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에 이정표를 제시하는 시험이 끝난 학교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확히는 2학년이 3학년과 함께 쓰는 뒤쪽 건물에 맴돌았다. 3학년 교실은 저녁이면 비어버렸고, 사람이 있는 낮에도 시종일관 차분했다. 반면 2학년 교실에는 일 년 앞으로 다가온 시험을 두고 저마다 다른 셈법이 자리했다. 기말고사의 분위기는 일 학기 때와 달리 한층 더 날이 서 있었다. 이런 예민함은 1학년 교실로까지 전달되었고, 모든 동아리는 당분간 활동을 중지했다. 연보라와 차고운은 서로를 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과외 시간에 차고운과 마주한 양선우는 변해버린 거리감을 두고 고민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두 사람 중 누군가 마음을 들켰으리라 짐작했다. 이마저도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양선우는 성적 욕심이 많아 애들 장난 같은 사랑 놀음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찾아왔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겨울방학 동안, 차고운은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수능이 끝난 오빠를 위해 다녀온 유럽 여행에서, 차고운의 아버지는 차고운과 오빠에게 자기 자랑을 겸한 조언을 늘어두었다. 자신이 고도화된 경쟁 사회에서 여태껏 버티는 이유, 또래의 남자들보다 이른 성공을 손에 쥐고, 부를 물려줄 수 있는 이유, 타인보다 자신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모든 이유를 설명했다. ‘유학’ 남매의 아버지가 약속한 것은 한 가지였다. 눈을 빛내는 오빠처럼 차고운도 자신의 앞에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차고운은 지금,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하는, 시간 낭비라 여기던 ‘연극’을 위해 정규 수업이 끝나고 남았다. 

 

 별 이유는 없었다. 연극제가 끝난 뒤, 복도를 지날 때면 듣던 ‘차고운 연기 잘한다더라?’나 학교 축제가 끝나고 들리던 ‘차고운은 연예인 하겠네.’ 같은 달콤한 칭찬 때문은 아니었다. 그 뒤를 따라오던 ‘연보라가 컨디션 나빠서 걔가 주목받은 거래.’나 ‘역시 연보라 끼가 미쳤네.’ 같은 비교에 울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딱 일 년만 더 견뎌보고 싶었다.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해냈다는 사실에 취해보고 싶었다. 어두운 무대 위에 서서 자기 호흡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 잠깐이 그리웠다. 부모님이 골라주신 선생님을 정해진 시간에 만나고, 학교 시험문제와 비슷한 문제를 매일 같이 기계적으로 풀어보는 삶에 질렸다는 것도 한몫했다.

 

 차고운은 무대 위에서 자유를 느꼈다. 그래서 그 자유를 조금 더 누리고 싶었다.

 

 “고운아, 아까 면접 온 일 학년 애들 봤어?”

 “응.”

 

 학년이 바뀌고 제법 가까워졌다고 여긴 건지, 동기들은 차고운에게 살갑게 굴었다.

 

 “이 언니가 미모가 좀 되니까! 애들이 오는 거 아니겠니?”

 “뭐? 나 보러 왔다던데?”

 

 입담 좋다는 동기의 시답지 않은 농담에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입을 벌려 우하하 하고 웃는 연보라가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차고운이 예상했던 일은 아니었다. 자기와 거리를 두듯 서는 연보라와 내외하듯 구는 것도, 연보라의 유쾌한 모습을 외면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것도 차고운 입장에서는 불편한 일일 뿐이었다. 그런 차고운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연보라는 자신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던진 말에 냉담한 차고운의 반응이 달갑지 않았다. 으레 하는 질문이라는 듯, 다른 친구의 시답지 않은 말에 대응하고, 차고운을 흘긋거렸다. 연보라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굴러다니던 각본을 넘기는 차고운이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연습실을 가로지른 시선이 얽히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연보라는 차고운과 눈을 마주칠 때면 늘 눈알이 따끔거렸다. 차고운은 연보라가 즐겨 서 있는 창가에 기대어 선 채, 창을 통해 부옇게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눈을 감았다. 아직 차가운 바람 사이로 봄바람이 살랑이며 섞여들었다.

 

 “작품 고르자.”

 

 한바탕 깔깔거리던 아이들 앞에 나타난 작년의 실장 선배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몇 묶음의 종이를 가져왔다. 지도 교사는 변함이 없었고, 이사장님은 지역 신문에 얼굴을 비추었다. 연극부는 여전히 이 사립학교의 자랑이었다. 고르고 골라온 작품을 하나씩 돌려보던 아이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작품 이름을 외웠다. 연보라는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어 한참이나 종이 묶음을 뒤적였고, 차고운은 이제 막 꼼꼼히 살펴본 극본을 내밀었다. 

 

 “이거 봐.”

 

 갑자기 가까워진 손에 놀란 연보라와 달리, 차고운은 얼른 가져가라는 듯 손목을 까딱거렸다. 제목이 인쇄된 첫 장을 넘기고, 차분히 등장인물을 살피던 연보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든 등장인물은 진취적이었으며, 이전 작품처럼 이기심만을 말하지도 않았다. 작품을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는 사랑이었고, 이는 연보라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담고 있었다.

 

 “저는 이거 마음에 들어요.”

 

 인근 대학의 연극 동아리에서 만든 극본이었다. 연보라는 당연히 주인공을 욕심냈으며, 이는 차고운도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작품을 마음에 담았을 뿐….

 

 “그러면 일단 각자 마음에 드는 작품 짚어보자.”

 

 마치 제품을 영업하는 사람처럼 저마다 해당 각본에 손을 올린 채, 왜 이 각본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가 떠들었다. 누군가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꼽았고, 누군가는 화려하게 꾸밀 수 있는 무대라, 누군가는 지나치게 무겁지 않아서, 그리고 누군가는….

 

 “사랑이잖아요.”

 “야, 여기도 사랑이야.”

 

 핀잔주듯 나서는 말에도 굽히지 않는 의견.

 

 “사랑이 아니면 극을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결국 다 사랑 이야기잖아요. 물체나 사람이나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야기가 극이 아닐까요?”

 “철학적인 내용은?”

 “삶에 대한 사랑?”

 

 궤변에 가까운 논리에도 아이들은 반짝이는 연보라의 눈을 보며,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배, 언니, 저는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요. 일단 등장인물이 다양하니까 일 학년들도 기회가 주어질 거고, 엄청난 분장이 필요하지도 않고, 등장인물 성별이 정해지지 않아서 저희가 해석할 수 있는 범위도 있고요.”

 

 쉬지 않고 떠드는 연보라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사람들은 연보라의 입술이 맞닿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차고운은 멍하니 앉아 연보라의 입술만 보며, 왼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어…. 물론 선생님이 보시고 오케이 하셔야겠지만, 저는 이게 좋다고요….”

 

 자신을 향한 눈빛에 놀란 연보라가 말끝을 흐렸고, 연극부원들은 가볍게 손뼉마저 쳤다. 차고운은 입술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부딪쳤다. 부장이 되어버린 실장은 연보라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연보라 손에 들렸던 극본을 집었다. 

 

 “그러면 나 선생님께 허락받고 올게!”

 

 부장이 나가며 어수선해진 연습실.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새 학기의 설렘을 나누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연보라는 창틀에 기대어 섰다. 그런 연보라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던 차고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보라 옆에 다가갔다. 움찔거리는 연보라의 몸짓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조금 더, 조금 더, 한발씩 거리를 좁혀 마침내는 팔꿈치와 팔뚝이 닿는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연보라는 한숨을 푹 쉬고 물었다.

 

 “자리 넓은데 왜 굳이 여기로 와?”

 “이 자리가 전용석이라도 돼?”

 “아니? 근데 굳이 여기로 오냐고…. 저기 저렇게 자리가 넓은데…. 그리고 오늘 좀 춥거든?”

 

 반 뼘 열린 창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어. 그래서 왔는데? 왜? 불만 있어?”

 “뭐? 무슨….”

 “더워서 그래. 싫으면 네가 저기 가면 되겠네.”

 

 차가운 창턱이 등을 식혔고, 차고운은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하여튼…. 차가운, 네 마음대로 해라.”

 

 콧방귀를 뀌고 몸을 움직이는 연보라의 손목을 차고운이 다급하게 잡았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연보라의 눈에는 이제 막 들어온 바람에 가볍게 흩어지는 차고운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먼지투성이 커튼이 살랑이듯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연보라의 코를 간질였다. 

 

 “에취! 어? 야! 미안!”

 

 커튼에 있던 케케묵은 먼지 때문인지, 차고운의 샴푸 향기 나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때 이른 꽃가루 때문인지 재채기를 한 연보라는 제 타액이 향한 곳을 보고는 놀라서 소리마저 질렀다. 차고운은 턱 아래로 튀어버린 액체에 놀라 몸이 굳었고, 재킷 깃을 손으로 툭툭 털며 연보라를 바라보았다. 다만 그 눈빛이 날카로워서 연보라가 흠칫 놀라 동작이 커졌을 뿐…. 

 

 “으아…. 내가 다 닦아줄게….”

 

 옷 소매를 늘려 손에 쥔 연보라가 투박하게 닦아내는 침이 묻은 곳은 차고운의 가슴께였고, 자꾸만 스치는 손길에 한껏 예민해진 차고운이 연보라를 밀쳤다. 구부정하게 서서 옷을 닦아주던 연보라는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이 소란에 놀란 아이들이 연보라를 일으켜 세웠다. 

 

 “넌 진짜….”

 

 뒷말을 잇지 못한 차고운은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고, 영문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저마다 차고운의 변치 않는 태도에 대해 왈가왈부했다. 속을 알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저마다 말을 보태는 아이들 사이에 서서 연보라는 소매만 꼭 쥔 채 고개를 떨구었다.


 *****


 일련의 소란이 지나고, 1학년 신입생을 일곱이나 뽑은 뒤 가지게 된 공식적 첫 모임. 잔뜩 긴장한 채 손을 모아쥐고 선 일곱 명의 신입생은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차고운을 보고는 저마다 입을 벌렸다. 차고운에게만 하이라이트가 쏟아지는 기분에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차고운은 이런 관심이 익숙한 듯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고, 연보라는 부장을 도와서 극본 뭉치를 안아 들고 들어왔다. 

 

 “벌써들 와 있었네?”

 

 부장은 신이 나서 말했고, 작년보다 한 명 더 늘어난 신입 부원을 보며 입꼬리를 늘렸다. 

 

 “자, 우리 오늘 첫 모임인데…. 선생님은 일이 있어서 삼십 분 뒤에 오신다고 했거든? 이거 우리 지역 연극제에 출품할 작품이고….”

 

 연보라를 향한 고갯짓에 연보라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한 사람씩 극본을 나눠주었다. 차고운 앞에 이르렀을 때, 연보라는 손을 떨었다. 

 

 “이거 읽어보면서 선생님 기다리면 될 것 같아!”

 

 밝게 웃은 부장이 맨 첫 장을 넘기고, 오늘 모임에서 배역을 모두 정하고 가자는 말도 남겼다. 연보라는 종이가 팔랑이는 소리에 집중하며 양 끝을 꼭 쥐었다. 어쩌다 보니 맞은편에 앉은 차고운의 뜨거운 눈빛을 보며, 주인공의 대사가 잔뜩 적힌 세 번째 장에 손을 고정한 것을 보며, 아무래도 차고운과는 친해질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연보라에게 차고운은 경쟁자이며, 자신에게 사랑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 연보라에게 차고운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연보라는 급식실 앞 잔반 처리대에 사는 고양이를 사랑한다고 답했을 것이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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