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며 교복 안주머니, 왼쪽 가슴 부근에서 열쇠를 꺼내다가,

 

짤그랑,

 

열쇠들끼리 맞부딪쳐 금속음을 내며 끌려 나오던 그것이 어떻게, 정말 우연히도, 신의 장난처럼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져 계단에 한 번, 그 언저리에 한 번 부딪히는 소리를 내더니 곧 잠잠해졌다.

 

순식간이었다. 호열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계단 손잡이를 잡고 아래쪽을 살폈다. 녹슨 철 계단 아래쪽은 관리되지 않은 수풀 같은 곳으로 갖가지 쓰레기와 담배꽁초,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곳이었는데, 시간은 자정이었고 그러니 어두웠으며 이 낡은 연립주택 2층 복도의 등은 늘 고장나 있는 데다가 골목에 선 가로등의 불빛도 시원찮았다.

 

한마디로 거기 빠진 열쇠를 찾기 어려운 심연이었다.

 

“젠장.”

 

호열은 나직하게 내뱉었다. 열쇠는 두 개였다. 하나는 집 열쇠, 하나는 스쿠터 열쇠. 졸지에 집과 차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 셈이다. 게다가 하나를 더 잃었다. 심장과 같은 것.

 

시커먼 나락 속을 들여다만 보다가 깔끔하게 시선을 돌렸다. 호열은 상황판단이 빨랐다. 아르바이트로 피곤하고, 졸리고, 얼른 자고 싶다. 당연한 선택지는 하나다.

 

가장 가까운 데 사는 백호네 집으로 갔다.

 

무작정 문을 두드리자 곧 “누구야.” 하는 불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홱 열렸다. “백호야.” 호열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백호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냐?”

 

퉁명스러운 한마디였으나 호열은 그게 백호가 반가움을 감출 때 지어 보이는 쑥스러운 표정과 말투임을 알고 있었다.

 

“열쇠 잃어버렸다.”

 

호열은 익숙하게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는 동시에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좁은 현관 빼곡하게 서 있는 백호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밀쳤다. 백호는 호열이 미는 대로 비켜 주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는 호열의 뒤를 입 쩍 벌리고 하품을 하며 어기적어기적 따랐다.

 

“자고 있었냐?”

“방금 누웠어.”

 

다다미 육첩 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고 누웠던 흔적이 역력했다. 백호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줄을 잡아당기려 하는 것을 호열이 팔꿈치로 툭 쳐 제지했다.

 

“됐어. 자라. 난 좀 씻을게.”

“엉. 그래라.”

 

호열은 마음대로 백호의 옷장을 열어 늘어난 티셔츠와 고무줄 바지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빠르게 샤워를 끝낸 후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나오니 집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백호가 자기 잠자리 옆에 바싹 붙여 이부자리를 한 채 더 깔아놨다. 본인은 팔다리를 대자로 벌리고 자고 있어 옆자리까지 팔다리가 침범했다.

 

호열은 피식 웃으며 발로 툭, 베개에 걸쳐진 팔을 치웠다. 이불을 걷고 들어가 눕는다. 백호가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더니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호열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백호를 마주 봤다. 눈 감긴 백호의 얼굴. 입을 벌리고 숨을 푸푸 내뿜으며 애같이 잔다.

 

호열은 그 얼굴을 한동안 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반듯이 누웠다. 어스름한 천장을 올려다본다.

 

“백호야.”

 

들려오는 숨소리.

 

“나 그거, 꼭 찾아야 하는데.”

 

푸스스. 푸스스.

 

“열쇠고리.”

 

고로롱. 숨넘어가는 소리.

 

호열은 다시 백호를 흘깃 봤다. 숨이 꼴깍 목구멍 뒤로 넘어가더니 소리는 다시 평온해졌다. 깊이 잠든 숨소리에 귀 기울인다. 쿨쿨 잘도 자는 강백호.

 

호열은 중얼거렸다.

 

“꼭 찾아야 하는데.”

 

 

 

*

 

 

 

강백호는 순간만 사는 남자다. 그 녀석은 오늘 마흔아홉 번째로 반해버린 여자애한테 무작정 고백을 했다. 호열이 보기에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 여자애는 백호에게 마음이 없었다. 사실 여자애들 심정도 이해가 됐다. 그렇게 고백을 남발하는 남자라니, 반반하게 생긴 여자면 누구든 다 찔러보는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백호는 사실 그런 놈은 아니지만. 그 녀석은 사실 정말 순수하게 각각의 여자애들한테 반했던 것이었다. 반한 여자애 외에는 전혀 딴 사람을 눈에 담지 않았다. 차인 다음에는 울면서 결과를 하릴없이 받아들였다. 강백호는 너무도 단순하고, 너무도 즉흥적이고, 너무도 직선적일 뿐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백호 군단은 마흔아홉 번째 실연을 당한 백호를 낄낄거리며 놀리고, 나팔을 불고, 색종이를 뿌려주고, 그다음엔 익숙하게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파르페와 나폴리탄 스파게티, 커피와 콜라와 감자튀김을 시켜놓고 실연 파티를 열어주었다. 강백호는 훌쩍거리며 불우한 현실을 개탄했다. 호열을 비롯한 네 명의 친구들은 적당히 백호를 얼러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또다시 놀려대고, 마지막으로 다음엔 좀 잘해보자고 격려해 주었다. (당연히 아무도 ‘다음’이 잘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호열은 백호가 후룩거리는 스파게티 가락이 입가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 걸 보고 냅킨을 뽑아 닦아주고, 흘끗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오늘은 나 먼저 들어가 봐야겠다.” 하고 말을 던지니 녀석들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 가냐?”

“아니, 열쇠 찾아야지.”

“열쇠? 아, 어제 잃어버렸다고 했지.”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야 돼. 이러다간 집에 영영 못 들어가겠다.”

 

호열의 말에 친구들은 각기 “그래라.” 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백호만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 자면 되잖아.”

“매일 그럴 순 없잖아.”

“오늘은 자고 가야지. 친구가 실연까지 당했는데! 날 버리고 갈 거냐?”

 

큼지막한 손이 호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호열이 “그러다 이틀 되고 사흘 된다. 내가 너네 집에서 살리?” 하며 손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백호는 옷을 잡아당겼다. “야, 찢어진다, 찢어져.” 호열이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알았어. 너네 집에서 잘게.”

“오, 진짜냐?”

 

백호가 활짝 웃었다.

 

“그래. 그거나 마저 먹어. 녹는다.”

 

백호는 다시 식욕이 도는지 파르페를 기쁜 얼굴로 퍼먹었다. 김대남이 혀를 찼다. “사내자식이 혼자 잔다고 아직도 무서워하면 어떡하냐.”

 

“무, 무슨 헛소리야! 무서운 거 아니거든?!”

 

백호가 발끈해서 즉시 김대남의 멱살을 붙잡고 쾅! 이마를 맞부딪치니 김대남이 하릴없이 쓰러졌다. 강백호가 눈을 부라리며 다른 녀석들에게 “너희도 맛 좀 보여줄까? 엉?” 하고 윽박지르자 남은 두 명은 몸을 피했고 양호열은 강백호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줬다. 야, 백호야, 실연까지 당한 놈이,

 

“기운이 왜 이렇게 넘치냐. 햄버거 하나 더 먹을래?”

“엉? 진짜?”

“실연 기념으로 내가 사 줄게.”

“와! 호열이 너밖에 없다!”

 

친구들이 서로 눈짓했다. 저 쉬운 녀석.

 

다섯 명은 거기서 있을 만큼 한참을 뭉개고 있다가 저녁 먹으러 온 손님들로 매장이 북적거릴 즈음 식당을 나왔다. 백호 군단은 한동안 길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쏘다니며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고 핫핫핫 웃어댔다. 웬일인지 오늘은 아무 불량배한테도 시비 걸리지 않아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어느새 늦은 저녁이 되고 어두워졌다. 추운 날이었다. 봄이 머지않았지만 해가 지니 아직 한기가 감돈다.

 

“백호야, 안 춥냐?”

“하나도 안 추워. 호열이 너는 춥냐? 약해빠졌긴.”

 

백호가 뻐기며 킬킬거렸다. 사실 강백호는 추위를 별로 안 타서 겨울에도 반바지 입고 쓰레빠를 끌고 다니는 것 같은 미친 짓거리를 하는 인간이니까 별로 물을 것도 없었다. 그래도 호열은 꼭 한 번씩 이렇게 묻게 됐다. 쓸데없는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게 있다.

 

“호열아, 저 튼튼한 거 걱정해줄 거면 나나 좀 걱정해 주지?”

 

노구식이 코밑을 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감기 기운이 있을락 말락 하는 것 같다고 했던가. “어, 괜찮냐?” 호열은 웃는 얼굴로 물어봐 주었다. “됐다, 인마.” 노구식이 투덜거렸다.

 

“엎드려 절받기지.”

“절까지 받고 싶냐.”

“양호열 이 새끼는 진짜.”

 

노구식은 투덜거리며 발길을 팩 돌렸다.

 

“됐다, 됐어. 감기 도지기 전에 난 갈란다.”

“어?! 벌써 가냐?!”

 

백호가 큰소리를 냈다. 노구식이 “춥잖아. 돈도 없고. 내일 보자.” 매정하게 인사를 고했다. 그걸 시작으로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씩 사유를 꺼내 들어 모두 흩어져 갔다. 백호 옆에 남은 건 양호열 한 사람뿐이었다. 강백호가 입술을 쑥 내밀고 쭝얼쭝얼했다.

 

“에잇, 약한 녀석들. 감기 따위에 지다니. 이 천재처럼 몸을 단련하란 말이야.”

 

그러더니 호열을 홱 돌아봤다.

 

“너도 갈 거냐?”

“내가 어딜. 네가 안 재워주면 잘 데도 없는데.”

“히히. 그렇지? 너 인마, 친구 잘 둔 줄 알아라!”

 

백호는 헤벌쭉 웃으며 호열의 목에 한 팔을 감았다. 호열은 웃는 얼굴로 백호의 허리에 한 팔을 두르고 서로 얽힌 나무 두 그루처럼 척척 거리를 걸어갔다.

 

저녁이 되자 상점가는 떠들썩해진다. 과일 가게 앞은 알록달록 조명을 켜고, 빛이 흘러나오는 약국, 그 옆은 접골원, 그리고 빵 가게, 찻집, 꽃 가게. 정육점에서는 튀김 냄새가 풍겨왔다.

 

“저녁거리 사 가자.”

 

정육점 앞에서 호열이 멈춰 섰다. 백호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튀긴 어묵과 고로케 한 봉지를 두둑이 샀다. 돈은 당연한 듯이 호열이 냈다. “알바비 받은 지 얼마 안 됐거든.” 하고 지갑을 꺼내며 호열이 씩 웃어 보였다. “형님이 쏜다.”

 

봉투는 백호가 품에 안고 갔다. 고로케를 세 개째 꺼내 먹으면서 호열의 입에도 물려줬다. “그러다 집에 가기 전에 다 없어지겠다.”고 호열이 가볍게 타박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백호는 고로케를 한입에 꿀꺽 했다. 뜨겁지도 않나. 백호 입 가죽은 고래 입 가죽인가.

 

백호네 집으로 갔다. 오늘도 열쇠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백호는 기뻐 보였다. 백호는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있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이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언제나.

 

호열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복을 벗어서 옷걸이에 잘 걸어 놓았다. 티셔츠는 곧바로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백호야. 네 것도 내놔.”

“응.”

 

백호는 순순히 교복을 따라 벗어서 티셔츠며 양말을 세탁기 속에 함께 던졌다. 섬유유연제까지 착실히 넣어서 돌린다. 호열은 그동안 가쿠란 재킷에 묻은 얼룩을 꼼꼼히 살피고, 목깃을 손으로 빨고, 각 잡아 다림질을 했다. 내친김에 백호 것도 같이해줬다. 개 같은 아버지랑 이혼해 따로 사는 어머니에게서 어릴 때부터 배운 생활의 습관이다. 자신의 몸과 거기에 걸치는 것을 청결하게, 깔끔하게, 단정하게 유지하는 것. 호열은 딱히 집안일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세탁과 옷 손질만큼은 훌륭하게 수행한다.

 

“호열이 너랑 살면 정말 잘 맞을 것 같다.”

 

백호가 옆에서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일 년 반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는 강백호의 경우에는 생각보다 먹는 건 잘해 먹고 산다. 집주인 아주머니나 아랫집 할머니가 반찬을 챙겨 주시기도 하고, 본인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서 밥 짓는 거나 값싸고 간단한 재료로 이따만큼 밥반찬 만드는 데 도가 텄다. 다만 세탁이나 그 정리에는 무심하다. 둘이 잘하는 분야가 다르니, 그래, 어쩌면 같이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구두도 닦자. 내놔 봐.”

 

두 켤레 학생 구두를 구두약 묻혀 솔로 싹싹 닦자 광이 났다. 백호 녀석, 평소엔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데 오늘은 고백한다고 구두를 신었다. 짜식. 그래도 소용없었지만.

 

언제 또 신을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그날은 올 테니 정성 들여 닦아 주었다. 구두뿐 아니라 백호가 매일같이 그 공들인 리젠트 머리와 깨끗한 티셔츠와 목깃에 때 묻지 않은 가쿠란 차림을 유지하는 것은 양호열의 공이 컸다. 지금은 먼 거리에 사는, 재가한 어머니는 사람의 품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호열은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적어도 겉모양만큼은 멀끔하게(부릴 만큼 멋을 부리며) 유지하고 산다. 사람의 품위란 것이 이런 것으로 형성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할 일은 거기서 끝냈다. 두 사람 모두 가방은 다시 열어 보지 않는다. 어차피 교과서며 노트는 책상 서랍 속에 다 넣고 다닌다. 가방 속에는 책이 없다.

 

백호가 1.5리터짜리 콜라 페트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왔다. 전에 군단 녀석들이 놀러 오면서 한가득 사 온 과자봉지가 아직 남았다. 그걸 까먹으면서 같이 텔레비전을 봤다. 저녁거리로 사 온 고로케와 튀긴 어묵도 깨끗이 먹어 치웠다. 백호는 밥까지 두 공기 퍼서 잘게 썰어 매콤하게 무친 단무지 반찬이랑 같이 내왔다. 아랫집 할머니가 갖다주신 거라고 했다.

 

백호는 호열의 허벅지를 베고 뻔뻔히 드러누웠다. 호열은 순순히 자신의 다리 한 짝을 내줬다. 시선으론 텔레비전을 보면서 백호의 머리를 쓸어 준다. 백호는 이러다가 금방 잠든다.

 

“백호야.”

 

중얼거림이 샜다.

 

“응?”

 

백호가 대꾸했다. 벌써 졸음이 섞인 목소리.

 

“정말 잃어버리면 어쩌지.”

 

백호가 바로 알아듣고 대꾸했다.

 

“그딴 걸 누가 가져가. 내가 내일 같이 찾아 줄게. 걱정하지 마.”

“음.”

“너네 집에 훔쳐 갈 것도 없잖아. 스쿠터도 고물이면서 뭘.”

“아니, 열쇠보다.”

 

호열은 말을 흐렸다. 백호가 호열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한 대 쿡 쑤셨다.

 

“뭐냐, 그 힘없는 목소리. 꼴사나워.”

“푸핫. 간지러워. 그만해.”

“것보다 뭔데. 열쇠보다 뭐?”

“열쇠고리.”

“아, 그거.”

 

백호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가 감았다. 텔레비전 소리,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에 노곤해진다. 호열의 조용한 목소리.

 

“수학여행 때 가서 산 거.”

“그 낡아빠진 부적*?” *오마모리お守り

 

백호가 투덜투덜 쭝얼거렸다.

 

“좀 바꾸지. 정월에도 새 거 좀 사라 그렇게도 말했고만.”

“중요한 거거든.”

“왜. 그 안에 뭐 비자금이라도 들었냐?”

“음, 뭐, 비슷해.”

 

호열이 열없이 웃었다. 백호가 입을 삐죽거렸다.

 

“웃기고 있네. 이참에 바꾸라는 거잖아. 신의 뜻? 뭐 그런 거?”

“으음.”

 

호열이 얕게 앓는 소리를 냈다. 고민하는 척하고 있다.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 그새 백호의 숨소리가 깊어지기 시작하고, 호열은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말없이 화면을 응시한다.

 

한창 유행하는 청춘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학교 여자애들이 떠들어대고 있던 것.

 

여자애들은 저런 사랑을 원하지. 잘생기고 능력 좋은 남자가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것. 헌신해주는 것. 나 외에 다른 사람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 것. 오직 이 우주에 나 한 사람밖에 없다는 듯이 생각해주는 것. 

 

“……백호야.”

 

숨소리.

 

“오늘 네가 고백한 그 여자애 말이야.”

 

호열은 가만가만 독백한다.

 

“꽤 괜찮은 애야. 성격도 좋고, 똑똑하기도 하고.”

 

백호는 대개 여자애의 어떤 외모, 혹은 그 일부에 반했지만(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길 때가 예쁘다든가 웃을 때 덧니가 귀엽다든가 피아노를 치는 손가락이 하얗다든가), 그 여자애는 호열이 봐도 성격이 좋았다. 손꼽게 서글서글한 성격에 남녀 할 것 없이 모두와 잘 어울리고 소외되는 애들이 없도록 잘 챙겼다. 어른스럽고 친절하며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그 여자애가 백호의 마음을 거절하리란 것을 호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전 호열과 얘기하다가 그 여자애가 넌지시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백호, 감당을 못할 것 같아.”

 

백호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무척 티가 났다. 그 똑똑한 동급생은 빠르게 눈치챘을 것이다. 본인이 마흔아홉 번째 짝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있어?” 호열이 물었다.

 

여자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백호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따로 좋아하는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 잘됐네. 일단 장애는 없는 걸로?”

 

“하지만,” 하고 여자애는 웃으며 말했다.

 

“친구를 더 좋아하는 남자는 좀 그래.”

 

호열도 웃으며 물었다. 그도 눈치가 상당히 빨랐기에.

 

“백호가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할 것 같다는 소리야?”

“글쎄, 비슷해.”

“여자친구가 생기면 백호도 바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여자애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약간 미안한 듯이.

 

“네가 백호한테 해주는 것만큼 잘해 줄 자신도 없고.”

“보통은, 본인이 받는 걸 생각하지 않나? 백호는 너한테 잘해 줄 거야.”

“그치만 백호는 나랑 있다가도 너한테서 전화 오면 너한테 달려갈 것 같아.”

“내가 그런 상황을 안 만들지.”

 

호열이 빙그레 웃었다. 말 그대로 호열은 백호가 여자애랑 사귄다면 선선히 두세 발, 어쩌면 여섯 발자국까지 물러나 지켜봐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 녀석한테 무슨 일이 있다면 달려가지 않을 수는 없고. 백호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대며 귀찮게 하거나 악몽을 꿨다며 울거나 할 때는 어쩔 수 없으니까. 설마 그 시간에 여자애가 집을 뛰쳐나와 남의 집에 달려갈 수도 없을 거고, 애초에 백호가 여친한테는 그렇게 전화하지도 않을 테니.

 

그 정도면 되는 거 아닌가.

 

“부담스러워.”

 

여자애가 분명히 말했다. 그 앤 무척 산뜻하게 그 말을 했고, 호열은 피식 웃고 말았다. 기분도 상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말을 면전에서 들은 건 처음이지만, 호열은 배짱 두둑한 사람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원 플러스 원으로 내가 딸려오니까 싫다는 거?”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그러려나? 근데 그거, 너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야.”

“나?”

“호열이 너 좋아하는 애들 많은데 그만큼 포기하는 애들도 많거든.”

“아, 음, 그렇구나.”

 

호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니까…… 백호와 자신의 연애 사업(자신은 관심도 없지만)이 번번이 망하는 이유는 서로 때문이라 이건가.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하지만 보통 친구를 더 좋아하는 남자는 싫어하지.”

 

호열은 그 점을 붙잡고 더 따져보자면 그 애가 명백히 오해했음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바로잡아줄 수고를 더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백호가 조만간 고백할 테니 너무 울리지는 말라고 의례적으로 말해두었다.

 

여자애는 시원하게 백호를 차 주었다. 고맙다고 생각한다. 백호가 엉엉 울고 바로 털고 일어났으니까.

 

그리고 백호는 다시 호열의 곁에 남았다.

 

“……백호야.”

 

호열은 백호의 머리카락으로부터 귓바퀴와 귓불을 살살 어루만졌다. 송송 솟은 솜털과 말랑한 곡선의 두께와 감촉. 만지면 재미있다. 강백호는 손도 발도 몸도 키도 다 큰데 귀는 그렇게 안 크다. 귀엽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 나 때문에 연애 못 하는가 보다.”

 

뭐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고, 그 여자애 말대로 어느 정도의 이유겠지만.

 

남들한테도 다 티가 나는가 보다. 양호열의 그림자 같은 헌신이.

 

같이 싸우고도 다친 데를 먼저 봐주고, 꼼꼼히 치료해 주고, 빨래 같이 돌려주고, 다림질도 해주고, 구두를 닦아주고, 머리를 공들여 세워주고, 받을 생각 없이 돈을 빌려주고, 고로케와 파르페를 사 주고, 잠들 때까지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자기 방에 잠을 재워주고, 자기도 가서 빈방을 채워주고, 새벽 어느 때나 전화하면 받아주고, 달려가 주고, 그런 모든 행위들이.

 

백호의 일방적 사랑의 역사에 자신의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었구나, 싶다.

 

화면에서는 여전히 어여쁜 소녀와 잘생긴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 소년이 몰고 있는 바이크 뒤에 타서 허리를 꼭 껴안고 있는 여자아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소녀가 속삭인다. 이대로 영원까지 달려가고 싶다고 소년이 독백한다.

 

그 부적 안에는 오미쿠지가 들어 있다.

 

호열은 오늘도 생각한다. 꼭 되찾아야만 한다고.

 

 

 

*

 

 

 

중학교 2학년 가을, 후쿠오카에 수학여행을 갔다.

 

거기에는 학문의 신으로 유명한 신사가 있어서 수험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물론 호열이나 백호에게는 별 상관없는 얘기였다. 마지막 날 코스에 그 신사가 들어 있었다. 신사는 넓은 공원처럼 꾸며져 수천 그루의 매화나무와 수백 그루의 녹나무가 있었고, 붓꽃이 자란 연못과 붉은 다리, 머리가 반질반질한 황소의 동상, 신사의 주인을 너무나 사모해서 뿌리째 날아와 무덤 앞에 뿌리를 내렸다는 신목(神木)이 있었다. 학문의 신에게 뭔가 빌 마음은 없고, 호열과 백호는 경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심심풀이 삼아 오미쿠지를 뽑아봤다.

 

오미쿠지おみくじ는 신사에서 뽑는 일종의 운세 제비다. 대길부터 대흉까지 단계별로 있다. 호열이 먼저 자기 것을 풀어봤다. 소길(小吉)이었다. 그럭저럭 하는 운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열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건 확률 놀음이다. 오로지 사람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그러나 백호의 옆얼굴은 진지했다. 처음에는 이런 걸 누가 믿냐면서 큰소리 뻥뻥 치더니 조심스레 펴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호열은 그 녀석이 정신 팔린 틈을 타 한 발자국 뒤의 돌 위에 올라서서 슬그머니 백호의 오미쿠지를 엿보았다.

 

대흉大凶

 

그 아래로는 가족의 안전이며 몸의 건강이며 위험한 기간이니 조심하라느니 어쩌고저쩌고.

 

만약 그렇게 엿보지 않았더라도 백호의 반응으로 충분히 점괘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호는 오미쿠지 종이를 한손에 구겼다.

 

“이딴 걸 누가 믿어.”

 

백호가 거칠게 중얼거리며 종이 뭉치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호열은 동의했다. 하지만 백호가 자신이 한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바보같이. 녀석이 그 종이를 도로 주워 조심스럽게 펴는 걸 보고 생각했다.

 

흉한 운세는 경내에 묶어두는 것으로 저주를 해소한다는, 역시 지극히 인간 기분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법칙이 있다. 호열은 그러면 된다고 친구를 다독였다. 백호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성실하게 오미쿠지를 나뭇가지에 묶었다. 거기에는 괴로운 운명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고, 거기에 백호의 운명도 꼬깃꼬깃 구겨진 빨랫감처럼 내걸렸다. 백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간절해 보였다. 그 녀석은 종이를 접고 묶다가 그 무딘 종이에 손이 베여 피를 몇 방울 뚝뚝 흘리기까지 했다. 마치 그 앨 베고 지나간 불행을 상징하는 것처럼.

 

백호가 먼저 성큼성큼 경내를 걸어 나갔다. 뒤에 남은 호열은 슬쩍 그 구겨진 양말 같은 운세를 풀어 자기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오마모리お守り를 하나 샀다. 손가락 두 마디쯤의 크기에 붉은 실과 금실로 짜인 <가내 평안> 부적.

 

본래 오마모리 안에 들어가 있는 기도문은 절대 꺼내 봐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한다면 기도문의 모든 효력을 잃고야 만다고. 호열은 코웃음을 치고 서슴없이 안의 기도문을 꺼내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거기에 대흉 오미쿠지를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여섯 번 꽁꽁 접어 넣었다. 그리고 붉은 실로 꽉 졸라매 단단히 묶었다. 다시는 풀리지 않도록.

 

백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이미 대흉의 해일은 휩쓸고 지나갔으나.

 

다시는 그 같은 불행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절대로.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흉물스럽게 매달린 타인의 불행들 가운데 그 애 불행을 덜 마른 양말 따위처럼 학문이나 관장한다는 신 앞에 내버려 두기보다는 살아 있는 내가, 내 가슴 속에, 심장 속에 봉인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분명 그게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품었으니 이것은 나의 몫이라고.

 

 

 

*

 

 

 

백호는 그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멀쩡히 깔린 이부자리 위에 사지를 뻗고 누워 있었다. 어제와 같이 호열은 좁은 방 안 빼곡하게 깔린 옆의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고, 역시 어제처럼 백호네 아버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제 티비를 보다가 호열이 다리 베고 잠들었지. 백호는 배를 벅벅 긁으며 입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과자봉지나 콜라병, 고로케 봉투 같은 것들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호열이가 꼼꼼하게 쓰레기봉투까지 모두 정리해 두었나 보다. 오늘은 안 타는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다. 이따 나가면서 버릴까, 하다가 새벽 공기도 마시고 팔다리를 움직이고 싶다는 기분이 들어서 후드가 달린 점퍼 하나 걸치고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꿰고 나왔다.

 

쓰레기장에 봉투를 내려놓은 다음에는 좀 걷기로 했다. 발길은 호열네 집으로 향했다. 열쇠를 찾아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없어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잠깐 해 봤지만.

 

백호는 호열이 떨어뜨렸다는 위치를 어림짐작해 낡은 철 계단 안쪽으로 들어섰다. 큰 키를 엉거주춤 숙이고 나무 막대를 하나 주워서 무성한 덤불에 잡동사니와 담배꽁초로 가득한 그곳을 열심히 헤집어 봤다. 페트병이니 아동용 카 시트니 이 나간 컵이니 하는 걸 뒤집고, 발로 차고, 뒤집고, 던져 버리고. 에이 씨, 어디 간 거야. 그 쪼끄만 게 뭐라고 밝은 아침에도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찾았다. 친구의 집과 차를 찾아 주기 위해서. 아, 그 낡아빠진 부적도.

 

그것은 오미쿠지건 운세건 새해 운수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양호열이 드물게도, 아니 유일하게도 갖고 다니는 <가내 평안> 오마모리였는데, 매일 품고 다닌 탓에 낡아서 군데군데 올이 풀리고 날강날강했다. 바꾸라고, 새로 사 주겠다고 잔소리를 해도 그저 씩 웃어 보일 뿐 가타부타 말을 안 했다. 양호열은 원래 말을 잘 삼키는 놈이었다. 지 힘든 얘기를 잘 안 했다. 지금은 따로 사는 그 개차반 아버지한테 얻어터졌을 때도, 다정한 어머니가 멀리 떠나가 재혼을 해버렸을 때도. 쉽게 말 안 해주는 게 좀 서운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뭐, 조개처럼 딱 다문 입 억지로 열 수도 없고…….

 

투덜거리던 백호는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열쇠다.

 

백호는 허겁지겁 다 깨진 맥주병 가운데 떨어져 있는 열쇠를 주웠다. 분명히 호열의 것이었다. 집 열쇠, 차 열쇠가 동그란 고리에 달려 있다. 그런데 부적만은 왜 없는 거지?

 

머리를 갸우뚱했으나, 곧 그러려니 했다. 어쩌면 잘된 거지. 늘 옷부터 구두와 소지품까지 모든 걸 깨끗하게 가다듬고 꾸미고 정돈해서 갖고 다니는 양호열이 그 낡아빠진 걸 고수하는 게 은근히 아리송하고 마음에 걸렸던 백호는 내심 가뿐하게 여기며 열쇠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사냥감을 포획한 커다란 개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깨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낫토와 달걀 프라이와 쌀밥―를 차리고 있던 호열이 “산책?” 하고 물었다. “일찍 일어났네.”

 

그 코앞에 열쇠를 짤그랑, 내밀었다.

 

“내가 찾았다!” 백호가 의기양양하게 웃어댔다. 호열이 눈 둥그렇게 뜨고 멀뚱히 열쇠 두 개를 보았다. 호열의 시선이 열쇠에 머문 잠깐의 순간 그가 ‘부적’의 존재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백호는 “그것만 없더라.”고 말해주었다. 호열이 선선히 웃었다.

 

“그랬구나. 고마워, 백호야. 일부러 찾아 줘서.”

“야, 당연하지! 친구 집인데 찾아줘야지.”

 

스쿠터도 내가 찾아 준 거다, 하고 덧붙여 생색을 냈다. 호열은 싱긋 웃고는 “고맙다. 얼른 아침 먹자.”고 말했다. 둘은 조용히 마주 앉아 아침밥을 먹었고.

 

짤랑짤랑, 열쇠 두 개는 다시 호열의 교복 안주머니로 돌아갔다.

 

 

 

*

 

 

 

학교가 끝나고, 오늘은 호열이 아르바이트가 있다고 했다. 호열과 헤어지기 전에 백호가 우물쭈물했다.

 

“호열아, 그러면 오늘은.”

“오늘은?”

“우리 집에 안 와?”

“오늘은 좀.”

“쳇.”

 

백호의 입이 댓 발 나왔지만, 호열이 “엄마 전화 올지도 몰라서.” 하는 말에 꼬리를 내렸다.

 

“그럼…… 그건 어쩔 수 없지.”

“응. 담에 또 갈게. 또 재워줘.”

“당연하지, 인마. 언제든 오라고!”

 

호열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고, 백호는 나머지 군단 녀석들과 학교를 나섰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편의점에서 만두를 하나씩 사 먹고 또다시 할 일 없이 돌아다니다가, 누구한테 시비가 걸려서 몇 대 패주고 다시 거리를 방황하다가.

 

그러다가 하나둘씩 각자의 사정으로―여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든가 요즘 일찍 들어오라는 잔소리를 들었다든가 할아버지가 시킨 일을 해야 한다든가―해서 흩어졌다. 저녁 즈음이었고 까마귀가 울었다. 백호는 혼자 집에 돌아가던 길에 작은 동네 신사를 보고 멈춰 섰다. 오늘 아침에 했던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하루 종일 까먹고 있었던 게.

 

호열이 부적을 새로 사줘야지.

 

그래서 경내로 들어갔는데,

 

어둑어둑한 신사에는 사람이 없었고 가로등이 외롭게 하나 켜져 있었다. 그래도 부적 파는 데에선 빛이 새어 나와 그쪽으로 향하던 길에, 백호는 고양이 한 마리와 마주쳤다.

 

백호의 눈앞을 가로질러 가던 고양이는 희고, 검은색이었다. 어둠에 녹아들 듯한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작은 파도처럼 두둥실 떠 있었다. 고양이는 걸음도 멈추고 푸른 눈으로 백호를 쳐다봤다. 뚫어져라.

 

백호는 걸어온 눈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호는 시력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도 금빛과 붉은 빛깔이 어른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고양이는 그것을 물고 있었다.

 

“어라.”

 

백호가 손을 내밀었다.

 

“그거 내 친구 거 같은데.”

 

백호가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두 걸음 더. 고양이는 경계하는 눈으로 백호를 지켜보다가, 마침내 백호가 눈앞까지 들이닥치자 펄쩍 뛰며 입에 문 것을 떨어뜨리고 달아나 버렸다.

 

백호는 남겨진 것을 주워들었다. 역시 그랬다. 눈에 익은 양호열의 오마모리.

 

원래도 낡았는데 더러워지기까지 했다. 어떻게 굴러다녔으면 여기까지 왔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신이 모셔진 본전을 한번 쳐다봤다. 신이 가져다준 걸까?

 

호열이는 오늘 늦게까지 아르바이트니까, 백호는 우선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일 줘야지. 호열이가 기뻐할 테니 기분이 좋았다. 집에 다 와서는 아, 새 부적을 못 샀네, 싶었지만 뭐, 돈도 얼마 없었고, 그보다 양호열이 더 반길 만한 걸 찾았으니까 됐다. 역시 기적의 사나이, 천재 강백호!

 

백호는 그 부적을 좀 깨끗이 만들어서 주기로 했다. 우선 저녁을 냉큼 챙겨 먹은 다음에 호열이가 하는 대로 티셔츠와 양말과 수건을 세탁기에 돌리고, 욕실에 들어가 씻으면서 부적을 빨려고 물에 적셨다. 그런데 안에 뭔가 들어 있었다.

 

부적은 원래 몇 겹으로 꼰 단단한 붉은 실로 묶여 있었는데, 지금은 온갖 수난을 겪고 헐거워져 있었다. 백호는 붉은 끈을 마저 풀고 안을 열어 보았다. 조그만 쪽지가 들어 있었다. 원래는 오마모리 안을 들여다보면 안 된댔는데,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백호는 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그걸 꺼내 들었다. 아주 꽁꽁 작게 접혀 있는 것.

 

둘, 넷, 여섯, 여덟 겹의 쪽지를 펴 봤다.

 

대흉大凶

 

큼지막한 글자가 망막에 박혔다. 핏자국이 조금 얼룩져 있었다.

 

백호는 우두커니 그 종이를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가족의 안전이며 몸의 건강이며 위험한 기간이니 조심하라느니 어쩌고저쩌고.

 

백호는 일단 그것을 부적과 함께 다른 곳에 두고 머리를 감았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손을 잘 닦고 종이쪽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다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손에 구겼다. 다시 폈다. 그걸 부엌으로 가져가 가스레인지를 켰다. 푸른 불꽃에 종이를 모서리부터 태웠다.

 

검은 불티가 날았다. 백호는 재를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불운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이랍시고 누군가에게서 주워들었던 걸 떠올렸다.

 

모은 재를 물에다 타서 죄다 마셔 버렸다.

 

 

 

*

 

 

 

백호는 전화를 걸었다. 새벽 한 시였고, 호열이 졸린 기색이 묻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제 괜찮다, 호열아.”

 

백호가 대뜸 말했다.

 

“응?”

 

의아한 되물음. 그리고 백호의 자신만만한 선언.

 

“좋은 일만 생길 거야.”

“음, 무슨 말이야?”

“내가 다 먹어 치웠으니까.”

 

강백호는 위장도 천재라서 튼튼하니까 탈은 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대흉을 뱃속에다 담고 있어도. 내가 담고 있으면 괜찮다. 너는.

 

너는 괜찮다.

 

호열은 말이 없었고, 백호는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알겠지? 호열아. 걱정 말라고.”

“음……. 백호야, 뭐 잘못된 거 주워 먹었냐? 배 아파?”

“아니. 날 뭘로 보는 거냐. 내가 다 먹어 치웠다고.”

 

호열은 끙, 영문을 모르겠다는 소리를 냈다가, 결국은 맞춰주기로 한 모양인지 이렇게 말했다.

 

“알겠다. 그럼 소화 잘 시키고 자.”

“당연하지.”

 

백호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젠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뱃속이 든든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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