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집안 가득 멤도는 커피향기. 피곤에 절어있던 희수였지만 눈을 뜨게 하기 충분했다. 오늘은 한글날. 수능 전 마지막 공휴일이었다. 비척비척 거실로 나가니 커피 향기의 진원이 보였다. 커피포트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드립을 내리고 있던 영인은 희수를 발견하고 미소를 보였다.


"굿모닝."

"응. 흐아암. 영인아. 좋은 아침."

"피곤에 절어 있네. 우리 물만두."

"자꾸 물만두라고…."

"그럼 꼬부기?"

"흐암."


왈가왈부하기 싫다는 듯이 아장아장 걸어와 안기는 희수에 영인은 자기 지금 포트들고 있어서 위험하다며 잔소리를 하고는 포트를 내려놓았다. 필터 안의 분쇄커피가 움직이면서 내는 사그락한 소리와 숨소리만 가득했다. 


"피곤하지. 커피 마실래?"

"응……."

"귀엽네."

"자고 일어난 게 뭐가 귀여워…. 귀엽기는 네가 귀엽지."

"나는 귀여운 거보단 아름다운 거지. 아침 먹게 떨어지세요."

"싫어어~~"


앙탈을 부리는 희수의 하얀귀를 만지작거려 빨갛게 만든 영인은 귀와 눈코입에 다 한 번씩 쪽쪽 뽀뽀를 해 주고는 떼어냈다. 


"힝."

"커피 마저 내리고 아침 차려 줄게."

"으으응. 오늘은 일찍 일어났으니까 내가 차릴래."

"씻기나 해. 눈꼽이나 떼고."

"나 요리 좋아해. 너한테 만들어 주고 싶어."


희수의 착한 소리에 영인은 미간을 구기며 웃었다. 


"야.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지."

"승부엔 원래 수단을 가리지 않아."

"얼씨구 그래요."

"토마토계란볶음 할게. 계란 2개 해?"

"아니. 3개. 그거 맛있더라?"

"응. 소화도 잘 되고. 너 잘 먹더라."

"부드러워서 맛있어. 아. 희수야."

"응?"


영인의 나직한 부름에 희수는 토마토를 썰다가 고개를 들었다. 영인은 커피를 마저 내리고선 희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부턴 내가 빨래랑 청소 할게. 넌 나갈 때 쓰레기만 버려줘."

"뭐? 어떻게 그래? 안 그래도 요새 장도 네가 다 보고…."

"뭐야. 10월 되면 바쁘니까 도와 달라면서."

"그때처럼 또 탈날까 봐 그러지…."

"안 그래. 대신 막 너랑 둘이 할 때처럼 깨끗하진 않을 수도 있어."

"괜찮아. 원래 나 10월, 11월은 돼지우리에서 살아……."

"아 네 방."

"…방 청소는 내가 할게!!!"

"볼 장 다 봤는데. 이제 와 새삼?"


피식 웃는 영인에 희수는 그래도 그게 아니라며 아무튼 빨래는 잘 내놓을 테니 방은 보지 말라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현재도 문제집과 잡다한 물건 등으로 엉망인 방이었다. 아무리 오래 봐서 격의 없는 사이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켜야했다. 


"고마워. 영인아."

"뭘. 이따 늦게 와?"

"아냐 오늘까진 그래도 휴일엔 7시에 끝나."

"와서 저녁 먹겠네."

"응! 올 때 뭐 사올까?"

"아. 오늘 매실 꺼낼 거라. 매실장아찌 먹으려고."

"와! 진짜? 벌써 그렇게 됐구나~"

"세월 빠르지."

"정말. 아 한글날에 꺼내려고 그날 담근 거야?"

"어. 100일 정도 있음 꺼내야 돼서."

"매실장아찌. 맛있겠다. 새콤달콤해?"

"응. 쌀밥이랑 먹게 일찍 와."

"응!"



43.2. 


"와 희수 샘 체력 좋네요."

"네? 아뇨. 전혀?"

"근데 왜 이렇게 신나 보여요."

"아…. 그래도 오늘은 빨리 끝나잖아요. 집밥 먹을 생각하니 좋아서요."

"으흑.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곡소리를 내는 동료를 뒤로 한 채 희수는 가방을 메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일찍 끝날 때 영인을 많이 봐 두고 싶었다.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영인이' 화면의 세 글자에 희수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영인아!"

- 여보세요~ 어디세요~

"나 끝나서 나왔어. 주차장."

- 그래?

"응. 왜애? 그렇게 나 보고 싶었어?"

"별로."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희수는 흠칫 놀랐다. 그리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핸드폰에 귀를 댔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보고 싶던 거겠지."

"으응? 어?!"

"둔하기는."


영인은 희수 바로 뒤에서 후드 집업에 손을 집어넣고 서 있었다. 귀에서 무선 이어폰을 빼서 케이스에 넣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모자까지 눌러쓴 모습은 스포티하고 편해 보여서 누가 보면 수험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이 됐든 희수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는 영인이었다.


"어떻게 왔어!?"

"지하철 타고."

"아이. 진짜."

"너 데리러 오기 좋은 날씨라서."

"뭐야. 진짜."

"추워. 빨리 차 태워줘."

"아. 미안. 오래 기다렸어?"

"10분 정도? 엄청 오래 기다렸지."

"그러게. 막 얼어 죽을 뻔했네?"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곤 턱짓으로 문을 열라는 시늉을 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진짜 춥긴 했던 것 같아, 희수는 차문을 열어 주었다. 타자마자 히터 틀어 달라는 모습에 희수는 바로 틀어 주면서도 피식 웃었다. 


"진짜 추웠구나?"

"어.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왔더니."

"으이구."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의 체력이라고 생각하면 돼."

"자랑이다. 자랑이야."

"서운하네. 네가 나 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 저질체력에도 나온 거 아니야."

"맞기는 한데…."

"뭐 나도 좀 보고 싶었지만."

"푸핫. 고마워. 마중 나와서. 기뻐."

"그렇지~ 그거지~"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고 기쁜 듯 와하하 웃는 영인에 희수는 피곤도 잊고 소리내어 웃었다.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더니. 이런 걸까. 지금이 자연스러운 걸 생각하면 또 지난 9년간 영인이 친구로 옆에 있던 세월이 새삼 신기해졌다. 


"신기해."

"어떡해 이렇게 초미녀랑 사귀는 건가?"

" 가끔 보면 영인이는 근자감이 심한 거 같애."

" 근자감이라니. 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

"그래. 여튼 그거 말고."

" 요새 아주 먹금 실력이 늘었어?"

" 그냥 친구였을 때가 전생같아서, 그게 좀 신기해."

"별게 다 신기하네."

" 대학때 만났으면 좋았을걸 데이트할 시간도 많고."

"글쎄.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잘 맞는지도 몰라."

"그런가. 그럴지도."

"지금 널 만나서 다행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응. 나도."




"졸업 엄청 늦어졌을걸."

"무슨 소리야?"

"아까 니가 한 얘기. 우리 대학때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


영인은 매실 장아찌를 씹으며 말했다. 아삭 하는 경쾌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희수는 오는 길에 포장해 온 불고기와 밥을 입에 넣고 매실 장아찌를 냠 먹으며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랑 너랑 사귀면서 같이 살았으면 수업을 갔겠어?"

"수업을 가야지. 학생이 그러면."

"맨날 밤마다…. 바쁘지 않았을까."

"…?! 저질!"

"누가 안 놔 줬을 것 같은데. 난 저질 체력이라~"

"체력 얘기 아니야. 방금 저질이라고 한 건."

"어쨌든. 무사히 졸업하고 사귀게 돼서 다행이라는 이야기."

"갑자기 훈훈하게 포장하는 것 같아."

"훈훈한 김에."


영인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히쭉 웃었다. 또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로 자신을 웃게 만드려나 싶어 희수는 살짝 기대를 하고 영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영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분히 희수의 예상을 뛰어넘은 무엇이었다.


"희수야. 11월에 말이지."

"웅! 수능 끝나면 뭐 하고 놀까?"

"여행 갈래?"

"여행?"

"응. 강원도. 2박 3일이나 3박 4일 정도? 하루 휴가 내면 되니까."

"와, 너무 좋지…!! 근데 갑자기 웬?"

"그냥."

"영인이 여행 그리 안 좋아하잖아.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너랑 가면 괜찮더라고. 뭐 차도 있고 이젠 돈도 있으니까."

"응. 나도 너랑 어디 가는 거 좋아. 재밌어."

"이야. 나쁘네. 난 어디 안 가도 너랑만 있으면 좋은데."

"시비조로 해도 애정표현인 거 다 알아. 나도 너랑이면 어디든 너무 좋아.'

"감이 좋은 꼬맹이는…."


창피한 듯 투덜거리는 영인에도 희수는 "어디 가면 좋을까? 그래도 내 차가 조그매서 그렇지 suv야!" 하며 아이처럼 신나했다. 


"아빠네 법인 회원권으로 리조트 예약 싸게 할 수 있대."

"앗. 진짜? 대박!"

"너 고생하니까.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어."

"감이 너무 좋은데……. 말 안 하고 텔레파시로 대화해도 되는 거 아니야?"

"아하하."


희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영인에 웃다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네가 지금 하는 생각 맞출 수 있어."

"하? 조희수. 나를 무슨 단세포 생물처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

"뭐?"

"아니야?"


배시시 웃는 희수에 영인은 한방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설령 당장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고 해도 (실제로 커플 퀴즈대회 나가서 1등 해서 슈퍼컴퓨터를 받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 질문에 답은 정해져 있었으므로. 영인은 애정표현을 하는 사람답지 않은, 패배감에 사로잡힌 얼굴로 인정했다.


"맞지."

"와."

"완전한 파해법이네. 제법이야……."

"감이 좋은 꼬맹이는 싫다더니 감 좋은 애인은 좋은가 봐."

"어. 여하간 숙소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날짜 픽스해도 돼? 수능 끝난 다음주 주말이랑 월요일로 하려는데."

"응. 괜찮을 것 같아!"

"가보고 싶던 오리백숙집 있는데 가 봐야겠다."

"오?"

"배틀트라벨에 나왔는데. 엄청 맛있어 보였어."

"맛있을 것 같아! 나도 그 프로 좋아하는데! 몇 회?"

"검색하면 다 나올 텐데 뭐."

"응! 강원도 출신 선생님들한테도 맛집 물어볼게."

"든든하네. 국밥물만두."

"계속 이상한 별명 짓지 마?"


김치 물만두라고 놀리는 영인에 희수는 유치하다면서 쏘아보고선 콧방귀를 뀌었다.



43.3. 


오랜만에 같이 영화나 보고 자자는 영인의 말에, 씻고 나온 희수는 알았다며 머리를 말리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영인이 준비해 둔 매실에이드 두 잔을 보며 히히 웃고선 머리를 말리고 있자니 조금 심심해서 OTT를 켰다.


"응? 아. 이건가?"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는지 아까 영인이 말한 프로그램이 시청 목록에 떴고, 이어서 재생을 누르자 새파란 여름바다가 펼쳐졌다. 여행을 계획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수영복을 입고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희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아 시원하겠다. 역시 제주도 갔을 때 물에 들어갈 걸 그랬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욕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하게 달려온 영인이 TV를 껐다. 


"으아아아악!"

"어? 왜?"

"아니……."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전에 없이 당황하는 모습이 무언가 못 보일 꼴을 보인 모양새였다. 희수는 의아했다. 왜 저러지? 그리곤 눈을 또르륵 굴리는 영인에 알아챘다. 그리곤 TV 리모콘을 뺏어서 다시 전원을 켜고 프로그램을 재생했다. 

다시 보니 물놀이를 하고 있던 건 전에 영인이 괜찮다고 했던 아이돌 출신 여배우와 섹시 스타로 유명한 솔로 가수였다. 방송이니 그렇게 야한 수영복은 아니었지만, 큰 키와 육감적인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왜 중간에서 재생이 시작하나 했더니…."

"모르겠는데. 난 전혀 모르는 일인데."

"아까 자신의 행동을 보고도 발뺌할 생각이야?"

"뭐가?"

"공영인……."

"………아니 뭐 야한 거 본 것도 아닌데."

"그런 목적으로 여기서부터 튼 거잖아!"

"오해야~ 그 백숙집이 어딘지 알아보려다가."

"백숙집 검색하면 나온다며?"

"안 나오더라…. 아 잘 나오는구나?"

"공영인………."


희수의 핸드폰 화면 가득한, 단번에 나온 검색 결과에 영인의 얼굴이 하얘졌다. 아까 얘기하다보니 좀 생각나서(?) 희수가 씻는 동안 잠깐 봐야지 싶었는데, 찾자마자 끊어진 샤워기 소리에 흠칫 꺼 버린 영인이었다. 


"야. 억울해. 보지도 못했다고."

"지금도 보고 있으면서. 입에 침이나 발라. 영인아."

"순수한 팬심이야."

"순수?"


영인은 화면을 보고 자신의 말이 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희수는 다시 불어터진 군만두 열 받은 꼬부기가 되어 있었다. 


"미안."

"김주희 나와서 본 거지. 애초에."

"아냐."

"그러면?"

"…둘이 같이 나와서. 야. 아, 아파아!"

"진짜 오늘 하루 감동이었는데. 진짜아!"

"그만 때려. 아. 미안하다니까."


영인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애교있게 희수를 껴안았다. 그러나 더 열을 낼 것같이 굴던 희수는 아무 말이 없이 꼬옥 제 허리를 안아올 뿐이었다. 그제서야 영인은 무언가 크게 잘못된 건가 싶어 포옹을 풀고 희수를 바라보았다. 


"왜?"

"아니야. 화낼 일 아닌 것 같아서."

"왜 이래? 갑자기?"

"그냥. 내가 바빠서 못해 주니까……."

"뭐?"


영인의 머릿속에 불현듯 다시 어린이날 이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야한 쪽 말고 그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쓰레기가 했다던, 안 해 줘서 그랬다는 쓰레기다운 소리. 그 말에 얽매던 그날의 조희수. 그리고 바쁜 걸 항상 미안해하던 조희수. 


"야. 아니야."

"응?"

"나 너랑 자고도 이런 영상 볼 거거든?"

"응, 으응."

"욕구불만이나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예쁘고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그래서 보는 거야."

"으응."


'솔직히 그건 그것대로 좀 미묘한 기분인데' 희수는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영인이 자신을 생각해서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영인은 희수의 볼을 꽉 붙들고 쪽 키스를 해 주었다. 


"나는 플라토닉한 사람이거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사귀기도 전에 잤잖아."

";; 슷. 말이 많어."

"뭐래."

"아무튼 그 개새끼가 문제야. 발정난 개새끼."

"그냥 미안하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한번 더 그러면 나 화낸다?!"

"알았어…."


품안에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희수에 영인은 조금 안심하고선 안은 팔을 풀었다. 다시 OTT로 영화나 찾아 보려고 리모콘을 드는데 희수가 손을 잡았다. 


"나는 아니야."

"뭐가?"

"안 플라토닉해."

"………아하?"

"진짜 플라토닉이야?"

"아니. 다 뻔한 구라야."

"…내일 나는 11시에 나가도 되는데, 괜찮아? 너?"

"일찍 들어오는 거 마지막이라며? 뭐 선택지 있는 거처럼 말해."

"그래도."


대답 대신 영인은 진득하게 입을 맞추곤 나는 수영복보단 속옷이 좋더라 하는 느끼하고 변태 같은 말을 했다가 희수에게 입술을 깨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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