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치기 소년에게 낮은 구릉이 끝없이 물결치는 초지는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먼 데 보이는 험준한 산맥과 높은 계곡들은 그저 지평선을 장식하는 몇 번인가의 붓질로만 느껴졌다. 아무리 달려도 큰 양떼를 몰고 그곳까지 다다를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대강 깎은 나무 지팡이는 쓸수록 손에 맞추어지고, 끝이나 손잡이가 닳아 시간만큼 반질거리게 되었다. 소년은 도구와 함께 나이를 먹고 검은 양들은 그보다 더 빨리 자랐다. 어미의 젖을 물고 조는 새끼 양들을 안아 옮길 때는 봄이었는데, 크게 자란 양들에게 고함을 치며 겨우내 자란 털을 깎다보면 어느새 새파랗게 짙은 풀이 도로 자라 훌쩍 자란 발목을 스치기 일쑤였다.


그 억센 풀잎 끄트머리의 까칠한 감촉이 세상의 전부였다. 수리매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들이 그가 사는 시간의 전부였다. 구름 한 점 없는 건기의 하늘을 올려다 보며 이따금 그 너머의 땅을 떠올려보는 것만이 미적지근한 상상력의 전부였다.


세상도 시간도 그가 상상해본 삶도 영영 그만큼일 것만 같았다. 아들들의 옷이 너무 빨리 짧아진다며 한탄하는 어머니, 새 지팡이를 깎아주겠다고 말만 해놓고 매번 잊어버리던 아버지, 그리고 죽는 날까지 또 이름만 달리해 그렇게 살아가고야 말 아이들…….


"형, 성도 바로 앞에서 또 전투가 벌어졌대. 집채만한 용이 세 마리나 날아와서 농장 두 개를 다 태웠대!"


비가 내리지 않은 지 80여일, 건기가 한창인 어느 날 하늘이 시커멓게 뒤덮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계절에는 나무 그늘 아래로 빠르게 숨어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기온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고지대의 직사광선은 때로 눈을 상하게 했다. 해가 뜨고서 완전히 저무는 저녁까지, 그와 같은 양치기들은 드문드문 양떼를 풀어놓은 채 널찍한 그림자를 찾아 어슬렁거리며 게으름 아닌 게으름을 피웠다. 정착민의 삶은 규칙적이고, 하늘은 저절로 어두워지는 법이 없기에.


그러니 문득 고개를 꺾듯이 올려다본 하늘이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있던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될 수 없었다. 넓은 구릉은 순간적으로 깊은 밤보다 더 거대한 그림자에 삼켜졌다. 눈 한 번을 깜빡이는 동안에 양치기 소년은 완벽한 어둠 속을 지났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그림자는 굉음을 내며 멀어졌다. 초지를 죽은 땅처럼 거뭇하게 휩쓸고 지나간 작은 폭풍 뒤에는 선 채로 기절한듯 꼼짝도 않는 검은 양떼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온통 어둡고 시커먼 것에 둘러싸여,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며, 멀지 않은 하늘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게 선회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목격했다.


그 뒤로는 불꽃이 있었고, 타들어가는 초지는 정말로 숨결 한 점 남지 않은 죽은 땅이 되었고, 무너진 집과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사람이었던 것들이 있었고, 방금 막 지옥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생긴 기억들이 드문드문 정렬되었다. 흩어진 양떼는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날 적부터 지팡이를 휘둘렀다는 양치기의 경력에 대단한 흠집이 난 셈이고, 그로써 그는 부모의 유산이라 할 만한 것은 결국 아무 것도 남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십 년도 더 지난 뒤에야 문득 깨달았다.


높은 하늘에 긴 그림자가 졌다. 에스티니앙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탁 트인 하늘은 새파랗고 맑기만 했다. 솜털 같은 구름 몇 점이 느릿느릿 머리 위를 흘러다니며 점박 같은 조그마한 그림자를 뿌렸다.


"아빠, 아빠."

"응."

"저기, 새."


꾸벅꾸벅 조는 커다란 양 위에 올라가있던 아이가 짤뚱한 손가락을 뻗었다.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자그마하다.


딸이 가리키는 사냥매는 구름 옆에나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높이 나는 중이었다. 아주 멀리 있어서 이쪽의 사람 두엇이야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그래도 새가 도망가면 어떻게 하냐고 조막만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죽였다.


"주인이 있는 새 같은데……누가 토끼라도 잡고 있나 보다."

"토끼? 나도 가서 보여달라구 할래!"

"……."


이제 아장거리며 걸어다니는 아이에게 보여줘도 되는 꼴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확실하게 안 된다. 삶의 대부분을 사냥꾼으로 살아온 에스티니앙은 토끼몰이가 끝나간다는 사실을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매 사냥을 해본 적은 없지만, 느긋하게 원을 그리며 날던 녀석이 금방이라도 활강할 것처럼 폭을 좁히고 고개를 한 데 고정한 모습은 퍽 알아차리기기 쉬웠다.


이대로 저만치에나 있을 이름 모를 사냥꾼을 찾아가서, 내 딸이 토끼 구경을 하고 싶다는데 좀 보여주시오, 하고 매의 발톱에 배가 꿰뚫린 죽은 짐승을 함께 구경하는 것은 역시 무리가 아닐까. 아이가 기대하는 것은 십중팔구 건강하게 살아 깡총거리며 풀을 뜯는 토끼일 테다. 그는 언제고 딸에게 직접 사냥하는 법을 가르칠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그때가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어어, 거기. 네가 찾던 새끼 양 나왔네."

"꺄아!"


의미를 알 수 없는 환호성을 지르며, 아이는 쉽게도 관심을 돌렸다. 초보 아빠는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양들이 어미의 배 아래에 숨어있다 말고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늙은 양 위에 올라타 거칠어진 털을 껴안고 뒹굴던 아이가 두 눈을 빛내며 몸을 낮추었다. 풀을 먹는 짐승의 새끼는 쉽게 놀란다. 연약하고 심약해, 그가 양을 치던 시절에도 새끼를 다룰 때는 늘 어른들의 주의를 들어야만 했다.


이제 사냥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은 에스티니앙뿐이다. 아니, 저 어딘가에 매의 주인이 있다면 그 역시 저녁에 배를 곯을지 말지 여부를 두고 초조해하고 있으리라.


흘낏 돌아보았을 때 매는 날개 모양까지 보일 만큼 고도를 낮춘 뒤였다. 거의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느리게 날면서 사냥감을 주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솜씨 좋고 노련한 사냥꾼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풍경이었다.


정작 매를 먼저 발견한 아이는 그런 것이 있기나 했었냐는듯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여전히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 대신 숨을 꼴딱꼴딱 삼키듯 웅얼거렸다.


"너무너무 귀여워!"


그러시겠지. 에스티니앙은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꼭 양을 좋아해서 꼭두새벽부터 그와 아내를 깨우며 양떼를 보러 가자고 졸라댄 것은 아니다. 그 나이에는 으레 그렇다는데, 그냥 움직이는 동물이라면 뭐든 다 좋아했다.


심지어는 징그럽게 생긴 곤충이나 벌레도 호기심 가득한 손을 꼬물꼬물 뻗어 잡으려 들기 일쑤였다. 독을 가진 전갈이나 지네 따위도 예외는 없었다. 그나 아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아이의 곁을 지켜야 했는데, 아내는 이 먼 대초원까지도 부르는 사람이 수두룩할 만큼 바쁜 영웅님이신지라 그가 팔자에도 없는 육아 책임자가 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인생이란 이토록 알 수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사냥꾼과 사냥감도 비슷하긴 하지. 지금은 매가 토끼를 좇고 있어도, 한두 해 전에는 저 매를 사냥꾼이 훔쳐내 전리품으로 삼았을 거거든."


아이는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 뜬 채 그를 돌아보았다. 한때는, 그러니까 꽤나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참극을 겪은 뒤로 한동안은 정수리 위에 그림자만 지면 동생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러기도 힘들다. 딸은 무엇 하나 어려서 죽은 그의 동생과 닮은 구석이 없었다. 여자아이고, 빛깔도 다르고, 훨씬 어리고 작고……귀의 생김새도 다르고, 당연히 그의 동생에게는 저렇게 짤뚱하니 토끼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있지도 않았으니까. 더구나 아내를 빼닮아서, 형제는커녕 그를 닮은 구석을 찾기도 어려웠다.


죽고 산 것들 중에 같은 사람은 없다. 닮은 모양도 없었다. 잠깐동안은 잠들 적마다 소스라쳤고, 한때는 잿더미만 남기고 타오른 농장이며 마을을 조사할 때마다 그가 겪은 지옥을 겹쳐 보며 나즈막한 분노를 켜켜이 쌓았다. 그런 날들이 끝없이 이어질 줄 알았던 시절은 구름처럼 흘러가고 또 흩어져버렸다. 영원한 날은 단 하루도 없고, 변치 않는 삶을 그 누구도 살아본 적이 없기에.


머리 위를 나는 것들도 때로는 사냥감으로 전락하는 법이다. 땅굴을 파고 드나들거나 덤불 속에 숨어있는 들짐승 가운데 털가죽이 누렇게 변한 토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해마다 짧아지는 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살았다. 제 몸보다 긴 창을 쥐고 첨탑 위로 솟구칠 날이 오리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수를 끝마치고, 안식을 소망했으며, 창연한 하늘에 낮게 활강하는 매의 생각을 손으로 그러쥘 것처럼 빤히 꿰뚫는 사냥꾼이 되었다. 종잡을 수 없이 그를 삼킨 시간들은 따라잡을 틈도 없이 또 멀어져갔다. 잊고 살던 말로 아빠, 하고 그를 부르는 아이가 한가로운 양떼와 함께 자라는 날이 돌아왔다.


"아빠, 아가 양 하나만 우리 집에 같이 가면 안 돼?"


머나먼 이국의 대초원에서 풀어 기르는 양들은 하얀 털에 누런 흙먼지를 묻히고 굴러다녔다. 고지의 구릉에는 검은 양을 치는 집이 더 많았다.


에스티니앙 역시 연한 순이 돋는 계절마다 검은 털에 윤기가 자르르 돌던 양떼를 몰고 다녔다. 마지막 순간에는 악몽 속의 그림자처럼 흩어져버렸지만, 그래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세상의 검은 바다를 곧잘 상상하게 해준 녀석들이었다.


그의 아이는 지금 한낮의 구름 틈바구니에 파묻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높거나 낮거나 크거나 작은 떼구름, 밀알로 실을 뽑은 것처럼 옅게 반짝거리는 아이의 머리카락이 그 사이에서 함께 몽글거렸다. 벌써 털실로 뽑아낸 것처럼 온통 폭신하고 부드러운 풍경을 그는 오랜 하루처럼 살았다.


무언가 변하고, 기억을 뒤로 하고 꿈 한 번 꾸지 않고 달게 자는 날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지는 삶을 두려움 없이 살아갔다.


"글쎄다……엄마한테 물어봐라."

"이잉, 맨날 엄마한테 물어보래!"

"너도 엄마는 허락 안 할 거 알아서 아빠한테만 그러는 거잖아."


우기가 끝나면 새파랗다 할 만큼 사납게 푸르른 풀들이 훌쩍 자란 소년의 무릎을 뒤덮었다. 새끼 양들도 함께 자라서 이따금 비탈 아래로 뛰어내려가며 양치기들의 속을 썩였다. 하루 종일 계곡을 따라 걸어도 머나먼 산맥과 구름바다 위 하늘섬들은 가까워질 줄 몰랐다. 그때는 세상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멈추어있는 줄로만 알았다.


죽은 땅에 그림자가 지고 털빛이 어두운 양떼를 몽땅 잃어버린 뒤에도, 물려받을 유산은커녕 죽는 날까지 바래지 않을 기억 하나 남지 않은 눈보라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천체는 그를 비껴갔다. 삶은 별들과 함께 항해했고, 하늘은 깜깜하다가 밝게 걷히기를 반복했다. 기억이 다 바래서 어린 동생의 생김새가 가물거리게 되어도 괜찮았다. 떡갈나무 지팡이나 양떼를 물려받지 못했어도 그는 꼭 아버지처럼만 살았다.


산중턱의 구릉보다 더 넓은 초원을 보았다. 낯선 옷을 입은 어린 양치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딸을 데려와 놀게 했다. 제전이며 회의며 하는 자리에 초대받은 아내를 기다리는 시간은 내내 평화로웠다. 지팡이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긴 창을 둘러맨 남자는 검은 바다를 건너 머나먼 세상을 누볐고, 이따금 머리 위를 지나가는 사냥매의 그림자조차 그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검고 흰 양떼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뾰루퉁해진 아이를 달랠 비책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다.


"아유나르트 영지에서 백색증 양을 키우고 있다고 하더라고. 프란셀인가? 그쪽 삼촌에게 물어봐라. 영웅의 노고를 치하하고 어쩌고저쩌고……그런 핑계라도 대면서 증여해버리면 네 엄마도 도로 데려가라고 집밖에 덜렁 풀어버리지는 못할 테니까."

"백색증이 뭐야?"

"흰 양이 좋다며?"

"양은 다 좋아!"

"동물이라면 다 좋은 게 아니고?"

"아빠도 좋아!"

"그래, 양 취급 정도는 해줘서 고맙다."


딸은 터무니없이 작다. 그래도 금방 자라겠지. 새끼 양보다 더 가벼운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자 까르르, 높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온 평야를 채울듯 울려퍼졌다. 절뚝거리며 돌아다니던 새끼 양 두어 마리가 화들짝 놀라 도로 어미의 배 아래로 숨었다. 근처에 작은 짐승들이 있다면 그 역시 놀라서 땅굴로 숨어버렸을 것이다.


사냥매가 토끼를 잡았을까? 에스티니앙은 아주 잠깐 생각했지만, 희미한 의문 따위는 곧 새털구름처럼 흩어져버렸다. 아이를 한 팔에 앉힌 채로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스듬히 하늘을 노려보았다.


두어 점 떠다닐 뿐인 구름보다도 그의 마음이 더욱 고요했다. 물결 한 가닥 일지 않듯 차분하게 뛰는 심장 근처에 아이가 장난스레 머리를 가져다 박았다. 콩콩, 콩콩, 들리지 않고 기억되지 않을 것들을 대신하기라도 하듯이……어느샌가 사라진 새의 그림자를, 결코 선회하지 않는 시간을, 지옥 같은 불길에 타올라 검게 죽은 뒤에 반드시 새로 태어날 양이 있는 머나먼 땅을 다 잊게 할듯이.


높고 푸른 하늘에 그나마 떠다니던 구름마저 죄 흩어져버렸다. 오래된 것들을 떠올릴 이유가 없는 날이었다. 물려받지 않아도 계승되는 삶이 있고, 그는 멀거나 가까이서 흘러가는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변하고 변치 않는 일생을 살아냈다. 두 번 다시는 그를 삼키지 못할 용의 그림자는 이제 서늘한 밤의 이야기 속에만 머무른다. 아이는 무서운 척을 하면서도 곧잘 옛 용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시 보아도 날은 몹시 맑았고, 남자의 머리 위에는 그 어떤 날개 달린 것도 감히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했다.













어린이날을 맞아... 딸 돌보고 있는 애아빠 에스티니앙

대충... 하모르겟다 나 얘 존나사랑하네.........야...행복해라...


잡덕입니다 (진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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