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알았지. 진짜 어떻게 안 거지….”


여주는 침대에 엎드려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저대로 잠이 들었나 싶다가 대뜸 퍽퍽 침대를 내려치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수영하는 듯 양다리를 마구 움직이다가 한참 만에 몸을 뒤집었다. 꼭 우는 것처럼 칭얼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얼마나 숨을 참았던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굉음을 내는 여주의 행동에, 제 방에 있던 태형이 놀라서 문을 벌컥 열었다.


“아, 김태형 나가라고오!”

“미친 인간아, 너 도대체 뭐 하는데?”


태형은 옷을 입지 않아 드러난 맨살을 긁적이며 인상 썼다. 누가 봐도 막 자다 깨서 달려온 사람 같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노크도 없이 문을 연 태형의 행동에 여주는 나가라며 소리 질렀지만, 평소처럼 기를 쓰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선 태형은 아무리 봐도 여주가 이상해서 나가지 못했다. 바닥에 내팽개친 이불이며 산발이 된 머리며 시뻘게진 얼굴까지, 여주의 모든 게 심상치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던 태형이 너무 잔 탓에 살짝 부은 눈을 비비며 방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섰다. 그런데도 미동도 없이 방 천장만 보고 드러누운 여주를 보며 태형은 제 생각에 확신을 얻었다. 태형이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여주 위로 던지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또 무슨 쪽팔린 일이 있었길래 그러냐.”

“….”

“왜. 소주 한잔해?”


태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물이 살짝 고인 눈을 벅벅 닦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의 속이 너무 훤히 보여서 태형은 눈이 다 감기게 웃었다.


“왜 웃는데!”


사소한 자극에도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여주를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긴 한 것 같았다.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옷을 주워 입는 여주의 느릿한 움직임에, 태형 역시 옷을 입기 위해 제 방으로 향했다.






“여기 소주 한 병만 더 주세요.”

“아… 작작 마셔라, 진짜.”


태형은 마른세수하며 테이블 위에 늘어진 빈 병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어느덧 네 병이나 비운 술병을 보며 술 마시자고 제안한 좀 전의 일을 후회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턱을 괸 태형이 여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주는 태형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 막 나온 차가운 소주를 제 잔에 채운 다음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태형은 슬슬 잠이 오는 듯 턱 언저리를 문지르며 여주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대뜸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보고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전화가 끊기기 직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점국아.”


점국이란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여주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태형은 그런 여주를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변해 갔다. 특유의 집중하는 입술로 골몰히 생각에 잠긴 태형이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면서도 입으로는 말을 이었다.


“우리 둘 다 집에 없어. 지금 포장마차야.”

“….”

“너도 온다고?”


‘안 돼, 안 돼!’

여주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안 된다고 외치며 팔로 엑스 자를 그려 보였다. 얼굴은 빨개서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진 여주를 보며 태형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여주가 힘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을 때마다 가슴께까지 오는 머리카락도 함께 춤을 췄다. 여주는 걸리적거리는 머리칼을 양쪽 귀에 꽂고는 태형의 입만 빤히 바라봤다.


“그래, 그럼.”

“야….”

“어. 우리 맨날 오는 거기.”


쐐기를 박아 위치까지 설명한 태형이 태연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점국이 여기로 온다는 걸 들은 직후 사색이 되어 버린 여주와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태형은 왜 그러는지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반쯤 채운 술을 입 안으로 다 털어 넣은 태형이 골뱅이를 하나 집어 먹으며 여주와 눈을 맞췄다.


“이제 막 수영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래.”

“….”

“어떻게 오지 말라고 하냐.”


태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주의 어깨가 축 처졌다. 힝, 소리가 나는 듯했다. 여주는 그 와중에도 늦은 시간까지 운동한 점국을 걱정하는 자기 자신이 어이없었다.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이제 집에 들어간다니….’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여주가 습관적으로 소주잔을 들어 호로록 들이켰다. 태형은 눈꼬리가 한껏 처진 여주를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보다가, 쯧쯧 혀를 차며 모자를 고쳐 썼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점국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테이블 위 빈 병을 보며 제 눈을 의심했다. 내일이 쉬는 날이라고 해도 놀랄 일인데, 심지어 둘 다 1교시인 걸 뻔히 알았다. 태형은 새로 받은 소주잔을 점국 앞에 놓아 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거 다 여주가 마신 거라는 듯, 은근슬쩍 발을 쏙 빼는 행동이었다.

점국이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눈을 내리깐 채 픽 웃음 터트린 점국은 볼이 발그레해진 여주를 흘깃 보았다. 그러다가 아예 고개까지 돌리고 빤히 보는 바람에, 여주가 쿨럭 기침하며 또다시 습관적으로 잔을 잡았다. 여주는 어쩐지 점국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여주 너, 허리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응?”

“술 그렇게 많이 마셔도 돼?”


점국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주가 물 흐르듯 잔에서 손을 뗐다. 점국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여주는 어느덧 술 대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엄마 말을 그렇게 잘 들어 봐라.’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태형의 표정이 그 심정을 다 말해 주었다.

슬슬 열이 올라 겉옷 지퍼를 내린 태형이 목 언저리를 긁적이자, 남들에 비해 유난히 약한 피부가 금세 빨갛게 변했다. 여주는 한껏 찡그린 채 태형의 손을 잡아끌었다. 쩝, 태형이 아쉽게 입맛을 다시는 사이 또 한 번 진동이 울렸다.


“야, 헐, 김여주. 엄마 전화 오는데.”

“받지 마. 잤다고 해.”

“나 엄마랑 방금까지 카톡 했는데.”

“뭐 해.”

“…뭘?”

“빨리 집까지 안 뛰어가고.”


뻔뻔하게 손을 들어 작별 인사 하는 여주의 모습에 태형은 눈을 질끈 감고 공갈 사탕을 물었다. 점국은 그런 태형과 여주를 신기한 듯 번갈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어려서부터 친분을 쌓은 터라 어머니가 엄한 걸 잘 아는데도,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급하게 지갑과 핸드폰을 챙긴 태형이 금방이라도 뛸 태세로 점국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나 먼저 간다. 내일 1교시 때 보자.”

“응. 우리도 남은 것만 마시고 들어갈게.”


여주는 태형과 점국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사태 파악이 됐다. 집까지 달려가는 게 너무 싫어서 망설임 없이 태형에게 떠넘겼는데, 태형이 떠나고 난 뒤 둘만 남게 될 상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여주가 뒤늦게 손을 뻗어 태형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태형은 뚝 끊기는 전화를 보며 육상 선수에 빙의해 집으로 떠나 버렸다. 곧 한 번 더 전화가 올 텐데 그것마저 받지 않으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다.

점국은 태형을 향해 뻗은 여주의 손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허공으로 던진 여주 손을 빤히 보던 점국이 그 위로 제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마주쳤다. 여주는 멍한 표정으로 태형이 사라진 곳만 보다가 대뜸 손바닥에 닿는 느낌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터진 웃음이 간지러웠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점국이 왔는데도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여주가 처음으로 해맑게 웃음 지었다. 점국은 덩달아 예쁜 미소를 띠며 볼을 긁적였다.


“하이 파이브 하자는 거 아니었어?”

“바보야. 아니거든.”


여주는 그제야 점국을 똑바로 봤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쌍둥이 형제는 날이 좀이라도 풀릴라치면 어김없이 반소매를 꺼내 입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직 좀 쌀쌀한데도 점국은 하얀 반소매 티 하나만 걸쳤다. 막 샤워를 마치고 온 점국의 덜 마른 머리카락과 훤히 드러난 팔을 보던 여주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물었다. 점국은 검지 끝으로 여주 입술을 톡 건드리며 입으로는 똑 소리를 냈다.


“그러다 또 피 날라.”

“….”

“립밤 줄까?”


여주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점국은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씁쓸해 보이는 여주가 걱정됐다. 여주는 자꾸만 축축 처지는 기분을 억지로 바꿔 보려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늘뿐만 아니라, 정국에게 제 마음을 모두 들킨 걸 알아차린 후부터 줄곧 저기압이었다.


“여주야.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어? 아니. 그런 거 없어.”


여주는 특유의 해맑은 웃음과 함께 점국에게 소주잔을 내밀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잔소리 들었는데도 또다시 습관적으로 잔을 들었다. 점국은 웃긴 마음 반 걱정하는 마음 반이었다. 이걸 받아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점국이 모르겠다는 듯 잔을 소리 나게 부딪쳤다.

점국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내내 여주의 속뜻을 묻고 싶었다. 느껴지는 분위기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그런데 억지로 미소 짓는 여주의 모습이 꼭 피하는 것 같아서,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 대신 옅게 미소 지으며 여주와 차분히 눈을 맞췄다.


“여주야. 너 춥겠다. 얼른 마시고 들어가자.”

“그래.”






“5층까지 언제 올라가지.”

“업어 줘?”


여주는 빌라에 들어서자마자 끝없이 늘어선 계단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술만 마시면 계단이 거대하게 보였다. 점국이 장난스레 제 등을 내밀며 업히라고 손짓했지만 여주는 놀란 토끼 눈이 돼서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여주를 보며 점국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주야, 조심. 넘어진다.”

“아냐. 난 태어나서 한 번도 계단에서 넘어진 적 없,”


‘있어. 방금 생겼어. 지금 넘어졌어.’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한창 운동을 열심히 할 때는 학교 계단을 수십 수백 번 뛰어다니기도 하는 여주였다. 너무 힘들어서 다리에 힘이 풀린 적은 있어도 조금 뛴다고 넘어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여주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무릎을 세게 부딪혔다. 순간 느껴지는 고통보다 쪽팔림이 더 큰 여주가 살갗이 벗겨진 무릎을 감싸며 “아이씨….” 소리를 냈다.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짜증이 밀려왔다. 점국은 곧장 여주 곁으로 가 몸을 낮추더니, 손수건을 꺼내서 여주의 무릎을 감쌌다.


“괜찮아?”

“응. 별거 아니야.”


피가 별로 나지도 않는데 오버하는 점국의 행동에도 여주는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점국이 손수건으로 무릎을 둘러 매듭짓자마자 일어난 여주가 신경질적으로 귀 뒷부분을 긁적였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오는 여주의 습관이었다.

점국은 금세 새빨개지는 여주의 귀를 보며 말릴 생각못 했다. 여주가 요새 왜 그러는지 궁금하고 걱정됐다. 한참 만에 점국과 눈을 맞춘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점국이 재빨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여주야.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연고 줄게.”

“아냐. 별로 다치지도 않았어.”

“그래도. 줄 것도 있어서 그래.”


줄 게 있다며 말을 끝마친 점국이 먼저 계단을 저벅저벅 올랐다. 그의 뒷모습을 본 여주가 난감한 마음에 표정을 굳히다가, 이내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점국은 여주의 바로 아랫집인 4층에 살았다. 가는 길에 잠깐만 들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인데 왜인지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따끔거리는 무릎의 통증에도, 여주의 굳은 표정이 좀처럼 풀릴 생각을 안 했다.






점국이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가자마자 주방에서 물 한 컵을 들고나오는 정국과 마주쳤다. 정국은 윗옷을 입지도 않은 채 점국에게 눈짓으로 인사하다가, 뒤를 따르는 여주를 보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여주는 맨몸이 그대로 드러난 정국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국은 자연스레 소파에 앉는 여주를 빤히 내려다봤다. 이내 그 옆에 가 앉았다. 곧바로 방으로 향하던 점국이 정국을 돌아보며 제 가슴께를 두어 번 쳤다.


“정국아. 옷 좀 입어. 여주 왔잖아.”

“난 괜찮아, 점국아. 전정국 이러는 거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뭘.”


여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운동할 때마다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한 맨몸이라 그저 태연했다. 정국은 점국의 잔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물을 들이켜다가 대뜸 고개를 홱 돌려 여주를 보았다. 잔뜩 미간 구기고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여주 또한 정국과 눈을 맞췄다. 정국의 못마땅한 표정과 어울리는 쌀쌀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술 냄새. 둘이 술 마셨냐?”


여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지독한 소주 냄새가 더 강하게 정국의 코를 콕콕 찔렀다. 인상 쓰고 코를 틀어막는 정국의 행동에 여주가 입술을 삐죽이며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런 여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컵을 옆에 내려 둔 정국이,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던 게임기를 손에 쥐었다. 일시 정지된 티브이 화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정국은 곧장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력을 보였다.

그사이 연고와 밴드를 가져온 점국이 여주 앞쪽 바닥에 앉았다. 여주는 소파에 앉아 그런 점국을 내려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점국은 그냥 거기 앉아 있으라는 듯 손짓했다. 손수건을 벗겨 낼 때 무릎에 닿은 점국 손의 감촉에 여주가 입술을 물었다.


“점국아. 내가 할게.”

“이미 손에 묻혔어. 내가 해 줄게.”


둘의 대화에 고개를 흘깃 돌린 정국은 그제야 여주 무릎에 생긴 상처를 발견했다. 게임을 하랴 무릎을 살피랴 바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시무룩해진 여주의 표정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러다 게임 캐릭터가 죽어 버려서 탄식을 뱉는 정국의 소리에, 여주의 고개가 정국을 향해 살짝 돌아갔다.

정국은 게임기를 옆으로 던지듯 내려놓고, 꼼꼼히도 약을 바르는 쌍둥이 형을 빤히 봤다.

‘저러니까 애가 정신을 못 차리지.’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어느덧 연고를 다 바르고 밴드까지 붙인 점국이 여주의 무릎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훑으며 밴드가 더욱더 밀착되게 했다. 여주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고맙다는 의미로 웃음 지었다.


“여주야. 잠깐만 기다려. 내가 뭐 좀 챙겨 줄게.”

“응.”


점국은 뭐가 그리 바쁜지 곧장 일어났다. 피가 묻은 손수건을 손에 꼭 쥔 여주가 그런 점국의 뒷모습을 눈으로 열심히 좇았다. 그 순간 정국이 대뜸 손수건을 뺏어 제 옆에 놓았다. 여주는 갑자기 손이 허전해진 느낌에 왜 그러냐는 듯 정국을 빤히 보기만 했다. 정국은 어깨를 으쓱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손수건 안 빨아도 된다고.”

“….”

“그러니까 술 좀 적당히 마시지. 또 뭐 하느라 넘어졌냐?”


점국이 자리를 뜨고 난 뒤 여주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 한없이 처진 눈꼬리로 기죽어 있었다. 정국은 그게 내심 신경 쓰였다. 혹시 자기가 전에 한 말 때문인가 싶어 답답했다. 여주가 점국을 좋아하는 걸 누가 모르냐는 그 말 말이다. 정국의 짙은 한숨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정국이라고 해서 여주를 놀리려고 일부러 한 말은 아니었다. 코인 노래방 좁디좁은 부스 안에서, 정국 역시 자신도 모르게 뱉은 말을 곧장 주워 담으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술에 취해 빨개진 여주의 볼을 가만히 보던 정국의 시선이 어느덧 그의 귀로 향했다. 어찌나 긁었는지 새빨갛게 부어오른 귀를 보며 정국은 복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야, 여주야.”


대뜸 부르는 목소리에 여주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여전히 대답도 않고 정국을 보기만 한 여주는, 조금의 궁금증도 담지 않은 표정으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국은 무언가 결심한 듯 후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씩 웃으며 여주의 머리에 손을 탁 올렸다. 여주가 눈을 위로 치켜떠 정국의 손을 보기 위해 노력하다가 금방 포기하고 눈꼬리를 내렸다. 정국은 보드라운 여주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이며 결심한 말을 뱉었다.


“원래 친구끼리는 다 그러는 거 아냐?”

“뭐가?”

“원래 다 그러는 거라고. 챙겨 주고 다독여 주고 웃어 주고.”

“….”

“네가 점국이한테 그러는 것처럼.”


정국의 말이 이어질수록 여주의 눈은 점점 더 동그래졌다. 놀라서 짓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한껏 처져 있을 때보다는 생기가 돌았다. 내내 기운 없던 여주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입술을 달싹이는 여주의 모습에 정국이 픽 소리 내 웃었다.


“우린 다 친구니까. 너는 점국이도 좋아하고, 태형이도 좋아하고.”

“응응.”

“나도 좋아하잖아. 그치?”

“응!”


여주는 드디어 답을 찾은 듯했다. 제 가슴에 폭탄을 던진 정국의 발언 이후로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티 나게 행동했나, 점국이도 마음을 눈치채면 어떡하나, 그런 불안감 때문에 점국을 마주할 때마다 왜인지 기가 죽었다.

‘맞아. 친구한테 잘해 주는 게 왜 이상한 거야?’

그럴싸한 핑계가 생긴 여주는 그제야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주는 그러면서도 정국이 여주를 보다 못해 귀띔해 준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주는지 그 의중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드디어 답을 찾아 기쁜 마음에 해맑게 웃기만 했다. 부드럽게 눈웃음까지 지으며 한껏 들뜬 여주를, 정국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 순간 느껴지는 인기척에 웃음기를 미처 지우지 못한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보는 점국이 서 있었다. 점국은 여주에게 줄 반찬을 잔뜩 챙겨서,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게 웃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점국이 제 앞으로 오는 여주를 빤히 보다가 다시금 쌍둥이 동생을 한 번 봤다. 마지막으로 점국 역시 한쪽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었다.






점국이에게



“어? 전정국!”


새벽부터 조깅하기 위해 밖을 나서던 여주는 빌라 앞에 서 있는 정국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아직 꽤 쌀쌀한데도 얇은 후드티 하나만 입은 정국은, 여주가 나오자 뒤돌아 고개만 까딱였다.

새벽 운동은 언제나 여주 혼자만의 것이었다. 다 함께 체력을 길러 보자며 태형과 정국을 꼬시긴 했지만, 워낙 아침잠이 많은 두 사람이 단번에 거절했다. 그 와중에 점국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여주는 그럴 리 없는 걸 알면서도, 혹시 정국이 같이 운동하려고 기다린 건 아닐까 순간 기대했다.

‘아침마다 심심했는데 같이 운동할 사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어이없는 듯 보다가 여주가 메고 있는 백팩을 뺏어 제 어깨에 걸었다. 여주는 순식간에 홀가분해진 어깨를 흘깃 보고는 정국에게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다. 정국이 무언가 들어 줄 성격도 아니고, 그런 걸 요구할 여주도 아니었다. 정국은 그런데도 무어라 말할 생각도 안 하고 뒤돌아 먼저 걷기 시작하더니, 여주가 제 옆까지 쪼르르 따라오고 나서야 눈을 맞췄다.


“허리가 아프면 아프다고 진지하게 말해야지.”

“응?”

“난 또 네가 뻥치는 줄 알았잖아. 왜 나쁜 사람을 만드냐.”


정국은 대체 뭘 넣었기에 가방이 이렇게 무거운 건지 두어 번 들썩여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여주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몰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예전의 일을 떠올리며 손뼉을 쳤다. 얼마 전 여주가 홀로 체육관을 청소했을 때 정국이 도와주지 않은 일을 말하는 듯했다.

점국에 대한 고민도 해결했겠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여주가 정국과 속도를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마다 하나로 묶은 머리가 이리저리 찰랑이며 짙은 샴푸 향을 풍겼다.


“안 그래도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속이 안 좋아서 힘들었는데, 잘됐다!”

“그러게 술을,”

“이제 매일매일 같이 운동할 거야? 나 진짜 심심했는데.”

“무슨 매일,”

“나 허리 진짜 아팠거든. 네가 가방 들어 주니까 엄청 편해, 정국아!”


정국은 제 말을 두 번이나 끊는 여주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 좋은 여주는 그런 정국에게 미소를 띨 뿐이었다.

‘얘가 나한테 이렇게 해맑게 말을 건 적이 있던가?’

정국은 하루 만에 완전히 달라진 여주가 신기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걸 알지만, 왜인지 지금은 그냥 마음 편히 같이 걷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웃음 터지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볼에 바람을 조금 넣었다.

그사이 여주는 머리를 한 번 더 꽉 묶고 허리를 굽혀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이제 드디어 본격적으로 달릴 태세를 취하는 여주를 향해, 정국이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너 허리 괜찮아질 때까지만이다.”

“뭘?”

“미안한 것도 있고 하니까 당분간만 가방 들어 준다고. 알아들었어?”

“참 나. 알았어!”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1 공백 제외
1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