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인 글자는 영어입니다. 


<리차드클레이더만- Mariage d'Amour >



위잉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푸딩처럼 말랑하고 탱글탱글한 피부로 바늘이 파고든다. 피부의 주인이 고개를 비틀었다. 살짝만 뒤틀었을 뿐인데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블랙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 탱글탱글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텐션을 줘 바짝 당긴다. 커다란 가슴이 바늘이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걸 막기 위함이다. 풍만한 가슴을 쥐고서도 까만 눈동자는 단 한 톨의 흑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동자를 덮은 눈꺼풀이 선을 이어나갈 때마다 파르르 떨린다. 진중한 표정은 그녀의 몸을, 피부를, 도화지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았다.

보라색 선을 따라 검은색의 잉크가 새겨졌다. 삼각형은 총 세 개. 이것이 무슨 그림이 될까 해괴하기 그지없지만, 스윽 - 닦아내면 신기하리만치 예쁜 여우 하나가 남겨진다. 아직 음영이 들어가지 않은 러프일 뿐임에도 머신을 든 남자의 표정은 퍽 마음에 드는 표정이다. 이제 여기에 붉은 색채와 음영을 넣으면, 메리가 원했던 블레즈 갱단의 심볼이 완성된다. 메리가 원하는 색상을 찾기 위해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하고 아플 정도였다.


"너 요즘 작고 귀여운 애 달고 다닌다며."


고통을 참아내며 잘게 신음을 뱉어내던 여자가 제 가슴만 뚫어져라 보는 정국을 보며 말했다. 스윽- 흘러내린 잉크를 닦으며 정국은 무심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막 그를 떠올리던 참이었다. 메리의 정부에게 블레즈의 심볼을 심으면서, 6개월 전, 발목에 제 형의 이름을 각인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 여인은 지금 이걸 원해서 새기는 건지, 아니면 그처럼 억지로 새기는 건지. 


"좋아요? 이제 완전한 블레즈 갱단의 여인이 됐어요."

"왜 딴 소리야. 내 말은 들었어?"


어이 없어 하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외면하며 정국이 액상을 주입했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살갗으로 잉크가 스며든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어떻게 알긴 메리가 말해줘서 알았지."


스윽스윽, 붉은 색채를 덧입히던 머신의 움직임이 멈췄다. 가슴에 집중했던 무심한 눈빛과 다르게 제법 살기 띤 표정이 여인의 구미를 자극했다. 언제나 능글거리며 웃거나, 무심한 표정을 일관했던 정국에게서 보기 힘든 제법 생경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오호라. 그냥 떠본 건데 정말인가 보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미소를 지으며 살짝 몸을 틀어 완전히 정국과 마주 보는 자세를 취했다.


"진짠가보네. 표정 재밌어."

"메리가 왜 걔를 관심있어 해요?"

"걔가 아니라 너지. 메리가 생각보다 더 널 예뻐한다고."


몇 번이나 갱단에게서 입단 요구를 받았다. 블레즈의 보스인 메리에게서 직접 들은 적도 있었다. 물론 반농담식의 장난이라 정국도 구렁이처럼 잘도 넘어갔다. 

히스패닉계열의 메리는 별칭과 달리 덩치가 엄청 크고 무서운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그 얼굴을 보면 '아니요.'  '싫습니다.'라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을 텐데 정국은 그 험상궂은 낯짝 앞에서도 빙글빙글 웃으며 잘도 거절했다. 뻔뻔한 건지 담력이 높은 건지, 어쨌든 정국은 그들의 소속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딱히 사회에 불온한 생각을 가진 적도, 마약에 손을 댄 적도 없다. 


"저는 관심 없습니다."

"알아. 그냥 예뻐한다는 거지. 덕분에 걔도 예뻐하고."

"사양한다고 전해주세요."

"까불어. 너 우리 덕분에 여기서 편히 장사하는 거 몰라?"

"알죠. 암요. 그래서 신경써드리고 있잖아요."


딱딱하게 말하면서도 정국의 입가와 눈가에 미소는 지워지질 않았다. 단호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는 그들이 적정선 이상 다가올 수 없도록 하는 정국의 재주이기도 했다.

다 됐어요. 볼래요? 대화하는 내도록 일부러 그녀가 저에게 집중할 수 없게 빠른 손놀림을 자랑한 탓에, 생각보다 10분 더 일찍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부드러운 헝겊으로 잉크와 진물을 쓸어내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붉은 색감의 여우가 그녀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

"완벽하죠."

"그러게, 메리가 좋아하겠다."


벗었던 셔츠를 걸치며 여인이 침대에서 걸터앉았다. 정국이 담뱃갑을 열어 그녀에게 내어주자 다리를 꼰 여인이 고개만 내밀어 그가 내민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두 사람 사이에서 작게 빛났다. 하얀 연기를 가르며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일어나며 정국이 입고 있던 앞치마를 풀었다.


"넌 안해?"

"끊었어요."


켈룩. 담백하게 뱉어내는 말에 그녀가 기침을 했다. 연기가 팍- 하고 퍼지고 사이로 찌푸린 미간의 여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에 한 갑은 기본, 곱절은 더 필 때도 있었던 그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왜?"

"그냥."


어질러진 트레이를 정리하며 정국이 피실피실 웃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작고 귀여운 남자가 떠올랐다.


"그 꼬마 때문이지?"

"뭐가?"

"또 능구렁이처럼 넘어가. 재수없게."


정국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어지러진 물건을 정리하며 등을 보인 채다. 어쩐지 여인은 오랜만에 본 그가 매우 달라졌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톡톡. 그가 만들어준 재떨이에 재를 털며 여인의 눈빛이 따스하게 번졌다.


"정국."


왜건을 스윽 잡아당기는 정국의 팔로 커다란 뱀 꼬리가 보였다. 슬쩍 그녀를 향해 시선을 건네자 아직 단추를 여미지 않아 커다란 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고개를 들며 웃었다.


"아까 물었지. 블레즈 갱단의 여인이 되어서 행복하냐고."

"........"

"행복해. 내가 선택한 거라서."

"....."

"그의 정부라도 좋으니까 나는."


왜건을 잡아당겨 제 옆으로 놓았던 정국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올라갔다. 저 선택이 자의인지 세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더욱이 관심 또한 없다. 그녀는 저가 아니고, 또 그가 아니기에. 굳이 또 누군가를 구해줄 생각 따위도 생기지 않았다.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자, 그럼 말해봐. 너도."


코끝으로 강한 담배냄새가 들어왔다. 금연을 한 지 3개월이 지나고 있어 정국은 머리가 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들을 위해 항상 담배를 소지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보면서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제법 고난의 행군이었다. 맛깔스럽게 뻐끔거리는 입술을 바라보고 정국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너는 어때. 
행복해?"



구속

정국X지민X이안

W.코이






지금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지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행복하다고. 


"과도하게 연습하는 건 안되지만 조금씩 시작하셔도 될 것 같네요."


재활 치료를 위해 침대에 누워 있는 지민의 머리맡으로 제법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누워 푸른 잎이 흔들리는 창밖을 바라보던 지민의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 깃들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형광등 불빛을 등진 의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고, 이젠 주기적으로 오는건 안하셔도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벌써 LA에 온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쉽게 말해 그의 새장에서 탈출한 지 6개월이 지났다는 소리다. 새장을 떠나 위태롭게 걸어 다녔던 새에게 이젠 조금씩 날갯짓을 해도 된다 명하고 있다.

푸른 잎사귀. 그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지민이 웃었다.


"진짜 너무 감사합니다."


하늘에 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한국어로 중얼거려, 의사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잘게 떠는 속눈썹이, 환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는 느낄 수가 있었다.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실낱같은 희망이 얼마나 값진지 안다. 좁고 작은 세상에 갇혀 날지 못하던 새는, 이제야 드디어 이 자유가 얼마나 다디단지 깨우칠 수 있었다.


해링스시립병원은 LA에서도 제일 큰 시립병원이었다. LA에 온 지 한 달 뒤부터 지민은 이곳에서 재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국의 제안이었다. 며칠을 망설이면서 뜸을 들이더니 제법 진지하게 물어왔다. 남처럼 무뚝뚝하고 거리감이 물씬 느껴지는 남자의 제안을 지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다. 뻔뻔하다고? 아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였다.

그가 아무리 갱단의 예쁨을 받고, 유명한 타투이스트라 할지라도 그 작은 샵에서 번 수익으로 저를 이곳에서 재활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 재활은 100% 이안의 도움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승낙한 거였다. 절대로 저에게 다시 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던 그가, 막상 새장에서 도망치니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 거다. 물론, 그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인내가 바닥나 버릴 거라는 것도.


"어쩐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민은 당장 이 자유를 깨고 싶은 생각 따위 없었다. 펼쳐진 드넓은 초원에서 마음껏 뛰어놀아 두 다리가 부서진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일찍 마쳐서.
타요."


저 눈앞에 블랙 SUV 차량에 기대어 싱그럽게 웃고 있는 남자와의 동거를 그만두고 싶지가 않았다.

느릿하게 걷던 걸음이 서서히 빨라졌다. 입꼬리에 가벼운 웃음도 매단 채다. 푸른 잎의 싱그러움처럼 편편하게 펴진 입술이 단 냄새를 풍겼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서자 차량의 문이 열리며, 시원하게 웃던 정국이 지민의 머리카락을 푸슬푸슬 헝클였다.

지민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좀 더 크게 호를 그렸다. 분명 저보다 한 살 더 어리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그에게 동생 취급을 받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량으로 앉은 지민이 올려다보자, 쾅- 차 문을 닫고서 정국이 멀어졌다. 보닛을 빙글 돌아 걷는 그의 모습을 지민은 알알이 시선에 박았다. 샛노란 머리카락이 봄 햇살에 화려하게 타올랐다. 대충 입은 듯하지만 제법 값비싸 보이는 가죽 재킷. 그 안에 입은 얇은 티셔츠까지. 자유라는 게 덕지덕지 묻어나는 전정국을, 어느덧 지민은 동경하고 있었다. 

차에 오른 정국이 제 안전벨트를 메다 말고 멍하니 바라보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서 허리를 펴 지민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지민이 움찔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얼굴 가까이로 다가온 팔이 지민의 귀 옆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하도 곱게 길들여져서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챙겨줘야 하는 게 이젠 익숙해졌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의 짧은 거리에서 수 초간 교차하는 눈동자가 떨렸다.


"어땠어요. 오늘은?"


숨을 참아 빨개진 얼굴의 지민의 눈동자가 묘하게 서운함으로 맴돌았다. 조금만 다가오면 입술을 스칠 정도의 거리에서 정국은 힘없이 지민의 머리카락만 스치고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질문에 대답도 않고 안전벨트를 문질거리며 지민이 속으로 스스로를 힐난했다.

미친 것도 정도껏이지. 저를 가두었던 남자의 동생에게 흑심까지 품는다고? 제대로 된 정신이 박혀있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더군다나 저 남자는.


"왜 계속 말을 안 해."


나한테 관심조차 없는데.


"이제 괜찮대요. 다시 춤춰도 된대."

"그래?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담백하게 웃으며 끄덕인 남자가 부드럽게 엑셀을 밟았다. 후우- 지민이 깊게 숨을 뱉어내며 순간 긴장했던 몸을 풀었다. 창밖을 본다. 을씨년스러웠던 그곳의 풍경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완전한 봄이었다.



걱정이 앞섰던 LA의 생활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돌아갔다. 더 이상 제 뒤를 밟는 사람도 없었고, 이안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도, 지인도 없는 그 커다란 LA 땅덩어리에서 지민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그가 전부였다. 구해주었지만 그 뒤는 스스로 해결하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걱정과 달리 그는 망설이는 지민의 어조에 담백하게 화답하며 작은 방 한쪽을 내어주었다.


'자립할 때까지만.'

'그래. 자립할 때까지만.'

'......'

'나도 공짜로 베풀고 그러는 건 잘 안 해요.'

'.......'

'근데 왜 이렇게 그쪽한테만 풀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럼, 이제 자립할 수 있겠어요?"


창밖을 바라보며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날을 떠올렸던 지민이 들려오는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어놓은 창 탓에, 샛노랗게 탈색된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몇 초간의 생각 끝에 지민의 눈썹이 팔자로 내려갔다. 이제 괜찮다고 말하자마자 저렇게 매몰차게 정을 떼려고 한다. 나쁜 새끼. 서운함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너는 같이 지낸 정도 없냐..


"...알았어요. 방 알아볼게요."

"돈은 있어요?"

"......."

"없으면서."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 남자의 얼굴에는 가벼움이 잔뜩 묻어났다. 농담인 건지 진심인 건지 알 수 없어서 지민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벌써 함께 지낸 지 6개월이 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알 수가 없었다. 이안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먹을 거 좀 사가죠."


낡은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 차를 세운 정국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지민도 창밖을 보며 벨트를 풀었다. 차 문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그의 뒤를 종종 뒤따랐다. 식당이 즐비한 골목에서 정국은 망설이지도 않고 포장이 가능한 아시안푸드를 선택했다. 지민에게 무엇을 먹을 건지 묻는 배려조차 없었다. 이젠 그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서 지민 역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자 아무 자리에나 앉으려는데 정국이 지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마트 좀 가자."

"응? 며칠 전에 갔잖아요."

"와인 좀 사게. 먹고 싶어서."


갑자기 웬 와인이래. 진짜 송별 파티야 뭐야. 눈을 도로록 움직인 지민이 못이기는 척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한 음식이 있기에 다른 건 둘러보지도 않고 정국은 곧장 주류 코너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쭈욱 와인을 훑다가 마음에 드는 두 개를 잡고서 지민을 향해 양손을 살짝 흔들었다.


"화이트랑 레드중에 뭐가 더 좋아요?"

"레드."

"그럼 레드로."


두 가지 모두 이곳에서 먹어본 와인이었다. 화이트는 좀 톡 쏘는 탄산과 달달함이 강했고, 레드는 그것보다는 좀 더 떫었다. 생긴 건 아메리카노나 도수 높은 보드카를 마시게 생겼는데, 그는 어느 정도 단맛이 있는 주류를 선호했다. 이것도 알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였다. 이럴 때 보면 완전 애였다.

과일이 진열된 길을 쭈욱 걷다가 지민은 문득 과일이 먹고 싶어졌다. 오렌지가 참으로 크고 예쁘게 생겼다. 대답 없이 꽉 잡은 손에 힘을 줘 정국을 잡아당기자, 정국이 가만히 서서 지민을 기다려주었다. 그중 제일 크고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몇 개 고르고 지민이 웃었다. 

정국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에 지민이 오래도록 머물렀으나, 지민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의 아주 찰나였다. 

금세 서둘러 몸을 돌리고서 앞장서 걸었다. 제일 줄이 짧은 계산대 앞에서 한 사람은 와인을, 한 사람은 오렌지를 들고서 기다렸다. 순서가 오자 정국이 빠르게 계산을 하고 지민의 손을 잡아끌었다.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지민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걷다 문득 캐셔의 뒤편에 자리한 담배 진열장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내 입술이 동그랗게 벌려졌다. 와 그러게. 생각해보니까.


"담배 끊었어요?"


그에게서 느껴졌던 미미한 담배 냄새가 언젠가부터 느껴지지 않았다. 정국이 문을 열다 말고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입을 벌렸다.


"참 일찍도 알아차린다. 끊은 지가 언젠데."

"왜요?"


갑자기? 동그랗게 눈을 떠 묻는 얼굴을 보며 정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민은 당연히 저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트의 문을 열고 빠져나가는 두 사람이 아까 주문해두었던 음식을 찾기 위해 서둘러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나란히 잡은 채 놓지 않았다. 간혹 종알거리며 말을 건네는 건 지민이었고 정국은 들어주는 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주변을 기민하게 둘러보지 않았다. 그래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두 사람을 줄기차게 지켜보던 차 한 대가 있다는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셔올까요?"


차내의 어둠에 푸욱 파묻혀 있던 얼굴이 서늘한 낯빛으로 보였다. 해링스시립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따라붙었던 차내로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것보다 더 이상으로 분노가 들끓었다. 인내하고 참고 지낸 지가 벌써 6개월이 넘어서고 있었다. 

끝내는 돌아올 수밖에 없으면서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지민아. 


"어차피 곧 볼 건데 괜찮아요. 가죠. 시간 없을 텐데."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쁜 스케줄에 겨우 틈을 내어 따라다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 좇같았다.

스르륵 창문이 내려지고, 메케한 담배 연기를 내보낸다. 열린 창을 바라보며 이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냥 아예 부러트렸어야 했지.

그의 다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튼튼해서 무척이나 유감이었다.




**




오렌지가 매우 시고 달았다. 입안으로 콱 터지는 과즙에 지민이 눈과 볼을 설풋 찡그렸다. 볼 안쪽이 따끔해질 정도의 산미에 침샘이 절로 솟았다. 향이 세다고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맛이 좋았다.


"냄새가 진동을 하네."


달그락거리며 주방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던 정국이 트레이에 가득 먹을 걸 챙겨왔다. 함께 밥을 먹고 간단히 디저트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지민은 이 시간이 제일 좋았다. 딱히 뚜렷한 대화 주제도, 서로를 향한 진득한 시선도 없었고, 여전히 미묘한 벽이 존재했지만 그래도 이 시간이 되면 서로는 썩 괜찮은 룸메이트 같았다.


"포크 놔뒀는데 손으로 먹었어요?"

"굳이 과일인데 포크 써야 해요?"


기분이 좋은지 제법 말대꾸도 잘하는 지민은 확실히 그곳에 있었던 것에 비하면 밝아져 있었다. 생동감이 넘치고 건강해 보였다.


"뭐 그건 아니지.

자, 받아요."


정국이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바디워시 향이 지민의 코끝을 자극했다. 입 안 가득 과즙이 흘러넘치는데도 어쩐지 그의 향기가 더 독하게 맴돌았다. 건네주는 와인잔의 스템 사이로 서로의 손끝이 닿았다. 찰나의 떨림은 지민 쪽이었고, 정국은 서둘러 손을 피해 차가운 와인을 쥐었다. 펑. 하는 소리가 지민의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나 진짜 왜 이래. 미쳤나 봐.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잘라둔 오렌지를 하나 더 입안으로 넣었다. 톡- 하고 또다시 시큼하고 달달한 과즙이 터진다.


"완쾌 기념."

"진짜 송별회 같네."

"축하파티로 해도 좋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지민의 잔에 제 잔을 툭 부딪친 정국을 보며 지민이 과즙이 그득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피처럼 진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렌지의 시큼함과 레드와인의 떫은맛이 복잡하게 입속을 맴돌았다.


"술 잘하네."

"원래도 못 하진 않았어요."

"더할래요?"

"네."


보울 안에 든 와인을 단숨에 들이킨 지민을 보며 정국이 재밌다는 듯 큭큭 웃었다. 눈빛도 제법 다정하게 빛났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지민은 연거푸 그가 따라주는 술을 들이켜고 오렌지를 먹기를 반복하기만 할뿐이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카나페도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과일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가보다. 손대지 않은 카나페가 아쉬운 듯 입속으로 넣으며 정국의 시선이 진득하게 지민에게 향했다.

대화는 없었다. 그저 향긋한 오렌지 향만 가득한 거실이었다. 정국이 LA와 처음으로 형의 도움 없이 자립한 곳이었다. 물론 모든 곳이 그의 손안이었고 그가 이곳을 모를 리 없었지만 어쩐지 그는 더 이상 지민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먹이의 숨통을 끓기 직전 관찰하는 짐승과도 같았다. 

풀숲에 숨은 짐승의 형형한 눈빛이 보이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연락이 왔다. 불현듯 연락 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고 싶다고 했고, 이따금씩 지민의 사진을 받길 원했다. 개새끼를 맡겨놓은 주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정국은 도무지 형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취한 것 같네."

"아닌데?"


형을 생각하느라 잠시 넋을 놓았던 사이, 지민은 혼자서 잘도 들이켰다. 물처럼 꼴깍꼴깍 마시더니 결국 혼자서 반병을 해치운 뒤였다. 정국은 좀 의외였다. 아무리 별일이 없이 평탄한 시간 속에 있다고 해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지민이었다. 언제고 도망쳐 달릴 수 있도록, 항상 발목을 마사지하기도 했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있다가도 이따금 예민해지고 두려워하길 반복했다. 이유 없는 방문, 벨 소리. 낯선 발자국 소리만 나면 벌떡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늘따라 제법 풀어져 술을 반병이나 들이키니, 참.... 다시 춤을 출 수 있는 게 그렇게 좋은 건가 싶은 거다.

가벼이 풀어져 소파에 등을 푹 기대고 있는 지민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턱을 괴고서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슬거리며 잔잔한 일렁임을 만든다.

길게 쭉 뻗는 눈. 솜 가닥처럼 가느다란 속눈썹 같은 것들이 언젠가부터 뇌리에 깊게 박혀, 함께 있지 않은 순간에도 떠오르는 날이 많아졌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올 때마다 살며시 찌푸려지던 미간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멍하니 초점이 없는 가느다란 눈동자가 도르륵 굴려져 이내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침과 동시에 정국이 쓰게 웃었다. 시선을 돌리고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킨다. 카나페가 아닌 그가 먹었던 오렌지의 마지막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산미에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저기요."

"네."


소파에 기댄 고개를 살짝 기울여 마주치며 지민이 입꼬리를 느릿하게 올렸다. 만취는 아니었으나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살짝 상기된 두 볼이 동그랗게 예쁜 원을 만들었다. 신맛에 미간을 찌푸리고서 정국은 와인잔을 들어 뱅글뱅글 돌렸다. 더 이상 지민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은 채.


"그쪽은 내가 아무렇지도 않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정국은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지민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단아한 옆얼굴이 아찔한 콧선을 자랑하며 지민의 시야를 유린한다. 화려한 차림새만 뺀다면 완벽하게 전이안과 똑같았다. 물론, 그가 절대 전이안이 될 수 없을 거고, 되어서도 안 되는 거겠지만.


"진짜 닮았는데."


뱅글뱅글 돌아가던 와인잔이 커다란 파도를 만들며 출렁거렸다. 와인잔의 끝만 바라보던 정국의 시선이 지민에게로 닿았다. 두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앉아 시선이 알 수 없는 모양으로 교차된다. 흐음. 씁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이상하게 외로워 보였다.


"그쪽은 너무 덤덤하게 날 보니까 이상해."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헷갈렸다. 형을 그리워하는 건지, 아니면 속박당해왔던 시간을 그리워하는 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목소리는 정국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둘 중에 무엇이라도 화가 날 것만 같았다. 기껏 풀어줬더니 구석 앉아 이제껏 갇혀 있었던 새장을 보고 그리워하는 꼴이지 않은가. 다리를 꼬고서 정국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왜, 그럼 내가 어떻게 봐야 하지?"


술기운에 젖은 눈동자는 느릿하게 꿈뻑이기만 할 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친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러가는 소리가 날 정도로 흔들릴 뿐이다. 정국이 쓰게 웃으며 남아 있는 와인을 쭈욱 들이켰다. 입술에 맺힌 술의 마지막 방울까지 핥고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지민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내가 당신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

"혹시 나 좋아해요? 형이랑 닮아서?"


커다랗게 출렁거리는 갈색 눈동자는 말이 없다. 그저 오렌지와 와인에 젖은 입술을 말아 넣으며 시선을 피해버린다. 정국은 괜히 오기가 생겼다. 심통이 난 어린아이처럼 모가 났다. 소파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기대고서 오만하게 그를 내려다본다. 살짝 숙인 정수리가 이내 잔뜩 음울 속을 파고들었다. 병신처럼. 아직도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아니면,"

"........"

"그 집에서 속박당하고 구속당했던 삶이 그리운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진짜 나쁘다. 그가 말하는 것들 중에 거의 반은 다 틀렸다. 지민이 원망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겨우 이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가 전부인데, 이렇게 매몰차게 대할 때면 거침없이 외로워지고 서러워졌다. 술을 마셨더니 감정이 널을 뛰며 주체가 안 됐다.

대답하지 않고 기다란 눈을 접어 흘겼다. 정국은 그 모습을 매우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노란 조명에 번뜩이며 빛이 났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얼굴에 잔뜩 장난기가 묻어난다.


"묻잖아."

"가끔 이럴 때 존나 재수 없어."

"흠. 그것도 아니면..."


분위기 다 깨지고, 흥도 다 깨졌다. 역시나 저 남자는 나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게 맞다. 전이안과 닮기는 개뿔. 1도 닮지 않았다. 재수 없는 노란 머리통을 노려보다가 지민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더 이상 그와 함께 술을 먹고 싶지 않았음의 표출이었다.


"어디 가요. 아직 대화 안 끝났잖아."


하지만 마음대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순간 확 잡아끄는 손길에 지민이 크게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술기운에 휘청거림이 더욱 더 심해졌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움직이던 몸이 그대로 정국에게로 쏟아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자세가 된 지민이 당황해 엉덩이를 들려 하자 정국이 그대로 지민의 허리를 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혹시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허벅지 사이 정국의 단단하고 좁은 허리가 가득 들어왔다. 바짝 붙어 코끝이 부딪칠 정도까지 가까운 거리가 됐다. 숨을 쉬면 그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라 지민은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살짝 벌어진 정국의 입술에서 알싸한 와인의 향과 달큰한 오렌지 향이 동시에 밀려왔다. 또다시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까만 눈동자. 그것과 대비되는 노란 머리카락. 살짝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이 반으로 휘어지며 웃어 지민은 그만 까무룩 취해버렸다.


"좋아하는 거...."


커다란 악어가 입을 벌린 늪에서 나를 구원해준 구원자.


"좋아하는 거 같아요. 당신."


이 커다란 도시에서 외롭지 않게 해준 유일한 사람.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사람이었지만 지민은 어느새 그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올려다보는 정국의 얼굴을 바라본다. 눈동자가 한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위태롭게 떨렸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갈등하듯 일렁거리더니 단단해 보이는 턱을 잡고서 그의 벌어진 입술에 입 맞췄다. 짧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에서 떫은 와인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그 입술을 받아주는 정국을 내려다보며 지민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담배 왜 끊었어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정국의 아랫배를 간지럽혔다. 턱을 스치는 손을 붙잡으며 정국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네가 싫어하니까."


작은 머리통을 붙잡은 정국의 손등으로 핏줄이 솟구쳤다. 맞부딪힌 입술에서 과즙이 터지듯 신음이 터져흘렀다. 그대로 지민의 엉덩이를 받치고서 번쩍 안아 든다. 지민의 두 다리가 정국의 허벅지를 똬리를 틀 듯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입술에서 거친 숨이 뱉어진다.


'너는 어때.
행복해?'


잔뜩 흥미로운 눈빛을 건네는 메리의 정부를 바라보며 정국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행복은 이르고,
사는 게 재밌네요. 요즘엔.'


쾅 하며 열린 문 사이로 두 사람의 웃음이 터졌다. 

살얼음판이 깨어지기 직전, 가장 찬란한 빛이 얼음 위로 쏟아졌다. 



-------------------

익명에스크: https://asked.kr/koi5813

코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