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uv - Mine

프롬님 :)

봉봉 오 쇼콜라

14





고구마에 우유와 꿀, 그리고 소금을 넣어 만든 고구마무스를 빵 위에 펴 바르고 베샤멜 소스를 얹은 크로크무슈는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해 토치질을 한다. 밑줄 쫙. 이탈리안 머랭에 버터를 넣어주는데 머랭과 버터의 상태가 버터크림을 좌우한다. 아! 머랭은 너무 오래 돌리면 차갑게 식는다. 이건 별표 다섯 개.

지민은 틈만 나면 여주에게 직접 배운 소중한 레시피가 한가득 적힌 노트를 들여다보곤 했다. 바로 어제 배운 팁을 직접 해보려고 빗을 사 온 지민은 캐러멜 소스를 묻혀 마구 흔들었다. 가느다란 실처럼 뽑힌 소스는 모아서 새 둥지 형태로 만들 수 있었는데 그 안에 아이스크림을 담으면 맛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좋았다.

지민은 아침잠도 포기하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고, 밤늦도록 그날 배운 레시피를 달달 외울 정도로 디저트를 사랑했다. 지민이 보는 여주는 르 생크 파티쉐라는 명성에 걸맞은 천상계 사람이었는데, 여주가 가르쳐주는 것들의 반만 따라가도 웬만한 레스토랑 파티쉐는 거뜬할 정도였다.



"지민씨 벌써 출근했어요?"

"앗. 파티쉐님 좋은 아침입니다! 저 안 그래도 막 궁금한 거 생겼는데. 마카롱 짤 때 손목에 힘 뺐는데도 자꾸 꼬리가 생겨요. 이거 왜 이러는 거예요?"

"지민씨. 저 손만 씻고………."

"앗. 죄송합니다."



우등생. 열혈 수강생. 강여주 일호 팬. 라뒤레에서 지민을 칭하는 이름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지민이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세상에서 제일 멋진 파티쉐가 될 사람' 이었는데, 그건 여주가 지어준 거였다.








아침 일찍부터 방송국에 도착한 여주는 네 시간 동안 내내 신기한 경험만 했다. 전문적으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는 게 처음이라 어색했고,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에 나서면 연예인을 마주하기도 했다. 미리 세트장에 도착해 스태프에게 설명을 듣고 대기하고 있으면, 똑같이 메이크업을 끝낸 태형이 여주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못 알아볼 뻔했네요."

"그 정도로 심하게 하지는 않았거든요?"

"아닌데. 나 다른 여자 옆에 가서 앉을뻔했는데. 진짜로."

"…카메라가 많아서 참는 줄 알아요."





"여기서 싸움 나도 재밌을 것 같은데. 라뒤레 셰프랑 파티쉐 둘 다 한 성격 한다고 소문나면, 인기 더 많아지지 않겠어요?"

"사장님이 퍽이나 좋아하겠네요."

"그 형은 그런 고생이라도 좀 해야지."

"갑자기?"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뭔데요. 여주가 물었지만 태형은 대꾸 없이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됐네요, 또 쓸데없는 말이겠지. 여주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스태프가 준 콘티를 다시 정독했다. 그러다 보이는 낯익은 이름에 여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셰프님. 홍남수 이 사람. 프라운스 셰프 아니에요?"

"맞아요."

"에? 여기 같이 출연하고 계셨어요?"

"지난주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추락했어요."

"그게 뭔 소리예요."

"내가 이겼다고."

"…축하드려요."

"땡큐."



이 사람이랑 같이 나오는지는 몰랐네. 여주가 턱을 매만지며 프라운스 셰프와 함께 출연하기로 한 파티쉐 이름을 확인했다.



"안젤라? 외국인인가."

"…뭐? 누구라고요?"

"안젤라요. 오늘 이 셰프랑 같이 출연하는 파티쉐님 이름."

"진짜 이 새끼가 돌았나."



왜요. 여주가 불안한 표정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의 시선은 때마침 세트장으로 들어오는 프라운스 셰프 쪽으로 향했다. 그의 옆에는 안젤라로 추정되는 파티쉐도 함께였다. 둘은 곧바로 태형과 여주 앞으로 다가왔다.



"Long time no see. 오랜만이야."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야? 너? 아님 너?"



이름만 보고 추측했던 것과 다르게 안젤라는 한국인이었다. 안젤라의 인사를 무참히 씹은 태형이 사납게 손가락질하며 둘을 번갈아 가리켰다. 프라운스 셰프는 실실 웃으며 여주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태형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쳐 웃는 거 보니까 네가 그런 모양인데."

"둘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 얘기가 많지 않겠어? 난 강여주 파티쉐님이랑 놀면 되는데. 자리 비켜줄까?"



십 분 후 슛 들어갈게요. 스태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형이 여주의 손목을 잡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대체 누구길래 그래요? 여주가 물으니 잠시 고민하던 태형이 덤덤하게 말했다.



"전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해요?"

"어떤 거요?"

"바람났다던 엑스. 성형했나. 강여주씨가 이름 먼저 말 안 했으면 몰라볼 뻔했네."



켁. 사레가 들린 여주가 켁켁대니 태형이 생수를 건네주었다. 당황해 허둥대는 건 태형이 아니라 여주였다. 누가 보면 전 여자친구가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 1을 만난 줄 알 정도로 태연했다.








냉장고 속 재료를 선택하고 요리를 구상할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15분 안에 만들 수 있는 디저트는 너무나도 한정적이었기에 여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프라운스 셰프를 흘긋 본 태형이 여주 곁으로 다가왔다. 구상을 끝낸 태형에게는 고정 출연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해볼 만할 것 같아요?"

"대충요. 티라미수 형식으로 만든 초코무스를 만들까 하는데."

"..."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오긴 했는데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

"제가 지면 셰프님 짜증 날 거잖아요."



작게 속삭이는 여주의 말에 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안젤라 역시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며 고심하고 있었다. 안젤라의 뒷모습을 본 태형이 여주의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초콜릿이랑 코코넛 과자면 되겠다. 자몽청이 있으니까 칵테일 와인도 충분하겠는데. 여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고민했다.



"대충 해도 돼요. 쟤 못해."

"네?"

"먹어봐서 아는데 강여주씨 디저트가 더 맛있어."

"언제는 그런 맛은 누구나 낼 수 있다더니."



과거 발언을 꺼내는 탓에 태형이 당황한 듯 짧게 헛기침을 했다. 민망해하는 모습에 여주가 풉 웃으니 안젤라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떨어졌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프라운스 셰프님이랑 안젤라 파티쉐님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라뒤레에 있을 때 헤어졌거든요, 내가."

"..."

"강여주씨가 못 봐서 아쉬워했던 라이브를 봤던 운 좋은 사람이 홍남수예요. 라뒤레에서 쫓겨나고 둘이서 명함 교환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나 엿 먹이려고 저렇게 합심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



역시 신경 안 쓰인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거겠지. 태형의 말을 듣고 있던 여주가 그럼 그렇지, 생각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 기댄 몸을 더욱 여주 쪽으로 기울였다.




"안젤라가 뭘 하든 안중에도 없어요."

"..."

"나 지금 강여주씨한테 어필하는 건데."



완성된 초코무스를 담을 컵을 고르던 여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듣기 좋은 태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꼭 이겨야겠네. 중얼거린 여주가 가까스로 예쁜 컵 하나를 꺼냈다.



"져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럼 내가 빡칠 것 같아서."

"..."

"우리 둘 다 이기고 봐요."



태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촬영을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로 돌아간 태형은 그 옆에 선 프라운스 셰프와 벌써부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주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재료 선택을 마친 안젤라가 고개를 돌려 여주를 쳐다봤다. 둘은 별다른 말없이 짧게 묵례하곤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올리브오일과 참기름을 두른 팬에 채 썬 적양파와 홍고추, 그리고 대파를 볶는다. 구운 아스파라거스에는 불고기 양념과 굴 소스를 바르고 다른 팬에는 밥을 넓게 펴서 굽는다. 메인 재료인 차돌박이 여러 장을 겹쳐 넓게 모양을 만든 뒤 살짝만 구워 롤을 만들고, 롤 크기에 맞게 노릇하게 구운 밥을 자른 뒤 채소볶음과 잘게 썬 쪽파를 얹으면 태형의 요리는 끝이 난다.

미니 절구에 초콜릿과 코코넛 과자를 부숴 곱게 빻는다. 마른 팬에 설탕을 녹이고 뜨거운 물과 버터, 초콜릿을 넣고 한 번 더 녹인다. 우유와 청주, 달걀노른자까지 전부 넣어 섞고 머랭을 섞으면 초콜릿 무스였다. 미리 골라두었던 예쁜 컵에 코코넛 과자와 초콜릿 무스를 층층이 담고 그 위에 초콜릿을 갈아 올리면 완성이었다. 화이트 와인과 자몽청, 레몬즙, 얇게 썬 사과를 섞어 만든 칵테일 와인까지 곁들이면 여주의 요리도 끝이 났다.

냉장고 주인은 태형과 여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완벽한 압승이었다. 안젤라까지 동원해 태형의 멘탈을 깨부수려던 프라운스 셰프의 계획은 산산이 조각났다. 분에 찬 프라운스 셰프는 카메라의 빨간불이 꺼지자마자 씩씩거리며 대기실로 사라졌다.



"라뒤레에서 일하시는 분이세요?"



집기를 정리하던 여주에게 안젤라가 다가와 물었다. 그렇다는 여주의 대답에 안젤라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그럼 태형이랑 특별한 관계는 아니신 거 맞죠? 안젤라가 좀 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되려고 노력 중이지."



아니라고 정정하려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주도 입을 꾹 다물었다. 영훈과 맞닥뜨렸을 때의 감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터라 태형이 어떤 기분일지 알 것도 같았다.



"의외다. 홍남수한테 여기 출연해달라는 제의 받고 좀 설렜는데. 다른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

"왜. 그때 바람피우던 놈이랑은 헤어졌나 보지."

"백만 년 전에 헤어졌지. 너 생각 많이 나더라."

"난 하나도 안 나던데. 강여주씨 이만 가죠."



태형이 여주의 등을 부드럽게 밀며 세트장을 벗어나려 했다. 나중에 밥 한번 먹자! 뒤에서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자는데요. 태형이 대꾸를 하지 않으니 여주가 말을 전해주었다.



"뭐. 밥 먹자고?"

"네? 나 말고 저분이,"

"오케이. 콜."



완전 다 제멋대로야. 여주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태형도 따라 웃었다.








방송 언제 나와요? 본방 보려면 일찍 퇴근해야 하는데 사장님이 허락해 주실까요? 디너를 준비하는 지민의 말끝마다 물음표가 달려있었다. 처음엔 대꾸해 주던 여주도 지쳐 입을 다물었더니 정국까지 합세했다.



"있잖아요, 파티쉐님. 요즘 셰프님이 기분이 좀 좋으신 것 같더라구여."

"그래요?"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파티쉐님 앞이니까 말씀드릴게여. 사실 제가 정리가 쪼끔 느린 편이거든여. 그래서 셰프님 성에 안 찰 때가 무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맨날 '야이새꺄여기서맛있는요리가나오겠냐?' 이러면서 면박 주신단 말이에요."

"..."

"근데 제가 오늘 런치 때 일이 너무 많아서 쪼끔 밀렸는데 평소 같았으면 화내시고도 남았는데 별말 안 하시더라니까여?"

"아, 네…. 그랬군요. (지침)"

"아이. 파티쉐님이 뭘 모르시네. 이건 라뒤레 역사상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구여."

"곧 디너인데 주방 안 가면 그 역사 깨질 것 같아요, 정국씨."

"악! 저 갑니다!"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란 정국이 쏜살같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베이커리와 그다지 멀지 않았기에 뭘 하다 이제 왔냐며 소리치는 태형의 목소리가 여주에게까지 들렸다. 화 안 내기는 무슨. 여주와 지민이 동시에 웃었다.





"촬영은 잘 했어요?"



디너가 시작되기 십 분 전. 윤기가 베이커리에 들어오며 물었다. 준비를 마치고 허리를 쭉 펴던 여주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쿠, 화장실…. 눈치껏 자리를 피한 지민 덕분에 베이커리에는 단둘이 남게 되었다.



"아까 들었는데 프라운스 셰프도 출연 중이라면서요. 우리 셰프랑은 안 싸웠습니까?"

"싸운 거나 다름없는 것 같은데…."

"워낙 라뒤레에 악감정이 있는 사람이라. 태형이가 그걸 참고 넘어갈 성격도 아니고. 또 어떻게 싸웠어요?"

"안젤라 파티쉐님을 데려오셨더라고요."

"……누굴요? 안젤라를?"



태형이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헤어진 거라고 했으니 당연히 윤기도 알겠거니 해서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다. 역시나 태형의 이야기를 모두 아는 윤기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태형이 괜찮았어요?"

"괜찮던데요.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제가 다 놀랐어요."

"..."

"신기하고 좀 묘하더라고요. 사장님이나 저는 그러질 못했잖아요."

"..."



윤기의 당황한 표정은 사라지고 차츰 굳어갔다. 라뒤레에서 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번번이 마주쳤던 김영훈과 부딪히는 일들에 무던하지 못했던 날들. 오 년 만에 연화를 만나 혼란스러워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긋났던 순간들. 무엇 하나 꺼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지만 윤기와 여주 사이에는 그게 전부였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 일들인데 피해 보는 건 우리였잖아요."

"..."

"근데 셰프님은 안 그렇더라고요. 분명 우리처럼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인데. 그 사람 성격인가. 그건 좀 부럽더라고요."

"..."

"김영훈 안 본 지 좀 돼서 그런가. 저는 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장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차라리 욕해줬으면 좋겠네. 여주씨 화 풀릴 때까지 듣고만 있을 자신 있는데."

"욕한다고 풀릴 거였으면 진작했죠. 근데 뭐. 그런 류의 감정이 아니라."

"…이해합니다."



윤기와 여주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할 말이 뚝 끊기니 이어 나갈 무언가가 없었다. 홀에서 디너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남준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때맞춰 화장실을 다녀온 지민이 베이커리로 들어왔다.



"디너도 힘내주세요."

"..."

"…강여주씨."



윤기의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여주가 입술을 말아 물고는 냉장 보관해둔 반죽을 꺼냈다. 막 들어온 손님의 정보를 체크하는 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라뒤레의 디너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오랜만의 운동이었다. 정말로 데스크 직원이 있는 곳이었더라면, 태형의 농담대로 여주의 존재도 잊었을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괜히 민망해진 여주가 쭈뼛대며 헬스장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태형을 마주치면 분명 놀릴게 뻔했기에 여주가 꼼꼼하게 헬스장 내부를 살폈다. 다행히 태형은 없었다. 안심한 여주가 그제야 허리를 꼿꼿이 펴고 러닝머신으로 향했다.



"웬일이에요? 난 강여주씨가 회원권 당근에 내다 판 줄 알았지."

"에이씨."

"지금 나보고 에이씨라고 한 거예요?"

"없는 줄 알았는데."

"하. 참나."

"오랜만에 올 수도 있죠, 뭐. 안 까먹고 온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하다고요."



여주가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되려 목청을 높였다. 그래요, 대견하네요. 태형이 놀리는 투로 말했다. 태형의 시선을 억지로 피한 여주가 러닝머신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태형이 바로 옆의 러닝머신에 올라탔다.



"그러지 말고 퇴근하고 나랑 같이 운동 오면 되잖아요."

"제가 왜요?"

"여주씨같은 사람들은 헬스장 문 여는 게 가장 힘든 일 아니에요? 나는 매일 오니까 지금보다는 돈 안 아까울 것 같은데."

"..."

"정곡 찔린 얼굴인데."

"…안 아깝거든요. 돈 많이 벌어서."

"형이 사적인 감정 넣어서 돈 많이 준 건 아닐 테고."

"아, 진짜!"

"장난, 장난."



눈을 흘긴 여주가 태형의 머신 속도를 최대로 높이려 손을 뻗었다. 그보다 빨랐던 태형이 여주의 손을 잡아챘다. 졸지에 손이 잡혀버린 여주가 이도 저도 못하다 겨우 잡힌 손을 빼냈다.



"갑자기 손은 왜 잡아요."

"손잡은 게 아니라 나 넘어질까 봐 막은 건데. 생존본능."

"..."

"생존 빼고 그냥 본능인가?"

"미쳤나 봐."



태형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말 걸지 마요. 여주가 단호하게 말하고 작동을 시작하니 태형은 정말로 말을 걸지 않았다. 자꾸 옆에서 속을 긁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조용한 탓에 여주가 곁눈질을 했다. 태형은 여주보다 한 단계 높은 속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삼십 분 동안 대화 없이 러닝머신을 달렸다. 먼저 끝낸 여주가 오랜만이라 어색한 헬스장 안을 배회하다 딥스 기구 앞에 섰다. 사람이라도 좀 있으면 어떻게 사용하는지 훔쳐보다 따라 하면 좋겠는데 태형을 제외한 사람은 딱 한 명으로, 다른 기구를 사용 중이었다.



"가르쳐줘요?"

"할 줄 아세요?"

"강여주씨는 하도 안 와서 모르겠지만, 한 타임 전에는 운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양팔은 일직선으로 두고 팔꿈치는 안 벌어지게 신경 쓰면서. 복부에 힘 꽉 주고. 딥스에 올라탄 태형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들을 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김태형씨……, 저 포기."

"그 정도면 많이 했어요. 오랜만에 운동하는 건데 무리하면 덧나요."



여주가 결국 나가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또 놀릴 줄 알았지만 태형은 그저 수건을 건네주기만 했다. 여주가 미심쩍은 눈으로 태형을 올려다봤다.



"왜요."

"안 놀리네."

"더 놀렸다간 점수 깎일 것 같아서."

"깎일 점수도 없거든요?"

"..."



태형이 눈썹을 치켜뜨곤 여주의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수건으로 땀을 닦던 여주가 쳐다보니 바닥에 놓인 물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목이 탔던 여주가 한 번에 물을 반병이나 비웠다.

여주를 가만 보던 태형이 손을 뻗었다. 아까 러닝머신에서 손을 잡혔던 게 생각난 여주가 흠칫하며 몸을 뒤로 살짝 뺐다. 태형의 손은 여주의 헤어밴드로 향했다. 격한 운동을 한 탓에 삐져나와 땀에 젖은 잔머리를 다시 밴드 안에 넣어주었다.



"나 깎일 점수도 없어요?"

"..."

"왜?"

"..."





"강여주씨 아직도 나 안 좋아해요?"

"..."

"어렵네. 어필하는 거. 심심하면 방법 좀 알려주지."




레시피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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