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말에 아무 말 없는 일월을 보고 원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앗차, 내가 무슨 말을...'

  명의 곁에 있는 여인이고, 명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었다. 자신은 그저 어렸을 때부터 봐온 사이일 뿐 명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잠시 어두운 마음이 스며와 아무 잘못 없는 여인에게 상처될 말을 한 자신이 창피하였다. 

  "미...미안하네. 내가 괜한 말을 하였네."

  일월은 빠르게 자신에게 사과하는 원의의 모습이 의외였다. 자신이 본 양반님네들, 특히 양반여인들은 자존심도 높고 콧대도 놓아 자신처럼 미천한 계집종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랫것일 뿐,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 양반들과는 달리 자신이 한 말에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원의가 일월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닙니다. 그래도 곧 제 지아비가 되실 분인지라, 아씨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는건 실례일 듯하여 그리 말하였습니다. 아씨께서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일월도 좀전에 원의를 타박한 것에 대해 사과하였다. 명이 여인인 것이 들킬까봐 예민해져서 그녀에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게다가 그녀도 자신에게 바로 사과하지 않았는가.

  "아니네, 내가 과했네."

  "아닙니다. 제가 분수에 맞지 않게 주제넘었습니다."

  "아니네."

  "아닙니다."

  이젠 서로 자신이 더 미안하다며 주고받는 말에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고는 웃고 말았다.

  "풉!"

  "푸흡!"

  왠지 모르겠지만, 원의는 그녀가 편안해졌다. 일월 역시 보통 양반들과는 다른 원의에게 반감이 없어졌다.

  원의는 여전히 눈감고 누워있는 명을 바라보았다.

  "명이가 참 곱지 않니?"

  어느 새 일월에게 말을 놓은 원의였다. 일월은 곱다는 그녀의 말에 속으로 뜨끔하였다.

  "사내가 고와서 뭣에 쓴답니까? 겉은 이래보여도 사내는 사내입니다. 도련님이 얼마나... 얼마나 힘이 세고 든든한데요. 이처럼 든든한 사.내.도 없습니다."

  일월은 부러 힘주어 말하였다. 명이 곱긴 고왔다. 가끔 잠든 명의 뺨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곤 했다. 겉으로 봤을 땐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막상 만져보면 여느 여인네 보다 더 매끄러웠다. 그 탄력있는 보드라움에 밤새 쓰다드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원의를 보고 일월은 회고의 흐름을 멈추었다. 

  '왜 이 아씨는 얼굴을 붉히는거지? 아앗?'

  자신이 한 말을 엉뚱한 쪽으로 오해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말을 하면서도 얼굴에 열감이 훅 끼쳐 올라왔다. 명이 자신을 안아줄 때가 떠올랐다. 미쳤다. 지금 이리 누워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걸 떠올리다니. 생각이 꼬리를 물 수록 점점 더 얼굴이 더워졌다. 그런 일월을 보며 원의도 자신이 왜 더 부끄러워지는건지 귓볼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어색함에 천장과 바닥을 각자 바라보던 그때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니, 왜 그러고들 있는 것입니까? 아니, 아직도 약초를 갈아주지 않은..?"

  현이 조금은 피로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서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현이 들어오자 일월은 얼른 일어나 고개를 조아리고는 옆으로 빗겨 섰다. 원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로 그에게 인사하였다.

  "오셨습니까?"

  "낭자가 이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전 일월이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낭자가 계셔서 의외였습니다."

  현은 아직 명의 가슴에 덧댄 천이 어제 갈아준 것임을 보고 일월이 원의때문에 아직 갈지 못했음을 눈치 채었다.

  "명이...아니 명도령이 괜찮아지고 있는지 보려고 잠시 들렀습니다. 온 김에 상처 돌보는 것도 돕고요."

  원의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일월을 한쪽 시선으로 흘끗 본 현은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숙한 낭자께서 사내의 몸에 난 상처를 보시는 것도 그다지 유쾌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월이 자네가 낭자를 잠시 옆방으로 모시고 가서 찻상을 좀 올려드리게. 차 한잔 마실 시각동안 내가 얼른 명의 상처를 보아둘터이니."

  현의 말엔 태산같은 무게감이 담겨있었다. 원의나 일월으로서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그런 무게감이었다. 그제서야 명의 상처를 서로 돌보겠다고 했던 여인 둘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월은 사내인 현이 명의 상처를 보는 것이 꺼려졌으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무명천과 약초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옆에는 명을 사내로 알고 있는 원의가 번듯이 눈 뜨고 있지 않은가. 마뜩치 않지만 현의 손에 명을 맡기고 원의를 데리고 앞방으로 건너갔다. 원의더러 잠시 방에 있으라고 한 다음, 마치 자기 집인냥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가 찻물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원의와 일월이 방 밖으로 완전히 나간 후에 현은 명의 저고리를 벗기기 시작하였다. 앞섶을 열어젖히기 전에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몸에 있던 천을 휘릭 벗겨내었다. 익숙한 솜씨로 약초를 바르고 숨돌릴 틈 없이 바로 깨끗한 천을 두르고는 저고리를 잘 여며 주었다. 현은 눈을 돌려 명의 뺨으로 시선을 옮기었다. 얼굴에 붙인 약초를 조심스레 떼어내자 어느 새 새살이 차오르고 딱지가 위에 앉은 상처가 보였다.

  '다행히 잘 아물고 있군. 고운 얼굴에 흔적은 남을 것 같아 아쉽군.'

  현은 여인의 얼굴에 난 상처가 아쉬웠지만 이내 생각을 달리하였다. 어차피 계속 사내로 살아갈 이가 여인의 곱상함을 추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 상처로 인해 세간 사람들의 눈에 더욱 사내다움으로 보여지는 것이 나을 수 있기도 하였다. 기구한 팔자인 자신만큼이나 어이없는 팔자를 사는 명을 바라보자니, 동병상련의 감정이 느껴졌다.

  "너도 너를 드러내놓고 살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나를 드러내놓고 살지 못하였다. 신분 차이는 극과 극이었으나, 네가 살아온 길이나 내가 걸어온 길이나 매한가지로 가시밭길이었구나. 나는 나로서 당당히 헤쳐 나갈 것이다. 너 또한 그리하였으면 좋겠구나."

  화려한 왕족 생활의 이면에 감춰진 깊숙한 궁궐 속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진흙탕 속을 살다가 힘겹게 진흙을 뚫고 나오려는 명에게 하려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약초를 다 바른 명의 뺨을 살짝 구부린 검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쓰다듬던 손가락이 잠시 멈칫 하였다. 잠시 뒤 명의 뺨에서 손가락을 떼어낸 현이 눈을 가늘게 휘며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정신이 들었으면 눈을 뜨지, 계속 감고 있는 것은 내가 너를 계속 쓰다듬어주길 바래서인 것이냐."

  장난기 섞인 현의 목소리엔 명이 이제는 깨어났다는 안도감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현은 명의 뺨을 무심코 쓰다듬다가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눈동자를 감은 눈꺼풀 안에서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는지 점점 감긴 눈의 움직임이 커지자, 명이 정신이 들었음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현의 말에 명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오랫동안 꿈 속에 있었던 듯 눈 앞이 흐릿하였다. 잠시 여러번 눈을 꿈뻑거리자 흐렸던 시야가 선명하게 돌아왔다. 기실 명은 아까 현이 자신의 가슴 상처를 봐줄 때부터 정신이 들었었다. 하지만, 사내인 현에게 자신의 맨가슴을 드러내고 또 자신이 여인인 것을 현에게 들킨 것에 어찌할 바 몰라 그저 눈을 감고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이 자신의 저고리를 여며줄 때엔 그전까지 느끼지 않았던 심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찌푸릴까 상당히 집중하며 얼굴근육을 풀었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 상처를 보아주고는 자신의 뺨을 보듬는 현의 손길에 당혹스러웠다. 눈을 떠야할까, 아니면 좀더 있다가 눈을 뜰까 고민하던 찰나 웃음기 먹은 현의 목소리에 머쓱하게 눈을 뜬 것이었다.

  "송구...합니다. 대군께서 하찮은 저의 상처를 돌보아 주시고... 노고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명이 일어나려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현은 누워있으라는 손짓으로 만류하였다.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그냥 누워 있게. 그리고 자네가 하찮다니, 누가 그러든가? 이 나라 소과에 당당히 장원급제한 인재이자, 나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는 내 사람에게 누가 감히 하찮다고 하는가? 그런 소리 말게."

  현은 잔잔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명은 힘없이 고개를 돌려 현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서려있는 현의 얼굴엔 자신을 조롱하는 낯빛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진심이 얼굴에 담겨있었다.

  "저는... 대군의 눈을 속인 사람입니다. 사내가 아닌데 사내차림으로 살아왔고, 사내가 아님에도 사내가 아니라 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사내로서 과거를 치루고 급제까지 하였습니다. 대군과 세상을 기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누운 채로 현을 바라보는 명의 눈동자엔 어두움은 없었다. 세상을 기만하였다고 고백하는 이의 눈동자치고는 너무도 맑고 담백하여 뱉은 말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야 자네가 일부러 그리 살았던가? 원래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내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는가?"

  그렇다는 것에 확신하는 듯한 얼굴표정을 한 현이 명에게 물었다.

  "그건 맞습니다. 제 어미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사내아이라 속이고 사내로 키우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생집으로 보내졌을테니까요."

  명의 말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켠에선 명이 기생이 되었다면 단연코 화양각에서 한양 최고 기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이었다. 명석한 머리로 보나, 저 미모로 보나 말이었다. 지금이야 사내차림을 하고 있어 그 미모가 살짝 숨겨져 있지만, 여인의 복색을 하고 있다면 아마 뭇 사내들의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 확실했다. 지금 사내차림으로 있어도 그 미모가 다 숨겨지지 않고 가끔씩 비치는 아름다움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현 자신도 명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미색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미색의 사내인 명을 처음 봤을 때 느낀 충격은 표현하진 않았지만 상당했다. 나름 자신의 미색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현이었기에 처음엔 살짝 경쟁심리가 일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였다.

  짧은 시간동안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던 현은 자신의 손을 잡은 명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이 사실은 부디... 비밀에 부쳐주십시오. 대군..."

  간절한 표정의 명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현이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 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찌 일국의 대군이 자신의 사람을 곤란에 빠뜨리겠는가. 내 이 일에 대해서는 무덤까지 가져가겠네. 그리고... 저 일월이라는 아이말일세."

  현이 일월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일월의 아이 또한 제 아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월이도, 그 아이도 지킬 수 없습니다. 이 또한 비밀을 지켜주십시오."

  "하하, 자네는 비밀이 참 많군. 나 만큼이나 말일세. 알겠네. 그리하지. 뭐, 자네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라고 하면 자네가 사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전혀 받지 않겠지. 도리어 잘되었네. 나중에 조정에 진출했을 때 소실을 먼저 들였다고 부침이 있겠지만 그래도 사내행세 하는데는 그만한 보장이 없을 것이네."

  두 가지 비밀에 대해 말을 다하고 나서도 명이 자신을 잡은 손을 풀지 않자 의아해졌다. 오히려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이 무언가 말하길 주저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잠시 명이 말하기까지 기다려주었다. 오랜 침묵 끝에 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주잡은 손에는 힘을 더욱 꼭 쥐어 이제 현의 손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이내 손의 압력이 풀리고 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이 누워있으라 만류하였지만 고집을 부리고 결국 일어나 앉았다.

  성치 않은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은 채 제 앞에 조아리고 있는 명의 모습에 현은 진중한 얼굴을 하였다.

  "대군대감, 감히 청이 있습니다."

  어느 새 위엄서린 얼굴을 하고 있는 현이 명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대관절 무엇이건대 몸도 성치 않은 자네가 이리 기를 쓰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려 함인가?"

  "원의아씨께선 이제 세상천지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감히 청컨대 원의아씨를 배필로 맞아주시면 아니되겠습니까? 스승님께서도 대군께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시다가 불의의 습격으로 그리 되셨지 않습니까."

  부탁은 부탁인데, 마지막에 정환의 죽음을 언급함으로써 일말의 책임을 지라는 일종의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자네... 왕족을 협박하는 것인가? 우보 영감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으니 원의 낭자를 거두어달라?"

  명은 움찔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직설적으로 되물으니 곤혹스러웠다.

  "왜 아무 말 못하는 것인가?"

  잠시 뒤 명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대군께서도 아직 성혼하시지 아니하셨고, 또 한때 정혼하셨던 인연을 보아서라도..."

  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다 지나간 인연일 뿐이다. 지나간 인연에 미련을 가지면 아픈 건 자신 스스로이다."

  툭 내뱉는 현의 말에 명은 마음이 덜컥 내려 앉았다.

  "지났지만 다시 끌어와 이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서로 다른 실에 묶인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다급히 말하는 명의 말에 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이 없는 인연을 이어놓으면 그 인연이 행복하겠느냐? 마음이 있어도 인연이 늘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없는 인연이라면 더욱 그것은 그것대로 고통인 것이다. 그리 된다고 한다면 너는 만족하겠느냐? 그렇게 원의 낭자가 내게 시집온다면 그녀가 행복할 것 같으냐?"

  한마디 한마디에 아픔이 서린 말을 담아 뱉어내는 현의 표정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아씨께서 이리 홀로 힘들게 계시는 것보다... 아,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씨는 좋은 혼처에 좋은 사내에게 시집 보낼 것이라고. 스승님의 유지라도 따라드리는게 좋지 않을까 하여서..."

  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너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현의 뜬금없는 말에 명은 덩그라니 눈을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좋은 사내에게 시집보낸다 하셨지, 저 같은 이는..."

  명의 말을 툭 끊고 현이 끼어들었다.

  "자네 같은 이가 어떻다고? 자네 같은 사내가 또 어디있다고 하는건가? 자네처럼 능력있고 이만하면 잘생겼고, 여인 마음을 잘 아는 사내가 또 어디있겠는가?"

  "대군! 저는 그런 사내가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자네... 좀더 솔직해져보게.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원의 낭자의 마음을."

  현은 고요한 눈빛으로 명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 명은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그에 굴할 수 없었다. 사내도 아닌 자신이 원의를 좋아하고 연모해서 무에 소용있겠는가. 어차피 이뤄지지 못한 소중한 사람이라면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중 가장 좋은 곳은 자헌대군 이현의 곁이었다. 게다가 이전 정혼자이기도 했지 않은가.

  "저 같은 미천한 출신의 양반인 저보단... 그래도 지체 높으시고 진정한 사내인 대군께서 더 합당한 배필이지 않을까 하고..."

  다소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명을 보며 현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원의가 서있었다.

  "네가 뭔데 마음대로 날 어디로 보내는건데!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중요치 않은거야?"

  명이 깨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을 자헌대군에게로 보내려는 명의 말에 화가 나면서 복잡미묘한 표정의 원의가 씩씩대며 서있었다.

  "아, 아씨! 전 그런게 아니라... 아씨께서 좋은 혼처로 편하게 사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명이 앉아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온 원의가 명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니까, 네가 뭔데! 네가 내 가족이야? 남동생이 홀로 된 누이 시집보내려고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내가 연모하는 사람을 골라서 시집갈 권리가 있어. 근데, 네가 뭔데 나를 막 자헌대군한테 보내려고 그러는건데!"

  원의는 울면서 연신 명의 등을 쳤다. 솜방망이 같은 힘이라 그다지 아프진 않았지만, 등 대신 마음 안쪽이 아파왔다.

  그때 찻상을 들고 오던 일월이 열린 방문 사이로 명이 깨어난 것을 보고는 찻상을 대청마루에 버리듯 던져놓고는 들어왔다.

  "아니, 아씨! 왜 아픈 우리 도련님을 때리는건데요!"

  그럼에도 원의가 명을 힘없이 계속 치자 일월은 살짝 뿔이 났다. 제 사람인데 저리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그것을 또 밀어내지 않는 명이 얄미웠다.

  "아니, 왜 때리시는건데요. 이제 막 정신 든 사람을? 아씨가 뭔데, 제 서방님 때리냐고요!"

  한 사람은 바보마냥 가만히 앉아 등짝 맞으며 흔들거리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명을 감싸안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눈물범벅인 채 힘없이 팔을 내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내 입장은 아무도 듣지 않는거야?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거야? 허어...'

  현은 왠지 자신이 시중에 인기있다는 패관소설에서 나오는 사랑의 파괴자가 된 못된 왕족이 된 느낌이었다.

  셋이서 엉클어져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에휴!'하고 짧은 탄식과 함께 상처를 치료하고 남은 천들과 약초를 들고 방문 밖으로 나갔다.

  '왕족을 이리 부려먹는 이는 진헌이를 제외하곤 너 밖에 없을거다. 에휴, 내 팔자야.'

=======

독자님들~ 메리 크리스마스~~♡

드릴 산타 선물은 없고, 한편 투척하고 현생 출근하러 갑니당. ㅜ.ㅜ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초보 작가입니다. 사극 동양풍을 좋아합니다.

조선최고한량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