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일곱 살 때 엄청 괴로웠거든.”


영윤은 하늘에 뜬 달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열일곱살…, 자신이 아직 해준이라는 이름을 쓰고 인간이었을 때였다. 열일곱 살은 지옥이었다.


“이름이 뭐야?”


영윤의 시선이 다시 소년에게 옮겨졌다. 교복 셔츠에 달린 명찰을 펴 보이며 대답했다.


“아, 저는 고윤기요.”

“윤기, 좋은 이름이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소년의 감사 인사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송견이 캔 뚜껑을 핥는 소리만 들렸다.


딸깍, 딸깍. 윤기는 음료 캔 따개만 손장난처럼 살짝 건드리고 있었다. 음료를 마시고 싶은데… 할머니 가져다드릴 생각에 그림의 떡처럼 보고 있었다.


영윤은 잠시 송견이 어째서 이 소년에게 붙었을까? 생각했다.


“음료 마시고 싶으면 마셔, 하나 더 사줄게.”

“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럴 순 없어요.”


열일곱 살이라는 윤기는 나이에 비해 숫기도 없고 내성적이고 부끄러움도 많아 보이는 듯했다. 거기다 할머니와 살아서 그런지 공손하며 염치가 있었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도 너무 감사해요


따위의 소리를 내뱉는 윤기라는 소년이 싫지 않았다. 보통의 학생들과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어른스럽고, 철이 빨리 든…. 역시, 영윤은 자신과 닮아있다는 걸 부정하지 못했다.


영윤은 누군가에게, 그것도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게 얼마 만인 건지. 생각해 ㅌ보니 조금 오래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영윤은 윤기에게 친근하게 말을 놓고 있다는 것도 스스로 놀라웠다.


그러나 영윤 자신이 나서서 말을 걸지 않으면 두 사람의 대화가 전혀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윤기가 마음에 들었다.


“매일 밤 여기 와서 송견에게 밥 주는 거야?”

“…송견…이요?”

“몰랐어?”

“아, 혹시… 주인이세요?”


윤기는 주인을 찾아서 기뻐하는 것과 동시에 더는 자신이 챙겨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슬퍼하는 것이 묻어 있는 오묘한 눈빛이 되었다.


“아니, 주인 아니야.”


윤기는 조금 안도하는 안색이 되었다.


“윤기하고 했지? 지금 와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내가 이래 봬도 나이는 셀 수 없이 많으니까, 말 놓을게. 너 여태껏 송견이 뭔지도 모르고 밥 준 거야?”

“네? 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미 말을 놓고 있었지만, 스리슬쩍 넘어가기로 한다. 윤기는 그러더니 조금 고개를 숙이며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사실은 버려진 개인 줄 알았어요.”


‘이렇게 늑대만 한 개가 어디 있다고! 대형견하고 비교해도 월등히 크잖아!’


“마음 같아서는 키우고 싶었는데… 조금 집안 형편이 어려워요. 그래서 이 공원에서 만날 때마다 밥을 챙겨주었거든요. 인연도 있고.”

“인연?”

“네… 제가, 조금 안 좋은 일에 당할 뻔했는데, 이 개가 여기서 구해줬거든요.”


영윤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마음씨 좋은 윤기가 편의점에 들러 진열된 강아지 캔 사료를 훑고, 비싼 걸 사주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하니…, 제일 아래 싼 캔을 집는 모습은 떠올리기만 해도 다정했다.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만났음에도 두 사람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윤기도 열일곱 살은 괴롭겠다고 한 영윤에게 뭔가 마음이 확 열린 기분이었다.


사실을 정말로 괴로웠다. 이게 열일곱 살이라서 괴로운 건지, 그냥 이렇게 태어나서 괴로운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영윤의 말에 위로받았다. 열일곱 살은 괴로운 거였다.


***


“할무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내 새끼 조심히 다녀와.”

“몸도 아픈데 너무 밖에 나가서 일하지 마요, 할무니.”

“알았어, 알았어. 학교 늦겠다. 얼른 가.”


세상에 할머니 하나 남았다. 윤기는 할머니가 또 아플까 노심초사였다. 할머니에게 잔뜩 애교 있는 목소리와 뭉개지는 발음으로 ‘할무니’라고 부르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 인자한 얼굴이 좋았다.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걸음과 달리 윤기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학교는 멀지 않았다. 걸어서 이십 분.


왕따를 당한다거나, 괴롭힘을 당한다거나, 뉴스에 나올 법한 일은 없었지만…, 아니 그런 일이 송견을 만나기 전엔 이따금 있었다. 바로 늦은 밤에 걸어가다 보면 종종 못된 불량배들이 나약해 보이는 자신을 불러 소위 삥뜯기를 시전할 때, 송견이 구해주었다. 그 뒤로 그런 일은 없었다.


윤기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아무도 저와 친구를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혹시 나한테서 냄새나나? 싶어 팔을 들어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지만, 섬유유연제 향만 솔솔 났다. 할머니는 매일 교복 셔츠를 빨아 주었고, 다리미로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다려주었다. 여느 학생보다 더 깔끔한 윤기였지만, 부모가 없는 티가 어쩔 수 없이 나는 부분이 있었다.


윤기에게 불행한 건,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것, 가난하다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학교에 가기 싫었다. 친구가 없으니 학교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학생을 빨아들였다. 교문을 통과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안녕.”

“야야! 어제 UFC 봤냐?”


소심하고 나약하게 건넨 인사는 묻혔다.


윤기는 공기 같은 존재였다. 교실에서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되지 못하는 디폴트 인간. 그러나 아무도 윤기에게 다가와 말을 걸지 않았고, 윤기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 윤기는 외로웠다.


얼른 밤이 되어 송견을 만나고 싶었다. 유일하게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모든 반 친구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지만, 윤기의 주머니에는 핸드폰이 없었다. 핸드폰이 없는 유일한 고윤기.


“어제 단톡방으로 공지한 거 봤지? 우리 반 이번 반 대항전 롤 선수 투표한다. 저번 3월에 7반에 발린 거 이번에 갚아야지! 다 조져버려.”


아이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환호했다. 반장이 하는 이야기를 윤기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단톡방에는 윤기도 없었고, 롤이라는 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 수 없었다.


“윤기야, 너는 롤 안 해?”


뒷자리에 앉은 반 친구가 무심하게 윤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 응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뭐? 미친 푸핫! 요즘 컴퓨터 없는 집이 어딨어.”


그런 말이 윤기에게 큰 상처였다. 아무렇지 않게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그렇다고 이 친구가 일부러 상처 주려고 한 말은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탓에 오는 무지였을 뿐이다.


“야! 고윤기 집에 컴퓨터가 없대!”


그가 큰 소리로 외치는 탓에 친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탓에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터질 듯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윤기 너는 핸드폰도 없지 않냐?”


반장의 말에 윤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숙맥이어서 어떡하지 싶은 생각이 스스로 들기도 했지만, 친구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한다는 걸 생각만 하면 속이 울렁거리고 겁부터 났다.


반친구들은 진기명기라고 아랑곳없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래도 작년 중학교 친구들과 달리 좋은 친구들이었다. 뒤에 앉은 친구가 웃음을 그치더니 윤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오늘 학교 끝나고 피시방 가자, 이 형님이 손수 가르쳐 줄게.”

“미친 새끼야, 네가 여기서 제일 못해.”

“뭐 이 씹새가? 오늘 함 붙어?”


롤을 손수 가르쳐주겠다고 피시방에 가자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쪽팔리게도 거기 갈 돈이 없었다. 그런 곳에 돈을 낭비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학원 시간 아슬아슬하게 피해 피시방 갈 궁리를 꾀했고, 피시방에 가려면 학원 숙제를 끝내야 한다고 손에 모터를 단 것처럼 숙제를 미친 듯이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것 모두가 윤기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윤기는 결국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수중에 든 용돈 5000원 저녁 굶지 말고 공부하라고 할머니가 꼬깃꼬깃 주민센터에 나가 소일거리로 벌어 와 쥐여주는 돈.


이 돈이 어떤 돈인데…. 피시방 같은데 갈 수는 없었다.


***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영윤과 나눴다. 이상하게 처음 만난 사람이 영윤에게 윤기는 술술 털어놓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해 줄 것만 같았으니까.


“부모님은 어쩌다가?”

“어릴 때 돌아가셨대요. 할머니가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으셔서….”

“할머니랑 둘이 살아?”

“네, 할아버지는 폐암이셨는데…, 중학교 입학하면서 증세가 안 좋아지셔서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나 왜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고 있지?’


윤기는 뭔가 신비한 힘을 느꼈다. 수줍고 낯가림이 심한 자신이 누구 앞에서 말을 이렇게 술술 한다는 게 스스로 낯선 모습이었다. 거기다 담임 선생님도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못 듣겠다고 하는데, 그 앞에서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윤기는 어느새 눈물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한테 핸드폰 싼 거 하나 사달라고 하지. 그 정도는 요즘 다 있잖아. 할머니도 그거라면 어떻게든 마련해 주실 거 같은데.”


윤기는 의젓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돈이면 할머니 한 달 약값은 돼요. 거기다 통신비는 어떻고요. 다른 애들은 학원도 보내준다는데 할머니가 그것도 변변치 못하다고 미안해하세요. 대신 독서실을 끊어달라고 해서 다니고 있어요. 문제집은 학교 선생님들이 주시지만.”

“기특하네.”


피시방에 가자는 친구들을 뒤로 돌아오는데 서럽고, 속상하고, 원망스러워서 이 공원에서 울고 있었는데…, 여기 이 개가 나타났거든요. 처음에는 버려진 개인 줄 알았는데, 다음 날에 여기 오니까 또 있고, 또 있고…, 어느 날은 불량배들이 돈 내놓으라고 하는 걸 이 개가 나타나서 쫓아내 주기도 했고요.“


“그렇구나.”


윤기는 눈을 반짝거렸다.


“그리고 저를 매일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들어가는 거 보고 나면 감쪽같이 사라져요.”

“그건 송견이기 때문이야.”

“송견이요? 아까부터 송견이라고 하는데… 그게 뭐죠? 그런 품종은 처음 들어봤어요. 그리고 이렇게 생긴 개도 처음 봤어요. 꼭 늑대 같지 않아요?”


빨리도 알아차린다. 싶은 생각으로 영윤은 자세를 고쳐잡고 윤기를 바라봤다.


“송견은 늦은 밤 산길을 걷는 인간의 뒤를 몰래 쫓아, 그런데 모르는 미션이 하나 있어. 무사히 집에 도착하면 오케이, 그렇지만 중간에 넘어지거나, 다치면 본성을 드러내 습격하는 개야.”

“에엑! 아니에요, 잘못 아신 거예요. 이 개는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데요!”


윤기가 송견을 꼭 끌어안았다.


“송견 중에는 간혹 그렇지 않은 송견이 있지, 나쁜 무리를 지켜주는 그런 녀석, 대신 집에 도착했을 때 먹을 주어야 하는데, 너는 지금까지 잘 주었으니까, 안 먹히고 산 거야.”


영윤의 시선이 깨끗하게 비워진 캔 사료를 보았다. 윤기도 따라서 시선이 머물렀다.


그때 영윤이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면서 번뜩이며 좋은 생각이 스쳤다.


“아, 너… 혹시 아르바이트 할 생각 없니?”


1차 BL 질문 https://peing.net/ko/avril_s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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