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열심히 사모으는 사람은 집부터 장만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가혹하지만 사실이다. 항상 책장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지라 나는 이것이 별 과장 없는 진실임을 잘 알고 있다. 책은 항상 눈처럼 쌓이고, 제때 치워주지 않으면 생활의 영역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책이란 읽고 있는 순간이 아니면 그야말로 애물단지에 불과한 셈이다. 


그럼에도 종이책에는 포기하기 힘들 정도로 빼어난 장점들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멋진 게 ‘빌려줄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책을 읽고 남에게 빌려주는 행위에는 같은 내용을 파일로 주거나 다른 사물을 빌려줄 때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책이 오랜 시간 손으로 들고 바라본 사물인 동시에 타인의 기억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문자로만 이루어진 책은 시각화도 음성화도 거치지 않은 기억의 원형에 가깝기에 더욱 특별하다. 기억을 손에 들어오는 형태로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문자를 개발한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리라.   


학교에 다닐 때는 공간도 취향도 공유하는 ‘동지’들이 많았던지라 종이책을 사서 읽고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같은 책을 읽고 잡담하는 게 학교 생활의 소박한 낙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너도나도 졸업하면서 공유할 장소는 물론이고 비슷한 취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마음을 놓고 대할 수 있는 동지들도 대부분 잃게 되었다. 만나기 힘들어진 것만 문제가 아니라, 생활 환경이 달라지면서 서로 다른 문화권에 편입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굳이 종이책을 살 이유의 상당 부분도 상실되었으므로, 그즈음부터 가능하면 책은 전자책으로 사게 되었다. 좋든 싫든 그게 합리적인 결정이 된 것이다.


전자책을 주로 사기 시작하면서 독서 생활은 약간 간편해졌다. 전자책은 계정을 아예 열어주는 방식이 아닌 이상 빌려줄 수 없으나, 혼자 읽기에는 썩 편리하다. 주문하면 당장 받아서 읽을 수 있고, 레이아웃도 원하는 모양으로 바꿀 수 있으며, 검색이나 메모도 몹시 빠르다. 어느 스마트 기기에서든 읽을 수 있어 통신이 안 되는 곳에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 떨어져도 딱히 적적할 일이 없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가격이 저렴한 것도 마음에 든다. 


간혹 전자책에 대해 실물을 주는 것도 아닌데 비싸다며 불합리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것도 맞는 말이다 싶으면서도 요즘은 의식적으로 반대로 생각하려 한다. 종이책보다 저렴한데 심지어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으니 이득이라고 치는 것이다. 등산용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벼운 무게와 작은 부피는 매우 비싼 가치다. 그런 가치를 누릴 수 있는데 값도 저렴하니 생각하기에 따라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다만 전자책에는 그런 발상의 전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숨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더 절실히 체감한 것인데, 바로 ‘같은 책도 전자책으로 보면 이상하게 재미없다’는 사실이다. 만화나 쪽글 정도는 별반 차이가 없으나 장편 소설쯤 되면 정말이지 재미가 뚝 떨어진다. 예전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라이트노벨도 종이책으로 다시 읽었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충격받은 적이 있으니, 종이에서 LCD나 OLED로 옮겨가는 것만으로 텍스트가 일종의 영혼 따위를 잃는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텍스트의 영혼이 매체에도 담겨 있을까?)


그렇다면 대관절 전자책은 왜 재미가 없단 말인가? 글의 영혼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것은 종이뿐이라서? 먹고살자면 넌더리나게 글을 읽어야 하는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라 여기저기서 이유를 찾아보고 실험도 해봤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  매끈한 화면에 비치는 상 때문에 눈에 부담이 가고(양눈에 서로 다른 상, 주로 내 얼굴이 반사되어 들어온다) 집중을 해친다.   

-  화면에서 직접 쏘는 조명 때문에 피로감이 심하다.   

- 독서를 중단할 타이밍이 너무 많다. 연재 플랫폼이 글을 너무 잘게 자르기도 하고, 알림이 끊임없이 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차하면 쉽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말그대로 손안에 널려있다.   


모두 스마트 기기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셈인데,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할 만한 방편이 있긴 했다. 저반사 필름이라고 쨍하고 매끈한 글레어 패널의 반사를 죽여 논글레어 모니터처럼 바꿔주는 물건이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나는 마침 넥서스7 2세대(2012)라고 요즘 주력으로 쓰기에는 낡아서 덜 스마트한 태블릿도 보유하고 있었다. 둘을 결합하면 큰 돈 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실험을 결과부터 말하자면, 반쯤 성공이었다. 저반사 필름을 붙이고 밝기를 낮추니 빛 반사로 인한 피로도 줄었고, 기기가 낡고 느린 덕분에 샛길로 빠질 우려도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저반사 필름이라는 게 간유리처럼 화질을 낮출 수밖에 없는지라 멀쩡한 물건을 망가트려서 쓰는 듯한 저항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확률이 높은 전자책 리더, 이북 리더를 써보고 싶어져서 여기저기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매장에서도 만지작대고 몇 페이지를 읽어보고, 후배가 쓰기기도 구경해봤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검색해보니 화면에서 직접 쏘는 빛이 그렇지 않은 빛에 비해 더 낫다는 근거가 없다는 얘기도 있었다(정반대 얘기도 있었다. 일례로 교과서도 광택지를 쓰면 안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나는 이쪽을 믿는다). 


그렇지 않아도 돈이 없는 마당에 그리 좋을 것도 없는 기기를 확신 없이 일단 사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라 그렇게 장바구니에 물건을 넣었다 빼기를 한 달은 지속했는데, 그러던 차에 오닉스 포크2라는 고성능 입문기기가 썩 괜찮은 할인가에 나와서 결국은 사고 말았다 (*요즘은 더 좋은 기기가 많이 나왔다). 마침 시력이 또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어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 탓도 있었다. 


(꿈을 안고 구입한 오닉스 북스 포크2)


그래서 마침내 쓰게 된 전자 잉크 기기는 어땠는가? 사기 전에 표까지 만들어서 합리적이지 못한 충동 구매라고 자신을 다스린 게 우스울 정도로 잘 산 물건이었다. 그해 최고의 지름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일단 위의 문제 1, 2, 3이 모두 해결된 것은 물론이고, 해결의 질이 매우 빼어났다. 전자 잉크 패널은 반사도가 매우 낮고 외부의 빛을 받으면 종이책처럼 더 잘 보였으며, 어두울 때 라이트를 켜도 패널을 통과하지 않는 빛은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게다가 흑백에 반응까지 더뎌 안드로이드 기기처럼 사용할 수 있음에도 SNS나 웹서핑 따위 방해되는 일을 도통 하기 힘들다는 점이 결정적인 장점으로 작용했다. 쓸데없는 알림에 현혹되지만 않아도 독서의 질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나는 새삼 실감했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만족감이 전자잉크 패널에는 있었다. 마음에 드는 기기를 쓴다는 만족감이나 좋은 책을 읽어서 느끼는 만족감이 아니라, 책을 읽는 행위 자체의 만족감이 종이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정도로 있었던 것이다. 이건 전자잉크를 체험해본다고 몇 페이지 뒤적여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고 실제로 장시간 책을 읽어본 뒤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정말로 책을 읽은 듯한 맛'이 다른 스마트 기기를 썼을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을 독서의 포만감이 느껴진다고 주장하고 다니는데, 비유하자면 일반 LCD, OLED 패널은 여행지를 스트리트뷰로 보는 것이고, 전자 잉크 패널은 직접 그곳을 걸어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종이책은 여행지에서 내가 만져보고 싶은 것들을 실제로 만져볼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까? 


그리하여 모든 가정에 전자잉크 기기를 무상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로 전자잉크 기기의 열렬한 애호가가 된 나는 전보다 많은 책을 읽고 사기 시작했으나, 전자잉크 기기가 독서 생활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만능 열쇠가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너무 비싼 것은 둘째치더라도 흑백이라는 점도 단점이 아닐 수 없고, 반응 속도를 높이면 잔상이 많이 남아 적당한 지점을 찾아 조절해야 한다는 것도 성가신 일이며, 이미지의 섬세한 농담을 완벽하게 구현하기 힘들어 흑백 만화 읽기에도 부족한 면이 있다. 게다가 앞뒤를 빠르게 뒤적여 볼 필요가 있는 PDF 문서를 읽으려면 영 답답하기도 하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전자잉크 기기 성능이 마음에 들고 주변에도 추천할 수 있다. 편리함과 불편함 사이,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의 딱 적당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전자잉크 기기가 풀컬러에 스마트폰과 다를바 없이 빠릿빠릿하다면 결국 그것으로 SNS도 하고 유튜브도 보지 않겠는가. 나를 독서 밖의 세상으로부터 떼어놓기에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한 수준일 것이다. 비록 빌려줄 순 없지만, 그건 플랫폼의 발전과 마케팅의 변화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고.


아무튼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의 진정한 낙원이 어디 있는지, 있다면 어떤 형태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전자잉크 패널이 그에 가장 가깝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방해받지 않는 독서의 즐거움을 다시 일깨워주고 잠식되는 책장의 숙명적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이북 리더에 대한 감사와,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이북 리더 하나씩 사보시라는 영업으로 이 두서없는 글을 마친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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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밀리의 서재: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카카오 페이지)을 썼습니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두서없는 잡상들을 올립니다. 간혹 게임이나 영화 얘기도 합니다. 트위터 @memo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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