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아무 전력 60분 참여했습니다. 주제는 '시작과 마무리' 입니다.

- 아카이 슈이치 X 후루야 레이

- 조직은 아직 괴멸되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합동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 후루야가 히로미츠에게 기울이는 감정은 사랑이 아닙니다. (히로레이 X)

- 퇴고를 거치지 않은 글입니다.


 

 

 

 

 

 

시작은, 쓴맛이었다. 그래서 마지막도 쓴맛이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후루야는 조직에 말단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조직원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앳된 얼굴과 어리숙한 색기의 조합이 하루하루를 쾌락으로 먹고 사는 이들의 관심을 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은 운석처럼 나타나 공기처럼 스며든 스물넷의 소년을 두고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녀석은 조만간 코드네임을 받아서 그 라이나, 진이랑 같이 작업을 하게 되겠지. 엇, 그러면 미래의 간부님께 벌써부터 잘 보여야 하나? 하하. 이봐, 너 이름이 뭐랬지? 아무튼 우리 잊어버리면 안 돼.

술과 담배, 약에 취해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주제에 그들은 잘도 떠들어 댔다. 역겨운 냄새가 후루야의 코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버러지 같은 범죄자 새끼들…. 말단의 상태부터가 이랬으므로 더 안쪽으로 파고든다면 어떨지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이보다 더 역한 냄새가 나겠지. 후루야는 길을 지나가다가도 그들이 종종 언급했던 이름의 술이 보이면 이맛살을 찌푸렸다. 후드를 깊게 쓰지 않았으면 누군가가 별안간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라이….”

 

이제는 버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많아진 후루야가 작게 중얼거렸다. 조직으로부터 지급 받은 낡은 휴대전화 메시지에는 앞으로 종종 라이Rye와 작업하는 일이 많아질 테니 친하게 지내라는 내용이 있었다. 버러지들이 종종 얘기했던 이름이었다.

골목으로 들어오기 전 후드를 더 깊게 고쳐 썼더니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있어도 시야의 절반 이상이 옷에 가려졌다. 그래도 버번은 후드를 벗을 생각을 하지 않고 요령 좋게 널브러져 있는 술병 같은 장애물 위를 폴짝 뛰어넘으며 걸었다.

 

“Bourbon?”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실은 아직도 낯설기 그지없는 호칭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겨우 스며드는 골목에서 술병은 잘도 피했으면서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게 버번의 자존심과 연결된 심기를 건드렸다.

버번이 주먹을 꽉 말아 손바닥에 손톱을 박고 있는데, 남자가 자신의 머리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움직임이 들렸다. 불이 붙는 소리, 한 순간 옅게 밝아진 시야, 그리고 쓴…. 아주 쓴 냄새.

그때, 남자가 버번의 후드를 잡아채 뒤로 넘겼다. 순식간에 옅은 금색 머리카락과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 애새끼군.”

 

남자가 담배 연기를 뱉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뒷머리를 잡혀 어쩔 수 없이 위로 치켜든 고개 때문에 목이 뻐근해졌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열이 오르는데,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건 남자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자신의 얼굴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것이었다.

쓰다. 그리고 흐리다. 그게 버번이 라이에 대해 가진 첫인상이었다.

 



 

  Tell me that you love me, anyway

w. 비에

 

 

 


모로후시 히로미츠라는 사내는 후루야에게 있어선 빛 같은 존재이자, 일종의 지표였다. 그의 이름에 빛光이 들어가 있는 건 분명 그래서일 것이라고, 후루야는 그런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종종 후루야를 가리키며 ‘너 정말 멋있다, 제로.’라고 말해주었지만 후루야의 눈엔 그가 훨씬 더 멋있어 보였다.

나의 빛. 나의 영웅. 나의, 친구. 죽어버린 친구.

사실 후루야가 4년 전 한 건물의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제대로 마주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달빛 아래에 고요하게 쓰러진 친구를 눈에 담았을 때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정작 제대로 마주한 건 최근이었다.

총성이 금방 멎지 않고 진동하듯 울렸고 장발의 남자는 손에 권총을 하나 들고 있었다. 스카치는 쓰러진 채로 심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후루야의 눈과 귀에 닿는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가능성을 가리켰다.

라이가, 스카치를, 죽였다.

하지만 후루야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손에 쥐기 위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가 타인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자결을 택했음을 알았다. 그게 사실이었고 곧 진실이었다.

왜 당신쯤 되는 남자가 죽게 내버려 뒀어? 왜 구해주지 못했어?

그럼에도 결국 라이가 스카치를 죽였다는 최초의 가능성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못한 채, 후루야는 라이에게, 아카이 슈이치에게 4년 동안 증오를 쏟아냈다.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시간은 때때로 감정의 결을 비틀었다. 후루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의 합동 수사가 전개된 후 그는 아카이와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후루야에게 죽어버린 이름을, 이름들을 가져다주었다.

라이. 스카치. 버번. 스카치. 버번. 버번. 스카치. 스카치. 라이. 라이. 라이. 버번. 라이.

공통된 경험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관계를 구축하는 데 속력을 더했다. 엘리트라고 불리는 수사관들이 헤매는 작전 내용을 둘만 단박에 이해하거나, 부연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없는 것들을 늘어놓을 때면 후루야는 이 세상에 자신과 아카이 둘만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화가 나야 마땅한데 화가 나지 않았다. FBI 수사관들이 유머랍시고 자신과 아카이를 묶어 파트너로 칭할 때도 분노는커녕 그것과 엇비슷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에게 증오를 쏟아냈던 4년의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요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긴장이 풀린 탓이라 여겼다. 문제를 직시했다면 해결 방법도 금방 떠오르므로, 후루야는 모로후시가 자결했던 옥상을 찾았다. 그때의 기억을 되돌리면 감정도 함께 되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옥상에 직접 올라가 보는 건 4년 만이었다. 그동안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는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듣기 싫은 쇳소리가 서로 마찰했다.

그때는 삐거덕거리는 쇳소리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냥 계단을 오르는 소리만 좀 크게 났을….

거기까지였다.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동시에 계단을 오르던 다리도 멈춰 후루야는 건물 중간층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발, 소리, 발소리? 발걸음 소리. 발소리. 발소리. 발소리!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계단을 올랐다. 옥상에 도착해서는 속력을 줄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있어야 할 핏자국 위로 새까맣게 탄 자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시신을 태운 흔적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탄내가 나는 것 같았다.

후루야는 한쪽 무릎을 굽혀 손으로 새까만 흔적을 더듬었다. 까칠까칠한 시멘트 감촉이 손톱 밑까지 들어와 따가웠다. 흔적이 끊어진 곳에 도달하고서야 그는 시멘트벽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아카이 슈이치의 이름을 찾았다.

 

[도와주세요.]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와 함께 보낸 건 자신의 GPS 위치였다. 그는 옥상 입구 쪽을 향해 돌며 아카이를 기다렸다.

마침 근처에 있었는지 아니면 최고속력으로 달려왔는지, 아카이는 후루야가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계단을 올랐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으므로.

후루야는 소리가 선명해지는 속도에 맞춰 그 날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반복한 기억이었지만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번 떠올릴 때마다 낯설어서 꿈이고, 거짓말 같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낯설었다. 낯설어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은 라이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배신. 신뢰를 져버리는 일을 가리켜 사람들은 배신이라고 말한다.

후루야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엄지와 검지만 펴서 손을 총 모양으로 만들었다. 깜찍한 총이 후루야의 왼쪽 가슴을 향한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곧 아카이가 들이닥칠 거라는 예고였다.

 

“후루야 군!”

 

아카이의 발이 옥상 입구에 닿은 순간과 동시에 후루야가 입으로 ‘빵!’ 하고 총성을 흉내 냈다. 당황한 기색의 아카이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후루야의 주변을 차례대로, 하지만 빠르게 훑었다.

 

“당신도, 지금 배신당한 느낌입니까?”

 

4년 전 그날부터 후루야는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을 제대로 마주한 건 최근 들어서였다.

자신은 그때 라이를 믿고 있었다.

 

 



 



고요는 사람을 무의식의 저편으로 침잠시킨다. 후루야는 정적이 주는 공포감을 아주 잘 알았다. 그건 시야가 차단당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으로, 사람의 신경을 곤두세워 예민한 상태로 만든다. 고요가 평온과 닿아있다는 건 크고 흔한 착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새벽에 움직이는 일을 한다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고요는 평온이 아니라 새벽에 닿아있었고 그런 새벽에는 어김없이 쓸데없는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자책, 후회, 불안, 우울, 그리고 다시 자책과 후회.

분명 자신을 갉아먹는 감정뿐이었지만 후루야는 한 번도 침잠되지 않으리라 애쓴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라도 자해하는 것만이 속죄의 길인 것 같았다.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고 똑같이 지켜주지 못한 남자를 사랑해버린 것에 대한 죄를 영원히 품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한때는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었다. 모로후시를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행복할 자격이나 있을까. 그래서 후루야는 불행을 전문적으로 생산해내는 공장처럼 똑같은 모양의 불행을 몇 개나 찍어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라, 그는 최근 자신의 불행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아카이를 사랑하는 게 그 자체로 이미 크나 큰 불행이자 죄였으므로.

후루야가 손으로 만든 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쐈던 날, 그는 아카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도, 지금 배신당한 느낌입니까.

아카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루야도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으므로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아카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드디어 상황을 전부 파악했는지 평소의 냉담한 얼굴로 후루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루야는 그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후루야와 아카이가 아니라 버번과 라이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냉기가 서린 얼굴로 버번을 보고는 애새끼라고 중얼거렸다. 그건 불만을 표현하거나 욕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순수한 감상이었다.

쓰다. 그리고 흐리다. 후루야는 라이의 첫인상을 그렇게 가졌다. 지금도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그는 아카이가 담배를 물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쓴맛과 흐린 시야를 상상했다. 거짓으로라도 담배를 피워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쉽게 상상이 되었다. 아카이가 상당한 골초인 탓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시선이 시도 때도 없이 아카이에게 머물러 있던 탓이었다.

 

‘그럼…. 제 추리가 맞습니까.’

 

이번에는 대답을 기대하고 한 물음이었다. 말끝은 올라가지 않았고 글로 쓴다면 문장 끝에 물음표 대신 마침표가 찍힐 것 같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히 묻는 말이었다. 후루야의 푸른색 눈동자가 아카이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혹은 다른 말이든 해주기를 바라는 눈이었다.

아카이의 입은 쉽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루야는 다시 기시감을 느꼈다. 버번의 기억이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어 흔들렸다.

진은 종종 베르무트와 버번을 묶어 ‘비밀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거나 욕설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버번의 눈에는 베르무트나 자신보다 라이가 더 비밀주의자인 것 같았다.

아무리 조사를 겹쳐서 해봐도 모로보시 다이라는 웃기는 이름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가 비밀스러웠다. 굳게 다물려 쉬이 열리는 법이 없는 라이의 입술은 버번이 그를 과묵하기보단 신중한 성격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 신중함이 모로후시 자결의 진실을 덮는 데에도 작용했을까. 후루야는 그게 궁금했다. 아카이는 분명 스카치가 방아쇠를 당긴 계기가 후루야의 발소리라는 걸 알았을 터였다. 그래서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말하지 않았던 건지 말하지 못했던 건지, 후루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내 발소리가 히로를 죽였나요.’

 

그 당시 신중한 라이의 입을 열기 위해 버번은 종종 그를 도발하곤 했다. 일부러 날이 선 말투로 시비를 걸면 그는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버번의 얼굴 위로 담배 연기를 흩뿌렸다. 그리고는 버번이 콜록거리든 말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열은 받았지만 어쨌든 그의 입을 여는 데는 도발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후루야는 일부러 자신과 아카이를 동시에 꿰뚫는 질문을 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흔들렸다.

 

‘내가 구하지 못한 거야.’

‘맞아요. 나는 히로가 자결한 이유를 제공했고 당신은 구하지 못했죠. 우리 둘 다 천국에 가긴 글렀네요.’

 

후루야는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깔았다. 아카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루야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아카이를 지나쳐 옥상 입구로 걸어갔다. 마침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윙, 윙 울리고 있었다. 보나마나 자신을 찾는 부하의 전화일 터였다.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전화를 해온 걸 보면 상당히 급한 일임이 분명했다. 후루야는 계단을 내딛기 전 고개를 돌려 아카이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한때 저 등을 동경했던 게 생각났다.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이건 확실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 후루야 군, 나는….’

‘제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가… 저를, 위해서였습니까?’

 

후루야는 아카이에게서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 뒤로 한 달 동안 후루야는 아카이를 만나지 않았다. 일부러 그를 피한 게 아니라 갑자기 조직과 연결되어 있던 끈 두 개가 동시에 끊어져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간은 감정의 결을 비틀었다. 후루야는 동경과 신뢰의 알을 깨고 나온 사랑을 어쩔 수 없이 끌어안았다.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버리려면 이유가 필요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 새로 발급한 허가증이랑 필요한 서류입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격을 대기하고 있는 중에 현지 경찰과 마주하면 이걸 보여주십쇼.”

“그러지. 수고스럽게 해서 미안하군. 오늘 쉬는 날이었을 텐데.”

“괜찮습니다.”

 

아카이가 옅은 베이지색 서류 봉투를 후루야에게서 받아들었다. 꼼꼼하게 봉합된 서류 봉투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때, 방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담뱃갑이 와르르 무너졌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후루야는 쓰러진 담뱃갑 쪽으로 걸어가 널브러진 것들을 차곡차곡 세웠다. 그는 흡연자도 아니면서 쭈구려 앉아 담뱃갑의 탑을 쌓고 있는 자신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지만 이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라이는 지독한 골초였는데, 덕분에 버번은 라이를 도발할 때 종종 담배를 재료로 삼았다. ‘니코틴에 뇌가 잠식돼버리기라도 했습니까? 말 좀 해보시죠.’라는 말은 작업 전 회의에서 열에 여덟 번은 나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라이는 버번의 도발에 응수하듯 그의 얼굴 위로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불곤 했다.

그래서 후루야는 그의 담배 연기를 아주 잘 알았다. 무언가를 흐릿하게 하는 냄새도 익숙했다. 임무를 수행할 때나 길을 걸어가다가 라이의 담배와 비슷한 냄새를 맡으면 그에게 다가가 어떤 브랜드의 담배인지를 알아낸 적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산 담배가 세어 보니 벌써 서른두 갑이었다.

 

“담배, 피웠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아카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후루야는 마지막 담뱃갑을 집어 들기 위해 뻗은 손을 허공에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서른두 번째 담뱃갑이 가장 꼭대기에 올랐다. 어떻게든 그의 질문에 진실이 아닌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우습게도 그 날 이후 그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게 처음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후루야는 아카이 앞에 서면 늘 우스워졌다. 그래서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진실이 아닌 사실로 적당한 대답이 떠올랐다.

 

“안 피웁니다. 두 번째로 좋아했던 사람이 담배를 피웠거든요.”

“로맨티스트 같은 구석이 있군.”

“미련이죠.”

 

후루야가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 일어섰다. 아카이에게 전달해야 할 서류도 전했고 그도 바쁜 몸이므로 슬슬 집에서 내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그와 필요 이상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가는 사랑한다는 뻔뻔한 고백이 나올 것 같았다. 이미 다 인정했으면서도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카이는 순순히 방에서 현관으로, 현관에서 밖으로 이동해주었다.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몇 마디 사적인 말이 더 오고갔지만 다행히 후루야의 진심을 튀어나오게 할 정도의 수위는 아니었다.

다시 혼자가 된 후루야는 현관문에 머리를 쿵, 하고 찧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쩌자고…. 대체 뭘 어쩌고 싶어서.”

 

자신은 무엇을 바라고 라이가 피우던 것과 같은 담배를 찾아 돌아다녔는가. 그는 늘 아카이 앞에서 우스워졌으니 라이와 같은 담배를 피우면 그와 같은 냄새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라이와 좀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기대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을 터뜨리면, 그때도 아카이는 자신을 로맨티스트라고 칭해줄까. 후루야는 현관에서 천천히 멀어져 방 안으로 들어갔다. 32층 담배의 탑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가장 꼭대기에 올려두었던 담뱃갑을 집어 들고 비닐을 벗겼다.

캐러멜 색 배경 위로 흘려 적은 영어가 쓰여 있었다. 아카이가 피우는 담배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것 따위는 버리면 될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품은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의 집에는 라이터가 없었다. 4년 전 친구의 시신을 태운 이후로 전부 없애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의 마지막 순간을 반듯하게 해주고 싶어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모로후시의 머리를 잡고 바로 세웠다. 하지만 죽은 이의 목은 다시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같은 짓을 열 번이나 더 반복하고 같은 결과를 열한 번 얻고 나서야 후루야는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모로후시의 몸에 붙은 불길이 하늘로 솟아 새까만 연기로 길을 만들었다. 사람의 신체가 타는 냄새는 장작이 타는 냄새와는 전혀 달랐다. 언제나 라이가 자신의 얼굴 위로 내리던 담배 연기에서 나던 냄새와도, 전혀 달랐다.

그래서 후루야는 그 순간만큼은 라이의 담배 연기가 그리웠다. 무언가를 흐릿하게 하는 그 냄새로 자신의 눈 위를 덮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증오해 마지않아 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웠다.

나는 너에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하는 걸까. 후루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잿더미도 바람에 흩날려 사라진 뒤였다. 시멘트벽과 콘크리트 바닥에 새까맣게 탄 자국이 남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흔적이었다. 유품 같았다.

후루야는 근처에 있던 성냥을 집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담배 연기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베란다 문을 닫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 끝에 불을 붙여 담배에 불을 옮기는 폼이 오랫동안 담배를 피워온 사람 같았다.

 

“하아….”

 

잿빛 연기가 허공에 몇 초간 머물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모로후시의 시신을 태웠던 날이 떠올라 후루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팔을 베란다 난간에 걸치고 등을 굽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담배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사실은 친구의 시신 같은 거, 태우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머니 속 라이터를 더듬은 건 그 누구도 모로후시의 시신에 손을 대도록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약부의 인간들이 죽은 말단 조직원의 시신으로 무언가 실험을 하고 있다는 괴담이 조직 내에 퍼지고 있을 때였다. 후루야는 허무맹랑한 루머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때만큼은 라이터를 쥐지 않을 수 없었다.

후루야는 평생 모로후시에게 속죄할 거라고 다짐했지만 과연 그 속죄에 끝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늘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했고, 모로후시는 그 말대로 할지도 몰랐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후루야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기를. 자신을, 그리고 아카이 슈이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기를 바랐다.

후루야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담배 연기는 이미 전부 흩어지고 없었다. 후루야는 다행히 아직도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는 담배를 입에 물고 숨을 먹었다. 쓴맛이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라이. 라이, 라이. 아카이 슈이치. 라이, 아카이.”

 

성경을 외는 신자처럼 후루야는 라이와 아카이의 이름을 번갈아 중얼거렸다. 그는 아카이를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는 대신 사랑을 해버렸으므로. 용서보다 사랑이 먼저였으므로. 사랑은 용서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감정이었다. 순서가 반대였다면 무언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멍청하긴. 이러니까 정말로 미련 같잖아.”

 

미련과 후회는 닮았다. 다시 담배 연기가 하늘로 솟았다. 연기가 매워서 눈물이 떨어졌다. 젠장,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후루야는 차라리 눈물을 전부 쏟아내 버리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 아….”

 

아래에 아카이가 서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후루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아카이가 내뿜은 담배 연기에 그의 얼굴이 가려졌다. 그럼에도 후루야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함이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두 번째로 좋아했던 사람이 담배를 피웠거든요.’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카이는 근처 유료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후루야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를 반복했다. 두 번째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첫 번째, 그러니까 그의 첫사랑이 누구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후루야의 말은 때때로 아카이의 귓불과 가슴과 뇌에 달라붙곤 했다. 그건 자신을 도발할 때마다 하던 지겨운 말일 때도 있었고 별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며 흘렸던 말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아카이 스스로도 어떤 기준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냥’이라는 말이 그나마 제일 적당할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천국에 가긴 글렀네요.’

 

이번에는 다른 말이 아카이의 뇌를 장악하려 구석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후루야가 한 달 전 폐건물 옥상에서 했던 말이었다. 도와달라는 내용의 메시지와 첨부된 좌표를 받자마자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글자의 형태를 한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카이는 하던 일을 전부 치워두고 후루야에게로 향했다.

후루야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으로 빵, 하는 총성을 흉내 내며 살짝 웃었다. 그제야 아카이는 그 건물이, 그 옥상이 4년 전 그때의 장소임을 깨달았다.

그는 훌륭하게도 혼자서 진실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아카이에게 자신의 추리를 확인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눈동자에 그대로 담겼다. 하지만 거기에 ‘거 봐요, 내 말이 맞죠?’ 같은 의기양양함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시시때때로 아카이의 신경을 건드리고 약아빠진 척을 하는 버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후루야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아카이에게로 다가왔을 때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스카치의 죽음은 온전히 자신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찰나의 순간이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이 방심했기 때문에 스카치는 자결했다.

처음에는 그게 전부였다. 자신이 스카치를 직접 쏴 죽였다는 투로 했던 말에는 버번의 마음이나 감정 따위를 고려한 흔적이 없었다. 실제로 아카이는 그 시절의 버번을 그저 귀찮고 건방진 애새끼 정도로 여겼으므로 그의 감정을 고려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게 전부인가? 지금도 자신은 후루야의 마음이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말하고 있나?

 

‘우리 둘 다 천국에 가긴 글렀네요.’

 

후루야가 약간의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했던 말이 다시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외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메아리만이 섬찟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들은 천국 같이 귀한 곳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다. 너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 죄의 대부분에는 변명의 여지가 존재했고 정상情狀을 참작 받을 가능성도 깔려 있었지만, 아카이는 그런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용서 받을 생각은 없었다. 감히 멋대로 추측하건대 후루야도 자신과 마찬가지이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한다 하더라도 아카이는 기꺼이 후루야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그곳에서 죽고 죽어서 일백 번을 더 죽는다고 해도 스카치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 속죄라니, 웃긴 생각이었다.

아카이는 멈추었던 발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은 왔던 길의 반대 방향이었다. 후루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그 날 옥상에서 아니라는 대답 뒤에 차마 하지 못했던, 그때는 몰라서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말로 전하려고 하니 어떤 말이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후루야에게 상처를 줄 터였다. 그렇다고 열심히 갈고 닦아 예쁘게 가꾼 말로는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십분의 일도 전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상태로는 그를 찾아갈 수 없다. 아카이는 후루야의 집 베란다가 보이는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 담배를 다 피우고 나면 갈 생각이었다.

담배 길이가 점점 줄어드는 모양을 보니 애가 탔다. 복잡한 마음에 불현 듯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그곳에 후루야가 있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뱉은 담배 연기에 시야가 가려졌다. 후루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더 애가 탔다.

 

“젠장.”

 

아카이의 뇌 속 메아리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후루야가 두 번째로 좋아했던 사람이 흡연자였다는 말이 크게 울렸다. 자신의 몸속이 텅 비어서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첫사랑이 누구인지에 대한 호기심? 그딴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첫 번째가 자신이 아니라는 질투심, 그리고 약간의 배신감이었다.

아카이는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후루야의 집 문을 세게 두드렸다. 쾅, 쾅, 쾅. 철로 만들어진 문에서 소음이 났다. 무식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여섯 번을 넘기기 전에 안에서 후루야가 아카이의 침입을 허락해주었다.

 

“이웃에 무슨 민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후루야의 눈가가 빨갰다.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눈물이 만든 길이 볼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웃에 폐가 될까봐 문을 열어주었다니. 아카이는 그거야말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통하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너무 복잡한 길을 걸어왔다. 쉽고, 편하고, 단순한 길이 없어서였다. 천성이 단순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건 대개 좋은 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만들고 해소했다가 다시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는 노력에는 방해가 되었다.

 

“후루야 군.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바보가 되는 게 좋겠어.”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과거는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므로 외면해봤자 자신만 우스꽝스러워질 뿐이다. 과거를 마무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카이는 과거 같은 건 잊어버리자는 형편없는 말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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