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울어서 지친 건지, 정운은 뒤척이지도 않고 조용히 숨소리만 내며 자고 있다. 잔뜩 부은 눈과 코가 안쓰러워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행여 정운이 깰까 다시 손을 물린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정운 때문에. 수해가 하려고 했던 것들, 수해가 좋아했던 것들, 일할 때 우선시하는 것들... 모조리 다 허물어지고 다시 쓰여진다. 수해는 자신의 가슴께를 손으로 눌러 보았다. 살아가면서 절대 바뀌거나 무너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을 이루는 감옥이 이정운을 만나고 부서진다.

   앞으로 정운과의 날들은 수해가 정운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지 보여주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정운은 자기가 날 위해서 다 버리고 포기한다고 했지만... 어찌 보면 공평한 건가. 이정운을 얻는 대신 나를 준다. 그리고 이정운은 나를 얻는 대신 자신을 준다.

   헌신. 몸과 마음을 바친다. 수해에게는 너무 낯설고 자신의 삶과는 멀게만 느껴지는 개념이었다. 정운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를 버린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자기를 포기한다는 건 곧 목숨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지금까지 수해의 삶은 어떻게든 자기를 지켜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었다. 타인의 위협에서 몸을 지켜내고, 모욕과 무시와 그 많았던 버림받음에도 자기를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기 위해 끝없이 무던해지고, 타인에게 자신을 단 하나도 나누어주지 않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버텨왔다. 아무도 들이지 않음으로써 감옥처럼 굳어져 간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건...

   불행일까, 축복일까. 웬만해선 부술 수 없는 단단한 경계면으로 싸여있는 타인의 자아와 하나로 녹아드려면, 자기 자신을 결국엔 포기하고 놓아주어야 한다.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다 못해, 이젠 괴로워하며 자기를 버리는 선택을 감내하게 한 이 애정은 결국 서로를 파멸하게 할까, 아니면 영원하게 할까.

   뒤척이며 잠을 설치다 겨우 잠든 탓에, 정운이 먼저 일어났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그릇에 시리얼을 따르던 정운이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온 수해를 보고 미소 짓는다. 아직 잠이 깨지 않아 괴로운 얼굴로 수해가 테이블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해 앞에 시리얼 그릇을 놓아주고 우유를 부어준다. 건성으로 시리얼을 휘적이며 대충 우유에 적신 시리얼을 입에 떠넣는 수해를 가만히 지켜보다, 정운이 픽 웃었다. 수해 씨는 아침 먹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도 내가 해주면 항상 잘 먹는다고.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아침부터 사람 멋쩍게... 수해는 괜히 시리얼을 몇 입 더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우리 얘기 좀 할래요?"

   막 끓여 김이 나는 차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정운이 수해 곁으로 와 앉았다. 수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차가 조금 식기를 기다렸다.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어제 사무실에서 이야기하다가 정운의 감정이 격해지는 바람에 오랫동안 정운을 안아줘야 했으니까. 수해는 한 김 식은 차를 호록 들이켰다.

   "어젠 이야기 못했는데, 박재성 씨 사건 조사한 이유요. 정운 씨 도와주려고 조사한 거에요. 정운 씨가 하려는 일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정운 씨는 직장도 있고... 뭐 여러모로 뒷조사는 내가 전문이니까. 뭐라도 더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잠시 머그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수해가 한숨을 쉬었다.

   "핑계같이 들리는 거 알아요. 솔직히 말하면, 질투가 나서 시작한 건 맞아요. 정운 씨가 다른 사람 생각 하는 게 싫어서. 둘이 얼마나 가까웠을까 이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정운 씨한테 조사하고 있다고 말을 못 꺼냈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불안해서."

   고개를 숙이고 컵 안에 담긴 차를 보고 있던 수해가 겨우 눈을 들어 정운을 보았다.

   "어제도 이야기 했지만, 조사하다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여러 가지 느끼게 된 것도 많았고. 정운 씨나 윤정아 씨가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다는 아니겠지만, 조금은 이해하게 됐어요. 그래서... 정운 씨 도와주고 싶어요. 박재성 씨 사건이 해결이 안되면, 정운 씨는 아마 계속 괴로워 하겠죠. 정운 씨 옆에 두고 괴로워하는 거, 가만 보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수해는 정운의 눈치를 보았다. 도와주고 싶다는 말은 실컷 했으나... 아직도 정운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조사를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떳떳하지 못하다.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운이 씩 웃으며 수해를 보았다.

   "수해 씨랑 지내면서 좋은 것들이 뭔지 알게 되는데... 싫은 것도 알게 되네요. 싫다기 보다는... 마음에 안 드는 것? 어제는 내가 너무 놀라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네."

   수해가 혼나는 강아지처럼 몸을 살짝 웅크렸다. 정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살핀다.

   "나한테 숨기고 혼자 몰래 뭐 하는 거. 그러다 혼자 위험해지는 거. 나한테 말 안 하고 사라졌다가 다쳐 오는 거, 납치 되는 거. 혼자 정보 알아본다고 갔다가 상황 안 좋아지는 거."

   "..."

   "나한테 털어놓는다고 내가 수해 씨 미워할 일 없으니까, 앞으로는 뭐든 말해요."

   "... 알겠어요."

   정운은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불완전한 믿음의 구간이다. 수해는 내가 정말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건지 확신이 없고, 나는 수해가 앞으로 정말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줄 것인지 확신이 없다. 반쯤은 믿고 싶고, 믿음이 있는 채로 행동하고 싶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주 작은 불안이 균열을 자꾸만 키우겠지.

   "어제 나한테 했던 말. 내 옆에 있겠다는 말. 더는 안되겠다는 말... 무슨 뜻이에요."

   "위험한 케이스는 이제 안 맡고. 당분간은 서울 안 벗어나려구요. 앞으로도 되도록이면 줄일 거고."

   정확히는, 당분간 봐야 할 곳이 여기라서 그런 거지만...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며 수해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방 미행 건을 차차 줄이려는 생각은 전부터 있었다. 사업 규모가 확장되면서 수해가 내내 현장에 붙어있기엔 시간 분배를 할 수가 없어 추가 인력을 뽑으려는 계획을 하고 있긴 했으니까. 우연찮게 시기가 맞아 들어간다.

   "... 그럼 재성이 일은."

   "어제도 말했지만, 민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어요. 조사 쪽에서는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렵다고 봐요. 이제 남은 일은 윤정아 씨랑 정운 씨가 알고 있는 한에서 취합하고 플랜을 어떻게 세우냐에 달려 있어요."

   "... 알겠어요."

   더이상의 무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조사는 여기까지가 최선이겠지. 수해가 군 기관까지 손을 대 무리하게 뛰어들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도 수해는 종종, 이 정도 선까지는 괜찮겠지 라고 판단되는 안에서 예상치 못한 모험수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은 늘 그런 도박에서 운이 좋았던 편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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