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탄은 눈을 떴다. 눈앞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옆구리에 기분 나쁜 축축함이 느껴졌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머리 위로 하얀 달빛이 들어온다. 그의 숨결처럼 약하디약한 빛이었다. 그 약하디약한 빛에 바닥에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움직이는 그것에 손을 뻗는다. 푸드덕거리는 키틴질의 얇은 막이 느껴진다. 아마도 벌레겠지. 그는 벌레처럼 더럽고 축축한,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손끝에 살짝 단단하고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그는 벨파이어를 불러낼까 하다가 눈을 감았다. 불을 불러내지 않아도 손에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손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은 것들이 느껴졌다. 이 어두운 곳에선 이런 작은 미물들만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었다. 환한 곳에서라면, 질겁하며 손을 털었겠지만, 이런 좁고 어두운 곳에서는 이런 미물들조차 친구로 느껴졌다. 물론 보이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

한참 모로 누워 들리지도 않는 대지의 심장 소리를 듣던 샬탄은 몸을 일으켰다. 손과 다리, 옆구리에 진흙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것이 느껴졌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 덕지덕지 묻은 진흙을 털었다. 특히 귀를 나름 정성껏 털었다. 아까 들었던 대지의 심장 소리가 사실은 미물들의 합창 소리가 아닌가 의심하면서.

다행히 그의 귓속은 깨끗한 듯했다. 그의 팔이 힘없이 중력에 순응한다. 방금 노동은 아직도 옆구리가 시큰거리는 그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킨 건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입안에선 여전히 피 맛이 난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구덩이는 조용했지만 그의 마음속은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와 소용없는 저항은 그만두자는 목소리가. 그리고 그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느껴진다. 지긋지긋한, 그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비가 다시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서로 밀리지 않고 팽팽히 대치하던 양측의 목소리를 정리한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그가 여기서 죽는 것은 그를 던져 넣은 사람들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일이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시궁창에 굴러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마법의 힘을 느끼려 애썼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이곳은 억지로 치운 듯 아주 깨끗했다. 여기까지 오는 마법사가 그를 빼고 있었을까 싶지만 어쨌든 이곳은 마법적으로 아주 깨끗했다. 이 더러운 곳까지 와서 마법 에너지를 치우는 웃대가리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가 이곳에 와서 처음 지은 미소였다. 물론 그들은 이 진창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겠지만....최소한 악취라도 맡았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영혼의 귀를 세웠다. 어디에도 마법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귀를 세웠다. 비록 강한 억제력이 느껴졌지만 그의 힘이라면 작은 에너지, 변곡점만 있다면 능히 부술 수 있는 억제력이었다. 그의 귀에 그의 눈에 피부를 긁는 듯한 작은 바스락거림이 느껴졌다. 샬탄은 바스락거리는 곳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한발 한 손 움직일 때마다 진창이 된 바닥에서 물방울이 튀겼다. 쓰고 시큼한 맛이 풍기는 물방울이었다.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에 무언가 딱딱한 물체가 집혔다. 이것이 그가 찾던 바스락거리는 소리의 원천이었다. 작고 딱딱한 막대기...이것은 뼈였다. 마법사들이 행한 수십 번의 청소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집착이 바스락거리며 이 뼈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마음의 눈을 뼛조각에 집중했다.

작은 남자, 그가 쥔 뼈만큼이나 작고 가는 남자가 앙상한 손을 들어 벽을 긁고 있었다. 그의 눈은 퀭했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데도 그는 계속해서 벽을 파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항상 뒤에서 그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가 손에 쥔 뼈의 주인, 아니 주인이었던 남자였다.

샬탄의 눈에 또 다른 영상이 느껴진다. 작은 남자는 생살을 뜯어 먹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군데군데 하얀 것들이 보인다. 구더기들이었다. 작은 남자의 입에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의 의식과 반대로 멈추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서 어떤 남자가 쓰러진다. 그의 손에는 주먹만 한 돌이 들려 있었다. 그의 손에, 아니 온 몸에, 진흙보다 끈적거리는 것이 잔뜩 묻었다. 그의 혀가 그 끈적한 것을 핥는다. 그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것이 달콤하다고 느낀다.  남자의 앙상한 작은 손이 신경질적으로 벽을 긁었다. 벽에서 가르륵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를 쳐다보는, 그의 손에 죽어갔던 남자의 숨소리다.

뼈를 쥔 샬탄의 발치에 무언가 덜걱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 뼛조각을 쥐고 끊임없이 뼈를 긁었을 남자의 물질적 흔적이리라. 샬탄은 보이지 않는 남자의 유해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그의 눈을,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영상은 사실 그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작은 남자는 시체를 먹지도, 같이 갇힌 남자를 죽이지도 않았다. 작은 남자가 쥔 돌 같은 것은 진흙으로 뒤덮인 동굴에는 있지도 않은 물건이었고, 다른 남자를 죽이기엔 그는 너무 작고 약했다. 사실 같이 갇힌 남자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그가 쥐고 있던, 이 작은 뼛조각은 이곳에서 무수하게 죽어갔던 어떤 이의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항상 비가 오는 이곳에선 밥 먹는 것보다 더 흔한 일이었다.

뼛조각에 남은 기억은 살인의 환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흐릿하고, 소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샬탄은 뼈의 주인, 채 성년이 되지 못한 가련한 남자의 추억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가 바라봐준다고 달라질 것도 없건만. 하지만 아무리 그가 애를 써도 구덩이의 기억 외엔 어떤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샬탄의 무감각한 가슴에 드디어 슬픔의 씨앗이 심어졌다. 샬탄은 이 어린아이가 이곳에 갇힌 것도, 공포에 떨며 죽은 것도 슬프지 않았다. 이곳에선 흔한 일이니까. 하지만 마법적 진공의 공간에서도 살아남은 그의 갈망에, 이곳에서 그를 죽게 한 그의 소망이 담겨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를 슬프게 했다. 이 뼈를 쥐었던 이는 결국 죽어서도 물건으로 죽어갔다. 샬탄의 메마른 눈이 촉촉해졌다. 샬탄은 뼛조각에 남은 작은 갈망과 그의 마음에 흩뿌려진 슬픔을 모아 손끝에 집중시켰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뚫렸다. 뼛조각에 희미한 갈망을 남겼던 소년이 그토록 바랐을 바깥 공기가 그에게 느껴졌다. 자유는 비릿하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샬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틀거리며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등 뒤로 바글거리는, 그의 뼈와 내장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의 작은 한숨 소리가 바스락거리며 식어갔다.


마르세이유 타로 리더, 점성술사, 사이킥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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