는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죄책감 속에서 계속 글을 쓰고 음표를 적어내려갔으며, 음악을 하면서도 사랑에 대한 생각을 끊어낼 줄 몰랐다. 둘 중 한가지를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에투아르는 더 행복했을까, 글쎄 그것은 답해줄 수 없는 일이다. 애초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에투아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조차 없지 않은가.

오늘도 에투아르는 거울을 바라보며 제 모습을 점검했다. 자신이 좀 더 깔끔하고 깨끗한 금발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이 천하절색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이 귀족이었더라면, 자신이 좀 더 우아하게 말을 할 줄 알았더라면, 자신이 조금 더 멍청했더라면,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고민해야 소용없었다. 펠릭스는 파란색을 가장 좋아하니 역시 파란색의 드레스를 입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다. 에투아르는 깔끔하고, 과하지는 않지만, 우아한 느낌만은 가득한 하얗고 푸른 드레스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헤어스타일도 이게 제일 맞을 것이다. 이렇게 한쪽으로 넘겨둔 게 펠릭스 멘델스존의 생일이라는 중요하되 호화롭지는 않은 행사에 딱 어울렸다.

에투아르는 제 미간에 주름이 진 것을 보고 다시 억지로 얼굴을 폈다. 중요한 날이었는데 이리 못나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에투아르는 싱긋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니다, 어색했다-

에투아르는 펠릭스를 떠올려본다. 초대에 응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순수하게 기뻐하다가, 에투아르를 찾고는 수줍게 기뻐하며, 에투아르와 비쥬를-아니지, 악수일 것이다-나누고, 가족이 없어서 아쉽다고 한마디 한 뒤 다시 평상시처럼 명랑해지고 생일은 본인인 주제에 본인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줄 그런 미소를 지어줄 것이다!

에투아르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미소가 에투아르의 얼굴에 가득차 있었다.

클래식 작곡가 RPF/RPS 연성을 합니다. 간혹 작곡가 관련 개인적 사담+ 작곡가 편지 자료+ 작곡가 TMI 자료 등등을 올립니다!

타피 클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